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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귀용의 영혼의 폭포수
추천의 말
이책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글이 잔느-귀용 부인의 영적인 전기임을 주목하는데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폭포수가 바로 귀용 부인 자신이고, 이 책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부인의 인생여정을 그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다. 만일 이 글을 당신의 삶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재난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귀용 부인은 다른 시대에 살았고, 다만 영적 단계마다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부인은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더구나 귀용 부인은 매우 주관적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침울한 심정일 때도 있다. 귀용 부인이 『영혼의 폭포수』에서 언급한 것들은 실제 신약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이야기, 자기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신 손길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스도인의 길과 관련된 십자가를 주제로 하여 쓰여진 책은 참으로 드물다. 이 책이 그 드문 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은 신앙인의 인생에 있어서 십자가의 길에 대한 근본적인, 심지어는 극단적이라고도 할 만한 그런 글이다.
귀용 부인은 이 책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정을 여기 삽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귀용 부인은 자기의 전기를 썼는데 30대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부인의 첫 번째 출판된 책, 『짧고 쉽게 기도하는 법』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참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귀용 부인이 맨 처음 투옥된(실제로는 성 안토니오 수도원이라 불리는 파리 교구의 한 수녀원에서 유폐된 생활을 했다)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귀용 부인의 재산과 소유를 빼앗으려는 의붓오빠의 계략과 그때까지 부인이 썼던 세 권의 책들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귀용 부인은 루이 14세 왕정 안에 있던 친구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부인은 위대한 대중성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유럽의 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정, 베르사이유 궁정에서 부인이 끼쳤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결국 귀용 부인은 루이 14세 왕정의 미움을 샀다. 왕은 프랑스의 가장 유명하고 큰 인물, 교회당국자인 보쉬에 주교에게 귀용 부인을 심문하라고 직접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심문'은 일종의 정신적 탄압으로 돌변했다. 프랑스에서 거의 전능한 실세를 누렸던 보쉬에 주교는 자기가 어떤 어리석은 여자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압적으로 귀용 부인을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분노했다(후에 역사는 보쉬에에게 후하지 않았는데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이 여인을 지나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위험스런' 여인에 대한 보쉬에 주교의 결론은 루이 14세 왕으로 하여금 아무런 공판과 선고절차도 거치지 않고 귀용 부인을 감옥에 보내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보쉬에 주교와 다른 두 명의 주교들 앞에서 심문을 당했던 귀용 부인은 프랑스의 이 유명한 거물, 보쉬에 주교에게 저기의 자서전을 제출했다(그는 이미 귀용 부인의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책을 읽었고, 그것에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귀용 부인은 그때 다른 세 권의 책도 제출했는데 상태는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성경주석 중에서도 아가서에 대한 것을 제출했던 것이다. 귀용 부인은 또 당시 완성되었으나 아직 출판되지 않은 『영혼의 폭포수』 사본도 제출했다. 아가서에 대한 귀용 부인의 정열적이고 영적인 해석을 읽는, 지나치게 거만하고 경건한 독신의 늙은 남자를 상상해보라! 보쉬에 주교의 머리카락이 털끝까지 곤두서지 않았겠는가! 무엇보다도 섹스는 그 사람에게 낯선 세계임에 틀림없고, 그것이 비록 아가서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주제는 종교서적 안에서 발디딜 틈도 없었던 것이다. 『영혼의 폭포수』에 대한 보쉬에 주교의 반응은 더욱 나빴다. 이 책에서 귀용 부인은 지성주의와 지식인들에게 반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결국 보쉬에 주교 자신을 공격한 격이었다! 더구나 『영혼의 폭포수』에 비춰진 주관주의적인 특성은 당시까지 프랑스가 낳은 최대의 객관주의자(대표적인 외형적 종교인)인 보쉬에 주교의 호감을 얻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한 사건이 귀용 부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카엘 몰리노스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시기에 귀용 부인의 작품과 비슷한 책을 씀으로써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몰리노스는 당시 바티칸과 교황, 로마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을 뒤엎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시성(詩聖)이 된 성인들에 의해서 이미 역설된 것들이었다. 몰리노스가 귀용 부인, 두 사람 다 자기들이 쓰고 가르친 것 때문에 물의가 빚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 몰리노스는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 귀용 부인은 잠시 피신해 있을까 했지만 결국 빈센느성에 유폐되고 끝내 악명높은 바스티유 감옥에까지 쫓겨난다.
귀용 부인은 고양된 영적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은 매우 드믈다고 말한다. 그 상태는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늙으막히 거의 죽기 직전이나 도달할 수 있다고 보통 알려져 있다. 이 책을 쓸 때 귀용 부인은 40대 후반이었다. 그러므로 부인이 여기서 쓰고 내용은 자기가 직접 겪은 것을 스스로 이론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알기로는, 『영혼의 폭포수』는 귀용 부인이 죽기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 한 것은, 이 책이 출간될 때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당황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을 또다시 출간하는가? 이미 언급했듯이, 신앙인의 일상생활 속에 얽힌, 십자가를 주제로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작품이 많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고난의 문제로부터 점점 더 시시각각 멀어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낙담하여 손을 놓거나 자기가 읽었던 것을 잊으려고 애쓴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용 부인이 묘사한 단계를 전부 거쳐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귀용 부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특수한 책을 이해하려면, 카톨릭적인 전통을 이해해야만 한다. 귀용 부인은 가장 복음적인 로마 카톨릭 교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귀용 부인은 카톨릭교도였다. 귀용 부인이 여기서 다루었던 주제에 대하여 똑같은 글을 썼던 카톨릭교도가 있는데 그 사람은 좋은 카톨릭교도로 인정받았다. 이 전통은 어거스틴과 디오니시우스, 에그지우스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정착된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떤 '단계별'로 구분하였다. 그 후에 거의 모든 저자들 역시 이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거쳐야만 한다고 믿었던 단계들을 설정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교도들에게 있어 완전함이란 무죄함이나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안에 거함'의 단계를 의미한다.
귀용 부인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독자들에게 자기가 고유한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부인은 자기가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이 단계들에 자신은 최소한 도달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로마 카톨릭교도가 아니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는 결정적인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약성경에는 그러한 공식이 없다. 변화에는 공식이 없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주님은 길들여진 분이 아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체험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지 미리 전제된 단계를 통해서 계시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영혼의 폭포수』는 한 여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도상에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이 귀용 부인이 특출한 능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이다. 나의 친구 중 한 명이 나의 책 『내적인 여행』의 한 장, "영의 깜깜한 밤"을 논평하던 중 이 역설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진! 당신이 묘사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당신의 책을 별로 읽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다소 침울하기는 하지만 자기 체험에 대한 이 생생한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당신은 귀용 부인의 삶이나 글에 낯선 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손에서 책을 놓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유의 책을 읽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나는 특별히 깊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더 깊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은 사람들은 외톨박이로 만들지 않는다. 다만 외톨박이인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읽은 후 자기가 얼마나 외톨박이인지 더욱 강조할 뿐이다).
첫째, 종교적인 이유로 독신생활을 하는 남자들, 그들은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오히려 그들 종교심이 강한 독신 종교인들은 결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미 결혼생활을 10년이나 했던 부인이 쓴 이책이 그들 독신 종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결혼하지 않은 젊은 독신 남자이고, '종교심' 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당신을 참을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당신이 개인적인 자기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당신이 만일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고 합법적이라고 자만하며 다른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는 합법적이라고 자만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시도할 때, 당신은 여전히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즉 종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 한 주간 내에 건너뛰려고 계획하는 영적인 단계가 실제로는 20년 혹은 30년이 걸린다고 귀용 부인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들이다. 30대나 40대의 사람 중 종교인이면서 정신질환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서적을 쓴 저자들로 하여금 비록 그 책이 아무리 온유하고 부드럽다 하더라도 책을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실제로 기독교서적,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자기들이 읽는 것에서 상처를 입고 동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기 과신의 헛된 비전 속에서 눈이 먼 채 교만하게 자기 미혹에 빠져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읽지 말 것을 권한다. 그들은 자기를 제 2의 잔느 귀용으로 자처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 나도 이런 과정을 다 거쳤어, 지금 나는…"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실제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도달했어!라고 과신하는 동안 몸의 세공(細孔)을 통해서 메시자가 다 빠져나간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의 뾰족한 앞니를 뽑을 뿐 아니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앞니도 뽑아야 할 것 같다.
첫째, 모든 영적인 추구가 당신 개인의 사적 체험이 아니라 교회 생활의 내적 체험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바로 이 영적 추구가 귀속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주님과 함께 더욱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들 속에서 같이 살고 싶은 나의 심정이다(나 역시 그런 추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저 세계 끝에서 또 다른 세계 끝으로 여행할 때마다 시간이 허락되는 한, 나는 남자, 여자,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지금까지 단 두 사람 밖에는 만나지 못했다. 오직 두 사람! 두 사람! 이 두사람은 모두, 어떤 누군가가 사람들을 단계별로 분류한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워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베타 시리크라 불리는 그리스도인 여성이다. 그분은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그녀는 귀용 부인이 '냉담'이라고 묘사한 단계에 한번도 이른 적이 없었다). 베타, 그분은 76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글을 출판하는 나의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당신 자신이 영적 해석이 매우 높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여러분 대다수는 실제 다 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발견해 보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나 개인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즉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받았다는 사실, 그 시점을 넘어서는 모든 것이 내게는 약간 모호하다. 나는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요소를 보았다. 자기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오히려 나는 섣부른 뒷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다만 머리 속의 생각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터무니없는 영적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의 거칠고 터무니없는 영적 상태가 드러나 그들의 입이 봉해지거나 아니면 자기 착각이 가증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의 폭포수』는 매우 뛰어나고 유익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변화의 진행 과정중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영혼의 폭포수』를 출판하게 된 또 다른 동기가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깊은 내적 측면에 관해서 사역을 해왔다. 그러면서 나는 이 위대한 내적 모험의 길을 일찍부터 젊은 시절에 떠났던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 유형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 중에서 그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할 만큼 친밀하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깊은 심연의 반석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요했다. 그동안 그들 각자는 친밀한 교제의 그 부요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고난의 십자가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십자가, 이중의 십자가를 상기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친밀한 교제의 그 부요한 나날이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했다. 또 한 차례의 가뭄이 닥쳐왔다. 그 샘솟던 놀라운 물이 그쳤을 때 나는 그 중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예 주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머지 대대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건조한 나날을 지내며 계속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마침내 참으로 황폐된 상태에서 다시 십자가를 만났을 때는 더 이상 주님을 좇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그토록 엄청난 십자가와 시련에 대해서 경고해준 사람들의 말을 자기가 결코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 훗날 시인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 독자여! 『영혼의 폭포수』를 통해 잔느 귀용을 만나보라! 십자가를 묘사한 거장이(아니, 과거의 거장) 바로 당신 앞에 있다. 이 책은 상세한 고난 안으로 당신을 끌어당길 것이다. 이 책의 상반부는 당신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과 전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 편견된 인상을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신에게 경고를 줄 것이다. 십자가와 시련에 대한 경고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진 에드워즈(Gene Edwa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