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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프랑스 정치가 탈레랑의 커피에 대한 비유다. 커피의 치명적인 유혹에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아마 탈레랑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인들도 어느 샌가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는 커피의 유혹에 깊이 빠졌다. 통계가 증명해준다. 우리나라 사람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연평균 512잔에 이른다(2017년 기준). 전 국민이 하루 1잔씩 마신 셈이지만 직장인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더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두커피 시장도 2007년 9000억 원에서 2017년 7조9000억 원으로 10년 새 8배나 커졌다. 카페 체인점 매출액은 2007년 6억 달러에서 2018년 43억 달러(예상치)로 7배 증가했다. 인구 수(5181만명)를 감안하면 미국보다 1인당 커피숍 소비액은 더 많았다(유로모니터 인터내셔날). 파릇파릇한 청소년들이나 시골 노인들도 이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블루보틀 첫 한국 매장인 서울 성수도점 내부>
그래서 카페는 인구대비 공급과잉이라는 말도 나온다. 커피전문점 시장은 레드오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한 눈 팔면 한 순간에 경쟁에 뒤쳐지거나 시장에서 사라진다. 대다수 국내 카페체인점이 매출정체현상을 빚고 있다. 다만 한곳만 예외다. 스타벅스다. 남들이 제 자리 걸음하거나 반 발짝씩 걸을 때 성큼 성큼 앞서 나가고 있다. 2016년 첫 1조원 매출을 돌파한데 이어 2018년엔 1조5224억 원을 기록했다. 순이익만 1천429억 원이다. 매출과 순이익이 토종 브랜드의 선두주자인 투썸플레이스의 5배가 넘는다.
스타벅스는 감성경영으로 팬덤현상을 낳았다. 이윤 추구보다는 직원 우선주의, 커피 맛, 고객만족, 지역사회와 환경보호에 더 치중하는 스타벅스의 정체성이 숨어있다. 단순히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가치를 추구하는 혁신전략으로 국내 커피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반면 토종카페체인은 성장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아무리 운동화 끈을 조이고 뛰어도 스타벅스는 '넘사벽'이다. 이달 들어 투썸플레이스의 경영권이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는 투자회사에 매각된 것과 커피계의 애플'로 불리는 미국 카페체인 '블루보틀'이 성수동에 1호점을 열은 것은 국내 카페체인 시장의 미묘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블루보틀에서는 고객이 직접 핸드드립 과정을 볼 수 있다>
투썸플레이스를 자회사로 두고 있는 CJ푸드빌은 30일 투썸플레이스의 보유 지분 45%(2025억원)를 투자회사 엥커에퀴티파트너스에 매각했다. 물론 투썸 자체의 경영난 때문은 아니다. 투썸은 지난해(2~12월 기준) 매출 2743억원, 영업이익 292억원을 기록한 CJ푸드빌의 '알짜 브랜드'였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 출점 제한 등 각종 제한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2위 업체는 절대 1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게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블루보틀이 한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3일 개장행사에는 이른 아침부터 4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블루보틀은 창고 창업, 괴짜 창업자, 독창적인 제품, 열광하는 소비자 등이 애플과 닮아 '커피계의 애플'로 불린다.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커피광인 제임스 프리먼이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교향악단을 뛰쳐나와 설립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커피 맛을 내기 위해 생두를 구입할 때부터 로스팅과 추출까지 모든 과정에서 완벽을 추구한 '블루보틀'은 값도 비싸고 20분이상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커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제외하고 오직 일본에만 진출(2015년)할 만큼 보수적인 기업이다. 그런 블루보틀의 제임스 프리먼은 왜 중국도, 유럽도 아닌 한국 카페체인 시장을 선택했을까.
우선 한국인들은 매장에서 직접 내리는 원두커피를 유독 선호한다. 그래서 점심식사를 마치면 카페를 찾는 것은 직장인들의 일상이 됐다. 여전히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최근 몇년새 커피애호가들이 늘면서 커피의 풍미와 품질에 따라 카페 선호도가 갈린다. 동네마다 자체적으로 로스팅을 하는 '로스터리 하우스'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호가를 집중 공략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스타벅스의 성공을 눈여겨 봤을 것이다. 스타벅스는 한국시장에서 가파른 성장을 보였다. 토종 카페체인과 비교하기 힘든 압도적인 1위다. 스타벅스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도 소비자들에게 먹혀든 점도 있지만 직영점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거리제한 없이 돈 되는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점할 수 있다. 국내에서 120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스타벅스가 약 480개의 매장을 서울에 입점시켰다. 블루보틀도 미국과 일본에서 운영 중인 68개 매장은 모두 직영점이다.
<작은 폐공장을 리모델링한듯한 미국의 한 블루보틀 카페 매장>
블루보틀은 '느려서 행복한' 커피를 추구한다. 창업 20년을 맞았지만 미국내 매장은 57개 뿐이다. 일본은 3년 전에 진출했지만 매장은 고작 11개다. 또 손님이 주문을 하면 커피콩을 저울에 달고 갈아서 핸드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는 '슬로우 커피'다. 블루보톨은 연내 추가로 1개(삼청점) 매장을 더 열 계획이지만 추가 출점에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블루보톨의 맛과 커피철학에 공감하는 한국 고객들이 꾸준히 늘어난다면 국내 카페체인 시장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업체는 긴장할 수도 있다. 제임스 프리먼은 "커피가 마약이라면 가장 좋은 마약일 것이다. 좋은 커피는 기쁨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고 말한바 있다. 과연 한국 커피애호가들은 블루보틀이라는 마약에 빠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