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0년대 초반에 국회의원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모시던 의원은 공화당 소속이었다. 당시의 여당 의원은 국가가 아닌 박정희의 私兵에 불과 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곧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말해 주는 단적인 예로 설악산에서 의원들의 연수를 들어 보자.
비서들이 안 따라가고 의원들만 단체로 버스를 타고 가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츄리닝 복장으로 집합해서 구보로 시작을 했다. 당시는 국회의원이 개별 헌법기관이 아니고 단순한 박정희의 부하였을 뿐이었다. ‘충성과 복종’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 시대이었다.
80 년대 후반 가까이 지내던 의원은 야당의 안동선 의원이었다. 부천의 재야를 대표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아쉬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당시 부천의 유일한 야당의원인 안동선 의원을 상대로 부탁이나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안 의원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특별한 정치적인 신념은 없는 철저히 당리당략과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평균적인 보수 야당 체질 국회의원이었다.
부천에서 선거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청년 학생 노동자 빈민 세력을 대변 하는 입장이어서 지역의 국회의원들과 관계를 잘 유지 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는 일도 있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재주껏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도 나의 일이었다.
15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 부천 소사구로 김문수와 박지원은 둘 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93년도 뉴욕에 갔을 때 당시 김대중 총재의 심부름으로 미국의 카터재단에 가는 길이었던 박지원 의원을 만났다. 식사를 하면서 관광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럴 계획이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남는 것은 관광밖에 없다며 이야기는 저녁에 만나서 하기로 하고 최소한 일일 시내 관광이라도 해야 한다며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비서에게 일일관광 버스가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비서가 이미 버스가 출발했다고 하는데도 우리 부부를 억지로 차에 태워서 버스를 쫓아가서 다음 정류지에서 타도록 해주었다.
그 후로도 개인적으로나 단체로나 박지원 의원은 물적 지원을 많이 해주었는데 막상 투표에서는 고민 끝에 '우리가 남이가?'하는 생각에서 김문수를 찍었다. 선거의 결과는 현역의원이면서 야당 대변인이었던 박지원 씨의 근소한 차이인 낙선으로 나타났다. 이후 김문수는 내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뿐만 아니라 함께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순진하게도 김문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15대 선거가 끝나고 95년도 책의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김문수가 국회의원이 되어 참석을 했지만 그에게 아무런 순서도 맡기지 않았다.
부천의 토호 출신의 땅부자로서 전두환 패거리 정당의 국회의원을 하던 박규식이라는 불량한 인간이 있었다. 이 자가 14대 때 더 힘센 놈에게 밀려서 공천을 못 받고 민주당으로 공천을 받아 당선이 되었다. 우습게도 어제까지 적이었던 자가 아군이 되었으니 당시로서는 부천 지역 재야 세력의 대표격인 나와 안동선 의원의 주선으로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신발에 흙을 안 묻히고 살 수 있는 사람 아니오? 그런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욕을 하는 겁니까?”였다. 그러나 선수는 선수답게 놀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향 신고비로 200만 원을 갈취(?)해서 당시 대표를 맡고 있었던 부천민주연합의 사무실 경비로 썼다.
그러나 박규식과의 인연은 결코 좋게 끝나지 않았다. 재선의원으로 야당 몫의 상임위원장을 요구하던 박규식과 야당 총재인 김대중과의 거래가 틀어지자 그가 다시 보수 정당으로 월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대선이 다가왔고 노무현을 단장으로 하는 새물결 유세단이 역곡역에서 유세를 하게 되었다. 원래 선관위에 등록된 연설원만이 연설을 할 수 있었지만 노무현은 내가 인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올라가서 5분간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집중적으로 박규식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오랫동안 거래를 온 탓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많이 들어 있는 노련한 정보계장(이름이 노련한이 아니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날 낮 유세를 하던 시각에 박규식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자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내가 선거법을 위반하고 연설을 했다고 고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원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가서 접수를 받겠습니다.”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유세장에서 몇 사람 듣지도 않았는데 고발을 하면 지 목사는 잘되었다고 더 시끄럽게 떠들지 않겠느냐?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어떠시냐?”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야당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돈을 뜯는(?) 일을 한 셈이다. 인간적으로는 원혜영 의원이 제일 가까웠지만 돈이 없어서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제정구 선생이 국회의원이 된 후, 어느 날 "국회에 들어가 보니 어때요?"라고 물었더니 직설적 화법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똥구덩이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라고 했다. 그는 끝없이 자기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특파원이 "재야에서 국회의원이 된 뒤 무엇하고 투쟁하느냐?"는 질문에 "나 자신과 투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정치인이 국가를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운 직업이다. 왜냐하면 일반 국민들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당장의 정치적인 이익들에 민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교하자면 당장 눈 앞에 파도를 헤쳐나가기 바빠서 미처 도착할 항구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개인으로는 큰 성취를 이룬 것이겠지만 국회의원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정당에 속한 국회의원의 활동이라는 것이 스포츠로 말하면 권투나 골프같이 개인 경기가 아니라 축구나 럭비처럼 팀으로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좀처럼 빛이 나기 힘든 직종이다. 물론 운동경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선수들이 있지만 정치에서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는 연예계처럼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튀어야’ 하는 속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튀어도 멋있게 잘 튀어야 하는데 잘못 튀면 정치생명이 끝나기도 한다. 대중을 감동 시킬 수 있도록 튄 정치인의 대표적인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 노무현인데 그는 결국 잘 튀어서 대통령까지 되었다. 국민은 노무현처럼 감동적으로 튀는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퇴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옳고 바른 일에 생명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정치판에서 자기를 버려서 튈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즉 거의 종교적인 자세로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끔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노무현처럼 더 큰 가치를 위하여 정치적으로 사망할 수도 있는 길을 택할 줄도 아는 것이 제대로 튀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잖는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