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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 케이불 카 트래킹 -효도 관광 힐링 트래킹
제2화 프라하 (1)
2025년 7월 18일
시차를 건너 맞이한 아침
프라하는 한국보다 일곱 시간이 느리다.
어제의 피로는 그 시차의 틈새에 묘하게 스며들어, 프라하의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이었을까. 눈을 뜨자 몸이 가볍다. 여행자의 설렘이 피곤함을 이긴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프라하의 아침은 조용했다. 도시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이곳이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하나의 역사 그 자체임을 다시 느꼈다.
2. 프라하를 걷는다는 것
프라하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도시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거니는 일이다.
체코는 보이족이 정착하여 보헤미안 왕국을 이루어 살다가 14세기, 카를 1세가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며 꽃피운 보헤미안 왕국의 황금시대.
그 찬란했던 시절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 도시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품에 안겨 오스트리아 문화와 뒤섞이면서도,
프라하는 결코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되 보헤미안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켜낸 것이다.
프라하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광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그것은 시간 속을 거니는 일이다.
이 땅에는 오래전 보이족이 정착해 살았고중세에 이르러 보헤미안 왕국은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14세기, 카를 1세—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의 치세 아래 프라하는 정치와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꽃피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으며 오스트리아 문화와 깊이 얽혔지만,
프라하는 끝내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았다.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이되 보헤미안 특유의 정체성은
끝까지 지켜낸 도시. 그래서 이곳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우아하면서도 단단하다.
어느 시인은 프라하를 두고 ‘아름다운 도시라기보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라 했다. 정말 그렇다. 프라하는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도시다.
아름다움 뒤에 숨은 신념의 역사
프라하는 낭만의 도시이기 전에 신념의 도시다.이곳은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가 자신의
믿음을 지키다 화형당한 땅이며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와 개혁을 외쳤던
저항의 무대이기도 하다.그리고 1989년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주화를 이뤄낸
벨벳 혁명의 현장이다. 아름다움과 아픔, 낭만과 투쟁이 공존하는 곳.
프라하는 늘 그렇게 역사를 품고 서 있었다.
이곳은 종교개혁자 안 후스가 순교한 신념의 땅이며,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저항의 현장이다. 그리고 무혈 혁명인 벨벳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평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아름다움과 아픔, 낭만과 투쟁이 공존하는 곳.
그것이 프라하다.
시민회관, 음악으로 숨 쉬는 건축
오전 9시 무렵, 우리는 호텔을 나섰다. 조금 걷자 웅장한 시민회관(오베츠니 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시청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이제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외관과 내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체코의 국민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를 기리는 장소로 유명하다.매년 5월 12일, 스메타나의 서거일이 되면
이곳에서 그의 교향곡 《나의 조국》이 연주되며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가 막을 올린다.
그 순간, 도시는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시장 방의 벽화도 꼭 보길 권한다. 한 붓의 곡선 안에 체코의
역사와 민족혼이 숨 쉬고 있는 곳, 그곳 역시 프라하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마주한 기도
멀리 화약의 탑도 보이며 우린 명품점들이 무수히 입점해 있는 첼레트나 거리를 지나
바츨라프 광장까지 걸어 가면서 광장 중앙, 네 명의 호위 성인과 함께 세워진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 그 앞에 선 순간, 대좌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체코의땅 영도자이시며 우리주군 성 바츨라프여!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사라지지
않토록보호해 주소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이 기도를 되뇌었을까.
아쉽게도 광장은 대대적인 수리 중이었다. 민주항쟁의 기념비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정신만큼은 여전히 이곳 공기 속에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돌과 음악, 기억이 숨 쉬는 하루
광장 끝자락에 자리한 국립 박물관이 있었고 10시 개관 시간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웅장한 돔 아래로 들어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 건물이 품은 시간의 무게가 전해졌다.
최근 이곳은 의미 있는 발견으로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승리의 성모 성당 지하에
보관되어 있던 유해가 바로크 시대의 저명한 의사이자 카를 대학교 총장을 네 차례나 역임한
"얀 프란티셰크 뢰브(Jan František Löw, 1648–1725)"의 것임이 확인된 것이다.
그의 서거 300주년이자 1971년 신원 확인을 시도했던 인류학자 에마누엘 블체크 교수의 탄생
100주년이 겹친 해로 학문과 시간이 마침내 하나로 만난 작은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건축의 언어
1918년 슈테른베르크 백작에 의해 개관된 이 박물관은 역사·자연사·예술이 공존하는
체코의 지적 보고다. 지하 통로로 연결된 현대식 신관까지 이곳은 말 그대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였다.
입구의 판테온 홀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건축가 요세프 츨츠(Josef Schulz)가
1890년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한 이 공간은 역동적인 방사형 타일 패턴으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보헤미아의 문화와 과학에 기여한 인물들의 흉상과 조각상들은 하나하나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체코라는 나라를 만든 얼굴들이었다. 이곳은 박물관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초상화 갤러리였다.
지구의 기억을 마주하다
자연사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기자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이 펼쳐졌다.무려 24,800점에 달하는 암석 컬렉션.
체코는 물론 유럽과 세계 곳곳에서 모인 돌들은 지구가 남긴 기억 그 자체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서그린란드에서 온 약 37억 년 전 원생대 암석그리고 체코 무츠코프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상 석영 섬록암. 인간의 역사가 한순간처럼 느껴질 만큼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나이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밍크고래의 거대한 뼈대와 1,500여 점의 전시품 사이를 거닐며 전쟁과 자연, 문명의
흔적들을 차분히 돌아보았다
세월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없어지고 사라지는데 인간의 노력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월의 흔적을 찾아 이렇게 시간을 되돌려 준다는것은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드보르자크를 찾아서
박물관을 나와, 구글 지도를 따라 안토닌 드보르자크 박물관으로 향했다.
드보르자크(1841–1904)는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양대 국민 음악가로 불리는 이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자연스레 설렌다. 프라하는 계절마다 음악으로 숨 쉬는 도시다.
5월에는 스메타나 음악제가 9월에는 드보르자크 음악제가 열린다.
도시는 사계절 내내 악보 위를 걷는다.스메타나 기념관은 이전 여행에서 이미 방문했기에,
오늘은 드보르자크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작은 기념관에 담긴 큰 삶
그의 생가는 프라하에서 약 한 시간 거리 네라호제베스 성 근처에 있지만
드보르자크 기념협회는 프라하 시내의 바츨라프 미흐나 백작의 바로크식 여름 별장을
매입해 1961년 국립 박물관 소속 기념관으로 개관했다고한다
특히 사진 자료가 유난히 많았다. 드보르자크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진작가
얀 물라치(Jan Mulač)의 작품들이었다. 친구이자 기록자로서의 헌신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라하 시내에서 1시간 거리인 네라호제베스 성 근처가 그의 생가가 있지만,
드보르자크 기념협회는 프라하 시내 바츨라프 미흐나 (Vaclav michna) 백작의
바로크식 여름 별장을 매입하여 1961년 국립 박물관 소속 기념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40여 평 남짓한 아담한 2층 건물로 소박하지만 단정했다.1층과 2층에 걸쳐 전시된
유품들그리고 2층의 작은 연주회 공간은 음악가의 삶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드보르자크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진작가 얀 물라치(1841-1905)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드보르자크의 모든 순간을 렌즈에 담아 보관했다. 친구이자 기록자로서의 헌신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벽에 진열된 비욜라이다
1880년경 스트라고프 (Stragov) 수도원 원장에게 빌린 이 악기로 드보르자크는
콤자크 앙상블을 연주했다. 1883년 그는 후배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베른하르트에게
이 비올라를 선물했다. 베른하르트는 1925년까지 이 악기를 사용했고 1929년
드보르자크 기념협회에 기증했다. 한 악기가 품은 우정과 음악의 역사가 가슴을 적셨다.
미국 시절의 악보도 눈에 띄었다. '슬라브 무곡'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후 드보르자크는
뉴욕 음악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00달러를 받으며 시작한
미국 생활 하지만 향수병에 시달린 그는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그 그리움 속에서
'신세계로부터', 'Going Home' 같은 불멸의 명곡들이 탄생했다.
브람스와 드보르자크, 국경을 넘은 우정
한편 벽에는 독일 출신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60주년 기념 증권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브람스는 무명이던 드보르자크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적극 후원했으며
그의 도움으로 1889년 '슬라브 무곡'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두 거장이 주고받은 서신들.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 우정이 한 예술가의 운명을 바꿔
놓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2층 천장에는 바로크풍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연주회를 위한 공간에서
드보르자크의 생애를 담은 영상을 봤다.
904년 5월 1일 심장마비와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한 드보르자크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프라하 비셰흐라드 국립 명예 묘지(Vyšehrad Cemetery and Pantheon) 에 안장되었다.
체코의 유명 인사들만 잠들 수 있는 그곳. 시간이 된다면 꼭 한번 방문해보시길 권한다.
하벨 시장, 삶의 온기로 마무리하다
드보르자크 기념관을 나와 걸음을 옮긴 곳은 하벨 시장이었다.
1232년 문을 연 이곳은 800년의 세월을 품은 프라하의 전통 노천시장이다.
처음엔 현지인들을 위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파는 재래시장이었지만 이제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도 함께 파는 시장으로 변모했다.
먹음직스럽게 진열된 과일들 즉석에서 씻어 먹을 수 있도록 길옆 분수대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우리는 사지 않았지만 그저 눈으로 담는 눈으로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웠다.
허기와 피로가 몰려왔다. 시장 길옆의 작은 식당에서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를 하며 잠시
쉬었다. 발을 쉬게 하는 것도 여행의 지혜다.
다시 호텔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올드타운 광장, 프라하의 심장으로
발길은 자연스럽게 올드타운 광장으로 향했다.프라하를 처음 찾는 이도, 다시 찾는 이도
결국 이 광장 앞에 서게 된다. 도시의 심장처럼 모든 길과 시간이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천문시계가 달린 구시청사,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의 동상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교회가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얀 후스 동상 앞에 서니
이곳이 단순히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라 신념과 희생의 무대였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1415년,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을 당한 그의 죽음은 체코 민족 의식의 불씨가 되었고
훗날 종교개혁의 씨앗이 되었다. 광장 한켠의 골스킨스키 미술관을 둘러본 뒤,
광장 중앙에 우뚝 선 성모 마리아 기념탑 앞에서인증 사진을 남겼다.
17세기에 세워진 이 탑은 삼십년 전쟁의 종식을 기념하며 세워진 것으로한때 철거되었다가
체코인들의 염원으로 다시 복원된 상징적인 존재다.
하늘을 향한 기도, 틴 성당
광장 뒤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마치 도시 전체를 굽어보듯 솟아 있는 틴 성당
(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이 보인다.
11세기부터 건축이 시작된 고딕 양식의 이 성당은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설교하던 중심 교회였다.
높이 약 80미터에 이르는 두 개의 첨탑은프라하의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사람들은 북쪽 탑을
‘이브’, 남쪽 탑을 ‘아담’이라 부른다. 미묘하게 다른 크기와 형태의 두 탑은 마치 하늘을 향해
영원한 대화를 나누는 연인처럼 보였다.
돌과 빛으로 쓰인 신앙의 역사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차분하면서도 엄숙한 기운
그리고 세월이 남긴 깊은 향기 틴 성당은 유럽의 다른 화려한 성당들과는 결이 달랐다.
화려함보다는 신념의 무게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중앙 제단에는복음사가 요한과 네포무크 성인이 조각된 부조가 정교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제단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중앙 제단 앞쪽에 조셉 제단과 겟세마네
제단이 나란히 놓여 있어 기도의 방향과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 같았다
갈보리 제대 앞에서의 침묵
성당 안에서 가장 마음을 붙든 것은 틴 갈보리 제대였다.
1410년대에 제작된 이 제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복음사가 요한
세 조각상으로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1661년 성당 왼쪽 통로 끝의 바로크 양식 제단에
새롭게 설치되었다고 한다. 집사람은 그 앞에 오래 머물렀다.
아무 말 없이,그저 두 손을 모은 채 가족의 안녕과 앞으로 이어질 25일간의 무사한 여행을 위해.
그 조용한 기도가 어쩌면 이 여행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고 진실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가 만나는 축제
호텔 근처 구시가지 팔라디움 백화점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프라하 민속의 날 축제가 한창이었다.이 축제는 민속 예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매년 열린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온 50여 개의 댄스 앙상블이 참여한다. 프라하 중심부 곳곳의 야외 무대에서
각국의 민속 공연이 펼쳐지고, 전통 음악이 광장을 채운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2시간 가까이 공연을 관람했다.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중국이 참가했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공연이었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사물놀이나 대취타를 아리랑과 함께 이 무대에서 펼친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공연은 이곳과 카롤 대학의 Karolinum 미술관 근처의 공터에서 동시에 공연된다고 한다
집사람은 핀란드 공연자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언어는 달라도 웃음과 박수는 하나였다. 그것이 축제의 마법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프라하의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https://www.praguefestival.cz/folklore
오늘의 기록
걸음 수: 25,659보
순수 걷기 시간: 4시간 23분
이동 거리: 16.8km
마음의 상태: 축제의 마법에 걸린 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