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엔 휴가라고 따로 갈 형편도 아니라서 광복절 연휴에 김제 큰아들 집을 방문하는 걸로 떼웠다. 부산에 있는 둘째아들도 데리고 가서 모처럼 우리 가족끼리 맛집 순례나 해보자고 했다. 이 더위에 장보고 밥해줄 일이 귀찮기도 했지만 애들도 맛집 얘기가 나오니까 대환영이다. 어쨌든 외국 여행을 간 셈 치고 3박 4일을 몽땅 외식으로 해결하는 특별 이벤트를 시작했다.
첫날 점심은 김제 가는 길에 진주에서 유명하다는 냉면집을 찾았다. 과연 주차장부터 만차더니 식당에 들어서도 누구 하나 "어서 오세요" 반기는 사람도 없고 식탁으로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둘러보니 식탁마다 사람들이 지루한 표정으로 식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주인인듯 싶은 남자에게 어디 앉을까 물으니 아직 그릇도 치지 않은 지저분한 식탁을 가리키며 앉아 있으면 치워줄거라는 것이다. 아들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이런 식으로 서비스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며 툴툴거렸다. 나도 기분이 언짢았지만 종업원 여자애들이 지친 모습으로 힘겹게 산더미같은 식기들을 나르는 걸 보니 뭐라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흔히 먹던 냉면과는 뭔가 다르긴 달랐다. 남편은 물냉면 속에 손바닥만한 소고기랑 고명이 푸짐하게 들어있고, 보통이 곱배기만큼이나 양이 많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은지 맛있게 먹는다. 고속도로가 막혀 그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밥 때를 한참 놓쳤으니 시장기가 한 몫을 거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킨 비빔냉면은 양념이 너무 달고 텁텁해 실망스러웠지만 그 집 냉면 한 그릇 먹겠다는 일념으로 5시간이나 운전을 하고 온 남편의 눈치가 보여서 꾸역꾸역 먹고 나왔다. 그 대신 저녁 식사 메뉴인 군산의 꽃게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늦게 먹은 점심으로 밥이 먹힐 것 같지 않았는데 큰접시에 가지런히 담아낸 깔끔한 간장 꽃게장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더니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게 여간 감칠 맛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화장실 앞에는 양치를 하도록 칫솔을 준비해 두고 손에서 나는 비린내를 없애도록 레몬 조각을 준비해 놓은 세심한 배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비싼 저녁을 먹었어도 제 값을 하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둘째날 아침은 금산사 콩나물 해장국으로 했다. 김제에 올 적 마다 들리는 집인데 나물 반찬도 맛있고 특히 콩나물 해장국은 어떻게 맛을 낸 건지 입에 쩍쩍 붙는다. 처음 맛을 본 둘째 아들도 이거 배워서 부산에다 식당 차리면 대박나겠다고 좋아라 한다. 식사 후엔 금산사 산책을 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매표소 입구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더니 계곡이며 야영장에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다른 때는 절마당까지 차로 들어가곤 했는데 입구부터 걸어 들어가자니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게다가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워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그러고보니 그 날이 백중이었다. 법당에는 신도들과 템플스테이 체험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금산사의 명물 미륵전을 다시 본 걸로 위로를 삼을 수 밖에. 미륵전은 통일 신라 시대 양식으로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법당인데 안은 통층으로 되어 있고 그 속에 어마어마한 부처님이 계신다. 어떤 방법으로 법당 안에 모셨는지 그게 늘 궁금하다.
돌아 나오다 흐르는 물에 발이나 담가 보려고 냇가로 내려갔다. 누군가가 물 속 바윗돌마다 작은 비석돌을 세워 놓았다. 참 별난 재주들도 많다.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그니 피곤함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며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러나 그런 상쾌한 기분도 잠깐이었다. 점심 식사로 정한 풍천장어를 먹으러 고창으로 가는 길에서 갑작스런 폭우를 만났다. 남편은 큰아들에게 운전대를 맡긴 게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참에 차간 거리를 두지 않고 계속 속력을 내는 아들에게 드디어 화가 폭발했다. 아빠가 몇차례 천천히 가자고 했는데도 아빠 말을 무시하고 위험하게 운전을 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앞이 안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져 아들애도 당황이 되었을텐데 남편이 좀 참아주지 못하고 잔소리를 해대니 나도 신경이 곤두섰다. 한 순간 차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져 버렸다. 풍천장어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고 온 것인데 아빠가 분위기를 완전 망쳐 놓았다.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날씨가 좋아졌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토라졌으니 밥맛이 나겠는가. 게다가 앉을 자리도 없어 입장하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성질 좋은 둘째 녀석이 제 형과 아빠를 구슬리며 분위기를 잡아가는 가운데 겨우 식사를 마쳤다. 뽕잎과 상추에 싸서 먹는 복분자 장어와 양념 장어의 그 기막힌 맛을 다시 느껴 보려고 불원천리 갔건만 입맛이란 게 음식맛이 아니라 기분맛이란 진리만 터득하고 온 꼴이 되었다.
원래 성질이 급해 골을 잘 내도 오래 가지 않는 남편은 아들 마음을 상해준 게 미안해 안절부절하더니 먼저 사과를 청한다. 자식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뭐 하러 성질부터 내서 비싼 밥을 뭔 맛인지도 모르고 먹게 만드는지 참 밉상이다. 그걸 기회로 아들 녀석들은 편을 가르고 저희들끼리 시간을 갖겠다고 한다.
진작부터 아빠, 엄마를 떼어놓고 저희끼리 놀 공산이었는지 모르지. 지은 죄가 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튼 저녁식사는 늙은이끼리 집에서 임실치즈피자를 시켜먹고 치웠다.
말이 그렇지 하루 세끼를 사먹으러 다닌다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다. 세쨋날 아침은 냉장고를 뒤져 된장찌개랑 밑반찬 몇 가지로 밥을 차렸더니 모두 군말 않고 먹는다. 점심에는 집 근처의 식육식당으로 한우 불고기를 먹으러 갔다. 나는 평소에 육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아들애가 제가 알아서 갈빗살과 살치살을 시켰는데 두 쟁반이나 되는 고기를 누가 다 먹나 싶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괴기맛을 보더니 정신을 못차리겠는지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는 거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흐뭇하다더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밥을 먹자마자 또 저희들끼리 어딘가로 내빼고 우리 내외는 하릴없이 전주 한옥마을을 삥삥 돌다 지쳐서 돌아왔다.
마지막 날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산청에 들렀다. 전부터 동의보감촌에 가서 한방박물관과 약초원 등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마침 산청에 이름난 한정식집도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갖고 찾아갔다. 말이 한정식집이지 그저 그런 촌식당이었다. 1인분에 15000원이면 촌식당치고는 비싼 밥값이었다. 한상 가득 차려주긴 하는데 특별한 거라고는 홍어랑 돼지고기랑 묵은 김치의 삼합 몇조각 뿐 이렇다할 만한 것도 없었다. 군청 바로 앞에 있어 자리값이 비싼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산길을 꼬불꼬불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동의보감촌은 아직 준비 단계인지 자리는 크게 잡았는데 박물관도 잠겨 있고 썰렁하니 야외 분수대 밖엔 아무 것도 구경할 게 없었다. 의료투어 프로젝트를 맡은 각 지자체의 연구원들이 내게 와서 우리 한방병원이 전국에서 제일 잘 운영되고 있다고 했던 말이 다 빈말이 아니었는가 보다. 저만한 규모의 한방 타운을 활성화하려면 여러 가지로 참 힘들겠다 싶은 게 그래도 몇년간 의료투어를 담당해 왔다고 내 일처럼 걱정이 되었다.
둘째 녀석은 처음 먹어 본 전라도 음식을 이것 저것 떠올리며 아쉬운 듯 혼자 품평회를 하더니 "엄마, 솔직히 음식은 다 맛있었는데 그렇게 매일 먹으니까 좀 지겹더라." 하며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그랬다. 좋은 말도 삼 세 번이라더니 아무리 맛잇는 음식도 어쩌다 한번 먹어야 그 진가가 있는 거지 식도락가처럼 매일 맛잇는 것만 골라 먹는다는 건 정말 미련한 짓이란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며칠간 혀는 호강을 했다만 불어난 뱃살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다이어트에 돌입할 걸 생각하니 괜한 짓을 했다 싶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한번쯤 이런 일탈도 해보니 재미있긴 하다.
맛집을 답사 하는 거움도 잠시이고 덥고 복잡한 여름 휴가철이여서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하셨네요. 그치만 가만히 지내기보다는 가끔은.. 어디든지 떠나서 큰 사건만 아니라면 고생이 되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움직여서 여행을 하는 일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첫댓글 진주 그 냉면 집은 나 스스로 간 적이 없고 덤으로 아니 억지로 서너 번 따라 갔지만 갈 때마다
내 손수 비빔국수 해 먹는 것이 더 맛있는 걸요
ㅎㅎ 산청.. 안보아도 비디오.. 나도 그러했어요
맛집을 답사 하는거움도 잠시이고 덥고 복잡한 여름 휴가철이여서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하셨네요.
그치만 가만히 지내기보다는 가끔은.. 어디든지 떠나서 큰 사건만 아니라면
고생이 되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움직여서 여행을 하는 일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몇년전 초겨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릴때 고창 선운사에 들린 다음 식당에 들어가서 풍천장어에 반주로 복복자를 곁들여서 저녁을 아주겁고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게장 살이 사르르 녹는 맛이 느껴 지기도 하구요
신선한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이 참 부럽습니다. 뱃 살 어떻게 하면 뺄수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ㅎㅎㅎㅎ
지난해 겨울 가족여행으로 담양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구경하고 눈내리는 고창 선운사에 들려 풍천장어을 먹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나네요.
멋진 여행 잘 다녀 오셨군요
다음 기행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