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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식당. 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들을 냅킨으로 하나씩정성껏 닦고 있다. 식기가 더러웠을까? 아니다 호텔식당 관계자들은 그가 세균에 대해 병적인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남자의 자리에 놓인 식기들은 다른 자리에 있는 것들에 비해 더 신경 써서 깨끗하게 준비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냅킨 열여덟 장을 다 쓰고 나서야, 음식을 입에 넣는다.
음식을 먹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음식을 한입 떠먹을 때마다 요리의 부피를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그는 그래야만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텔 측에서 준비해 둔 냅킨은 왜 매번 열여덟 장일까? 그는 3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번호가 붙은 방이 아니면 투숙을 하지 않을 정도로 3이란 숫자를 좋아했다.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젊은 시절의 니콜라 테슬라
‘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발전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거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이 남자의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발명의 천재, 전기의 천재, 전기의 마술사, 교류의 아버지, 뉴욕의 마술사 등으로 불린 그의 이름은 니콜라 테슬라이다. 발명가로서 그는 에디슨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학도들 사이에서 테슬라라는 이름은 천재라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을 스밀리안(오늘날 크로아티아 영역)에서 태어났다. 정교회의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테슬라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음에도 가재도구나 농사도구를 직접 발명해서 쓸 정도로 발명에 재능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이미 나름의 발명을 시작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훗날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발명가이셨다. 만약 좋은 환경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셨다면 이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셨을 것이다.” 테슬라는 1875년에 그라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기계장치를 보았다. 그것은 발전기와 모터의 기능을 모두 하는 최신 기계였다. 이 장치에 푹 빠진 그는 직류 대신 교류로 작동하는 장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받던 장학금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 후 프라하 대학에도 다녔지만 역시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1881년 테슬라는 부다페스트로 가 국영 전화국의 기술자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아이디어가 마치 계시처럼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1882년 겨울 그는 친구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해가 지는 모습에 취해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걷다가 갑자기 땅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친구에게 외쳤다. “이게 내 모터야!”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교류 모터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듬 해 파리로 건너간 테슬라는 콘티넨털에디슨 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조잡하나마 최초의 교류 유도 모터를 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 실험을 통해 그것이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알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연구 결과를 시연중인 테슬라(1891년 왼쪽),테슬라의 연구실 이미지 사진(1900년)
1884년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쓴 시 몇 편, 동전 몇 개, 하늘을 나는 기계와 관련된 계산 결과 그리고 동료가 토머스 에디슨에게 전해주라고 한 추천서가 전부였다. 추천서 덕분에 그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만다. 그의 능력과 집중력만큼은 에디슨도 인정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바로 직류와 교류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에디슨은 철저한 직류 신봉자였다. 그러니 교류에 집착하는 테슬러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디슨과 결별한 테슬러는 1885년에 조지 웨스팅하우스에게 교류 관련 장치들의 특허권을 팔았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그 유명한 ‘전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격렬했다.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6개월 안에 틀림없이 누군가가 죽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개나 고양이를 사 교류에 일부러 감전사시키려는 식으로 교류의 위험성을 과장해 선전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는 교류 쪽으로 기울었다. 시카고 세계 박람회를 밝힐 전기로 교류가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에 교류 시스템이 적용됨으로써 전쟁은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테슬러는 웨스팅하우스에게 받은 돈으로 개인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자동 보트, 고주파 유도 코일인 테슬라 코일 등을 발명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900년 그는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투자를 받아 전세계로 통신을 할 수 있는 무선전신탑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이 계획은 모건의 지원 철회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건설 되다 만 탑도 1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구상들은 자금 부족 때문에 거의 대부분 실제로 구현되지 못한 채 노트 속에만 남게 된다.
1915년 테슬라는 에디슨과 또 한번 악연을 맺게 된다. 그가 에디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될 거라는 언론 보도가 연이어 난 것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된 온갖 추문이 나돌았다. 테슬라가 에디슨과의 공동 수상을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었고, 테슬라가 상금을 받지 못하도록 에디슨이 계략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었다. 2년 후, 테슬라는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가 주는 에디슨 메달을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수락했다. 시상식 자리에서 그는 “에디슨은 이론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사전에 그 어떤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혼자 힘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슬라의 이미지 사진(1878년 왼쪽), 테슬라 실험실을 찾은 마크 트웨인(1894년)
그날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뢴트겐의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었고, 그의 연구가 나온 이후부터 톰슨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업적을 이루어 현대 물리학의 개념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테슬라 씨는 마르코니의 연구보다 앞섰으며, 무선 전신과 기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1943년 1월 8일 아침 호텔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검시관은 그가 1월 7일 오후 10시 30분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이라고 밝혔다. 그는 1891년 6월 23일 전기 조명 시스템으로 받은 미국 특허를 비롯해 25개국에서 적어도 272개의 특허를 획득한 말 그대로 세기의 발명가였다.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 중 우리말로 옮겨진 책은 <과학 문명을 1백 년 앞당긴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와 <니콜라 테슬라, 과학적 상상력의 비밀> 이렇게 두 권이다. 두 권 중 한 권을 선택해 읽는다면 전자를 추천한다. 후자는 꽤 산만하다.
테슬라는 자신이 발명할 것들을 도면을 그리거나 실제로 만들어보지 않고도 머릿속 구상만으로 완벽하게 미리 다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 깜빡 할 사이에 책 한 쪽을 통째로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강박증과 편집증으로 인해 온갖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첫 책의 제목에는 “천재 과학자”란 문구가 들어있고, 둘째 책의 표지에는 “빛의 마법사”란 문구가 적혀있다. 그는 과학자였을 수도 있고, 마법사였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였을 지도 모른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그리고 테슬라가 얽힌 “전류 전쟁”의 전말을 다룬 <빛의 제국> 은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A major contributor to this article appears to have a close connection with its subject. (June 2015) |
International Widows Day is a United Nations ratified day of action to address the "poverty and injustice faced by millions of widows and their dependents in many countries".[1] The day takes place annually on 23 June.
International Widows Day was established by The Loomba Foundation[clarification needed] to raise awareness of the issue of widowhood. The significance of 23 June is that it was on that day in 1954 that Shrimati Pushpa Wati Loomba, mother of the foundation's founder, Lord Loomba, became a widow.[2] One of the foundation’s key goals is to highlight what it describes as an invisible calamity. A 2010 book, Invisible, Forgotten Sufferers: The Plight of Widows Around the World, estimates that there are 245 million widows worldwide, 115 million of whom live in poverty and suffer from social stigmatization and economic deprivation purely because they have lost their husbands.[3] As part of the Loomba Foundation’s awareness campaign, this study was presented to UN Secretary General Ban Ki-moon on 22 June 2010.[4]
The first International Widows Day took place in 2005 and was launched by Lord Loomba and the foundation's president, Cherie Blair.[5] By the sixth International Widows Day in 2010, events were held in Rwanda, Sri Lanka, the USA, the UK, Nepal, Syria, Kenya, India, Bangladesh and South Africa.[6]
On 21 December 2010,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formally adopted 23 June as International Widows Day, endorsing by unanimous acclaim a proposal introduced by President Ali Bongo Ondimba of Gabon.[7] As well as formally recognizing 23 June as a day of observance, the accompanying resolution called upon "Member States, the United Nations system and other international and regional organizations to give special attention to the situation of widows and their childre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