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9. 주일예배설교
예레미야애가 5장 1절, 요한계시록 18장 5절
304명, 그리고 159명
■ 기억하게 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좋을 것이 있습니다. 안 좋은 기억입니다. 트라우마를 가져오는 기억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사’입니다. 비참한 일이고, 참혹한 사건이기에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모두의 삶을 위해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의 부주의, 더 나아가 국가의 부재나 국가 폭력에 의해 일어난 참사는 더더욱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두 번 다시는 이런 비참하고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억한다는 것은, 불의에 대한 저항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오늘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바로 일 년 전인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날입니다. 159명의 생명이 참혹하게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
우리가 이 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사가 예견될 수 있었기에 국가가 주의를 기울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참사를 대하는 국가의 태도로 볼 때, 국가 부주의가 아닌 국가 부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주무 장관인 행정안전부 장관의 태도에서, 더 나아가 대통령의 태도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참사 이후 오늘까지도 단 한 번도 사과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법적 대책도 없습니다. 오직 참사가 정권 유지에 해가 될까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과연 이러한 국가와 정부의 태도에 하나님은 어떤 반응이실까요? 역시 9년 6개월 전인,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대하시는 반응과 같으셨습니다. “그들의 불의를 기억하고 있다!”
■ 오늘 우리는 두 곳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5장 1절과 요한계시록 18장 5절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당한 치욕을 기억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을 그 시작부터 과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고 기억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의를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소환하여 간구한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예언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의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만이 아니라 도시가, 그리고 정부와 국가가, 어떤 불의를 저질렀는지를 다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곳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이 불의를 얼마나 세세하게 기억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불의를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이 불의를 어떻게 다루실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그런데 이 심판을 위해 우리에게 준비시키시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선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길 원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듯,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타인에 대해 더이상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무공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 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개인의 선택에 의한 개인의 불행한 사고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참사를 개인의 책임이라며, 정부를 향한 항의를 멈추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공적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단순히 남의 일로 바라보는 피상성인 ‘연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내 생명으로서의 그/그녀(타인)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 해야 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2. 이렇게 공적 책임 아래 당장 해야 하는 행동 중 하나는, 책임 전가/책임 회피의 태도를 지적하고 회개시키는 일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해 주무 장관, 관계자들의 책임 전가/책임 회피 일변도의 태도를 회개시키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참사에 대해 모든 사람이 끝까지 질문하고 성찰할 수 있는 민주적 공론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로써 참사는 모두의 공동의 경험이 되고, 지적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참사의 목격자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위험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분법적 사고인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잉된 동일시인 ‘나는 너다’라는 태도입니다.
이에 민주적 공론장이 마련될 경우, 이러한 다른 두 가지의 거리감 있는 위험한 태도 사이에서 적절한 연결 공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나일 수도 있었다’라는 위험 공감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좀 더 이성적인 참사 규명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책임자 처벌, 그리고 사후 방지책 등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적 공론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왜곡과 부인과 조작을 일삼는 ‘기억의 정치’에 맞서는 방법입니다. 정치는 늘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과 기억을 왜곡하고 편집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억의 정치를 막고 맞서기 위해서는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이라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이는 기록 작업으로서, 개인의 기억이 아닌 집단의 기억으로 작업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기억의 정치를 이용해 온 부정의의 정치를 이기는 방법이 집단 기억의 기록 작업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동안 기억의 정치로 사건을 왜곡·조작·은폐하였던 국가와 그 국가의 명령에 움직이는 이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시키는 일입니다. 이러한 공론화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책무입니다.
3. 이렇게 기억의 정치에 맞서면서 공론장에서 펼쳐야 할 개념 싸움이 있습니다. ‘죽음을 세는 법’ 개념입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는 304명이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159명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하나의 참사로, 이태원 참사도 하나의 참사로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늘 그래왔던 입장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해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참사가 아닙니다. 희생자의 수만큼 일어난 참사입니다. 304건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고, 159건의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한 생명으로 여기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하나의 우주인 것입니다. 이에는 어떤 생명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참사 유가족은 우주가 붕괴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슬픔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더욱이 언어로도 존재하지 않는 슬픔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표현할 길이 없어 언어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슬픔이 없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안녕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에 기독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하나의 참사가 아닙니다. 희생자의 수만큼의 참사입니다. 304건의 세월호 참사, 159건의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으로서의 한 희생자, 한 참사의 유가족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세는 법’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세는 법’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앞장서서 공론화시켜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가 타자를 위한 곳이요, 세상과 더불어 사는 곳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공공적 영성 지수’입니다.
4. 그러나 법치국가에서 불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외침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외침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소위 ‘참사 방지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법 제정에 앞장서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로 읽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소망을 상실한 유가족으로 찾아오셨고, 참사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삶의 지표를 상실한 생존자로 찾아오셨고, 참사와 이 참사와 연관된 사건들을 겪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국민들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읽기는 슬픔을 만난 타인에게 ‘곁’이 되어주는 읽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난받는 자들의 곁에 있는다는 것은 단순한 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의 곁입니다. 이 대리행위는 단순한 연민이 아닌 연대(連帶)입니다. ‘그가 나’라는 동일시로서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는 함께 앞으로 나아감입니다.
이것의 대리행위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지난 9년 6개월 동안 내내 요구하고 있는 소위 ‘재발방지 안전대책을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데 함께 지지하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호소의 차원이 아닙니다.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이 주장한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을 지지하고 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링의 말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리는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 중요한 모든 법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법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쟁취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참여와 연대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라면, 투쟁과 참여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리를 되찾아 오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재발방지 안전대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정치’가 나서도록 압박하는 것은 거룩한 노동행위로 성경적입니다.
■ 여러분이 담임목사에게 연구할 수 있는 배려를 해 주셔서, 8년 6개월 전,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앞에 내놓은 논문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태도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반성-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전에 내놓은 논문이 『10·29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국가(정부)의 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기독교윤리적으로 일고(一考)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지난 10여년 간의 참사 연구를 통해 얻은 신앙적-신학적 깨달음은 분명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참사를 당한 이들의 슬픔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몫이 없는 자들, 몫이 없어진 자들의 슬픔에 공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 슬픔을 당한 이들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이들과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예레미야애가 5장 1절)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요한계시록 18장 5절)
바라기는, 신앙적-신학적 설명이 충분한 이 참여와 연대의 거룩한 노동에, 기꺼이 동참하는 비전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