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여기, 복음의 온도 생활성서 2022-08 p72-76
정치 김용태 대전교구 소속사제,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
“차라리 옷 벗고 정치나 하시지!”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알리고 그 아픔을 만들어내는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한 걸까? 처음에 저 말을 들었을 땐 답답하고 속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그동안 하도 많이 듣다보니 이젠 무덤덤하다. 오히려 요즘은 웃으면서 이렇게 응수한다. “옷 벗으라고요? 그거 성희롱인데!”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신부 때려치우고 정치나 하라’ 는 이 말 안에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몰이해’다. 전 세계 직업의 신뢰도를 조사해 보면 사람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직업으로 과학자, 의사, 교사 등 다양한 직종이 꼽히지만 가장 믿을 수 없는 직업으로는 언제나 공통적으로 정치인이 꼽힌다. 일부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실수, 부패, 무능 때문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 자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정치 없이 우리 세상이 돌아갈 수 있을까? 올바른 정치 없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 평화를 향한 효과적인 발전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모든 형제들 176항 참조)? 그럴 수없다. 이것이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란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스림’은 ‘다 살림’과 통한다. 모든 것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두루두루 다 잘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다스림이다. 다스림은 본래 하느님에게서 연유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 닮은 모습으로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게 온전히 살아가도록 사랑으로 가꾸고 돌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성서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낮아지고 섬기고 비우고 내어 주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들을 들어 높이기 위해 내려오시고, 채워주기 위해 비우시고, 살리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왕 예수님의 온 생애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필리 2,6-11 참조).
하느님은 이 다스림을 인간에게 위임하신다.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맡기신 이 다스림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생태와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두루두루 다 어우러져 잘 살아나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창세 1,26-31 참조). 당신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모습대로 다스리라는 말씀이다(마태 20,25-28 참조). 이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바로 정치다. 구약시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 안에서의 정치라는 것은 하느님이 위임하신 다스림의 직무에 성실히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등장한 왕이란 것도 실은 참된 왕이신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봉사하는 대리인에 불과했다(시편 72장 참조).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이루어지는 정치 역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정치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모든 이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봉사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정치에 대한 혐오와 몰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나쁜 정치란 결국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사라진 정치를 뜻한다. 이 나쁜 정치의 실체가 예수님께서 맞닥뜨리셨던 광야에서의 유혹에서 잘 드러난다. 악마는 말한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마태 4,9)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아닌 불의와 차별이라는 악한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유혹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신다. 예수님은 악마가 아니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절하심으로써 불의와 차별의 악이 아닌 섬김과 봉사의 선을 통해서 공정과 정의의 참된 다스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다스림에 우리를 초대하신다(요한 13,1-20 참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옛날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과 귀족들이 매번 걸려 넘어졌던 유혹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오늘날까지도 세상의 수많은 정치인과 정치공동체가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나쁜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의로운 정치인의 출현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를 몰아내고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공동체의 출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일반의 각성과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본질적으로 정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일이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다스림의 사명은 정치인이나 정치공동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다. 따라서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은 정치 즉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다양하게 참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누구보다도 더욱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해야 할 사명을 직접적으로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 표현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왜 정치가 타락하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정신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가? ‘그들 탓’으로 돌리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정치 참여는 의무입니다. 공동선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2013년, 예수회 학교에서) 정치라는 것이 이런 거라면 이 시대 우리는 모두 ‘옷 벗고 정치나’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손 걷어붙이고’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못마땅하다면... 교황님께 따져 보시라.
*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면 (아침공감편지 230215)
어떤 고통이나 비극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지만 위기의 나날이 끝나면 우리는 더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게 될 것입니다.
-멕사인 슈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