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만 쓰이는 참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시험에 들었다"는 말이 있지요.
교우 사이가 아니면 세상에서는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세상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삐졌다" "화났다" "빈정상했다" "소원해졌다" "불만이 있다" "믿음(신뢰)이 식었다" 등을 쓰지 않겠어요?
요즘에는 잘 쓰지도 않는 말이지만 가끔 들립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개가 시험에 들었나봐"라고 애둘러 표현하면
삐졌다. 화났다. 빈정상했다. 소원해졌다. 불만이 있다. 믿음이 식었다 등의 의미를
어느 정도 포함하면서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당사자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인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모호하게 쓰거나, "상처받았다" "실족했다"등으로 표현이 바꿔 쓰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하에서는 같은 의미의 용례로 "시험에 들었다"로 통일하겠습니다.
누구라도 본인을 가리켜 "시험에 들었다"는 말이 오가면 본래 기분이 나쁜 마음이 정상이지요.
그보다는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품게되면 참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아~~~주~~~ 은~근~히 이 말을 즐길 때가 있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시험에 들었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봐주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주기 바랄 때도 있어요.
안 그러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럴 때가 있더랍니다.
너무 간교한 마음인데,
1. 교우 간에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생겨도 내가 "시험에 들면" 은~근~히 그 사람 잘못으로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거든요.(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 속에서는 그렇게 간주하지요)
2.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풀어야 할 일을 의도적으로 은근히 무시하고 제쳐두기 편합니다.
3. 도저히 회개하고 싶지 않을 때 명분을 만들기 좋습니다.
4. 특별히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더 그렇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이나 부교역자 분들과의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순장님 등 리더십과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순장님들도 일종의 목자라고 생각합니다.)
리더십을 향해서 그분 때문에 자신이 시험에 든 것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원하고 티를 내고 뒤에서 말하고 다니면 리더들은 속이 썩어나겠지요. 주로 "서운하다" "상처받았다" "실족했다"등으로 말하고 다녀요.
그래도 목자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목양하려고 하시겠지만, 그분들도 인간이라서 속이 썩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어떤 때 보면 시험들었다고 자랑(?)하고 다니고, 자주 그러는 분(인간)들이 왕노릇을 해요.
세상에서도 안하는 짓을 교회에서 받아주니까 좋다고 수시로 하는 분(인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관계 다 끊어질 것입니다.
"저 인간은 걸핏하면 저래"
"저 인간 삐진 것 참 오래가네"
"저 인간 너무 자기 중심적이야"
"애도 아니고"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오냐오냐 해주니까 별의 별 것이 다 "시험거리"예요.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자신의 '시험거리'를 떠벌리고 다니는 분(인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전혀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데
신앙이 무슨 사춘기 소녀 감성 정도가 되는 것 처럼 여기는 마음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인간"에 대한 안 좋은 소리가 들리면 은연중에 퍼뜨리고 다니지요.
5. "시험에 든 성도"는 험담을 하고 다녀도 용서가 됩니다.(?)
다 남의 탓이고 특히 목자들 탓이거든요.
"나 상처받았거든!!"이라는 말을 앞이나 뒤에 붙이면 무슨 험담인들 험담 처럼 안 들리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요.
그리고 그게 또 먹힙니다.(?)
부끄럽게도 경험자(저)의 이야기 입니다.
6. 심각한 경우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 비방하는 구실로 삼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처음 부터 거듭난 적이 없는 '교회인'들 이라고 봅니다.
처음 부터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고 사람 바라보며 "교회 다니는" 분(인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천지에서 교회와 목사님들에게 불만이 많은 성도들을 A급으로 분류하여 집중 공략하는 추수 대상으로 삼은 점은
그들 입장에서는 탁월하고 유효적절한 선택이지요.
참고로, 신천지에서 교육장까지 하다가 회심한 신*욱 전도사님이 26세 나이로 담임 강사를 할 때, 시무하는 신천지 교회에서 꼬신 '교회인'들이 2000명이고 그중에 350명이 권사 장로님들이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물론 '시험'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test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험에 들었다"고 표현 할 때 거의 대부분은 교회 안의 관계에서 나오는 문제들이고
신앙과 별 상관 없는 '감정'과 '자기 의' 의 문제가 많고, 심지어 '정치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화의 과정중에 있는 분들이고
적지 않은 수의 '교회인'들은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비그리스도인 입니다.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한치의 양보도 하고 싶지 않은 단호한 입장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결국 "시험에 드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감기증상과 같아서
겉으로보기에는 다 이 증상을 겪는데 회복되는 사람이 있고, 알고보니 중병에 이미 걸려있는 경우도 있고
중병으로 번지는 경우까지 있다고 봅니다.
걸리기 전부터 면역력이 떨어진 것인지, 걸려서 면역력이 약해진 것인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2,3)
목자와의 관계를 파괴하고(4)
교우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1,5)
이게 다 뭐가 됩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파괴가 아닐까요?
헤어나오지 못하면 종국에는 자기도 죽이고, 교회도 죽이는 일꾼으로 부름받아 충성하게 됩니다.
어떤 일꾼들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며 진짜 어디든지 가서 날뜁니다.^^
"시험들어"나왔다는 분(인간)들이 다른 교회 가서 거기서 또 시험 안 드는 모습 보신 적 있습니까?
교회에서 어떠한 모습에 실망해서 나왔다는 분들이 교회 파괴의 선봉장들로 세워집니다. 누가 세웠을까요?
세상에서는 술 한잔으로 풀거나, 이런 분(인간)들을 왕따를 만들거나, 과도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공동체를 보호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냐오냐 하고만 가서는 "시험들기" 수석합격자가 좌지우지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인'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시험거리"를 피부로 가르쳐 그 영혼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는 역할을
교회에서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누군가 새신자를 시험에 들게 만들어 넘어지게 했다"고 하지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스스로 회개를 거부하고 회심하지 않을 명분을 찾은 것이지요.
부수적으로 선배들이 "시험거리"라는 변명을 몸소 가르쳐 자기부인을 철저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어찌할꼬 싶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취했던 길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원래"시험에 들었다"는 말의 의미는 서두에서 말씀드린 세상의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단순히 삐지고 화나고 불만이 있고 믿음이 식었다 정도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었다"는 말은 대단한 책망이고 군대식으로 표현하면 "군기가 빠졌다"와 가깝습니다.
당연히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라"는 듣기 싫은 말이 뒤이어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고,
누구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누구 때문에 실족했다고,
누구 때문에 엎어버려야겠다고 변명하는 바로 그 "때문에"를
하나님 앞에서 꺾어버리라는 무서운 질책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은근히 즐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요.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바꾸어 말하면 "상처받았어? 실족했어? 회개해"가 됩니다.
사람들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칭얼대고, 인정해달라고 하고, 교우들과 교회에 품은 불만 다 떠벌리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상태 그 자체를 병들었다고 정확하게 직시하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권징에서 '권'의 역할을 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징'이 나옵니다.'징'까지는 못해도 '권'은 해야 합니다.
감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요즘에는 어떤 목사님들은 '힐링'에 미친 성도들 등쌀에 못이기셨는지, "시험든 사람들 회개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렇게 했다가는 너나 잘하라며, 실족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한국교회 한국교회 목사들 목사들 하면서 거품물고 달려드는 분(인간)들 난리가 날 것입니다.
(사회넷에서 좋아하는) 분당의 모 교회 목사님, 참 귀한 분이신데, 그분 설교를 잘못 알아듣는 것이 뻔합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우리 같은 목사들 때문에 상처받은 성도들"(실제 설교) 이라고 말씀하시면 마음이 온유한 성도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하며 은혜를 받겠지요. 염소들은 자기와 상관 없는 말씀으로 들어요. 자기는 목사 아니니까. 그러면서 은혜롭다고 하겠지요. 이런 자칭 성도들은 목사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교회 내의 그 어떤 리더십이나 교우 상호간 관계에서도 안 봐도 뻔합니다. 본인들은 매끄럽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다른 교우들이 참아주는 것도 모르겠지요. 요즘에는 교회 안에서 시끄럽게 난리를 치는 분(인간)들이 스스로 다른 분들 보고 "참으라"고 권면까지 해요. 기본적인 인격의 상실입니다.
교회 안에 상처와 실족함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그 원인들이 꼭 당사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첫째되고 큰 원인이 자신의 영적인 병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시험에 들었다"는 (위로가 아닌) 책망을 들려줄 분들이 필요하고, 때로는 그런 말을 가감없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영혼을 살리는 길이고 힐링이지
덮어놓고 "에구구 상처 받았는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보듬어줄게" 따위의 임시처방을 하거나
소통을 한다는 정체불명의 잡설로 동조해주다가는 옆 사람들 까지 한꺼번에 수렁으로 빠집니다.
전염성이 무섭거든요.
맑은 물을 담은 병에 독극물 한방울이 떨어지면 독극물이 됩니다.
독극물을 담은 병에 맑은 물 한바가지 쏟아도 독극물 그대로 입니다.
독극물이 변하여 맑은 물이 되는 방법 외에 없습니다.
자기 신앙 지킬 줄을 아는 현명한 분들은 독성을 감지하면 최소한의 공감 조차 해주지 않습니다.
정확한 의미로 적절하게 "시험에 들었다"는 말을 사용할 때
또는 이러한 관점으로 조심스럽게 바라 볼 때
무조건적인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심령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고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지키고 나아가 아름답게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첫댓글 저도 이런 경험을 했었고 다른 분에게서 이런 경우를 느끼곤 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잘 짚어주셨네요.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살펴보고 무교병에 은근슬쩍 들어와 오염시키는 사람들을 주의해야겠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맑은 물을 담은 병에 독극물 한방울이 떨어지면 독극물이 됩니다.
독극물을 담은 병에 맑은 물 한바가지 쏟아도 독극물 그대로 입니다.
마음에 남는 글 입니다.
내 안에 있는 독극물... 성령님 씻어주소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믿음이 어릴 때 제 모습인것 같습니다~....시험에 들때 모든 것이 내 탓이요라고 하며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