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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훈] 심 훈 선생과 당진
[심 훈] 심 훈 선생과 당진 |
심 훈 선생과 당진
글, 사진 / 김경식
낭만적 그리움으로 가슴이 욱신거릴 때가 있다. 눈발이 날리거나 쌓여서 차량 통행을 걱정하는 방송이 시작될 때이다. 이런 날은 중학교 때 어느 겨울의 눈 내리던 날로 돌아간다. 고향의 미루나무 신작로가 눈으로 막혀 하루에 한 번 오던 버스도 오지 않던 날의 적막한 고향마을이 생각난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필경사
나는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소설 상록수를 읽었다.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의 사랑과 봉사정신의 의지들이 살아와 잠이 오지 않았다. 긴박한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였다. 창호지 문을 여니 새벽이 다가와 있었고 마당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상록수를 읽고 감동의 열기를 식힐 수 없어 대문을 열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고향의 고샅길을 걷기도 했다. 이후 많은 독서를 하였지만 이때와 같은 기분을 느낀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시기의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상록수를 떠올린다.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간혹 아파트 입구에서 중학생들을 만나곤 한다. 방학임에도 학원수업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그들이 어떤 공부를 하였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들이야 말로 역사성과 서정적인 문학성을 가슴에 품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학원에서는 아마도 경쟁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정답을 찾는 학습을 하였을 것이다. 오직 모범 정답 하나만을 인정하는 학습 풍토 속에서는 행복한 독서는 불가능하리라. 오히려 자녀들이 소설을 읽는 모습은 부모들을 불안하게 할지 모른다.
우리시대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한 권의 독서로도 이 시기는 그 가치를 평생 간직할 수 있음을 믿기에 안타까움이 크다. 특목고 진학에 간섭을 덜 받고 자란 기성세대들이 오히려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의 학생들은 자신의 실력과 집안의 경제적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진학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방학과 여유 시간이 있었기에 독서의 여력도 가능했다. 컴퓨터가 없었기에 독서할 수 있는 조건이 지금보다 오히려 좋았다. 과거에는 청소년기의 독서가 평생 동안 책을 벗하며 살 수 있는 재미를 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필경사 (농부가 농사일을 하듯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는 집)
아무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간혹 상록수를 밤새워 읽던 고향집에서의 그날 밤을 기억한다. 이런 인연으로 심훈이란 작가는 눈이 내리면 살아오는 작가가 되었다. 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지금의 서해대교 북단 쪽 바닷가에서 해안경계를 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 지역을 담당했던 소대장은 내가 시를 쓴다고 하니까 단박에 바다건너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의 한진 포구야, 심훈이 상록수를 쓴 필경사가 저 바다 끝에 있어.” 상록수에 관심을 가지고 말해주던 소대장은 당시 문학청년이었다.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그는 내게 ‘그날이오면’이란 시를 소개하기도 했다.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우리는 심훈을 소설가로 알고 있지만 시인이기도 하지.” 그날 밤 경계근무 중에 동료와 심훈선생의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 이라는 시에 관해서 나누던 이야기도 이제 세월이 되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상록수를 읽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적어도 70년대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치고 문학 소년과 소녀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렇게 문학을 지망하고 선망하면서 성인이 되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심훈이란 작가에 관해서는 상록수의 저자 정도로 알고 있다.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면 시인이라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당진에서의 삶과 1930년대의 시대상황을 알지 못하면, 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의 일생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격정적인 삶에 큰 매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품을 읽고 공감하면서도 그 작가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는 작가의 삶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리라.
서해대교가 개통되고서야 비로소 필경사를 찾아 갔다. 그때 비로소 그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필경사 주변의 상록수들은 그 푸르른 잎을 간직하며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상록수와 첫 인연을 가슴에 품고 살아 온지 30년이 지난 후였으며, 군대시절 바다 건너로 바라본 지 20년이 지난 후였다.
이렇듯 작가의 삶이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를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문학기행을 진행하면서 심훈 선생이 삶의 보금자리로 선택한 당진군의 부곡리를 가장 먼저 찾고 싶었다. 탐방 시기는 겨울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시기를 매 번 놓쳤고 홀연히 지나쳐 갔다.
서해안고속도로를 10여분 쯤 달리다 보니 산과 들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다.
산에는 소나무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활엽수 들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상록수인 소나무들은 유독 그 푸르른 색을 드러내고 있다. 눈이 만들어 놓은 순결하고 하얀 겨울풍경이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아름답다. 눈이 녹으면 이 광경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오래되면 진부함으로 변하기에 짧은 기간과 순간의 풍경들은 모두 소중하다. 다시는 연출할 수 없는 설경이 차창으로 스치며 멀어져 가고 있다.
'심재영 생가'가 보이는 솔숲
삼한사온을 망각하며 지속적으로 춥던 날씨도 풀리고 기상대의 예보와는 다르게 하늘이 맑고 푸르다. 불현듯 상록수란 노래가 듣고 싶다. 그러나 이 노래의 테이프를 준비하지 않고 떠나 왔다.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적으로 어둡던 70년대와 80년 중반기까지는 소위 운동권 가요라는 것이 있었다. 그 노래 가운데 상록수란 노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운동권 가요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노래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나면 가슴이 울렁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을 하고 가수 양희은이 불렀던 이 노래는 가사가 마음에 들어 자주 부르곤 했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라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이 노래는 1998년 봄과 여름동안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박세리의 골프 승리 장면과 함께 그 배경음악이 되기도 했다. 가수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는 공익 광고방송으로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많은 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 가사처럼 고난을 이기고 IMF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10년이 지나고 최근 다시 경제위기 속에 이 노랫말은 살아서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부곡리 야학터
논어에 "날씨가 추어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한 것처럼, 상록수는 겨울에도 그 잎을 푸르게 보전한다. 1930년대 일제의 칼날 같은 통치와 추위 속에서우리 민족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문학을 통해 민족을 각성시키고 농촌을 살리려고 실천하던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숭고하다. 그래서 이른 아침 당진 부곡리를 향해 이렇게 떠나고 있는 것이다.
심훈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의지와 같다고 칭찬했을 상록수 노랫말을 떠올리다 보니 서해대교가 보인다.
서해대교 근방에 다가서니 갓길에도 눈이 쌓여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서해대교를 건너니 당진 땅이다. 당진은 삼한시대(마한), 백제의 벌수지현을 거쳐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당나라와 교역이 매우 활발한 지역이다. 이때 이미 당진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지명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다가 1895년에는 당진군이 되었다. 당진군은 충남의 북부지방에 위치한다. 아산시와 평택시가 아산만 넘어 동쪽으로 경계다. 서쪽으로는 서산시와, 남쪽으로는 예산군과 인접한다. 바다건너 북쪽으로는 경기도 화성군이다. 석문방조제, 대호방조제의 건설로 인해 넓은 평야지대가 새로 형성이 되었으며, 최근 여러 곳의 공업지대가 조성되어 있다.
서해대교 남단을 지나면 이내 송악IC 이다. 필경사로 가기위해 38번국도 석문방조제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1차선은 제설작업이 되어있지 않다. 필경사 앞까지 약1.5km 가는데 길게 차량들이 늘어서 거북이의 걸음처럼 기어가고 있다. 619번 지방도로가 이어지는 지점에 신호등이 기다린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경사면으로 약 100m 쯤 오르면 삼거리다. ‘필경사’ 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1차선 도로를 따라 약 600M쯤을 가면 필경사다.
설날 하루 전날에 당진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10시간 이상이 걸렸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아직 도로가 곳곳에 당시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눈 더미가 쌓여 있다. 도로에서의 눈은 내릴 때와 내린 후 얼마간만 아름답다. 필경사로 가는 길은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차량의 운행이 쉽지 않다 . 반대편에서 차량이 오면 피할 곳이 없는 필경사 가는 길, 차량을 피하려고 하다가 눈길에 헛바퀴가 돈다.
한진 공단 길은 넓고 시원하게 바닷가까지 뚫려 있다. 그러나 필경사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오면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아직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매우 적다는 것을 반증하다. 그런대 이런 길이 오히려 더 정감이 간다. 폭설이 내린 소나무 숲길을 지나 필경사까지 심훈 선생을 생각하며 간다. 왼편으로 소나무 숲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심훈 선생이 이곳에서 상록수란 영감을 얻었는지 모를 정도로 소나무 숲이 푸르고 싱싱하다.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소나무 숲의 정경이 이채롭다. 이곳에서 언덕길을 따라 200m쯤 가면 왼쪽에 필경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필경사에 도착하니 마당에는 제설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다행이다. 눈이 다 치워져 있으면 오히려 서운할 뻔 했다.
필경사 전경
넓은 마당 왼편에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필경사가 서 있었다. 초가지붕이라 더 한층 정겨움과 포근함이 있어 보인다. 정면에는 심훈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할 수 있는 상록수문화관이 신식 한옥형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상록문화관에는 당진군청에서 파견된 공익근무 요원이 혼자 근무하고 있다.
필경사의 문이 잠겨있어 유리문으로 내부를 들여다 본다. 방과 마루가 당시 그대로의 모습처럼 보인다.
당진군은 93년 필경사 옆 뜰에 심훈의 ‘그날이 오면’ 시비를 세우고 건물 앞에 100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한 후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하고 심훈의 문학정신을 홍보하고 있다.
상록수문화관
그러나 다른 지역의 문학관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다. 심훈 선생의 자료들도 부족할 뿐 아니라 전시 형태도 엉성하다. 그러나 이런 전시관이라도 있으니 심훈 선생을 더 이해 할 수 있다. 약 15분간 심훈 선생의 영상을 관람한다.
특히 그가 3,1운동 때 만세운동으로 감옥에서 쓴 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당시 그는 경성제일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옥중에서 비밀리에 전달된 편지‘어머님께 올린 글월’이다. 이 옥중 편지가 그의 첫 작품이 된다.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가 읽어주는 옥중편지의 내용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기가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 1919년 심훈의 옥중편지 인용
고등학생이 쓴 편지답지 않게 감옥의 현장을 생동감과 민족적인 정서의 파도로 일렁이게 만든다. 이 육필 원고의 원본은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 이라는 마을에 있는 심훈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경사의 문이 닫혀 있어 공익요원에게 부탁하여 내부 공간을 탐방한다. 난로가 없고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와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신발을 벗게 되었지만,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실내화가 준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경사 집의 구조는 독특하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민도리 기둥을 세웠다. 집의 측면 중앙기둥을 중심으로 앞뒤로 나누어 공간을 만들었으며,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 다락이 있는 독특한 집의 구조다.
비록 초가집이지만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비교적 큰 규모다. 방에는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보관 상태가 불안하다. 분실의 염려도 있고 청결상태도 양호하지 않다.
심훈 선생의 아들이 자료의 보관 상태와 상록문화원의 관리 상태를 미덥지 않게 여겨 자료를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것 같다. 심훈 선생의 3남인 심재호씨는 필경문학관이 세워지면, 지금까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모든 부친의 자료를 기증하려는 의지를 가진 분이다. 그러나 기념관 건립이 지지부진하자 자료의 분실을 우려하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옮겨갔다.
심훈 선생의 각종 원고들을 도쿄대와 시카고대 등이 몇 차례 선생의 유고를 구입하겠다며, 백지수표를 심재호 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심재호 씨는 심훈 선생의 아들로 1936년에 이곳 필경사에서 태어나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1975년 해직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형 심재건씨는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결국 심훈 선생의 유품들과 원고들의 보관은 심재건 씨의 몫이었다. 이 원고들은 구입하려고 했던 대학에서는 그에게 충고까지 했다고 한다. 심훈 선생의 자료들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니 잘 보관하라는 권고였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는 선생의 시를 번역했으며, 선생의 원고는 이미 몇 나라에서는 세계적인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은 좀 다르다.
심훈 선생 묘소
심훈 선생의 묘소도 눈으로 덮여 있다. 선생의 유골은 용인과 안성을 거쳐 아들 심재호씨에 의해 이곳 필경사로 모셔왔다. 필경사 좌측 옆에 모셔진 선생의 작은 묘소는 눈으로 덮여있다. 맑고 순결한 그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셨으리라. 당진군에서는 이 작고 초라한 묘역을 조만간 좀 더 넓고 아름답게 단장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짧은 심훈 선생의 묘비명을 읽는다.
독립유공자, 작가
심훈(본명 대섭)
1910-1936
여기에 잠들다
대표작
1919년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1930년 시 "그날이 오면"
1935년 소설 "상록수"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필경사(筆耕舍)는 심훈(沈熏1901~1936 ) 선생이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살던 집 이름이다. 1932년 당진으로 내려 왔지만 자신의 집이 없이 종가댁에서 지내야 했다. 1934년 연재하기 시작한 직녀성의 원고료를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1935년에 이 집을 짓고 필경사라 이름을 지었다.
필경사(筆耕舍)란 집 이름은 그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그는 1930년에 "그날이 오면" 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발간하려 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간행되지 못한 시집 속에는 "필경" 이란 시의 제목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농부가 밭을 가는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는 뜻의 집 이름을 짓고 행동으로 실천한다.
필경사는 자신의 종가댁에서 약 200여m 떨어진 언덕위에 위치한다. 이 집이 불후의 명작 ‘상록수’의 산실이다. 부곡리의 낮은 언덕에 위치한 필경사는 ‘상록수’의 산실답게 대나무, 향나무, 측백나무 등 상록수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필경사 오른쪽에 서 있는 키 큰 향나무는 당시 심훈이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아산만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이 향나무는 심훈 선생을 기억한다는 듯 자신의 몸을 흔들고 있다.
이곳에 집터를 잡은 이야기가 재미있다.
심훈이 집지을 장소를 찾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애장품인 상아 파이프를 분실한다. 그는 부곡리의 여러 장소를 담뱃대를 찾기 위해 쏘다녔지만 찾지 못한다. 어렵게 필경사가 서 있는 장소에서 파이프를 찾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귀한 애장품을 다시 만난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도 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던 아산만의 바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곳이 자신과 인연이 될 터전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결국 이런 인연으로 이 장소에 필경사 세워지고 오늘에 이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인연이 되지만, 사람과 물건도 인연을 만들고 역사를 만든다.
그럼 왜 심훈 선생은 당진으로 오게 되었을까.
당시 서울에서 생활하던 심훈 선생의 삶에는 안식처와 어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날이 오면’ 시집 출간도 거절되고, 신문사 기자로, 경성방송국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지만 일제하의 민족적인 저항의식으로 그의 직장생활은 적응이 어려웠다. 이런 그에게 위안을 준 곳은 자신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왔으며,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마침 그의 조카인 심재영의 권유도 있어서 1932년 드디어 당진 부곡리 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 심재영은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 농촌계몽을 시작한 인텔리였다.
부곡리는 청송 심씨 안효공파의 세거지(世居地)이며, 심훈 직계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에 정착한 그는 열정적으로 동네에서 계몽운동을 하던 조카 심재영의 삶에 감동을 받는다. 1934년1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계몽운동을 하다가 숨진 최용신의 삶을 읽고 역시 감명을 받는다. 그녀는 경기도 반월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문맹을 깨우치기 위해 헌신하다가 사망하였다.
심훈의 문학비와 최용신 기념관 (안산)
이듬해 동아일보사가 창간 15주년기념사업으로 공모한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응모작품으로 그녀의 죽음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 남자 주인공이 필요했다. 이 모델의 남자 주인공을 자신의 조카 심재영으로 삼는다. 부곡리에서 2년 동안 활발하게 농촌계몽운동을 펴던 심재영이 주인공 박동혁에 어울리는 모델이 된다. 상록수는 필경사에서 1935년 5월5일부터 쓰기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26일에 완성한다. 원고지 1천5백매 분량을 불과 55일 만에 쓸 수 있었던 심훈의 창작열이 대단하다.
심재영의 헌신적인 부곡리에서의 봉사활동과 당시 경기도 반월에서 야학운동을 하다 죽은 최용신의 삶을 주제로 쓴 상록수는 실화 같은 소설이다.
당시 사회적으로도 러시아의 '브 나로드(v narod 농민 속으로) 운동'이 퍼지고 있었기에 이런 소설의 성공이 가능했을 것이다. 상록수의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름방학 때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한다. 이들은 oo일보사에서 주최한 농촌계몽운동보고회 겸 위로회 장소에서 만난다. 박동혁은 고등농림 학생이며, 채영신은 신학교 학생이다. 박동혁의 보고연설은 참여한 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특히 채영신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런 동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다. 어느 토요간담회 자리에서 박동혁과 채영신은 재회하게 된다. 이 만남을 계기로 박동혁은 한곡리로, 채영신은 청석골로 가서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한곡리는 당진의 한진리와 부곡리에서 한 자씩 따왔다.
소설 상록수에는 이런 한곡리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동네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호수(號數)가 구십사 호인데, 농업이 칠 할 어업이 이 할이요, 토기업(土器業)이 일 할이라는 것과, 인구가 사백육십여 명에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 팔 할 이상이나 점령한 것을 삼 년 동안을 두고 여름과 겨울방학에 중년 이하로 여자들과 육칠 세 이상의 아동을 모아 놓고 한글을 깨쳐 주고 간단한 셈수를 가르쳐 준 것이 이백사십칠 명에 달하는데, 그곳 보통학교 출신들의 조력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자,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 심훈의 소설 상록수 중에서
얼마 후에 한곡리에서 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박동혁에게 채영신이 찾아온다. 영신은 일주일간 한곡리에서 머물다가 떠난다. 이 만남을 계기로 둘은 3년 후에 결혼하자는 약속을 한다. 이후 그들은 농촌운동과 결혼의 선택으로 그들은 갈등한다. 이 갈등을 잊기 위해 더욱 열심히 농촌운동에 전력한다. 박동혁은 한곡리에서 이런 저런 사업을 진행하며, 20평의 농우회 회관까지 건립한다.
박동혁은 한곡리에서 자신이 진행하고 있었던 계몽운동 상황을 상록수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 아프리카의 그 어디보다도 그 환경이 열악함을 알 수 있다.
"우리 고향은 워낙 원시부락과 같은 농어촌이 돼서, 무지한 부형들의 이해가 전연 없는데다가, 관변의 간섭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별짓을 다해 가면서 억지로 시작을 했었지요. 첫해에는 아이들을 잔뜩 모아는 놨어도 가르칠 장소가 없어서 큰 은행나무 밑에다 널판대기에 먹칠을 한 걸 칠판이라고 기대어 놓고 공석이나 가마니를 깔고는 밤 깊도록 이슬을 맞아 가면서 가르치기를 시작했었는데, 마침 장마 때라 비가 자꾸만 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헐 수 없이 움을 팠에요. 나흘 동안이나 장정 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한 대여섯 간통이나 파구서 밀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덮고, 그 속에 들어가서 진땀을 흘리며 '가갸거겨'를 가르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은 밤새도록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까 교실 속에 빗물이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고였는데, 송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책상 걸상이 둥실둥실 떠다니는군요."
- 심훈의 소설 상록수 중에서 인용
이런 박동혁의 진보적인 농촌활동에 대해서 지주의 아들인 강기천은 달갑지 않게 여긴다. 강기천은 농우회관을 당국이 권장하는 농촌진흥회 회관으로 바꾸기 위한 모략을 한다. 박동혁은 이런 강기천의 수작을 알아내고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기독교 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으로 청석골로 간 채영신은 어린이를 위한 강습소를 마을의 예배당을 빌려 운영한다.
한편 채영신이 발기한 청석학원의 낙성식에 박동혁이 초대된다. 박동혁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농촌계몽사업에 관해서 냉정하게 반성한다. 채영신은 뜻 있는 사람들로 부터 기부금을 받아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날 주재소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소장은 강습소가 좁고 낡았으니 학생을 80명만 받고 그 누구에게도 기부금을 강요하지 말라는 억압적인 이야기를 영신에게 한다. 강습소로 돌아온 채영신의 마음은 무겁고 억울한 마음이 일렁거렸다. 정원 80명이 넘었기 때문에 잉여 학생들을 강제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울면서 강습소를 떠난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머리를 내밀고 담에 매달리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공부하는 교실을 지켜보고 있다. 채영신은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모고 감동을 받는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교실을 지어야 한다는 일념에 불탄다. 약속한 기부금 후원자에게 50원을 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기부금 강요혐의로 감옥생활을 한다. 출소한 채영신은 과로로 쓰러지고, 이 소식을 들은 동혁은 청석골로 가서 영신을 입원시킨다.
동혁이가 청석골로 떠나간 후 강기천은 한곡리 농우회에서 자신의 추종자를 동원하여 농우회의 회장이 된다. 강기천의 의지로 농우회 회관은 결국 진흥회의 회관이 되어 버렸다.
이에 박동혁의 여동생 동화는 진흥회관에 방화를 하려다가 발각된다. 이 사건으로 동화와 동혁이 구속된다. 이번에는 영신이 동혁을 면회한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농촌운동을 투신하기로 약속한다. 기독교계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채영신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박동혁은 그녀를 장사지내고 돌아오며 오직 농민들과 함께 살 것을 다짐한다.
박동혁은 채영신의 죽음에 절망하였지만 동네 상록수를 보고 용기를 얻는다. 이 장면을 상록수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상록수의 마지막 끝 부분이다.
“동혁이가 동리 어귀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던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패다 심은 상록수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는 듯.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허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동혁은 졸지에 안계가 시원해졌다. 고향의 산천이 새삼스러이 아름다워 보여서 높은 묏부리에서부터 골짜구니까지, 산허리를 한바탕 떼굴떼굴 굴러 보고 싶었다.
--중략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 심훈의 상록수 중에서 인용
필경사 (심훈 선생 책상)
심훈 선생은 암울하던 1930년대 우리 농촌의 현실을 철저한 사실주의로 민족문학에 공헌한 작가다.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적 자각과 조국이 일제에 의해 능멸당하는 상황을 대립시켜 팽팽한 긴장관계로 만들 줄 알았던 민족작가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작품의 장소가 된 부곡리 일대 그의 유적지를 찾는 일은 의미 있다.
소설가, 시인, 영화인 독립운동가인 심 훈 (1901.9.12~1936.9.16) 선생은 서울 지금의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대섭(大燮), 호가 해풍(海風)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다. 이런 조혼은 당시 우리의 풍습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6개월 투옥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한다. 학교는 퇴학당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직업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없었다.
이 때 그가 선택한 길은 중국 망명이었다. 1920년 어느날 중국으로 남몰래 떠난다.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 귀국한다. 이 무렵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극문회’라는 염군사의 산하단체를 조직한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이해영과 이혼한다.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 출연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문학적으로는 카프(KAPF)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다. 이 작품이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다. 시련이 닥친다. '철필구락부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 당한다. 이 때 함께 해직 된 사람이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 등이다.
철필구락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사회부 기자들이 1926 일제의 민족언론탄압에 항거하여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단체다.
심훈 선생은 자신의 처지가 미약할 때는 늘 미래를 준비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마음고생을 하던 심훈은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먼동이 틀 때’ 제목의 영화를 만든다.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직접 감독을 맡아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이 영화에 대해 임화와 한설야에게 계급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가 다시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해는 1928년이다. 기자로 입사해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의 평론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한다. 이듬해 조선일보사에 사직을 하고 일 년 이상을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찾아든 곳이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이곳 부곡리는 심훈이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출발한 장소다. 1932년에 이곳으로 낙향한 그는 영원의미소(1933)와 ‘직녀성’(1934)을 발표한다. 결국 이 마을은 그가 제대로 딘 소설들을 창작한 문학의 고향이다.
승용차를 상록교회에 주차하고 심재영씨 댁을 찾아 나선다. 부곡교회의 이름을 이제 상록교회로 바꾸었다. 버스로 문학기행을 하게 되면 이 교회에 주차를 할 수 없다.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 된 심재영씨의 집은 솔밭 밑에 ㅁ 자 형태의 집이다. 사랑채가 밖으로 나있어 집의 운치를 더한다. 눈이 내려서 녹아가기 때문에 조심해서 걸어 내려간다.
심재영 선생 사랑채
대문은 열려있고 인기척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심훈 선생의 조카이며 박동혁의 모델이었던 심재영씨는 1995년 세상을 떠났다. 홀로 사모님이 집을 지키고 계신다고 하는 데 인기척이 없는 것이다. 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 솔밭에 있는 심훈 선생의 문학비를 찾아 솔숲을 걷는다. 몇 사람이 밟고 간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가 유년의 고향생각을 하게 한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인기척은 없다.
이제 ‘그 날이 오면’의 시비가 있는 상록초등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학교는 상록교회에서 지척이다. 상록초등학교는 심훈의 상록수와 직접 인연이 있는 학교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가 포함된 시집을 출간 하려고 하였지만 일경의 탄압과 검열로 좌절된다. 이별한 아내 이해영을 그린 ‘직녀성’의 원고료를 받아 부곡리에 필경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필경사에서 그는 자식 없이 이혼한 첫 부인 이해영을 기억하며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필경사에서 쓴 원고인 상록수가 당선되자 그 상금 전액을 기부하여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이 학원이 지금 상록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상록초등학교는 심훈 선생의 종손댁(심재영씨 댁)에서 걸어서도 잠깐이다.
학교로 가는 외길, 눈길을 간다. 열린 교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서니 운동장은 눈이 가득하다. 발자국이 없는 것을 보니 아이들은 아직 방학 중이다. 교가가 새겨진 기념비 아래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의 시비가 서 있다.
이 학교의 교가 가사를 심재영씨가 지었으니 상록수와 인연은 대단하다.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을 읽는다.
‘그날이 오면’이란 시는 1930년대의 일제 통치기간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제격이다.
3,1운동이 끝난 후 10년이 지났지만 독립은 더욱 멀어져 가던 시기가 아닌가.
이런 절망의 언덕에서 그는 절규하면서 펜을 들었던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시비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전문
상록초등학교
이 시는 영국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역저 ‘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함께 뛰어난 시로 평가 받았다.
이 시에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향한 간절한 절규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미 조국이 해방되고도 60년이 넘었으며, 자유는 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가. 그런데 우리들은 결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질만능에 오염된 정신과 육신이 아름답고 행복한 자유를 자신 안에 가두고 스스로 감옥생활을 하게 만든다. 다가오지 않을 걱정을 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오늘의 행복한 삶을 내일로 미루며 살고 있다. 문학기행을 진행하다 보면 “왜 진작 이곳을 오지 못했는지 정말 속상하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주어진 삶속에서 현실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네 현실적인 삶은 각자의 자유를 가슴속에 가두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훈의 이 시 한 편은 독립된 자유의 국가에서 살고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 이외에 다른 행복조건을 따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는 그 만큼 피와 땀과 눈물을 섞은 호소이며, 자유의 선언문이다.
자유가 있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을 활짝 열고 행복의 문을 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심훈 선생이 찾아가던 한진포구를 찾아 떠난다. 이곳은 상록수에서 채영신을 마중하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마중을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한진포구는 부곡리에서 승용차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부곡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빤히 보인다. 그런대 이곳은 부곡공단이 거의 모든 땅을 차지했다. 한진포구의 역사는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침체해 있다가 최근 주변에 부곡공단이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분위기다.
p회집에서 대구탕을 주문하고 썰물로 빠진 바다를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서해대교와 평택항이 건너다보인다. 서해대교의 건설로 사람을 태우는 배는 사라지고 고깃배 몇 척이 부둣가에 겨우 정착해 있을 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다물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출렁이면서 밀고 들어가 만든 지역이다. 당연히 바다에 닿아있는 곳에는 포구가 있었고 이곳에서 배를 띄었으며, 먼 바다까지 갈 수 있었다. 내포평야의 곡식들은 이 바다를 통해 한양을 비롯하여 각 지방으로 쉽게 운반이 용이했다. 이제 이 아산만을 거슬러 올라가는 38번 국도를 타고 삽교방조제 근방을 스치며 솔뫼성지를 찾아 가려고 한다. 바다에 인접한 부곡공단 앞길은 눈이 쌓여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 동상)
38번 국도로 나오니 제설작업이 되어있다. 송악IC를 지나 잘 뚫린 4차선도로를 달린다. 음섬포구와 맷돌포구를 지나 15분쯤을 달리면 왼쪽으로 삽교방조제로 이어진다. 솔뫼성지 방향은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34번 국도로 갈아 타야한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그 날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총살을 당한다. 30년이 지났다. 가난한 국가를 부흥시키기 위한 그의 경제업적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역사적인 평가는 그래서 30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34번 국도에서 솔뫼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622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한다. 이곳에서부터 솔뫼성지에 이르기까지 호남평야처럼 넓은 내포의 들이 펼쳐진다. 내포 들녘은 어린 김대건 신부가 자신의 가족들과 더불어 고향을 등지며 걷던 들녘이다. 눈이 내린 평야는 평화롭다. 그러나 이 땅에는 또 얼마나 많은 소작인들의 눈물과 한숨이 섞여 있겠는가. 이런저런 사연들을 숨기고 저렇게 땅은 아무소리 없이 침묵을 지키며 겨울을 나고 있다. 국도변에는 간혹 ‘솔뫼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 이라는 뜻이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높이로도 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솔뫼성지의 주소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다.
김대건 신부 생가
김대건(金大建1821~1846)신부는 이곳 솔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세례명이 ‘안드레아’이다.
1836년 프랑스 출신 모방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된다.
한양에서 역관인 유진길(劉進吉, 1791~1839)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16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떠난다. 유진길은 엥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다.
김대건은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부에서 서양의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운다. 그의 스승이 칼레리 신부이다. 김대건은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1842년 수업을 마치고 고국에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한다. 당시 조선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대단할 때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아니었으면 당시 천주교의 선교는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파리외방전교회란 단체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아시아의 선교를 목적으로 1653년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한다. 이 본부를 프랑스 파리에 두었다. 가톨릭 선교를 위해 창설한 이 단체는 중국 일본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그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선교방법을 취하게 하였다.
1831년 브뤼에르 주교가 처음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오던 중에 1831년 사망한 이후 앵베르, 샤스탕, 모방 신부 등이 파견되어 순교와 박해의 고난을 겪기도 한다. 이들의 헌신적인 선교와 순교의 피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형성했다.
페레올 주교는 신학생 김대건에게 조선에 잠입하라고 분부한다. 1845년 1월 입국에 성공한 후 약화된 조선 교세 확장을 만회하려고 노력한다. 프랑스 외방전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쪽배를 이용하여 상해로 가야했다. 이배에는 사공을 포함하여 농사꾼과 목수로 구성된 11명이 타고 있었는데, 가마니로 만든 돛을 달고 가다 상해 인근에서 조난을 당하기도 한다. 배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물을 퍼내면서 항해를 계속하였다는 이 조각배의 이름은 ‘라파엘로호’다. 이런 배에서 극적으로 구조되어 상해에 도착한다. 예수 당시에 바울의 선교 활동 같은 항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런 김대건 신부의 신앙심과 용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비로소 중국 금가항신학교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다. 같은 해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1818~1866) 주교와 함께 상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비밀 항로의 개척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순교 당한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시신은 경기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미리내)에 안장되었다가 몇 곳으로 나누어 안치중이다. 그는 1984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聖人位)에 올렸다.
솔뫼성지에는 눈이 온 터라 온통 백색이다.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 성지 초입 왼편에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다.
이집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l816년 순교),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태어나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한다.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 김택현이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천주교 박해 때문이었다.
김대건신부 기념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1739~1814)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면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이존창李存昌, 1752~1801)에게 천주교의 복음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교인이 된다. 이존창은 권철신의 제자로 이곳 내포지방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전도를 많이한 사람이다. 1795년 체포되어 6년간 연금되었다가 공주에서 참수당한 순교자이다. 한편 김진후 역시 180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10년 이상의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에 감옥에서 순교한다.
이때부터 솔뫼는 천주교 마을이 된다. 천주교의 박해는 진산사건으로 촉발한다. 천주교의 교리는 유교적인 제사문제를 심하게 건드렸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지면서 크게 확산된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당파가 만들어 진다. 조정의 실권은 남인계열이 잡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누어지면서 대립한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본래 대저택이었다고 하는데 안채만 복원한 상태다. 한옥이 정결하고 깔끔하다.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건당’이라는 당호를 읽는다. 우물과 담 너머로 보이는 솔숲이 평화롭다. 눈이 내린 솔뫼성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고 밝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밝음 속에는 슬픔과 절망의 흔적들이 스멀거린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재산과 벼슬을 버리고 순교한 김대건 신부 조상들의 삶 때문이다. 그렇기에 슬프지만 감동이 되어 가슴이 일렁인다.
김대건 할아버지 김태현은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 손자 김대건을 비롯한 식솔들과 함께 이곳을 떠났던 1827년 무렵의 조선은 천주교인에게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용인으로 이주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1796~1839)은 선교에 열성을 보이며 아들을 사제로 만들 결심을 한다.
그 자신은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부수업을 받고 있던 기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김대건은 1845년 8월17일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로 서품되어 그해 10월 귀국한다. 용인 일대에서 사목을 하면서 모친을 잠시 만난 후에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한다. 증조부에서 시작된 그의 집안의 순교는 김대건 신부를 포함하여 30년간 4대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 세계에도 그 유례가 없는 순교의 역사다. 지금 솔뫼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상들때 이미 자라던 늙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솔뫼성지'의 솔숲
이 소나무 숲에는 한복차림을 한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순례자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니어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천주교는 이 순교의 피로 성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나무 숲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천천히 거닐면서 우리나라의 천주교 역사와 순교한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절감하게 될 것이다.
악명 높던 천주교 박해국인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는 프랑스인 ‘모방’이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자 파리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예비 성직자를 모집한다.
이들은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이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마카오로 보낸다. 3년 9개월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1839년 9월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같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다.
군문효수(軍門梟首)는 당시 조선에서 죄인을 군율(軍律)에 따라 목을 베어 시신을 군문에 매달던 잔인한 형벌이었다.
눈이 쌓인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자신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 중국어를 가르쳐준 유진길, 아버지의 김제준, 등의 죽음에 절망했을 김대건 신부의 슬픔 마음을 상상하면서 걷는다. 김대건 신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솔뫼성지의 순례는 감동이 되지 못하리라.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은 불이 꺼져 있다. 관계자에게 부탁하여 겨우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었다. 33억원을 들여 건립하였다는 김대건신부기념관은 절전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솔뫼성지의 인근에는 유서깊은 합덕성당과 볼만한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 있지만 방문을 다음 기회로 미룬다.
솔뫼성지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성지가 아니겠는가.
이제 멀리 왜목마을과 대호방조제 넘어서 도비도를 향해 떠나야 한다.
솔뫼성지에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당진군을 가로질러 한 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하는 곳이다. 같은 당진군이지만 남동쪽 끝에서 북서쪽의 끝이 아닌가. 당진의 남서쪽에 위치한 안국사지는 탐방할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깝게 도비도 가는 길의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불상과 탑은 역사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 정미면 수당리 봉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안국사지의 석불입상은 충주 미륵리 미륵불상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의 높이는 5m이며, 석탑과 함께 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
왜목마을 바닷가
왜목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당진읍으로 진입하지 않고 당진종합운동장 방향으로 가는 길이 덜 막힌다. 가는 길에 영랑사란 사찰이 있다. 수덕사의 말사지만 역사 깊은 사찰이다. 백제위덕왕( 564년) 때 창건되었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827∼898)국사가 중창하고, 1091년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한 사찰이니 그 역사성은 대단하다.
왜목마을을 향해서 달린다. 길은 아산과 서산으로 이어지는 32번 국도를 타고 당진읍까지 가서 615번 지방도로를 타고가면 석문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왜목마을이 기다린다. 왜목마을이 가까워지면 당진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운반하는 고압선들이 하늘을 타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당진화력발전소 입구 약 500m 전방의 동인장 여관 앞에서 우회전 하면, 이내 왜목마을의 주차장에 닿는다. 왜가리의 목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왜목마을’에 닿는다. 이곳 바닷가에는 붉은 자갈이 깔려있다.
그 붉고 멋진 자갈을 밟고 바닷가를 걸으면서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 이곳이 동해바다로 착각하게 된다.
이 마을입구에 이근배 시인의 시비 ‘왜목마을에 해가 뜬다’가 서 있다.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은 해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서해안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당진출신 이근배 시인은 이 고장을 위해 서정정이 돋보이는 시를 썼다. 왜목마을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그의 시 ‘왜목마을에 해가 뜬다’라는 시비를 읽는다.
내 나라의 해는 모두
여기 와서 뜨고
여기 와서 진다.
하늘이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해를 빚어 올린
고운 아침의 나라
바다가 금빛 물살로
가슴을 활짝 열고
산이 푸른 이마로
오색구름 피워 올리는 곳
여기 왜목마을에 와서
백두대간의 해는 뜨고 진다.
저, 백제 신라의 찬란한 문화
뱃길 열어 꽃피우던 당진
역사 일으킨 큰 자취 숨결 높고
두루미떼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
땅 기름지고 물 향기로운 내 고장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우리들의 사랑 눈 시리게
-- 이근배 시인 시‘ 왜목마을에 해가 뜬다’ 중 일부
도비도에서
해가 서녁으로 뉘엿거리고 있다. 도비도로 가기위해 대호방조제를 넘는다.
원래 섬이었는데 대호방조제로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농어촌휴양단지로 개발하였지만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도비도의 해안을 이어진 산책길에서 만난 서해안의 일몰은
아름답다. 이런 일몰을 두고 다시 심훈의 고향 송악면 부곡리로 향해 달린다.
대호방조제를 넘고 장고항포구를 스치며 달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석문방조제에 잠시 내려 바다와 긴 제방을 본다. 해는 이제 먼 산을 넘어가고 있다. 이내 어둠이 내리고
다시 부곡리로 돌아왔다. 솔숲으로 내려가 심훈 선생의 종손댁인 심재영씨 댁을 찾아간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다. 결국 심재영씨 사모님을 만나지 못하고 부곡리를 떠난다.
도비도 해변산책길
어둠속 솔 숲길을 걸어 나오며 질척이는 눈을 밟는다. 시골의 밤은 조용하고 캄캄하다.
심훈의 ‘밤’이라는 시가 있는데 지금의 부곡리가 분위기와 흡사하다.
밤, 깊은 밤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아아, 기나긴 겨울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아침에 당진에 도착하였을 때, 온통 눈으로 덮인 모습이 유년시절의 고향의 산과 들녘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발 치던 왕복 20리 통학길의 추억이 아련하다. 어머니의 따뜻한 마중과 화롯불에 끓고 있던 된장국의 추억도 아른거린다.
우리국토의 여러 곳을 기행하다 보면 간혹 어떤 곳은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곳에 역사가 있고 문학적인 이야기들이 수런거리는 곳이면, 몇 달이고 몇 날이고 머물면서 당시의 역사와 작품의 무대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진도 그랬다. 심훈 선생의 삶과 문학, 김대건 신부의 삶과 신앙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심훈 선생과 당진’ 기행에서 얻어 가는 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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