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에 큰 아들 집에서 느낀 일이다.
큰 아들이래야 아내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 낳았고 쌍동이 제 동생보다 2분 먼저 나온 정도이니, 정상적인 분만과정을 거쳤다면 그 아이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그의 출생서열이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광산김씨 문중에서 5대째 장손이 되며 또 그의 첫 아들이 또한 그 영광(?)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숨길 수 없는 나의 못남 가운데 하나는 가족얘기만 나오면 좌우에 보이는 것이 없이 좋아하고 떠들어대는 습관인데 이는 마치 다리 저는 사람이 그 걸음걸이를 숨기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시세말로 '그저 구제불능'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교동문 웹싸이트인 <부고USA>를 통하여 나와 가까이 교제하는 동문들도 거의 대부분 같은 결함이 있어서 나의 어리석음이 자주 감추어지는 형편이다. (이 취향에 관해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반성한 뒤에 언제 한 번 새로 글을 쓸 계획이다.)
자식 셋 가운데 숫자로는 3분의 2이고 또 앞에 말한 것처럼 그들중의 하나가 5대 장손이 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긴 했어도, 아홉 살 더 먹은 제 누나를 금이야 옥이야 기르느라고 힘을 많이 썼던 차에 낳은 아이들이라서 그랬는지, 혹은 사내 아이들이니 사내답게(?) 기르고 싶다는 잠재의식 때문이었는지, 여하튼 우리 쌍동이들은 방목하는 가축처럼 놓아 길렀다.
그렇게 막 자란 아이들이니 그들이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저 아이들이 언제나 성숙해지겠는가'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돈이야 몇 푼 벌겠지만 저희들도 가정을 꾸며가려면 앞으로 쓸 데가 워낙 많아서, 아직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행사에서 내가 경비를 충당하는 형편이라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이제 13개월된 장손 순익이와 할아버지가 단 둘이서 조촐하게 식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 아비가 턱받이를 목에 걸쳐주고 밥을 가져다주니 숟가락을 움켜쥐고 마치 눈 치우는 사람 삽질 하듯 퍼서 제 입으로 가져가는데 그만 겨냥을 잘못해서 볼 옆에 부딪치는 바람에 밥이 다 엎질러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번번히 같은 사고가 계속되니 이따금 숟갈이 입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밥을 다 쏟고난 뒤라서 빈 숟갈만 빨아댄다.
손자는 그렇듯 헛손질만 하는데 할애비가 꾸역꾸역 먹는 것도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더군다나 아이가 배고플 생각을 하니 더 두고만 볼 수는 없어서 밥을 먹다 말고 아이 곁으로 가서 대신 먹일 참이었다.
아이에게 숟갈을 달라 하려고 마악 손을 뻗치는데
"그냥 놔 두세요. 그러다가 숟갈 쓰는 법을 배우겠으니까요."
아들의 말을 들으니 퍼뜩 이런 생각이 든다
'네가 맞다. 자식을 제법 잘 기르는구나.'
가르치지 않은 일을 스스로 알아낸 아들이 대견스러워 기분이 퍽 상쾌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날 사위와 주고 받던 대화가 마음에 떠올랐다.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에만 넣어두었던 일이다.
오륙년전 어느 날 딸네 집에 가서 식사후에 온 가족이 함께 다과를 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외손자 순재가 지금의 손자 순익이처럼 돌을 갓 넘었을 때인데, 이 아이가 뒤뚱거리며 걷다가 쏘파 위로 기어오르는데 성공을 못하고 자꾸 미끌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마음을 빼앗긴 채 아이의 거동을 전혀 모르는지라, 할 수 없이 내가 일어나서 아이를 들어올려 주려고 가까이 갔을 때였다.
"그냥 놔 두시지요. 그러다가 올라가는 법을 배울테니까요."
사위의 차분한 음성이 내 귀를 거슬린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정한 놈! 자식을 무지스럽게 기르는구나.'
장인이 되어서 그만한 일로 속 좁게 삐쳐봐야 내 딸에게 손해라 느껴져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 때 그 일 후로는 사위에게 정이 뚝 떨어졌다. 그 뒤에 눈을 밝히고 사위의 언행을 살펴보니 되지 못하여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모든 것이 이번 일로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건에서 아들은 좋게 보였는데 사위는 왜 밉게 보였을까? 아들이나 사위나 제 자식 훈련시키는 정성은 똑같았는데, 그럼 내가...?
"숨길 수 없는 나의 못남 가운데 하나는..."
앞에 이미 고백하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잘 한 것 같다.
거기에다 더 보태서 지금 새로 고백한다면
"숨길 수 없는 나의 못남은... 나의 지식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혼자 말을 주고 받으며 깨닫고나니 오륙년 지나 뒤늦게 철든 장인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
"사위, 미안하네!"
첫댓글 박연우, 김현숙, 권철혜, 이창흥, 이대경, 황대우, 최명상 등 여러 14회 선배님들의 글을 모셔다가 <부고USA> 동문과 가족들에게 소개를 하면서 자주 '글 빚'을 져왔기에, 오늘은 큰 맘 먹고 저 자신을 소개도 할겸 서투른 글을 한 편 써서 올립니다.
평소에 <부고USA>에 대한 14회 선배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은 시행착오 끝에 옳바른 방법을 터득한다지만 할아비 마음이야 어디 그런가요? 옆에서 보기에 안스러우니까 자꾸보살펴 주려고 하는데, 역시 사위, 아들의 생각이 옳은 거지요. 사위도 아들도 참 잘 두셨네요.사위, 아들 자랑, 마음껏 한번 해보시라구요.ㅎㅎ
박연우 선배님,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박 선배님의 글을 즐기시는 <부고USA> 독자 선후배님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시도록 ID 와 Password 를 정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메일로 연락을 주십시오. revho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