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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신학’ 계통에 포함되는 테마들 가운데서도 원자력은 과학기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기에 앞서 ‘과학기술신학’ 계통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과 성서’의 요점을 먼저 확인해두고 싶다(2022년 6월호 참고).
과학기술은 인간의 본질에 해당한다. 창세기 1-2장을 P자료와 J자료로 구분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로 읽어본다면, 1장의 “지배(하라)”라는 말을 통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과제는 2장에서 “경작하기”(기술)나 “이름짓기”(과학)로 구체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 원초적인 과학기술은 3장에서 ‘지혜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적 관점에서 본 과학기술의 기본 성격은 ‘선악의 양의성(両義性)’, 즉 창조의 선성(善性)과 원죄성으로 요약된다. 이는 과학기술이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우상)’를 지향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과학 영역에서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이야기되는 현상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자력은 과학기술의 양의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현대 과학기술을 신학적으로 질문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전형적 사례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과학기술신학’ 계통의 일반적 특징을 다루었기에 ‘원자력 신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원자력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체적 맥락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맥 속에서
일본 신학자 모리모토 안리(森本あんり, 국제기독교대학 명예교수, 현 도쿄 여자 대학 학장)는 아시아 신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토착화되기 전의 순수 기독교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일본에 토착화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토착화되었으며 유럽에서 토착화되었고,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토착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아시아 신학자들을 오늘날의 문맥화(文脈化) 속으로 안내하는 내적 동기가 되고 있다. (모리모토 안리, 《아시아 신학 강의 ― 글로벌화하는 콘텍스트의 신학》)
이러한 인식은 과학기술신학에도 해당한다. 과학기술은 근대 이후의 세계를 규정하는 글로벌한 존재이지만, 문제시될 경우 구체적인 모습은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단지 글로벌하다는 점만으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해외의 국가나 기업이 원전으로부터 발을 빼고 있음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이 정책을 변경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해외에 더욱 적극적으로 원전을 전파하려는 모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이런 원전에 대한 집착이 도시바 같은 일본 기업의 근간을 흔들었던 사실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일본의 문맥상은 독일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맨 앞에 소개한 인용문에서 구리바야시가 말했듯이, 일본 기독교(교회, 신학) 대부분이 원자력발전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한 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이다. 그동안 이러한 인식이 부재했던 상황 배후에는 일본의 ‘원자력 무라(마을, 村)’가 강고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즉 원자력을 둘러싼 산·학·관(산업계-학계-관료계)의 특정 관계자로 구성된 사회집단(=원전 카르텔 ― 역자 주)이 일본의 원전 정책을 추진해온 셈이다. 이 무라(카르텔)에는 매스미디어도 포함되며, 그들의 광범위하고 끈끈한 네트워크는 교묘한 여론 형성(프로파간다)을 주도해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기독교계는 원전 문제에 내실 있게 대응하기 위해 일정 시간이 필요했지만, 독일은 실로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전까지 원전 추진파(확대파)였던 메르켈 당시 총리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목격한 직후부터 반원전 쪽으로 방향을 확실히 바꾼 점은 일본 상황과 매우 대조적이다. “원자력은 인류가 제어할 수 없는 과학기술이다”라는 슈뢰더 전 총리의 말에 담긴 인식이 기독교계를 포함한 독일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가톨릭) 철학자로 반원전론을 전개해온 로베르트 슈패만(Robert Spaemann, 1927-2018)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술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든 원자력 연구는 원자폭탄이라는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 선의가 상실되어 버렸으며, 그 후(냉전 시대)에 비로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생각이 나타났습니다. ; 원자력 기술은 책임질 수 없을 정도 규모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행성(지구)의 운명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활권의 모든 생명체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일만큼 큰 범죄는 없습니다. (R. 슈패만, 《원자력 시대의 교만 ― “이제는 들과 산이 되어라”》)
물론 슈패만이 단순하고 소박한 연구부정론을 주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우리는 진실을 인식하는 노력에 제동을 걸어야 할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희생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원전 사고로 원자력 연구(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의 궁극적 의미까지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원전을 안전하게 폐기하려면 폐기 기술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이 봉착한 현실 상황이다.
‘원자력 신학’을 향하여
일본의 맥락에서 원자력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앞서 살펴본 ‘과학기술과 성서’ 관점을 일본 맥락에서 원자력 문제로 구체화하려면 일본의 원자력 정책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더불어 원자력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원자력의 배경이 되는 과학기술사 및 그와 관련한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해서는, 첫머리에 인용한 구리바야시의 책에 실린 논문들(8장, 11장)을 보면 잘 파악할 수 있다. 구리바야시의 고찰을 통해,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은 “원자력발전은 창조주의 기술”이라는 점과 “핵 기술은 파멸의 길이며 우상 신을 섬기는 일”이라는 두 유형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입장이 나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결정적인 시기는 1950년대 동향이다. 바로 이 시기에 현재 원자력 정책의 원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1954년에 일본학술회의(日本学術会議)2)는 ‘민주’ ‘자주’ ‘공개’라는 ‘원자력 평화 이용의 3원칙’을 채택했지만,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 1885-1969)가 위원장으로 있던 원자력위원회는 일본학술회의의 경종에도 콜더홀 개량형 원자로(Calder Hall type power reactor)3) 건설을 허가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물리학)인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도 이 위원회의 초대 위원으로 참가했다.) 연이어 1964년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 건설 계획이 공표되었다.
당초에는 원자로를 기초부터 연구하여 일본 연구자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개발에 활용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그 성과가 충분히 활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자력처럼 위험을 수반하는 기술은 전문가가 스스로 축적해온 지식을 살려가야 하고 연구 철학을 존중하는 일이 필수적인데, 오히려 정부는 원자로 수입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 자주적으로 운용한다고 해도 미국에서 사온 원자로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용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자세한 설계 내용조차 몰라서 사고가 나도 곧바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마사이케 아키라(政池明, 교토 대학 이학부 명예교수), 《과학자의 원죄》, 2015)
세계적으로도 1953년에는 아이젠하워가 국제연합(UN)에서 ‘평화를 위한 핵’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고, 1957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되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원자력 체제가 확립된 시점이 1950년대이며, 이는 일본의 정치·경제 논리에 의해 추진되는 원자력 정책(평화적 핵 이용)의 성립을 의미했다. 1970년대는 유카와 히데키도 서명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1955)이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위기와 그에 대한 과학자의 책임을 논의하면서, ‘과학자 국제회의’의 필요성이 공감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2년 후(1957)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s)4)로 결실을 맺는다. 원자력 신학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하며, 과학기술신학 계통과 해방신학 계통이 결합한 주요 사례이다.
일본 원자력 정책의 역사적 이해와 함께 필요한 것은 원자력에 대한 과학적 이해이다.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1979)나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로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던 유럽과 미국의 그리스도교 신학에 비하여, 일본의 그리스도교 사상계는 원전에 대한 ‘안전 신화’를 강조하는 언설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원자력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운동, 예를 들어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郎)가 설립한 원자력자료정보실에서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중앙협의회(일본가톨릭주교협의회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지금이야말로 원전 폐지를 ― 일본 가톨릭 교회의 질문》(2016)은 핵에너지·원전에 대한 그리스도교계의 깊이 있는 인식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고찰이 잘 드러내는 지점은, 방사선의 위험성이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원전의 가동 중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점, ‘전력 비용의 문제’(일본에서는 원전 유치를 추진하고 싶어 하는 원자력 무라(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작용하여 원전에 적합한 시산(試算, 어림 잡은 예산)이 공개되어 버리는 경향)나 고속 증식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는 점, 현재도 원자력의 안전성이나 폐기물 처리의 목표가 제대로 정립돼있지 않은 점 등이다(마사이케 아키라).
이런 과정을 거쳐 부각되는 것은, ‘원폭=악 vs. 원전=선’ 도식으로 나타나는 원전에 대한 일의적(一義的) 이해가 낳는 문제점이다. 원전은 ‘선’이며 ‘안전’하다는 논의는 상대적인 과학기술의 절대화라는 점에서 우상적 사고의 한 형태이며 동시에 비성서적이다. 구리바야시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대가(大家) 혹은 중진 신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60년대에 기존 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대체할 만한 형태로 등장한 정치신학자들도, 원전에 침묵한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라고 지적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유럽과 미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계에서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 시기는 일본보다는 빠를지 몰라도, 그마저도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선구자 야나이하라 다다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1961)5)는 일본에서 원자력 정책이 확립되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에 걸쳐 ‘원자력 신학’에 대한 선구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야나이하라는 1961년에 별세하므로 이 시기는 생애를 마감해가던 만년기이다. 생애 마지막까지 이 주제에 천착한 야나이하라에 대해 마사이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쿄 대학 총장이었던 야나이하라 등은 물리학의 기초 연구가 원전 추진을 위해 이용되거나 자유로운 연구와 자주성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원자력과는 분리된 채 대학 등에서 과학자가 자유롭게 소립자나 원자핵에 관한 기초 연구를 실시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것은 ‘야나이하라 독트린’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원칙 덕분에 물리학자들은 원자력 연구를 전개하던 국가기관인 일본원자력연구소와는 구별된 공간에서 소립자나 원자핵 구조 등의 기초적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의 책)
이것은 현재 일본에서 문제시되는 ‘대학에서의 군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대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야나이하라의 논의가 원폭(무기로서의 핵 이용)을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원전(핵 발전)의 문제성에까지 시야가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자력은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기계적 생산 방법을 통해 인간 삶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즉 원자력을 동력으로 하는 생활의 기계화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빼앗으며, ‘기계화와 원자력은 근본적 의미에서 볼 때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압박한다’는 주장이다. 야나이하라는 대학에서 접한 학생들의 자살이나 노이로제 증가 현상의 배후에 전쟁과 원자·수소 폭탄의 ‘가공할 만한 불안과 공포’가 존재하며, ‘과학기술=선’을 주장하는 과학주의를 ‘하나의 미신’, 심지어 ‘원자력 신사(神社)’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한다. 이러한 미신은 ‘원전=선’ ‘원전=안전’ 이미지를 동반하며, 이것은 국가권력과 결합될 때 학문 연구의 자유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 시대의 한 특색은 국가권력 증대다. 원자력의 연구와 응용은 거대한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점과 대부분 국방상의 이유로 필요하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다. 이는 결국 원자력 연구와 응용에 대한 국가의 관리 통제를 강화한다. 원자력의 비밀을 국방상의 이유로 국가가 유지하는 것은 학문 연구의 자유를 요구하는 일과 충돌한다. (야나이하라 다다오, 〈원자력 시대의 종교〉)
물음으로서의 문명
야나이하라가 원자력발전을 기계적 생산 방법이나 생활의 기계화와 결부하여 자유의 압박이나 불안·공포를 수반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슷한 논의가 만년의 폴 틸리히 사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불안의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위대성이나 비소성(卑小性)도 궁극적으로 초월한 것 ― 파스칼과 시편에 의해 질문받는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대답의 상실이다. 또 다른 이유는 …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지배력을 인류의 일부뿐 아니라 모두를 멸종하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탐험이 전쟁 준비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는 점은, 우주 탐험에 대한 긍정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큰 만큼 깊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워왔다. 이 그림자는 무기 개발과 우주 탐험이 서로 결합되어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폴 틸리히, 〈우주 탐험이 인간의 조건과 양태에 미친 영향〉, 《종교의 미래》)
원자력 문제는 환경이나 우주 개발 등 과학기술의 수많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심지어 정치와 경제, 교육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원자력이 개별 과학기술 문제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 의문시되는 부분은 문명 전체의 기본 방향임을 의미하고 있다. 한쪽에는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문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생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명이 있다. 구리바야시는 탈원전의 기독교 윤리(“생명을 선택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만, 이는 콘도 가츠히코가 지적하듯이 다름 아닌 ‘문명’의 문제이다.
‘생명’과 같은 애매한 말을 원전의 논의로 끌고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원전은 기술이나 과학의 문제라고 하는데, 터무니없는 말이다. 과학기술의 가부(可否)를 정하는 가장 구체적인 지침은 그야말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은 그러한 의미에서는 생명을 지킬 수 없는 테크놀로지입니다. (《구리바야시 테루오 셀렉션 1 ― 일본에서 신학한다는 것》)
이번에 제가 요청받은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관점으로부터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원전에 의존한 문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현대와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명의 문제이며, 긴급성을 지닌 윤리적 문제입니다. (콘도 가츠히코, 〈에너지 정책 전환의 카이로스 ―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점으로부터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생각하다〉, 《지금, 지진재해·원자력발전·헌법을 생각하다 ― 속편·그리스도교의 세계 정책》)
몰트만도 《희망의 윤리》에서 ‘생명의 신학’에 기초하여 다양한 죽음을 초래하는 현대사회의 생명 위기에 대응하는 생명윤리를 구상하면서 ‘파괴의 욕망과 죽음의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생명 문화의 고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자력 신학은 신학적 문명론이라는 더욱 큰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야 한다.
■ 주
1) 2011년 3월 11일 리히터 규모 9.0 동일본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하 역자 주)
2) ‘학자들의 국회’로도 불리는 일본학술회의(SCJ)는 패전 후 태평양전쟁 등에 일본 학계가 동원되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인문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이 1949년 설립한 독립적인 학술단체다. 국비로 운영되는 총리실 산하 법적기구로, 정부 정책에 조언을 하기도 한다. 단체가 신임 회원들을 자율적으로 추천하면 총리가 그대로 임명하는 관례를 따라왔는데, 2020년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신임 회원으로 추천받은 학자들 중 6명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거부당한 이들은 모두 아베 신조가 총리 시절에 추진하던 ‘집단적 자위권’ 주장 및 헌법 개정(군대 부활)에 반대 의견을 표했던 이들이었다. 본 연재의 필자인 아시나 사다미치 교수도 이 6명 중 한 명이다.
3) 영국이 개발한 실용적 원자로. 명칭은 영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었던 컴버랜드주 콜더홀을 기념해 붙였다. 가장 풍부한 운전 실적을 지닌 발전로 중 하나이다. 본래는 발전용이 아닌 원폭 재료인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되었다가 발전용으로 개량되었다.
4) 정식 명칭은 ‘과학과 세계의 분쟁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s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이다. 모든 핵무기와 전쟁을 근절하자고 호소하는 국제적 과학자 회의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주도하에 발표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공감한 세계적 과학자 11명이 뜻을 같이하여 창립되었다. 1957년 제1차 퍼그워시 회의가 10여 개국 22명 과학자가 참여하여 열렸는데, 이때 모든 핵무기를 ‘절대악’으로 규정했다. 이후 핵무기에 대한 평가가 변화하면서 핵무기 폐지를 주장하는 측과 공존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이 일어났으며, 점차 핵 억지 이론이 힘을 얻게 되면서 이 회의 중심 이슈가 되기도 했다.
5) 대표적인 근대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식민정책 연구가로, 도쿄 대학 총장을 지냈다. 교수로 재직하던 1937년 중일전쟁을 비판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종전 후 복직되어 총장에 선출되었다. 식민지하 한국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였으며, 1940년 김교신에게 초청받아 한국에서 전국을 다니며 성서를 강의하기도 했다. 저서 중 《개혁자들 – 자유롭고 진실하게 살았던 일곱 사람》(포이에마)이 한국어로 번역돼있다. 〈원자력 시대의 평화〉·〈원자력 시대의 종교〉·〈원자력 시대의 사상〉(1957), 〈원자력 시대의 교육〉(1958), 〈과학과 도덕〉(1960), 〈우주와 인간〉(1961) 등 원자력과 과학기술에 관한 다양한 논고를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