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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꽃
1. 꽃과 상징
1) 미와 영화의 상징
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아온 자연물 주의 하나이다. 종류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모든 꽃은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윽한 향기로 인하여 그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윤택하게 만들어 왔다.
만원버스에 시달린 뒤 여유 없는 마음으로 바쁜 걸음을 걷는 출근길. 문득 한아름 꽃을 안은 밝은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미소를 짓게 되는 여유를 느낄 것이다. 꽃에 대한 이러한 느낌과 정서는, 동·서양은 물론 고대 원시사회나 현대에 있어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미에 대한 추구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온대지방에 사는 우리 민족은 긴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꽃이 피는 즐거움을 크게 나누었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풍류를 즐겨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의 꽃을 다투어 노래하였다.
따라서 꽃은 아름다움, 화려함, 번영, 영화로움 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아름다운 여자나 좋은 일, 영화로운 일에 비유하여 어여쁜 여자의 얼굴을 화용(花容), 화안(花顔)이라 하고, '꽃 같은 시절'이라 해서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기를 일컫기도 한다. 또한 경사스럽고 번영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 집안에 꽃이 피었다', '웃음꽃이 핀다'하였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어사화를 내려 영화로움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오랜 옛날부터 구애, 숭배, 존경, 친애의 표시, 위문, 축하의 마음 등을 전하고자 할 때 가장 즐겨 꽃이 선택되었고, 장례행렬에도 상여를 꽃으로 장식하여 저승길의 안녕과 극락왕생을 빌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를 두고 있으며, 교화, 사화 등 한 집단을 상징하는 역할에 꽃을 사용하여 그 품격과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꽃 재배에 관한 첫 기록으로, 〈동사강목〉에 백제 진사왕 때인 390년 궁실에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꽃을 많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꽃을 심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자연 속에 만발한 꽃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숭배하는 대상에게 바치거나 가까이 두고 보려는 마음에서 꽃을 꺾어 그릇에 꽂는 적극적인 행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꽃꽂이'는 삼국시대부터 벽화나 문양 등에서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한편, 우리 선조들은 꽃에도 품계나 등수를 매겼는데, 이때는 꽃의 아름다움보다 꽃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가 결정되었다.
강희안은 뛰어난 운치나 절개를 의미하는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를 1등으로 다루었다.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 작약, 왜홍, 해류, 파초를 2등, 운치가 있는 치자,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을 3 등, 역시 운치가 있는 화리, 소철, 서향화, 포도, 귤을 4등, 변화한 석류, 도화,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을 5등, 역시 변화한 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 오동을 6등, 그 이하는 각각 장점을 취하여 배, 정향, 목련, 앵도, 단풍을 7등,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을 8등, 해바라기, 전추라, 금전화, 석창포, 회양목을 9등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소나무, 대나무, 연꽃, 국화는 1품, 모란은 2품, 사계화, 월계, 왜철쭉, 영산홍, 진송, 석류, 벽오동은 3품, 작약, 서향화, 노송, 단풍, 수양버들, 동백은 4품, 치자, 해당화, 장미, 홍도, 벽도, 삼색도, 백두견, 파초, 전춘라, 금전화는 5품, 백일홍, 홍철쭉, 홍두견, 두충은 6품, 이화, 행화, 보장화, 정향, 목련은 7품, 촉규화, 산단화, 옥매, 출장화, 백유화는 8품, 옥잠화, 불등화, 연교화, 초국화, 석죽화, 앵속각, 계관화, 무궁화는 9품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꽃은 아름다움과 영화로움, 화려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물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생활전반에 걸쳐 직접, 간접적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숭배, 존경, 사랑, 친애의 표시로 전달되는 매개물에서부터 각종 생활도구와 공예품 등에 길상을 나타내는 존재로 시문되었고, 미술, 음악, 문학작품 등에 가장 즐겨 등장하는 소재 중의 하나의 애용되었다. 이러한 예술작품에서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중 하나이면서도 이내 시들어 지고 마는 꽃의 속성이 인간의 삶, 특히 젊음과 비유되어 비장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즐겨 쓰이기도 한다.
2) 불교와 꽃
불교는 꽃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무소유, 무욕을 이상으로 삼는 승려들은 기운 옷에 일체의 사치를 금한 거처에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법당, 불단, 탑, 석등 등 부처님의 세계를 묘사한 각종 건축물과 조각품은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는 단순히 부처님에 대한 경배와 외경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세계, 법(진리)을 깨우친 불국정토의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번뇌가 없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법당의 천장, 대들보, 불단 등에는 하늘을 나는 용과 극락조, 아름다움 연꽃과 길상을 상징하는 갖가지 꽃문양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종이나 불벽에는 연꽃방석에 앉아 긴 천의를 너울거리며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천상에서 비파와 장고를 연주하며 주악공양을 하는 비천도 있고, 꽃을 뿌리며 산화공양을 하는 비천도 있다. 이들은 모두 법희선열의 환희로운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 영취산에 있으면서 설법을 하던 어느 해 영산회상에서의 일이다. 법좌에 오른 석존은 말없이 대중을 둘러보신 후에 조용히 꽃 한송이를 들어보였다. 감로수와 같은 법문을 듣기 위해 갈망하고 있던 모든 대중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리둥절해 하며 연꽃을 든 석존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때 대중 가운데 마하가섭만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존은 여러 대중을 향해 가섭에게 법을 전수할 것을 알렸다. 가섭은 범위 눈을 떠 석존의 뜻을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꽃을 들어 대중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뜻을 마음으로 통하여 미소한 가섭. 이에 따라 후세 사람들은 마음을 전하여 통하는 것을 '염화시중의 미소', '이심전심'이라 하여 즐겨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향과 꽃을 올리는 향화공양이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 주위에는 향로와 함께 꽃병이 놓였으며, 꽃병에 꽃을 꽂고, 향로에 향을 피워 불전에 바쳤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병에 꽃을 꽂는 일, 즉 꽃꽂이에 관한 글을 처음 남긴 이는 신라의 명승 지장법사이다. 그는 13세 때 당나라에 가 지양현의 구화산 화성사에서 고행, 수도하였다. 그때 데리고 있던 동자가 부모님을 뵈러 곁을 떠나자, 쓸쓸한 심정을 읊은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내에 뜬 달은 볼 생각도 않고
병에는 꽃꽂이도 않는구나.
이로 미루어 보면 동자가 평소에 지장을 위해 차를 끓여 드리고 난 후 틈이 나면 꽃을 꺾어 병에 꽂아 스님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동자가 산 아래로 내려가자 빈 꽃병을 보며 쓸쓸함을 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고분벽화와 막대기와 등에는 병이나 수반에 꽂힌 꽃그림이 나타나 있으며, 고구려의 안악 2호분 가운데 선녀비천상 벽화에는 수반에 연꽃을 꽂은 그림이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이미 향화공양이 이루어져 불가에서 꽃꽂이가 성행하였으며, 사찰의 각종 장식문양에 주된 소재로 꽃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꽃꽂이의 역사를 언급할 때도 불가에서 성행한 꽃 공양이 점차 민가의 방안 장식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보는 설이 지배적이다.
고려시대에는 석가탄신일을 음력 4월 8일이며 불상의 몸을 씻기는 행사인 관불회를 거행하였다. 이때 여러 가지 꽃으로 꾸민 화정, 또는 화어당을 짓고, 그 안에 탄생불상을 모신 뒤 향탕이나 감차를 불상에 뿌렸다. 이는 석존 탄생시에 향수로 몸을 씻었다는 인연에 따라 큰 성인의 출세를 축하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화정을 본받아 고려의 귀족들은 집 안방에 작은 당을 마련, 석가상을 안치하고 꽃을 병에 꽂아 놓은 뒤 믿음의 무아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꽃 중에서도 불교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것으로는 연꽃을 들 수 있으며, 우담바라화는 3천년 만에 한번 피는 꽃이라 하여 아주 희귀하고 어려운 완성에 비유, 불교설화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2. 연꽃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의 자태와 특성은 불교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연꽃을 통하여 오묘한 불법을 펼치기도 한다. 이처럼 불교를 대표, 상징하는 꽃으로서의 연꽃을 살펴보기 전에, 연꽃의 일반적인 특성과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1) 연꽃의 일반적 특성
연꽃이 피는 장소는 못 속의 진흙과 흙탕물이다. 물과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에 젖지 않고 흙에 더렵혀지지 않은 채 깨끗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 연꽃이다. 이러한 연꼿의 세속을 초월한 듯 한 청아함과 고결한 모습으로 인해 유가에서는 연꽃을 일컬어 꽃 중의 군자, '화중군자'라 부른다.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꽃을 노래하였다.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에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소통하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음이다.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있는 품은 멀리서 볼 것이요, 다붓하여 구경하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연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한다.
또한 강희안이 꽃에 매긴 품계에서도 연꽃은 단연 1등 또는 1품으로서 그 뛰어남과 높은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은 밤에는 꽃잎을 오므렸다가 아침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태양과 함께 피고 태양과 함께 지는 까닭에,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태양숭배사상에 의해 연꽃을 소중하게 여겨 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떠서 빛을 비추면 만물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며, 그 빛을 거두면 어둠 속에서 생명이 잠든다. 따라서 소박한 토속신앙은 태양과 관련된 연꽃 역시 재생을 상징하고 내세의 무량한 생명을 준다고 연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예로써 고전소설 (심청전)을 들 수 있다. 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임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청이의 갸륵한 마음에 감복한 용왕님에 의해 환생하게 된다. 이때 연꽃이 등장하여, 그 속에서 심청이 다시 살아나오게 되는 것이다.
연꽃이 재생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로는 꽃상여의 장식으로 연꽃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연꽃 속에서 무량한 생명을 받아 좋은 세상에 태어나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잔칫상을 장식하는 종이 연꽃도 태양의 불멸을 상징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음력 섣달 그믐날 밤 공중에서 잡귀를 쫓기 위한 나례(儺禮)가 베풀어졌다. 이때 추는 춤의 내용을 보면, 학 모양으로 꾸민 두 젊은이가 춤을 추며 나와서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연꽃 봉우리를 활로 쏜다. 그러면 연꽃이 열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 서로 엇갈러 가며 춤을 춘다. 이는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연꽃을 결부시켜, 새해를 앞두고 장수와 번영을 염원하기 위한 춤이라 할 수 있다.
연꽃은 도교에서도 매우 귀중하게 취급하는 꽃이다. 연꽃은 도교의 8선인 중 한 사람인 하선고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선고는 열매가 달린 연꽃줄기를 들고 있는 도상으로 그려진다.
우리나라에서 연꽃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삼국시대의 고분벽화나 탑, 불화 등에서 연꽃이 장업의 주종을 이루었음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건축물이나 공예품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생활도구와 관혼상제 등의 의식 용구에 이르기까지 연꽃의 장식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불교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승화되어 불교를 생활화한 데서도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연꽃이 지닌 청아함과 영생, 장수를 상징하는 특성으로 인 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보통 식물은 꽃이 먼저 피고 진 후에 열매가 맺히는데,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에 따라 민화에서는 화병에 커다란 연꽃을 꽂은 그림을 즐겨 그렸다. 이는 연꽃이 꽃과 열매가 동시에 성장하므로, 빠른 시일 내에 아들을 연이어 얻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또한 연밥에 촘촘히 박힌 씨앗이 다남을 상징한다는 뜻과 함께, 연꽃의 '연'자가 연이어서 태어난다는 연생의 '연'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 점을 인용하여 연생귀자라는 뜻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연꽃은 꽃 중의 군자로서,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사랑과 아낌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2) 불교의 상징
연꽃은 그 상징하는 바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연꽃이 지니고 있는 불성을 꽃의 특성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흙과 흙탕물 속에서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낸다.
연꽃은 혼탁한 환경에 몸을 담고 있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자신의 청정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는 세속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과 다생의 윤회 속인 혼탁한 세상에 처하였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본래의 자성을 물들지 않고 늘 청정하다는 불교의 기본교리에 비유 된다.
(2)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개화하는 것이다. 다른 식물들은 꽃이 피어 성숙한 뒤 암수가 연결되어야 열매를 맺게 되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겨난다. 이는 모든 중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성불, 즉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기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헛된 꽃, 헛된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연꽃의 꽃은 수단을 위한 방편교를 나타내고 열매는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신 본뜻을 의미한다고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석존께서 권법을 설함은 실법의 방편을 설하고자 한 것으로 꽃이 열매를 위하여 피는 것과 같고, 또한 실법이 나타나면 실법 이외에 권법이 없고 모두 실이 되는데, 이는 열매가 성취되면 꽃이 떨어짐과 같다. 그런데 연꽃은 반드시 꽃과 열매가 동시에 있으므로 일승(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며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법)의 인과가 동시에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아름다움에 고상함과 기품이 있다.
연꽃은 다른 꽃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수려함과 고결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세속을 초월한 깨달은 경지, 완성과 원만의 경지를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여인에 견주기보다는 세속을 초월한 선인, 원만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이나 보살의 넉넉하고 청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연꽃은 불교의 깊은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 올리는 육공양물인 꽃, 향, 초, 탕, 과일, 차 중 꽃공양이 으뜸인데 그 중에서도 연꽃 공양을 제일로 치고 있다. 연꽃에 담겨진 여러 가지 의미를 대입하여 경전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으니, 이를 「묘법연화경」, 줄여서 「법화경」이라 한다.
불가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에는 연꽃의 '연'자를 넣어 만든 말이 많이 있다. 극락정토의 성중들이 연화지에 모여 법을 듣는 것을 '연화회'라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일종의 법회의식을 그렇게 칭하기도 한다. 스님이 입는 가사를 '연화의'라 하고, 두 손의 열 손가락을 세워 손가락과 손바닥을 함께 합치는 최초의 합장행법을 '연화합장'이라 한다.
불가에서의 열 가지 즐거움, 즉 십락의 하나인 '연화초개락'은 연꽃에 싸여 극락세계에 왕생한 수행자가 그 연꽃이 처음 필적에는 마치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뜨는 것같이 기쁘기가 한량없음을 나타낸다. 이에 더하여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의 세계를 '연화장세계'라 하였다. 곧, 향내 나는 큰 바다 위의 연꽃 속에 갖추어진 세계라 하였으니, 꽃에 대한 이보다 더한 높임은 없을 것 이다.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한 석가모니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가자 떼어놓는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한 흰 연꽃인 분다리는 부처님을 뜻하고, 푸른 연꽃은 우발라는 부처님의 눈, 붉은 연꽃인 파두마는 부처님의 손과 발을 나타내기도 한다. 연꽃의 봉우리는 청정을, 활짝 핀 꽃은 기쁨과 성불을, 연밥이 드러난, 지는 꽃은 진리를 상징한다.
이처럼 연꽃은 부처님의 세계, 극락의 세계를 나타낼 때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활짝 핀 연꽃자리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뒤에는 온갖 꽃으로 꾸며진 광배를 두르며, 양옆에는 꽃 관을 쓴 아름다운 보살을 내세운다. 바로 한 무더기의 꽃으로 부처의 자리가 이루어져 있다. 따라 서 부처를 모신 집은 곧 화원이며 그 세계가 또한 꽃누리, 연화장세계인 것이다.
한 송이의 연꽃처럼 꾸며진 법당을 비롯하여, 사찰의 곳곳에는 연꽃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 불국사를 살펴보자. 절 앞에는 연못 구품연화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를 건너 연화, 칠보교를 오르면 바로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에 이르게 된다. 또한 부처님의 좌대, 석등의 상대석과 하대석은 연꽃 자체의 모양을 일어 있고, 종, 벽화, 단청, 문살에도 연꽃을 담고, 등을 만들어도 연등을 만들었으니, 연꽃은 가히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연꽃은 우리 모두가 부처임을 나타내는 꽃이다. 모든 중생이 청정한 자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꽃이다. 불교의 대의를 함축하고 있는 꽃. 연꽃은 실로 부처님의 진의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진리의 꽃, 법의 꽃이라 할 수 있다.
3. 무궁화
1) 나라꽃과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중에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옛날부터 선조들은 매, 난, 국, 죽 사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아껴 왔고 모란, 이화의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즐겨 애송하였으며, 진달래, 봉숭아 등에 우리네의 정서를 담아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장식외어 온 여러 꽃들을 생각하면, 문득 역으로 무궁화가 왜 국화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하나의 기정사실로만 받아들일 뿐 의문조차 품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일단 뒤로 미루고, '국화와 무궁화'의 현상학적인 측면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여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채택된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국화로서의 인정을 얻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관한 시비는 195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상논쟁까지 벌이며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격이 평가, 재검토되어 왔다.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 국화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 나라의 국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는 1. 국토 전역에 분포하는 꽃, 2. 우리나라 원산종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꽃, 3.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한 꽃, 4. 이름과 모양이 모두 아름다운 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에 비추어볼 때 무궁화는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며,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 등으로 인해 국화로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화는 그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꽃이 있다면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현재의 무궁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궁화에 대해서 충분히 안 다음 위에서 말한 부적합한 사유들이 타당한 것인지에 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 나라의 국화는 단순한 꽃으로서만 평가될 수 없으며, 이면에 간직된 깊은 뜻과 정신을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국 ... 유훈화초조생춘사'라 하여,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 목근, 순영, 순화, 조개모락화, 번리초 등으로 칭하였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에는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러 왔다.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고, 「구당서」(737년: 성덕왕 36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 근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은 무궁화가 많은 땅,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규모의 글 중 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 하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고 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무궁화', '무궁화' 등으로 쓰이다 가 조선말경에 현재의 '무궁화'로 정착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 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되어 쓰인 것이라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불렀다 한다. 속명 무궁화라 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화(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는 무궁화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를 꽂았는데, 이를 진찬화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노라면, 막연히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무궁화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무궁화가 본격적인 국화로 등장,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개화기이다. 당시 윤치호, 남궁억 등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나라꽃으로 무궁화를 결의하였다. 당시에 만들어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 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계속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민족정신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로서 민족의 가슴에 심어져 왔다.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1910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이 땅의 여인들은 우리나라의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심어 나갔다.
특히 남궁억은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확산시키고자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 삼천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을 확산, 고향인 홍천에다 무궁화 밭을 가꾸어 해마다 수십만 그루씩 각 지방의 학교, 교회, 사회단체에 공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반일적 사상의 발로라 하여, 1933년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체포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사꾸라를 심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째 말살하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근세의 명수필가로 알려진 김소운은 광복 후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서간체 연재수필을 썼는데, 제목을 「목근통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그대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그 줄기찬 화기는 민족의 줄기찬 불굴의 정신과 연관시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 뒤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다. 광복 후 채 일어서기도 전에 6.25로 민족의 비운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전진만을 계속하여 왔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꽃,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꽃. 여기에는 온 국민이 관심과 의견을 제시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이제 무궁화가 가지는 꽃 자체로서의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3) 꽃으로서의 무궁화
(1)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꽃
무궁화는 이른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진다.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그의 시구에서 “무궁화는 하루 동안 스스로의 영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궁화는 날마다 새로 피고 반드시 그날로 지고 만다. 그러나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 적으로 피어,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 일 동일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의 특징이다.
무궁화의 화기가 짧다거나, 위에서 말한 백낙천의 시구절 등은 꽃 한송이 한송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 나무의 화기를 말한 것은 아니다. 화기를 두고 볼 때에 가장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이다. 하루에 보통 작은 나무는 20여 송이, 큰 나무는 50여 송이의 꽃이 피므로 100여 일 동안 피운 꽃을 합하면 한 해에 2천에서 5천여 송이의 꽃을 피우는 셈이니, 다른 화목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특유한 개화습성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른 새벽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는 무궁화. 그날의 태양은 졌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매일 새롭게 꽃을 피우는 무궁화. 무궁화는 태양 과 일맥상통하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 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궁화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일생은 짧기가 그지없다. 오늘의 꽃이 최선을 다하여 피고 지면 다음날, 또 다음날을 연이어 새로운 꽃들이 대를 잇는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은 짧지만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듯이...
또한 무궁화는 질 때에 뒤가 어지럽지 않고 조촐한 끝맺음을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질 때는 색이 바래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지저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궁화는 봉오리처럼 곱게 도로 오므라져 송이채 꼭지가 빠지면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활짝 꽃을 피운 뒤 깨끗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삶. 우리는 무궁화를 통해 인생의 철학, 역사의 진리를 다시금 느껴볼 수 있다.
정인보의 시조 「근화사삼첩」은 무궁화를 노래한 3수의 시조이다.
신시로 내린 우로
꽃 점진들 없을쏘냐?
왕검성 첫 봄빛에
피라시니 무궁화를
지금도 너 돋 대하면
그제런 듯하여라.
저 뫼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세오리까?
천만년 무궁화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담우숙 유한코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이 둥두렷이 돌아올 제
옛 향기 일시에 피니
강산 화려하여라.
이 시조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 겨레의 영원한 표상으로 나라꽃 무궁화를 점지하셨으며, 우리나라의 태고적 자연과 함께 변함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의 정신을 찬양하고, 무궁화의 그윽한 자태와 향기 속에 영광스럽고 평화로운 겨레의 미래의 노래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사라져 갈지라도 새로 살아나고 자라나서 길이 무궁한 빛으로 역사를 이어 가는 우리 겨레, 이 모든 겨레의 힘으로 또한 무궁히 뻗어나갈 우리나라. 무궁화는 유구한 역사와 관계를 그대로 표출시킨 꽃이다.
(2) 순결과 정열의 꽃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여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인 꽃이다.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흰색의 꽃잎에 화심 깊숙이 붉은색이 자리 잡은 단심 무궁화가 손꼽히고 있다.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 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직한 순결한 영혼을 연상하게 한다. 마치 먼 옛날 심신유곡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맑게 하고 가슴의 뜻을 가지던 화랑도의 무리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달빛 아래서 손에 손을 잡고 긴 댕기를 휘날리며 끝없이 강강술래를 하던 이 땅의 순결한 처녀들인 듯…….
조지훈은,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하였다.
이러한 무궁화의 순결한 일편단심을 잘 나타낸 설화가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글과 노래를 잘하여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애하여 왔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이 있었고 그녀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은 사람이 유혹을 해도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인을 탐내 오던 고을의 성주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그녀의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음을 보고 강제로 여인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끝까지 명령에 굴하지 않자 성급한 성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여인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여인은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를 집 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소경 남편이 있는 집 뜰에 묻어 주었다. 묻은 자리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은 삽시간에 그 집 뜰 안을 둘러싸고 말았다. 마치 남편을 보호하여 품안에 감싸 안은 울타리처럼.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번리화(무궁화의 별칭)’, 즉 ‘울타리꽃’이라 불렀다.
한편, 중국의 「시경」에는, ‘안여순화’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 마치 무궁화 와 같다는 뜻이다. 이어 시선 이백은,
함초롬히 피어난 섬돌 옆의 무궁화
온 동산 다 살펴도 이 꽃에 견줄 것이 없구려.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무궁화를 이상향인 샤론의 장미, ‘ROSE OF SHARON’이라 하여 꽃 중의 꽃이라 칭송하고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궁화의 고아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으나, 정작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취하여 무궁화의 참된 아름다움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3) 나라꽃으로 부적합한 이유에 대한 변
앞에서 무궁화가 국화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측의 이유를 살펴본 바 있다.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1950~1960년대의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보고된 것으로, 그 뒤 오랜 연구를 거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 바 있다.
유달영 박사는 함경도 등에 무궁화가 없는 것은 단지 심어 가꾸지 않은 까닭이며, 무궁화는 어느 땅에서도 잘 자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번식이 되는 강인한 꽃이라 하였다.
임채욱 선생은 이 점과 관련하여 무궁화를 보지 못한 북한사람들에게는 ‘무궁화 삼천리’가 넌센스가 된다는 의견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로 오늘의 북한에서도 무궁화가 잘 알려져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198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음악제 ‘아시아음악 연단’에서 「무궁화 3형제」라는 노래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궁화 꽃수건」이라는 극도 있으며, 의식행사 때 단상을 장식하던 꽃도 무궁화였고 소련인이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국화로 보기보다는 분단 이전의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꽃으로 인식하고, 그 상징성을 자기들도 공유하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까지 분단 상황을 떠나 겨레의 상징성으로 공유되고 있는 무궁화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역시 역사적 기록과 고증을 통하여 잘못된 것임을 밝혀진 바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에서 살펴보았듯이,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토양에 맞아 2천여 년 이상의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자생하여온 꽃이다. 식물학계에서는, 무궁화의 원산지가 학명으로 미루어 시리아라고 해석되어 왔으나, 이에 대해 점차 의문이 제기되고 최근에는 인도, 중국, 한국 지방이 원산지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다는 점이다. 무궁화에는 진딧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된 육종으로 최근 진딧물 없는 무궁화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사실 난이나 장미 같은 꽃은 까다롭다 하여 어린아이 돌보듯 온갖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만, 무궁화는 세인의 관심은커녕 화단에서도 밀려나 관공서, 학교의 담 곁에 묵묵히 서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단명허세 하다는 평은 같은 현상을 놓고 나쁜 쪽으로만 본 극단론이다. 그것이 오히려 무궁화를 무궁화답게 하는, 우리 민족의 꽃으로서의 특성 중 하나임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이다. 무궁화가 늦게 꽃이 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늦게 꽃이 핀다고 하여 그것이 어찌 흠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묵묵히 때를 기다려 다른 꽃들이 하나 둘 지고 난 다음,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줄기차게 피어나는 무궁화야말로 우리 민족성의 강인함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무궁화는 계절상 늦게 피지만 가장 부지런한 꽃이기도 하다. 흔히들 새벽 5시경에 피어나는 나팔꽃을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무궁화는 이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운다.
(4) 나라꽃 무궁화
이제까지의 글에서 혹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갖거나, 다른 적합한 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일가견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관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적합한 말이 있다. “무궁화는 육안으로 보기보다는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윤극영 선생의 말이다. 꽃만을 보기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정신과 역사,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배달겨레의 맥락을 보아야 된다는 뜻의 이 말은 오늘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니겠는 가.
우리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깊은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온 무궁화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해 왔고 자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민족의 꽃이 무궁화와 우리나라만큼 깊은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겠는가.
멕시코의 선인장, 그리스의 올리브, 캐나다의 단풍 등은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나라의 상징으로 그 국민이나 외국인이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스코틀랜드 같은 나라에서는 애국주의적인 전설 하나 때문에 엉겅퀴 같은 독특한 꽃을 국화로 사랑하고 있다. 즉 중세기 덴마크 군대가 침략했을 때 스코틀랜드의 엉겅퀴 숲에 매복하였다가 그 가시에 찔려 패퇴한 유래 하나만으로도 지역과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웃 일본도 어떠한가. 일본은 그들이 아시아를 재패할 때 발길이 닿는 곳마다 제일 먼저 벚꽃을 심었다. 일본은 그네들의 국화인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닌다. 벚꽃의 특성과 일본인의 기질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무엇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임을 말할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될까? 오히려 일제 때 왜곡된 무궁화에 대한 인식이 무의식중에 전해 내려와, 무궁화를 하찮게 취급한 적도 없지 않으리라.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꽃이다. 오랜 역사를 두고 그러한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꽃을 피워 온 무궁화. 우리가 잠시 그 존재와 의미를 망각했다 하더라도, 무궁화는 늘 그대로의 의미와 상징성을 간직한 채 우리의 곁에서 오늘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있다.
4. 사군자
1) 사군자의 의미와 기원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많은 꽃과 식물 중에 서 특별히 이들을 선택하여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의 인품에 비유, 군자라 하였다. 그 까닭은 매 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이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매화는 이른 봄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깊은 산 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 우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울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은 간직하고 있다.
매, 난, 국, 죽의 순서는 각각이 꽃피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모든 식물이 두려워하는 추위를 이겨 찬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고 푸르름을 더하는 매화, 국화, 대나무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고히 향기를 뿜어내는 난의 기상을 위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사회에서는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하여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으로 일컬어지기 이전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시문과 그림에서 각각의 기상을 취해 즐겨 다루어졌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선 시기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최초로 대나무가 「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 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 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 원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 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 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다.
이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각각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매화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 이 매화는 백화가 미처 피기 전에 제일 먼저 피어나므로 ‘화형’ 또는 ‘화괴’라는 별칭으로 불리어 왔다. 또한 봄을 가장 먼저 전해 준다고 하여 일지춘색, 철간선춘, 한향철간이라 하였고, 춘한 속에서 홀로 핀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와 절개로 즐겨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의 특징이다. 선비들은 매화의 곧고 맑은 성품을 노래한 글을 지어 일편단심으로 사무하는 임에게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때 임은 나라 또는 임금일 수도 있고 자신의 굳은 뜻일 수도 있다.
특히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에 즐겨 비유되었다. 옛 기생들의 이름에 유독 매화 ‘매’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가 아름다움과 함께 정절을 상징하였으므로,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인 매죽잠을 즐겨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매화의 상징성으로 인해 눈이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가 문인과 풍류객들의 연중행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범석호는 「매보」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송하였고, 소동파는 얼음 같은 맑은 혼과 구 슬처럼 깨끗한 골격이라 평하였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의 화목9등품론에서 국화, 대나무, 연꽃과 함께 1등으로 분류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의 화품평론에서 강산의 정신이 깃들고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 꽃이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꽃 중에서 매화는 (도화: 복숭아꽃)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매화는 우리 선인들의 드높은 기개와 굽힐 줄 모르는 지조의 상징으로 애창되어 왔고, 다 썩은 고목에서도 봄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는 신의의 벗으로 노래되어 왔다.
백설이 자자진 곳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의 이 시에서는 추이하는 계절과 더불어 걷잡지 못할 애상에 잠긴 마음으로 매화를 찾는 지사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매화는 달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자연적인 조화와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 이후로 매화와 달의 짝은 더욱 애호되고 있다. 실로 달과 매화는 예로부터 은일처사들의 아낌을 받아온 고아함의 화신이요, 정절의 상징인 자연이었다.
달을 벗한 매화는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양매월 이제청절’이라는 화제가 적힌 윤리문자도에는 은나라의 은일처사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달과 매화를 벗삼아 은둔의 일생을 보냈다는 고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매화 그림, 묵매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매화의 꽃송이가 중국의 그림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위원 허영환 선생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성긴 것, 어리숙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 등을 좋아한 성격 탓’ 인 것 같기도 하고,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민족성은 빽빽한 것, 완전무결한 것, 아주 예쁜 것, 되도록 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묵매화가들이 어지럽게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수십, 수백 꽃송이를 화면 가득히 그리면서 웅장, 완벽, 섬세를 추구할 때, 우리나라의 묵매화가들은 그러한 화법과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미술의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와 단순의 미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비록 묵매화가 사군자의 하나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에 맞게 완전히 소화, 재창조되어 한 단계 높은 미적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 난초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남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는다.
도곡이 지은 「청이록」에 나타난 구절이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다. 특히 동양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 ‘난화사미인’, ‘유란여정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 「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일찍이 여항에 객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서안 위에 놓아두었는데, 한참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그 난이 향기로운 줄 몰랐다가 밤이 깊어 고요히 앉았노라니 달은 창 앞에 휘영청 밝고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사랑할 만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고려말의 이거인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초의 강희안은 우리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로는 조선초 강세황의 「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최경찬, 신위 등이 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그것은 난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 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 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 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 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4) 국화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어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즐겨 비유되었다. 「종회부」에서는 국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게 한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미가 있으니,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모양한 것이요,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요, 일찍 심어 늦게 핌은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뚫 고 꽃을 피움은 경직한 기상이요, 술잔에 동동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라.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의 주돈이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범석호는 「국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 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 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품격은 마치 산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화가 이와 같은 은일지사의 상징으로 위치를 굳힌 것은 진나라의 도연명에 의해서였다. 도연명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관리란 직책이 생리에 맞지 않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왔다. 이때 지은 「귀거래사」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기고 있다. 그 외에도 국화심기를 좋아하고 국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시 「음주」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하여 탈속한 설비의 풍류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대목의 시정은 그의 도가적 모습을 나타내는 데 즐겨 인용되며, 회화에서도 이 부분을 화의로 취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은 당,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 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도연명의 시취에 빠져들어 이와 연관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정선의 「동리채국도」와 「유연견남산도」에는 한 선비가 국화를 꺾어 옆에 놓거나 들고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이한복은 상황의 설명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국화 화분을 그린 정물화 형식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화제를 「동리가경」으로 한 것을 볼 때 국화와 관련된 도연명의 시취를 인용하여 그린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국화는 ‘국유걸사지풍’이라 하여 호걸의 풍모를 가졌다고 표현되며, 일명 절화, 여절, 여화, 여경, 갱생, 음성 등이라고 한다. 「양화소록」에서도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단연 1등, 1품으 로 꼽고 있다. 국화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로부터 국유황화라 하여 황국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이처럼 국화의 높은 기개를 사랑하여 회화에서는 필묵으로, 문학에서는 글로써 그 불굴 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국화는 특히 고려자기와 이조백자, 나전칠기 등 도예품과 공예품에 문양으로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자기 등에 나타나는 국화문이 비록 회화적인 면보다는 도안화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정취를 물씬 나타내고 있는 야국의 그림은 고려청자의 푸른 바탕에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국화는 노장사상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라 일컬어졌다. 더욱이 「포박자」의 내편에 기록 하기를, “감곡수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라는 사상이 고려시대에도 충만하고 있었으므로 청자, 술 잔,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이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국화에 대한 신비한 효능이 전래되었고, 「신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국화는 성품을 기르는 가장 좋은 약으로 능히 장수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 남양사람들은 국화의 담수를 마시고 다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민간에서는 9월 9일에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 하여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 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흐 얘라 아으 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양지방의 「각설이타령」에도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씨고”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 “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꺽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라는 구절이 있다.
국화는 선조들이 남긴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정보와 송순의 작품을 음미하여 보자.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5) 대나무
사군자 중 제일 먼저 시와 그림에 나타난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정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과 함께 대나무를 1등으로 삼았다.
대나무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 실용성은 일찍부터 예술과 생활 양면에서 선조들의 많은 아낌을 받아 왔다. 대는 소나무와 함께 난세에서 자신의 뜻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지사, 군자의 기상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상징물로 나타내고 있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 는 말은 대를 쪼갠 듯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곧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말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이는 대나무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시경」의 「위풍에서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는데,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기수 저 너머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청초하고 무성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정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여,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여.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육조시대는 대나무와 군자의 사이가 더욱 밀착되는 시대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은 것이든지 왕휘지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한 일화들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특히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그 이후로 대밭은 문학작품 등에서 은거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설화와, 전설 등에서도 대나무는 신비한 영물로 등장하여,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중 미추왕과 죽엽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이라고 하였다 한다.
「만파식적」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그 산에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가 있었다. 신문왕은 용의 계시에 따라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부모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대나무 밭으로 달려가 울면서 애 원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솟아올라 그것을 잘라서 부모를 공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 등에 채록되었다.
대나무는 주기적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5년에서 60년 주기까지 다양하다.
대개 꽃이 피면 모족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에 발육되어야 할 죽아의 약 90%가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 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으며,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화에서는 대나무가 독립된 화목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 또는 화조화의 일부로 나타났으며, 그 뒤 대의 상징성과 기법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문인 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때로 달방에 창호지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서 묵죽을 그린 낭만적인 화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 「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시험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상감창자에 새겨진 문양에는 국화문과 함께 죽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자기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주악선인 등의 인물과 연꽃, 국화, 매화, 학, 새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연의 경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흑상감한 대나무와 백상감한 군학을 같이 구성하여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세기경의 주병류에서는 대체로 대나무 그림만을 주제로 시문하여, 당시 유행한 사군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이처럼 대나무는 그 상징성과 고아함, 실용성 등으로 인해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설화 등에서도 교훈적, 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 소재로 아낌을 받아 왔다.
6) 사군자의 상징성
이제까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각각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생각과 거기에 부여한 의미와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들 네 식물은 각자 높은 품격과 지조를 가진 뚜렷한 자연물로 인식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별꽃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즉 꽃잎, 잎사귀, 줄기, 뿌리 등으로 이루어진 각 식물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공통된 특성으로 갖는 의미를 취하여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게 서 있는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의 인격을 함양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시와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꽃을 가꾸며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은일지사들은 사람과 교류하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뜻있는 자연물로서 벗을 삼았으며, 이름 높은 지사들이 이들을 시와 그림으로 노래한 작품과 일화들은 후대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사군자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군자를 함께 여러 가지 비유로 칭송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전한다.
매화의 운치, 난초의 향기, 국화의 윤택한 기운, 대나무의 청아함이 없으면 역시 군자라 할 수 없다.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난초는 제왕과 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치를 지니고, 대나무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도다.
또한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꽃다운 벗), 국화를 일우(뛰어난 벗) 또는 가우(아름다운 벗), 대나무를 청우(맑은 벗)라 하여 차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맑음과 고아함을 취하여 매, 죽을 쌍청 또는 2아,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매, 죽, 송을 세한삼우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 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군자끼리의 배합뿐만 아니라 상징성이 유사한 소나무, 돌, 연꽃, 학, 달, 술 등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정다운 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국화에는 술과 벗이 짝하고, 매화에는 달이 가장 즐겨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짝을 더함으로써 시적 운치를 높이고 주제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사군자의 그림은 시, 서와 함께 전인격을 투영하고 있다고 믿어,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사군자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꽃과 식물의 정신을 나타내야 하므로 그리는 이의 인품과 정신이 중요하다고 본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선인들의 벗으로서, 교훈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그 상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왔다. 꽃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우선으로 한 전통시대의 관념적인 명분론의 일면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꽃 속에 담겨진 의미나 정신을 망각한 채 지나치게 외적이고 감각적인 미만을 추구, 화려함을 우선으로 취하는 현대인들의 흐름 또한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사군자에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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