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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11월 하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한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맘때쯤이면 한해를 돌아보고 정리하며 새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나갔습니다. 이 주인은 얼마나 걸렸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본문에 보면 ‘오랜 후에’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습니다. 떠나있는 동안 자신이 맡긴 달란트를 종들이 각각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주어진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달란트가 주어졌고, 둘째는 시간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의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해진 시간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인은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는 날, 주인은 종들을 불러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낱낱이 결산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주제입니다. 달란트를 내게 맡기고 떠나간 주인이 마침내 돌아올 때까지, 그 주어진 시간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의 달란트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간도, 건강도, 재능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것들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맡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맡기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를 잘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다 주인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들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것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맡았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적당한 달란트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과제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바로’ 갔습니다.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달란트를 맡겨 주신 주인의 뜻을 좇아서 그들은 즉시 가서 그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달란트를 맡은 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고 삶의 자세입니다. 이 종들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내게 왜 달란트를 맡겨주셨을까? 그것을 그대로 보관하라고 맡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그 달란트를 관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도록 나를 믿고 나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즐겁고도 충성스럽게 장사를 했고, 그 결과 각각 갑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가서’가 아니라 그냥 ‘가서’입니다. ‘바로 가서’라는 말과는 그 뉴앙스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 두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달란트를 맡겨주신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주인이 돌아왔고, 주인은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습니다. 각자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과연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남겼는지, 계산을 한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두 사람을 칭찬하였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칭찬이 똑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주인은 똑같이 칭찬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받았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일이 모여 큰 일이 되고, 티끌이 모여서 태산이 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기기까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해야 했을 것입니다. 매일 하루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기나긴 세월이 됩니다. 하루하루 작은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의 인생을 충실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중요하고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작은 일들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큰 일만 하겠다고 작은 일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그 사람에게 주인은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는 주인의 초청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달란트를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 주어진 일들을 최선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충성은 아랫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존재가 되기 보다는 충성을 받는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그 누구라도 맡은 자일뿐입니다. 따라서 맡겨준 대상에게 우리는 충성스런 존재가 되어야 하고, 맡겨준 사람의 뜻을 헤아려 잘 관리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가운데 일곱 번째로 충성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충성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실 때 충성할 수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달란트에 대하여, 혹은 받은 바 사명에 대하여 충성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나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는가? 건강이나 재능, 소유와 시간, 지식이나 지위, 가정과 교회,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충성스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소유와 지위가 주어졌지만 충성스럽게 주인의 뜻을 따라 사용하지 못하고, 그것이 나의 것인양 나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이 주어졌는데, 충성스럽게 그 건강을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건강을 가지고 헛된 일로 남용하거나 오용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충성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아무래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으나, 이것을 사용하여 장사를 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이 종이 게으른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땅에 묻어두었으니, 게으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달리 생각해 본다면, 이 종은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다가 잘못되면 그것이 오히려 주인께 손해가 되고, 그래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원 달란트를 그대로 땅에 묻어두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패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왜 그를 악하다고 말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심판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가 주인께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한 달란트도 남기지 못하여서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게으름입니다. 일해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달란트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일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았습니다. 게으를 뿐 아니라 그는 충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 삶을 주님은 무섭게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하여 24절에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색하고, 베풀 줄도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두려워하여 이 돈을 땅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주인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하니, 자기가 심지도 않은 남의 밭에서 소출을 거두는 사람이고, 돈을 꾸어준 적도 없으면서 돈을 회수하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종은 주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굳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재물에 집착하고, 그래서 결과를 중요시하는 그런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왜 주인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피도 눈물도 없이 물질만 탐하고, 방법이나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분이십니까? 주인에 대한 그런 오해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데, 죄에 대해서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늘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심판을 두려워할줄 모르고 방종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정죄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회개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실 만큼 그분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며, 그 은혜에 감격한 마음으로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그 뜻을 따라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그와 같은 주인의 자비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주인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인에 대한 이해와 편견에 갇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종은 자신의 주인과 진정한 관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 그가 게으르고 충성하지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 좁니다. 어쩌면 그는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왜 내게는 한 달란트만 맡겨주시느냐?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나 받았고,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왜 내게는 한 달란트만 맡기셨느냐 는 불만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왜 흑수저로 태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과 한 달란트를 가지고는 시작하는 사람은 경쟁이 안되는 법이고, 그래서 나는 어쩔 수가 없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원망하고, 주어진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포기하고 땅에 묻어둔 것입니다.
이것은 버려야 할 열등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대로 넉넉히 주셨습니다. 한 달란트라고 해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문가들의 설명으로는 당시 로마시대에 금 한 달란트는 20킬로가 넘은 무게로, 값으로 치면 약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6,000데나리온이면 6000일 동안, 20년 가까운 세월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커다란 금액입니다. 나는 왜 적은가 하고 불만을 갖기 쉽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적어 보일 뿐이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적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충분하게 받았습니다. 너무 적게 받았다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서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가지 불만과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난다든지, 세상이 잘못되었다든지, 그러한 열등감과 원망이 우리를 게으름과 불순종으로 교묘하게 몰고 갑니다. 우리로 하여금 받은 바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따에 묻어두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 달란트라고 하는 것이 화폐의 단위이고, 그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종들이 각각 얼마를 남겼는가 확인하는 주인의 모습이 마치도 종업원들의 연말 성과를 따지는 경영자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이 비유를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돈을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긴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주님은 똑같은 말로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착하고 충성스런 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넉넉히 맡겨진 몫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맡겨준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게을렀던 종을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의 열등감과 불신앙을 합리화하고 핑계만 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제각각이지만, 그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는 맡겨주신 주님의 뜻 안에서 소명을 찾고, 그 소명을 위하여 더욱 힘써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는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가? 무엇을 향햐 달려왔는가? 나의 삶의 목표는 진정 주님의 뜻에 합당하였는가? 더 많은 소유나 힘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성공을 추구하였는가? 주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는가?
‘악하고 게으른 종’의 반대는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그러니까 악함의 반대는 착함입니다. 게으름의 반대는 충성입니다. 자신에게 주님이 맡겨주신 달란트가 비록 작은 것 같더라도 주님의 선하신 뜻을 긍정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러 주시고 더 큰 것을 우리에게 맡겨주실 것입니다.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달란트로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실들을 거두며 살아가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지식, 우리의 소유, 우리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것인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