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섭 목사, 이정진 선생의 삶을 되돌아 보며
허병섭 목사는 1941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 군목(軍牧)으로 입대. 군복무중에도 청계천에서 빈민들을 만났으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청계천 꼬방동네에서 중랑천 뚝방의 도시빈민들과 어울리며 가난한 자의 벗과 형제가 되어 무료 진료를 알선하고, 당국의 무자비한 철거정책에는 몸으로 맞서 싸우는 주민운동(CO) 조직가로 활동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20여 차례 연행, 구금, 고문을 받아야 했고, 도피생활을 반복했다.
1976년 하월곡동에 동월교회를 설립하여 민족적, 민주적, 민중적 교회를 지향하며 국악찬송과 판소리 설교 등을 통해 예배의 한국화를 시도하였다. 교회가 단순히 예배드리는 곳, 자선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지역주민들 스스로 참여하고 깨닫고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1982년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의 보육의 짐을 덜어주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모아 교회안에 똘배의 집이라는 탁아소를 세웠으며 이는 1987년 탁아소 입법화의 기반이 되었다.
1988년 소속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고 성직자가 가지는 권위, 사회적 위상 등을 벗고 진정한 빈민으로 살기 위해 막노동판에서 미장공으로 노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 하월곡동 노동자 15명과 최초의 건설노동자생산협동조합 '건축일꾼 두레'라는 공동체 조직을 만들었다. 노동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스스로 노동을 통해 천대와 자기멸시를 떨쳐 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허병섭 목사의 실천적인 활동을 모형으로 현재의 자활지원센터의 제도화가 행해졌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정치를 위해 생활경제연구소를 만들었다.
1996년 무주 안성면 진도리로 귀농,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소비의 근원지인 도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나눔과 섬김, 공생의 가치가 담긴 생태적 관점으로의 전환 없이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자본주의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보고 생태 생명운동을 전개하며 골프장 등 무주지역 개발에 맞서 주민과 함께 싸웠다.
1998년 민중 교육을 실천으로 옮겼던 그는 생태주의에 근거한 교육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진도리 근처에 푸른꿈 고등학교가 들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03년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모여 설립된 최초 대안대학 녹색대학교(現, 온 배움터)가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개교 이후로도 학교와 물(학생)들과 함께 하며 학교가 안정화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생태적 삶의 방식을 알고 익히기 위해서, 왜곡된 문화를 생태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생태문화 공간을 창조하는 일꾼을 양성하는 생태적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다. 현재 온 배움터 공동대표와 생태교육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2008년도에는 두 분 명의의 땅과 산 등을 자연환경국민신탁에 증여하면서 무분별한 개발경영의 사회에 아름다운 귀감이 되었다.
이정진 선생은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70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72년까지 The Stuendet Times 기자 활동을 하였다.
1990년 해직교사 후원회, 참교육 학부모회 자원활동을 하다, 1993년 참교육 시민모임 사무처장으로 활동하였다.
1996년, 허병섭 목사와 뜻을 같이 하여 무주로 귀농, 땅을 일구며 생활하며 지역 어르신들께 한글 등 공부를 가르치며 봉사하였다.
2007년 만나지역아동센터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지역의 아이들을 돌보았다.
2008년 주민들의 권유로 지방선거에 민주 노동당 후보로 군 의원에 출마하였다.
두 분의 밀알노동을 통해 경험한 삶을 엮어 「허병섭 이정진의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함께 읽는 책, 2001)을 출판하였다.
두 분은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민중교육과 생태생명운동에 헌신하시다 지금은 두 분 모두 힘겨운 투병 중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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