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와 요한을 함께 보면서
먼저 성경을 보는 관점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사단의 대립이라는 큰 틀에서 보고, 무엇이 누구에게 유익한가, 무엇이 누구의 일을 이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 판단 기준 | 하나님 | 사단 |
| 어느 편인가? | 하나님 편 | 사단 편 |
| 누구에게 유익한가? | 하나님께 유익 | 사단에게 유익 |
| 누구의 일을 이루는가? | 하나님의 일을 이룸 | 사단의 일을 이룸 |
| 소원은 어디를 향하는가? | 하나님을 향함 | 사단을 향함 |
| 어느 편을 소망하는가? | 하나님을 소망함 | 사단을 소망함 |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관점에서 베드로를 다시 보게 되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마태복음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주님께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이것을 나는 나댐이라고만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고백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지금 제자들은 배우는 자들이다
지금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배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말은 단순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볼 필요가 있다.
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제자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야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②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사상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제자가 자기 생각을 말하고, 스승이 가르치고, 제자가 다시 배우는 과정을 통하여 서로의 생각이 맞추어져 간다.
③ 제자들은 이미 배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배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묻고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다. 질문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답을 듣고, 잘못된 생각을 고치면서 배우는 것이다.
④ 그러므로 제자의 말과 행동을 처음부터 완성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자의 말과 행동을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보고 “나댄다”, “교만하다”, “왜 저렇게 자기 생각이 많은가?”라고 판단한다면,
“내가 성경을 볼 때 빛보다 어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진정한 스승이라면
진정한 스승이라면 청출어람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대의를 가지고 제자를 가르친다면,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을 넘어 더 발전하는 제자를 원하는 것이 진정한 스승의 자세일 것이다.
말하지 않는 제자는 생각이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자랐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말하면 그 순간부터 가르칠 지점이 보인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말하는 제자가 오히려 가르치기 좋은 제자일 수 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진정한 스승에게 필요한 제자는 어떤 제자인가? 자기보다 작은 제자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배운 것을 가지고 자신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는 제자인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과 고집하는 것은 다르다
① 자기 생각이 있으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② 그것이 틀렸을 때 교정받겠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③ 잘못 생각했다면 돌이켜야 한다.
④ 주님의 뜻에 자기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
⑤ 체면을 차리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며 우기게 된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과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수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제자에게 필요한 자세일 수 있다.
베드로를 다시 본다
베드로는 자기 의견을 기탄없이 말했다.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베드로의 나댐을 단순히 교만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자기고백이라고 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으면 스승은 가르칠 수 없다.
제자의 의견이나 행동은 주님의 교훈으로 나타난다.
베드로가 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행동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잘못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바로잡으셨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가르치기 어려운 제자라기보다 자신의 상태를 잘 드러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는 제자였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야고보·요한의 특별한 동행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사건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동행하게 하셨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마가복음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변화산에서
마태복음 17:1-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겟세마네에서
마가복음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왜 이 세 사람인가? 단순히 편애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을 가지고 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소망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다.
마가복음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잔을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은 대답했다.
마가복음 10: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나는 이것을 단순히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자신감으로 보기보다, “주님의 나라를 원한다면 그에 따르는 대가도 감당하겠습니다.”라는 의지와 결심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 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영광을 얻는 데 대가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할 수 있나이다”는 베드로의 결의와 같은 결로 보인다.
마태복음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나라를 원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요구되는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다. 베드로 역시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죽음까지 감당하겠다고 결심했다.
둘 다 앞으로 실제로 무엇을 감당하게 될지는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소망과 그 소망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지는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적극적인 모습은 주님께 불편한 것인가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기를 원한다. 그 잔을 마시겠다고 한다.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한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한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주님께 불편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주님과 함께하기를 원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대가를 감당하겠다는 소망이 있다는 점에서 기쁜 것인가?
나는 후자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의와 소망이 주님의 소원과 같은 방향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중요한 사건에 특별히 동행하게 하신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이 이것을 직접적인 이유라고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함께 놓고 볼 때 이것이 합당한 관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중요한 것은 제자에게 소원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소원이 어느 편을 향하는가이다.
주님의 소원과 자신의 소원이 같은 방향에 있는가?
주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그 일을 위해 대가를 지불할 의지가 있는가?
잘못되었을 때 교정받을 수 있는가?
자기 생각을 주님의 뜻에 맞게 수정할 수 있는가?
내가 내린 결론
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공통적으로 주님을 향한 적극적인 소망과 결의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 길에 따르는 대가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결의와 소망이 주님의 소원과 같은 방향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중요한 사건에 특별히 동행하게 하신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세상의 겸손과 교만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주님의 소원과 자신의 소망이 일치하고, 주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하는 적극적인 결의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일 수 있다.
겸손은 단순히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며, 교만은 단순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원이 어느 편을 향하는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누구의 일을 이루는지를 보아야 한다.
내가 성경을 볼 때 빛보다 어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첫댓글 청출어람(靑出於藍)- 먼저 (나온) 풀 포기의 한 가닥(쪽) 빛깔보다 나중 나온 한 가닥 풀 포기의 쪽 빛이
더욱 선명하다는 뜻으로서 학문이나 인격이 스승보다 제자가 더욱 밝고 선명하여 더욱 큰 빛을 발한다는
뜻이니 풀 한 포기 중에서 나중 나온 한 가닥(쪽)의 빛이 세상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친다는 뜻.
예를 들면 쪽파 한 포기 중에서 나중에 나온 쪽이 더욱 생장도 잘되고 실한 경우를 빗대어 제자가 스승보다
학문이나 인격이 더욱 훌륭하여 세상에 자기 만이 아니라 그의 스승을 드높이는 경우입니다.
한 포기의 풀에서 나온 어떤 한 쪽이 자기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자기 스승을 비판하며 자기는 스스로 된
자처럼 언행을 함부로 하는 경우는 상하, 좌우 구분도 못하고 나댄다고 표현합니다.
상하,전후, 좌우를 구분할 줄 도 모르고 나대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물에도, 불에도 자주 넘어지며
거품을 내뿜는 간질 병 환자라고 빗대서 표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