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1987》■■■ (편집)
■ #최환(崔桓, 1943년 4월 20일 ~ )은 제10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본관은 전주
1. 1943년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2. 이부영 전 국회의원, 김정남 전 교육문화 사회수석비서관과 정치학과 동기였고 정치학과 재학 중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3. 영화 1987에서 최환 검사역의 하정우가 '장인 빽 믿고 이러는 거냐'는 소릴 듣는데 바로 그 장인어른이다.
(▪︎李鳳成 1915년 ~ 1998년 2월 2일,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큰 역할을 한 최환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이 그의 둘째사위이다.)
4.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제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5. 전역 후 검사로 근무하였는데, 주로 공안검사였으며, 1980년 국가보위비상 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 및 국가보위 입법회의 내무위원 등을 지냈지만,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는 사건의 은폐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6. 이후 1992 ~ 1993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장, 1995년 9월 ~ 1997년 1월까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내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수사를 담당하였고, 1998 ~ 1999년까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7.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 이인구 대신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원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8.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충청북도 영동군-옥천군-보은군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박덕흠에 밀려 탈락하였다.
9.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문흥수에 밀려 탈락하였다.
현재는 서울 반포동의 최환 법률사무소에서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10. 이야기 : https://spogood.tistory.com/m/433
《#박종철 열사와 다른길을 간 인물들》
■#박종운
1.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2. 동구권의 붕괴에 영향을 받고 사상적 전향을 한 정치인들은 2019년 현재에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비슷한 세대이자 현역 국회의원인 #하태경 의원이 그렇고 전 경기도지사인 #김문수 도 노동계의 전설이었지만, 이후 한나라당에서 활동으로 #수구전향 에 성공했다.
3. 그러나 이후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 정계를 떠난다. 그 후 극우 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수구로 전향했지만, 매년 박종철의 기일(1월 14일)과 생일(4월 1일) 때가 되면 그가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다고 하지만 ....)
■ #오현규
1. 박종운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맨 아래 사진에서, 당시 노제에서 영정을 들고 있던 사람이 박종철의 후배로,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이었던 오현규다.
2. 그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해운대구의원에 당선되었다.
■ #금창태
1. 정권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최초 보도를 내보내서 사건을 세상에 알렸던 그는 1990년대부터 홍석현 대표 아래서 전무, 사장, 부회장 등의 요직을 지내다가 2001년에 중앙일보를 퇴사하고, 2003년에는 동료였던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의 부름을 받아 계열사인 시사저널 사장으로 취임했다.
2. 그러나, 일선 기자들에게 삼성그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고, 결국은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폭거를 저질러서 시사저널 기자단 전원이 파업하는 사상 초유의 '시사저널 사태'를 촉발시켰다.
■ #김두우
1. 신성호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탐사했던 중앙일보 법조계 출입기자이다.
2. 당시 김두우는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의 정확한 이름, 소속 학과와 주소를 찾아냈다. 이 특종 보도로 1987년 당시 신성호, 허상천 기자와 함께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3. 2004년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을 받아 퇴사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회사측에 반려를 요청해서 조용히 복직했다. 이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까지 지냈다.
4. 2008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홍보수석까지 맡아 'MB 정부의 오른팔'로, 'MB의 입'으로 불렸다.
5. 그러나 이후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박근혜 퇴임 이후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언론인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를 받고 있다.
☆《 정권이 무너져도 당시 경질된 고위인사들은 지금까지도 호의호식하고 있다》☆
1. #김성기 당시 법무장관은 대한법률 구조공단 이사장, 주택은행 이사장으로 출세했다.
2.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했던 #정구영 검사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23대 검찰총장을 역임했고 진로문화재단 이사장이다.
3. 이를 진두지휘했던 #서동권 검찰총장은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간 재직하고 이후로도 대통령비서실에 있었으며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하였다. 전직 안기부장들이 흔히 당하곤 하던 구속은커녕 불구속 기소조차 당하지 않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4. #정호용 도 13대, 14대 모두 대구광역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5. #이영창 치안본부장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을 역임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북 경산-청도에서 당선되었다.
6. #박처원 치안감은 같이 구속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집행유예(8개월. 집유2년) 판결을 받고 출소한 후에 고문경찰관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했다. 물론 진심 어린 사죄는 조금도 없었다. 이후 카지노에서 10억여원을 빼돌려 이근안 등의 고문경찰관들에게 지원했다. 범인도피 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으나 고령과 당뇨병 등의 이유로 다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다. 이후 노환으로 사망.
7.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전술했듯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후 은둔생활을 해 오면서 2006년 전직 경찰총수 25명과 함께 전시작통권 반대 성명서에 서명했고, 2018년 7월 8일에 향년 85세로 사망.
8. 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박상옥 은 2015년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었고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결국 박종철 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건 말단 경찰관들 몇 명뿐이다.》☆☆☆
1. #하지만, 그 경찰관 5명마저도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기부터 최고 7년 3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가석방되었다.
2. 그러나 1998년 6월 8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 그 문제의 경찰 세 명이 경찰 산하 기관에 취직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