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배웅
이미나
무더운 날씨에 조바심을 내며 종종걸음을 한다. 장롱 면허에다 승용차도 없는 것이 더욱 후회되는 하루다. 땀을 닦으며 시댁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혼자 거실에서 소리 내어 울고 계신다.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등을 다독거려드리는 일밖에는 없었다. 얼마 동안 연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이것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하고 말문을 열며 오는 길에 산 햄버거를 건넸다. 떠난 딸을 그리워해도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으니 어쩌겠냐며 앞으로 살아갈 날에 마음을 두시라는 말만 해 드릴 뿐이었다.
사실 며칠 동안 벌어진 이 일들이 아직도 꿈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시댁에서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선 남편은 허탈한 목소리로 누나가 죽었다고 내뱉었다. 나는 장난이겠거니 하며 되묻자 남편 대답은 여전했다. 그제야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놀랬다. 그리고 일주일 전 기운 없는 시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럴 수가 어떡해 형님이''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침통한 남편은 경황없이 형제들에게 전화하고, 외지로 가서 농사일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뜻밖의 소식에 놀라시며 눈물 바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함께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이튿날 문상을 다녀오고, 발인 날 아침 6시에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들 유치원 등원을 맡기고 남편과 시아주버니들과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황급히 떠났다. 출발한 지 20여 분 지났을까? 이틀 밤을 장례식장에서 보내신 어머니한테서 7시에 발인하기로 한 일정이 당겨졌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속력을 냈지만, 제시간에 대지 못하고 고인의 영구(靈柩)가 일평생 남편과 함께 가꾼 목장에 다녀간다고 하여 그곳으로 방향을 바꿨다.
목장에 당도하자 영구차에서 어머니와 고모부 그리고 자녀들과 유족들이 내리고 있었다. 당신의 딸과 갑작스러운 작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통곡하시는 어머니, 사랑하는 짝을 보내는 고모부 역시 몸을 가누시지 못하여 딸의 부축을 받으며 오열하였다. 사위가 형님 영정사진을 들고 앞서 걸었고 따라오는 유족들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며 탄식 섞은 눈물을 연거푸 쏟아내었다.
식사라도 대접하며 형님의 힘든 심경을 위로하고 손을 잡아, 드렸어야 했는데 무심코 지나쳐 버린 것이 한이 되었다. 남편 역시 당신 주중에는 직장 일에 주말에는 어머니 댁 농사일과 취미인 낚시를 하느라 바빠 누나의 상황을 살피지 못했다며 자책하였다. 어머니도 고모부도 유족 모두가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생전에 형님이 그렇게 열정을 쏟으셨던 목장을 돌아보고 유족들은 영구차에 올라탔고 나와 남편 시아주버니 두 분은 따로 승합차를 타고 홍성 금마의 화장장으로 향했다.
2시간 가까이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어머니는 내 부축받으시며 넋을 잃은 채 언제고 당신 옆에서 함께 하겠다던 약속을 어긴 딸을 원망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시기도 하셨다. 고모부 역시 북받쳐 오는 슬픔에 정신을 잃으실 듯 힘겨워하자 딸과 사위가 마른 입에 생수를 드리고 청심환을 가져와 복용하게 하며 곁을 지켰다.
모여 있는 유족들과 지인들의 슬픔을 모르는 듯 형님은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형님의 얼굴을 쓰다듬어 드렸다. “형님 얼마나 힘드셨나요. 속으로만 끓이지 마시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죄스러운 마음으로 때늦은 위로를 해 드렸다. 금방이라도 "올케"하고 웃으며 화답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고모부와의 연애담과 여고 시절 학업도 우수하여 담임선생님이 대학에 보내려고 눈여겨 둔 우등생이셨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해 주실 듯한데 형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매사 꼼꼼하시고 빈틈이 없으며 추진력도 강하셨던 형님!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실 만큼 요리 솜씨도 좋으셔서 시댁 식구들 모임에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놓으셨던 형님! 윗사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뜰히 챙기시고 조카인 우리 아이들도 아껴주셨던 형님! 시댁에 며느리가 셋이지만 한 분은 시댁과 왕래하지 않고, 또 한 분은 이혼했고, 사실상 외며느리가 되어 버린 내게 명절 때나 시댁 모임 때 오셔서 격려해주셨던 형님을 보내야 한다니 한없이 슬프고 쓸쓸했다.
만으로 7년을 알고 지낸 올케도 이렇듯 마음이 아픈데 사랑하는 딸, 아내를 잃은 어머니와 고모부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시겠지. 그 어떤 위안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보듬어 드릴 수 없음을 알기에 손을 꼭 잡아, 드리며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되어 어머니와 고모부를 비롯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줌의 재가 된 형님의 유골함이 나오자 이승에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는 비통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유골함과 유족을 실은 영구차는 다시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납골당에 도착하여 지정된 곳에 형님 사진을 놓자 가슴속에 살아 있는 형님을 그리워하는 유족들의 오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제 다른 곳에 계신 형님의 영혼이 세상 시름을 잊고 편안히 쉬시길 기도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며칠 후 다가오는 형님 생신에 다른 납골함 공간처럼 형님의 생전에 아끼던 물품이나 기념할 만한 사진들을 넣어 두자며 일정을 접기 시작했다.
모두가 차를 타고 형님 목장 인근에 형님이 생전에 자주 가셨던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착잡한 마음으로 고모부께 인사를 하였다.
서울 집으로 떠나며 어머니 걱정으로 수심이 가득한 첫째 시아주버니께 남편과 나는 어머니를 잘 챙겨드릴 테니 마음 편히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이제는 어머니께 자주 찾아뵙고 안부 전화도 종종 드리자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사흘 밤낮을 고인이 된 딸 곁에서 눈물로 지새우셨을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오늘, 내일 우리 집에서 계시라 하였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이윽고 둘째 시아주머니 차에 탑승한 나와 남편은 집에 도착하였고 한숨만 내쉬시는 어머니 등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집으로 들어서며 심란한 걱정거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형님이 21살에 이른 결혼을 해서 아들은 예비 배우자를 데려오고 딸은 작년 가을에 결혼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안도는 하지만 무엇보다 혼자 목장 일과 집안 살림을 하며 식사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모부가 마음에 걸렸다. 식사를 도와주는 여동생분이 계시다지만 가끔은 내가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고 실의에 빠진 어머니께 주중에 자주 찬 거리를 사 들고 위로해 드려야 할 것 같다.
물론 수고스럽고 바빠지겠지만 형님의 빈자리에 허전함을 달랠 길 없는 시댁 가족분들을 위해 그리고 하늘에서라도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떠난 형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드리는 길이라 생각하며 더욱 애써야겠다는 심중의 말을 남편에게 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마음 아파하는 고모부와 아들, 딸, 어머니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세월이 약이라며 어서 아픔들이 무뎌지길 바란다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지쳐 잠이 들기 전 얼른 씻고 어머니와 고모부, 조카들에게 다시 한번 위로의 문자를 보낸다. 이튿날 아침 고모부로부터 작년 형님 생신 때 한정식 식당에서 형님과 어머니가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 밝게 웃고 계신 사진과 고모부와 형님이 등산하며 정상에 올라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을 보내오셨다.
그리고 “내 목숨보다 더 고귀한 사람 보고 싶습니다.”라는 고모부의 메시지에 나는 한동안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