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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봄집회 - 새 생명 안에서 행함]
5. 연합 안에서 새 생명 - 2018년 5월 7일 오전 이현래 목사님
로마서 6장 3절 4절을 보겠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이번 주제가 <새 생명안에서 행함> 이다.
새 생명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있다. 무엇이 새 생명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연합으로 구성 된 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전부 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라. 식물이건 동물이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의 연합체이지 혼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단성적인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있다고 해도 있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정도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연합체이다.
심지어 우리 사람도 반쪽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틀어 만든 것이 아니고 두 조각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더라. 뇌도 두 조각이 붙은 것이다. 어떤 것도 혼자 된 것이 없다.
이것을 중국철학에서는 음양으로 해석했다. 주역이라는 책은 중국철학의 기본이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온다고 했다. 자기들도 그 태극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비인격적인 말이니까 우리가 참고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니까 태극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을 자세히 보면 음양이다. 음과 양으로 되어있다. 음만 있는 것도 없고, 양만 있는 것도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통치를 위함)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하나님은 너무 높고 또 영이신데, 사람은 육체이다. 너무 질이 다른 두 존재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인간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신과 인간은 완전히 별개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하나님도 혼자는 아무것도 못하기는 분이다. 혼자로서도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활동을 하실 수가 없다. 자기를 표현할 수가 없다.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대상으로서 만물을 지었지만 그 만물 중에서 특별히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는 말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분이다. 비유한다면 마음과 같은 것이다. 마음은 형상이 없다. 이 마음이 표현되려면 뭔가가 있어야 된다. 마음은 마음대로 있는데, 그 마음이 보이지를 않는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보면 어떤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괴물이 되어버렸다. 말도 못하고 짐승처럼 되어버렸다. 가족들이 전부 와서 보고서는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한다. 말을 못하니까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한다. 처음에는 불쌍하다고 하다가 다음에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를 자기 앞에서 의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현대인의 막혀 있는 상태, 불통하는 상태를 설명하려고 그런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있으면 뭣 하겠는가?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성질이 완전히 다르지만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내가 손발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6.25때 부상을 당해 온 사람이 있었는데 팔다리가 없고 몸통만 있다. 니꾸사꾸라는 요즘 들러 메고 다니는 가방에 그 사람을 넣어서 한 사람이 업고 다녔다. 그때는 보훈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상이용사들이 구걸해서 살았다. 이 사람을 업고 가서 돈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구걸을 돌고 와서 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돌고 와서는 그냥 짐짝처럼 버려놓는다. 손이 있는가? 발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둥구처럼 그냥 놔두는 대로 있다. 인간이 정말 비참하더라. 속에 마음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마음이 있는데 손도 없고 발도 없으니까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말은 한다. 말을 해도 남이 들어주면 다행이지만 안 들어주면 할 수 없다. 쫓아갈 수도 없다,
내가 병원에 있어보니까 입에는 마우스를 끼워놓으니까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이불 하나 덮어달라는 것이 표현이 안 되니까 안 된다. 사람은 자기가 굉장한 것 같지만 사람도 누군가가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불변하는 실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표현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를 잘 생각해보면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육신이니까 잘못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고, 그러다 죽으면 썩어버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해 보았자 죽으면 그만이지, 이러면 인생이 할 말이 없다. 잘 살면 뭣하겠는가? 못 살면 뭣하겠는가? 많이 알면 뭣하겠는가? 모르면 뭣하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은 딱 죽음이기 때문이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너무 인생이 허망하다. “흙이니(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무엇을 했더라도 어떻게 살았더라도 마지막은 똑같다는 말이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귀중한 존재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명한 사람도 있고, 유명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로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가면 다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시간이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쓰실지 모른다. 내 인생이 어떻게 쓰여질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너무 귀중하다.
나는 어려서 병이 들어서 일생 동안 반 건강상태로 살았다. 힘 한 번 써보지 못했다. C.C.C.에 있을 때 단체로 설악산 관광을 갔다. 대청봉을 올라가서 오색약수터로 내려가는 코스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대청봉에 올라갔다. 하루 저녁을 산 꼭대기에서 자고 왔다. 거기 가서 머리털 자르고 손발톱을 잘라서 땅에 묻고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내려왔다. 나는 올라갈 수가 없다. 겨우 울산바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저리 돌아서 오색약수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머리털 자르고 손발톱 잘라서 하나님께 맹세한 사람과 비교가 되겠는가? 일을 한들 비교가 되겠는가? 그런데 그 사람대로 하나님이 다 쓰신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그 사람대로 하나님이 쓰신다. 쓰면 귀중해 진다. 그냥 귀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써야 귀중하다. 아무리 값비싼 것도 쓸 사람이 없으며 고물상에 간다.
늘 말하지만 전기공사 하다가 나온 둥근 케이블이 있는데, 그 안에 구리가 가득 들어있다. 구리 값이 굉장히 비싸다. 그런데 공사하다가 잘라져 버리면 이어 쓸 수가 없는 모양이다. 30만볼트가 흐르는 전기이니까 연결해서 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중간쯤 쓰다가 끝나버리면 쓸 수가 없으니까 고물상에 나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쓸 데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누가 나를 써준다면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 청소라도 시켜준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나를 써주면 감사한 일이다. 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써주기는 써주어야 되지 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는 고기로라도 쓴다. 한 근에 4~5만원을 하는데 사람 고기는 얼마나 하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었다는 이것은 너무너무 귀중한 말씀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인생을 이렇게 귀한 값으로 쳐주는 말씀이 없다. 그러니까 복음이다. 세상에 나가보라. 내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 기업체에 가보라. 내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 얼마 되지 않는다. 큰 기업체의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지었다고 한다. 거짓말이라도 이렇게 재미있는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좋은 말을 아무리 하면 뭣 하는가? 아무리 해도 나를 써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함)
그런데 성경은 너무너무 귀한 책이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고 표현한다. 점잖게 표현하느라고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고 했다. 원문에는 남성과 여성, 더 원문에는 암수라는 뜻이다. 암컷과 수컷으로 지었다는 말이다. 2장에 가면 남자와 여자가 나오지만 1장에서는 암수로 지었다고 한다. 사람만 지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지었다.
왜 암수로 지었는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는 안 된다. 우주를 혼자 날라 다닌다고 해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안 된다. 아무것도 몰라도 남성과 여성이 만나야 생육하고 번성한다. 이것도 얼마나 큰 복음인가!
형상과 모양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것이다. 통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 지었다는 말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쓴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해서 하나님의 번성을 위해서 지어진 존재이다. 오늘 이 말씀만 들어도 천만금보다 나은 것이다. 내 가치가 이것보다 높아질 수가 없다. 내가 나를 귀하게 알아야지 내가 나를 귀하게 알지 못하면 불행한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참 귀하다고 알아야 행복하다.
아이들도 너는 쓸모 없어, 너는 쓰레기야, 이러면 죽이는 것이다. 공부를 못한다고 너는 앞으로 뭘 하겠느냐, 지게꾼이라고 되라고 하면 사람 죽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해도 너는 최고야, 그렇게 해주어야 자존감이 생긴다. 부모가 귀중하게 여기는 아이들은 문제가 없다. 좀 시원찮다고 공부 못한다고 말 듣지 않는다고 뭐라고 해버리면 아이가 쓸모 없는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어디를 가도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 한다. 자기 부모가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세상에서 알아줄 사람이 없다. 자기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첫째 행복이다. 그것을 모르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귀중한 위치를 사람이 이탈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나타낼 그 위치, 하나님을 번성케 할 그 위치를 버리고 나갔다. 이것을 보고 원죄라고 한다. 이 귀중한 은혜를, 이 귀중한 축복을 버린 것을 원죄라고 한다.
사단의 방해로 인간이 위치를 이탈함
인간에게는 두 가지 노선이 정해졌음
생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연합하여 아들이 되고 선악과를 먹으면 마귀와 연합하여 하나님 같이 됨
이것이 인간이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노선이 있다.
원래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라 이것도 둘이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 아들이 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사탄과 연합하여 하나님 비슷하게 된다. 하나님 같이 된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용이 못된 이무기와 똑같다. 하나님이 볼 때는 뱀도 아니고 용도 아니고 사람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고 하나님 같이 되었으니, 이제 저것이 생명나무 과일까지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래서 추방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사람이 있어야지 하나님 비슷한 것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면 확실히 사람이어야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면 안 된다. 도를 닦는데 가보면 다 신이 되려고 한다. 어떻게든 고생해서 신의 경지에 도달해 보려고 한다. 신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괴물들이다. 뱀이 용 되려고 하면 이무기라고 한다. 뱀이면 뱀이고, 용이면 용이어야 한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신이면 신이어야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예수를 믿는 첫째 원인이 사람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맨 처음 부임했던 교회에서 설교한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그때 나는 사람이 되려고 믿는다고 했다. 그때는 확실히 모르고 한 말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이 된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니까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했다. 이것은 네가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네게 알려준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그때 말한 것도 그런 것 같다. 그때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다. 잘 몰랐는데도 하나님 믿는 것은 사람 되려고 믿는 것이라는 말을 담대하게 했다. 내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는 말이다.
#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었음으로 하나님의 동산(영역)에서 추방되었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어버렸다. 하나님 아닌데 하나님 같은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 인생에게 부여 된 모든 사명과 축복이 상실되고 저주 받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와 싸우다가 결국엔 흙으로 돌아감.
인생에게 부여된 모든 축복을 다 잃었다. 자리가 있으면 자리에 따라서 뭔가가 주어진다. 말똥 하나에게 부여된 권리가 있고 2개에 부여된 권리가 있고 3개에 부여된 권리가 다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별도 한 개짜리 2개짜리 3개짜리 4개짜리까지 있다. 그 하나하나마다 붙어있는 그 권리가 엄청나게 크다. 자기 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밥풀 하나인 소대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도 같은데 일선에서는 생살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쟁 때는. 수색대에 있는 장교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밥풀 떼기가 굉장한 것이라고 한다. 뭐가 굉장하냐고 하니까 매일 수색을 하다고 어제 없던 이상한 데가 나오면 누군가가 거기를 들어가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 폭발물이 들어있는지 뭐가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자기 소대원 30명 중에서 누구 하나를 지명해서 들어가라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소대장이 들어가면 좋지 않느냐고 하니까 소대장은 들어가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소대장이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대원 한 사람을 넣어야 되는데, 그 안이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는 다 귀한 사람들이다. 차출해서 죽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명령을 해야 되는 것이다. 안 들어간다고 하면 총살이다. 그렇게 권리가 있다고 한다.
계급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리이다. 그 사람의 위치이다. 그 위치에 따라서 부여된 것이 굉장히 많다.
오성 장군은 얼마나 많은 권한이 부여되어 있겠는가? 맥아더장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하고 일본 천황에게 항복을 받는다. 신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항복을 받는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대에 신이라고 하는 그 천황이 찾아왔다. 무릎 꿇고 하는 말이 우리 백성을 살려주시오.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천황이라는 사람이 오성 장군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리 백성을 살려달라고 했다. 오성 장군의 권리가 얼마나 크면 그렇게 하겠는가?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가 얼마나 큰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번성케 할 그 권리가 주어져 있는데, 권리가 주어져 있으면 그 만큼 풍성한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렸다. 그러니 무슨 축복이 있겠는가? 3장에 가서는 땅은 너로 인해서 저주를 받을 것이고 네가 가는 곳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있을 것이다. 너는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는 고생만 하다가 죽는다는 말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도로 흙이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비참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못 살아서 비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중한 축복에서 이탈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니까 괜찮지만 이것을 알고 나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지옥이 어디인지를 모르면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이라는 말을 할 때는 무엇을 보고 하는 말인가? 폐기물 처리장을 보고 한 말이다. ‘게헨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옛날에 나는 봤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돌무더기가 있다. 모든 쓰레기를 거기에 갖다 버린다. 고양이 죽은 것도 버리고 돼지새끼 죽은 것도 버리고 온갖 죽은 것을 다 버린다. 학교 갈 때면 그 길을 지나가야 되는데, 썩은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지나간다. 그리고 불을 피우기 때문에 항상 연기가 난다. 이것이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지옥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가? 쓰레기 모이는 곳을 말한다. 쓸모 없는 것이 모이는 곳이다.
사람이 쓸모가 없으면 지옥이다. 지옥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도 쓸모가 없어지면 지옥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지옥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쓸모가 없어지면 지옥이다. 내가 아무리 약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내가 아무리 보잘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쓰시면 천국이고, 아무리 내가 잘났다고 해도 하나님이 쓰지 않으시면 지옥이다. 지옥이 다른 것이 아니다. 멸망이라는 말은 불구덩이에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버려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대책으로 아들을 보내심(요3: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려고 멸망치 않게 하려고 아들을 보낸 것이다. 인생에 부여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이제는 축복된 것이 없다. 많은 것을 모아 놓아도 축복이 안 된다. 재산도 많은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지식도 많은 사람도 엄청 많다. 가진 것이 엄청나게 많고, 얻은 것이 엄청나게 많은 데도 감사가 안 된다. 요즘 우리나라 같은 경우 부자들이 고생을 한다. 그렇게 많으면 좀 나눠주지 꼭 자기 자식한테만 줄 일이 뭐가 있는가. 남도 좀 주면 욕을 얻어먹지 않을 텐데 감사가 없다. 은혜가 없으니까 그렇다. 원래 있어야 될 감사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가져도 감사가 없는 것이다.
우리 배가 뭘 먹으면 배부르다. 만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꼭 먹을 것을 먹어야 만족하지 먹을 것이 아닌 것을 먹으면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만족이 안 된다. 지금 단백질이 필요한데 단백질이 아닌 것을 아무리 먹어도 만족이 없다. 지금 탄수화물이 필요한데 탄수화물이 아닌 것을 아무리 먹어도 만족이 없다. 꼭 필요한 것을 먹어야 된다.
그런데 인생에 꼭 필요한 그 축복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만족이 없다. 높아져도 만족이 없고 부유해져도 만족이 없다. 존재 안에 감사가 있으면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다. 바울이 그랬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풍부하면 풍부한 대로 감사하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감사하다. 왜? 존재 안에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없으니까 불행하다는 말을 하면 시간만 낭비한다. 인생 낭비다. 가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을 얻어야 되는데, 이 축복이 없으니까 다른 것을 아무리 가져도 행복이 안 된다. 꼭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꼭 밥이 없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이 그 말이다.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 흉년이 들었는데 논밭이 욕심이 나니까 자기 먹을 것을 남겨놓지 않고 논을 사기 위해서 먹을 것을 다 팔아버렸다. 그러면 자기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것이다. 금붙이를 먹고 살겠는가? 논을 먹고 살겠는가? 사람은 하나님께 쓰이는 것보다 더 축복이 없다.
그런데 위치를 제대로 가지고 있어야 쓰이지 위치가 틀리면 쓰일 수가 없다. 아무리 유명한 장군이라도 위치가 다르면 쓸 수가 없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여포를 잡아다 놓고 쓸려고 하면 달아난다. 그러면 놔준다. 또 잡아다 놓는다. 또 달아난다. 달아날 줄 알면 놔둔다. 왜 그런가? 그 여포라는 놈 속에 반골이 들어있다. 이 놈은 항상 배신하게 되어있다. 몇 번이나 잡았다가 놓아주었다가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할 수 없이 항복하여 돌아오는 것이다.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는 그 어리석은 인생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축복이 없으면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고 만다. 이것이 있으면 행복하겠지, 저것이 행복하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행복은 있고 없는 것에 있지 않다. 물론 너무 가난하면 안 된다. 너무 가난할 필요는 없다. 내가 노력하면 너무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 노력만 한다면. 게을러서 그렇지 정말로 노력한다면 굶어 죽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 것인가? 그래서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낸 것이다. 모든 축복을 다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멀쩡하게 사람으로 생겼는데 하나님 축복이 없다. 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쓸 수가 없다. 전쟁을 잘하면 뭣 하는가? 위치가 이탈되었으면. 오히려 거꾸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면 못 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 쓸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을 사탄이 보니까 놔두면 안 되겠다. 그래서 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다. 먼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갔다. 추수 때가 되어 사람을 보냈더니 욕하고 때려서 보냈다.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영접하고 환영하겠지 하고 보냈더니 이놈들이 아 상속자구나. 이놈만 죽여버리면 포도원이 내 것이 되겠다 싶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자기 비유를 그렇게 들었다.
아들을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탄의 생각이다. 자기는 지금 가짜다. 하나님 같이 된 가짜다.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 판에 진짜가 왔다. 그러면 안 된다. 짝퉁만 진열해 놓고 있는 가게가 있다. 짝퉁만 팔고 있는데 진짜를 하나 갖다 두면 그 가게는 버린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가짜를 다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진짜를 없애야 된다. 짝퉁을 많이 팔아 먹으려면 진짜를 없애야 된다. 꼭 같은 것이다.
사단은 아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사용함 (십자가는 연합을 해체시키는 도구임)
그러니까 예수를 놔두면 안 되는 것이다. 진짜니까 안 되겠으니까 예수를 죽였다. 그런데 뭘 사용했는가? 십자가를 사용했다. 이 십자가는 뭘 하는 도구인가? 어떤 생명이라도 연합을 해체시키는 도구이다. 사람이 연합체라고 했는데, 생명과와 연합한 연합체거나 아니면 선악과와 연합한 연합체거나 하여간 연합체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벌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벌이 세 종류라고 한다. 숫벌, 일벌, 여왕벌, 이 세 종류라고 한다. 어떻게 알을 따로 깐 것이 아니라 알은 다 같은데 먹이에 따라서 숫벌이 되기도 하고 일벌이 되기도 하고 여왕벌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신기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지게 되어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돼버렸다. 사탄이 말한 대로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다. 가짜다. 쉽게 말하면 짝퉁이 된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아들이 된 사람이다.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었겠는가? 하나님이 언제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겠는가? 천주교에서는 천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이렇게 이야기한다. 천주라는 말은 예수를 가리켜 한 말인데 우리가 들으면 좀 이상하다.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님, 여성 중에 복이 있습니다. 태 중의 아이 또한 복이 있습니다. 이제 죽을 때 제 영혼을 위해서 빌어주시옵소서. 기도문이 그렇다. 천주의 어머니는 잘못하면 하나님의 어머니가 된다. 하나님이 부인이 있겠는가? 그래서 낳은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었는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서 아들이 되었다. 우리도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이 된다. 우리는 원래부터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벌의 알은 똑같은데 먹이를 그렇게 먹인다고 한다. 어떤 벌에게는 숫벌이 될 양식만 먹이고, 어떤 벌에게는 일벌이 될 양식만 먹이고, 어떤 벌에게는 여왕벌이 될 양식만 먹인다고 한다. 아주 계획적으로 산아제한을 철저히 하고 인구 경계를 철저히 한다고 한다. 숫벌은 여왕벌과 교미가 끝나고 나면 죽는다. 왜냐하면 꿀만 축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벌은 일을 해야 하니까 일벌만 남는다. 얼마나 일을 하는가 하면 여름에는 40일 동안 일을 하다가 죽는다. 여왕벌은 4년 동안 살면서 매일같이 알을 깐다. 음식 때문에 그렇게 결정된다. 이것이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음식 때문에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먹는 것에 따라서 듣는 것에 따라서 보는 것에 따라서 달라진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것이 아이가 보는 대로 한다. 시장에 살았더니 맨날 물건 파는 이야기만 한다. 장의사 쪽에 갔더니 맨날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가르치려면 도저히 이런 곳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같으면 학교인 서당 근처로 갔더니 책 읽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 옮겼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똑같다. 보고 듣고 만진 것이 무엇이냐가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은 아주 예민하고 감수성이 있기 때문에 어릴 때 뭘 만지고 본 것이 무의식 중에 자기 속에 들어가 버린다. 무의식 중에 들어가기 때문에 자기도 뭐가 들어왔는지 모른다. 굉장히 중요하다.
아들은 왜 아들이 되었는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서 아들이 되었다. 생명나무와 아들 둘을 합한 것이다. 혼자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열매를 통해서 아들이 되었다. 십자가는 무엇 하는 것인가? 이 둘을 쪼개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체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연합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시키는 것이 십자가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어떻게 말하는가? 겟세마네 동산에 갔을 때는 “아버지여, 내가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길 수 있으면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마음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6시간 만에 마지막으로 나온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했다. 그것도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라고 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버렸다는 말이다. 분리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 연합한 아들은 해체 되고 사람만 남음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십자가가 그냥 죽이는 것만 아니고 생명을 분리시켜 버린다. 갈라버린다. 연합을 해체시킨다. 그러면 뭐만 남는가? 사람만 남는다. 내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를 이야기한 이유는 그 사람만 남은 사람을 보고 말한 것이다. 그 전에는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니까 사람만 남았다. 하나님인 그분은 어디로 가고 없고 댕그라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만 남았다. 밭에서 곡식을 싹 거두어가고 나면 댕그라니 흙만 남는다. 오곡이 무르익어 풍성하던 그 밭이 추수하고 가면 아무것도 없고 댕그라니 흙만 남는다. 거기에 또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냥 흙이다. 귀중한 농산물을 생산했다고 해서 그 흙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냈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그냥 있다. 연합이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말하면 원소와 원소의 결합 같은 것이다. 두 원소를 결합해놓으면 우리가 제일 잘 아는 것이 물이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놓은 것이 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전기분해를 통해 갈라버리면 도로 산소와 수소로 갈라진다. 수소는 수소 대로 있고, 산소는 산소 대로 있다.
사람과 하나님이 연합해서 우리가 볼 때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십자가로 쪼개 버리니까 둘로 갈라져 버렸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사람만 딱 남는다. 그 영광이 어디로 갔는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여도 부스러기가 12광주리가 남았던 그것이 어디로 갔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던 그분이 어디로 가고 없는가? 그것을 보고 따라 왔던 제자들이 다 실망하고 가 버렸다.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겠구나 하고 3년 반 동안 따라 다녔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그냥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실망하고 가버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이다. 진짜 산소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는데 물이 되었으면 산소가 없어진 것 같다. 그것을 다시 분해하면 그대로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원소라고 한다고 한다. 원소불변의 법칙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 있다가 갈라져 버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대로 남고, 사람은 사람 대로 남았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한 아들을 낳는다. 아기를 통해서는 둘이 부부이다. 그러나 이혼을 하면 완전히 남남이 돼버린다. 어제 내 아내였다는 소리를 하면 맞는다. 어제 내 아내였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늘 이혼하면 남이다. 낳기는 한 아기를 아무리 낳았어도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이다. 남자와 여자가 합해져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연합이다.
미국이 지금 United Nations이다. 여러 개의 주들이 모여서 한 나라가 되어있다. 연합체이다. 미국은 어떤 주가 빠져나가려면 빠져나갈 수가 있다. 캘리포니아 주가 독립해 나갈 수도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캘리포니아 주 대로 정부가 따로 있고 군대도 따로 있다. 나라와 나라들이 연합되어 있는 것이 미국이다. 연방정부가 있고, 지방정부가 있다. 군대도 연방군인이 있고, 지방군인이 있다. 그것이 연합이다.
그대로 있는데 둘이 합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합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합하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면 하나님인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해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철씨 일을 해도 내가 이*철씨는 아니다. 똑같다. 십자가를 통해서 연합을 해체시켰다. 아들은 아들이 아니고 사람으로 나와버렸다. 그러면 완전히 망한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단과 연합한 아담도 해체되어(사람만 남음)
사탄과 연합한 아담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탄과 연합한 아담도 마찬가지로 쪼개졌다. 왜? 십자가는 혼자 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졌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사탄은 생각할 때 하나님 아들만 쪼개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자기 아들도 쪼개져 버렸다. 우리가 옛날에 아담인데 우리가 십자가 앞에 딱 가버리면 우리도 똑같이 갈라져 버린다. 우리도 사람만 남고 예수도 사람만 남는다. 십자가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 사탄이 그것을 몰랐다. 자기 새끼는 괜찮을 줄 안 것이다. 그런데 다 갈라져버렸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거기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만 그렇게 되고 말았으면 안 되는데,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내가 언제 십자가를 같이 졌는가? 나는 십자가를 본 일도 없다. 그런데 그가 죽으실 때 내가 죽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놀라운 사람이다. 바울은 예수를 본 일도 없는 사람인데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함께 죽었다고 한다. 믿는 사람만 함께 죽은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인류가 다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해체가 되는데 무엇과 해체가 안 되겠는가? 하나님 아들이 해체가 되는데 무엇이 해체가 안 되겠는가? 다 해체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도 속은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하나님 같으니까 괜찮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같으나 이무기 같으나 용이 되었거나 하여간 십자가 앞에서 다 쪼개지고 말았다.
그러면 예수님에게도 사람만 남고, 우리도 사람만 남으니까 뭐가 되었는가? 사람끼리 만난 것이다. 내가 수학을 잘 몰라서 그렇지만 수학에 그런 것이 있을 것 같다. 이쪽에서 나온 답이 하나 있고, 저쪽에서 나온 답이 하나 있는데, 둘이 똑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게끔 되었다.
우리는 전에는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연합된 연합체이고, 예수는 생명나무를 먹고 연합한 연합체이다. 그 차이가 천지 차이이니까 만날 수가 도저히 없다. 존경할 수는 있지만, 사모할 수는 있지만, 따라 간다고 애쓸 수는 있지만 함께 만나지지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시매”라는 이 말은 성막이라는 뜻인데 이 성막의 다른 이름은 회막으로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을 통해서밖에 만날 수가 없었다. 진짜로 만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왔는데 우리가 만날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웠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것 가운데 제일 어려운 것이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살아지는가? 못 살아진다. 아무리 해도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다. 비슷하게 살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다. 왜? 근원이 다르다. 하나는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이고, 하나는 사탄과 연합된 사람인데 어떻게 같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처럼 선하게 하려고 하면 위선이 돼버리고 만다. 예수님처럼 충성하려고 해도 위선이 돼버리고 만다. 다 가짜가 돼버린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최대의 고민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제 해체되었다. 해체되었으니까 어차피 사람 대 사람이 남았다. 그러면 수학을 풀기가 좀 쉬울 것이다. 약분하고 어쩌고 하다 보니까 해답을 찾을 때가 돌아왔다. 내가 수학을 잘 알면 설명을 잘하겠는데 수학의 천재가 아니다,
# 다시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강화되었음
여기서 분리된 인간, 갈라진 인간은 무엇이 되었는가? 다시는 유혹을 받지 않을 사람으로 강화가 되었다. 내가 가짜가 되어보았으니까. 예수도 믿어보고 별 것을 다해 보았다. 그런데 결국 가짜다. 이제는 다시 속지 않게 된다. 네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것에 속지 않는다. 속지 않을 수 있는 인간으로 강화되었다.
# 이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으로 구속 되어 예수 안에 있게 되었음(고전 1:30)
이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이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한 사람이다. 왜?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똑같다. 하나다.
우리는 여기서 연합이 가능하다. 예수와 우리의 만남이 여기서 가능하다. 다른 데서는 못 만난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별 것을 다 해보아도 예수를 만날 수 없다. 만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만난 것이 아니다. 둘이 하나가 안 되는데, 어떻게 그것이 만난 것인가? 여자는 미국에 있고 남자는 한국에 있다. 매일 전화를 한다. 사진을 보낸다. 그러면 만난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만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매일 기도하고 매일 기도하고 매일 해도 못 만난다. 같지 않으니까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모든 인류가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탄은 자기 편만 살리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도로 사람을 다 뺏겨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다.
씨름 선수 중에서 이*기가 유명하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옛날에는 이*기가 제일 유명했다. 이 사람의 특기가 엎어치기다. 허리로 엎어치는 것인데 자기가 넘어지는 것 같은데 도로 친다. 이*기가 허리 힘이 굉장히 강하다고 한다. 이*걸과 둘이 대결을 했는데, 이*걸은 키도 크고 체중이 훨씬 무겁다. 초판에는 이*기를 번쩍 들고 있다. 들고 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도로 내리면 허리를 붙들고 매는 것이다. 그래서 번번히 져서 천하장사를 못했다. 뒤로는 코치가 머리를 써서 꾀를 쓰지 말고 무조건하고 누르라고 했다. 먼저 꾀를 쓰면 이*기에게 당한다. 꾀를 쓰지 말고 누르라고 했다. 이 힘센 사람이 누르니까 이*기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꽉 누르니까 어쩌겠는가? 그래서 뒤로 이겼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참 놀랍다. 사탄은 언제나 앞장 선다. 그러나 항상 9회말 홈런을 하나님이 치신다. 끝까지 웃는 자가 웃는 자다. 다 같이 웃었는데 끝까지 웃는 사람이 웃는 사람이다. 끝까지 이기는 사람이 이긴 사람이다.
노름방에 가면 끝까지 이긴 사람이 이긴 사람이다. 초반에 아무리 이겨보았자 소용 없다. 돈을 많이 땄는데 새벽이 되면 다 잃어버린다. 꾼들은 다른 사람들이 헤롱헤롱할 때 새벽에 돈을 딴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신이 말짱할 때는 못하고 새벽이 되어 졸립고 지치고 할 때 기술자들은 그때 기술을 부린다고 한다.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전부를 이기는 것이다. 섰다라는 것이 있는데 3개가 열이 되고 2개가 몇 끝이냐 인데, 기술자들은 상대방에게 아홉 끝자리를 주고 자기는 열 끝자리를 가지고 간다. 마지막에 돈을 지르는데 구삥이니까 내 위에 누가 있겠냐 싶어서 계속 지른다. 장땡을 가진 사람은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 간다. 마지막에 돈이 다 돼가면 구삥짜리가 내 것이라고 가지고 가려고 하면 장땡을 딱 내놓는 것이다. 그 맛에 노름을 한다. 노름을 하여 살림을 다 팔아먹고 완전히 알거지 된 사람을 보았다. 돈 보다도 재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니까 항상 그렇다. 사탄은 항상 구삥을 가지고 내 위는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장땡을 내놓고 봐라 하는 것이다. 아들은 상속자다.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새끼 죽을 줄은 몰랐다.
완전히 어디로 다 돌아갔는가? 하나님께로 다 돌아가고 만다.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 포함되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내가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가겠는가? 내가 들어갈 수가 없다. 신앙이 좋으면 예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 자리에 가야 내가 예수 안에 있지 다른 데서는 그 안에 내가 없다.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구속이 된다. 예수 안에서 구속됐다는 말이 그 말이다.
#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안에서 구속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
새로운 피조물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함
모든 사람이 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 나왔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옛날에 이 구절이 너무너무 좋았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했는데 사실은 잘 몰랐다. 잘 몰랐는데 이 말이 너무너무 좋더라. 이 말만 들어도 얼마나 좋은가? 그 말만 좋아가지고 뭐 하냐 이렇게 들어서는 안 된다. 일단 좋으면 좋은 거라야 되지 나는 옛날에 이 말이 너무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를 알고 좋아했는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뭘 알았는가 모르겠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좋은가. 내가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겠나. 내가 어떻게 새 사람이 되겠나. 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다. 죽은 후에 되기는 뭐가 되는가? 살아서도 안 되는데 죽어가지고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 살아서 안 된 것이 죽어서 되겠는가? 살아서 되어야 한다.
사탄이 장난을 쳐 놓았는데 오히려 뭐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만 넘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꾀를 써도 결국 하나님에게 진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이다. 앞에 전반부는 난리다. 해가 1/3이 어두워지고 어쩌고 하는데 마지막에 가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바벨론은 사탄이 만들어 놓은 최고의 작품이다.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난 후에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게 된다. 이 성경을 읽으면 너무너무 재미있다. 재미있는 것이 역전승이다. 역전승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쭉 이기면 재미없다. 지는 것 같은데 이기고 지는 것 같은데 또 이기고 놀라운 분이다. 세상에 이런 재미있는 드라마가 어디 있고 이렇게 재미있는 연극이 어디 있겠나. 새로운 피조물.
그래서 로마서 6장에는 함께 죽고 함께 산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다. 그와 함께 죽었은즉 그와 함께 산 줄을 믿는다.(롬6:3,4 참조) 당연히 그렇다.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 말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와 함께 산다는 말이다. 그가 하늘에 오르면 나도 하늘에 오르는 것이고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으면 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것이고 그가 다시 오시면 나도 같이 오는 것이다. 왜? 그와 함께 죽었으니까 여기 함께 연합한다는 이 말에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그의 모양과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그 말이다. 그의 모양과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그의 모양과 같은 모양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똑 같은 모양으로 죽었다. 여러분 다르게 죽었는가? 똑같은 모양으로 죽었다. 예수님 죽으신 그 모양 그대로 죽은 것이다. 조금도 다르지 않게 예수님 죽으신 그대로 죽은 것이다.
예전에는 내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예수님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이것 찾다가 다 늙었더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이것을 찾아봐야 안 된다. 아침에는 있는 것 같은데 저녁에는 없고 저녁에는 있는 것 같은데 아침에는 없다. 계속해서 있다는 사람은 없다.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은 잠을 자도 그 자리고 일어나도 그 자리고 들어가도 그 자리이다. 왜? 예수 안에 있으니까. 내 안에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처럼 불안한 것이 또 없다.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 다음에는 안 계셔도 내가 원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저녁에 보니까 말짱 헛일이 되었다. 이상하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뜻대로 기도한 기도인데 왜 안 들어주시나 이렇게 생각을 했다. 왜 이것을 안 들어주실까? 내가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벼슬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것을 안 들어 주실까? 생각했다. 하루만 해달라는데 하루만 온전히 주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데 왜 안 될까? 참 하나님도 야속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속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리스도 안에 가보면 안다. 그리스도를 보면 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골짜기를 가다가 원망을 했다. 그런데 독사 떼들이 나와서 사람을 물었다. 독사에 물려서 다 죽게 되었다. 사막에 독사는 지독한 독사이다. 방울뱀 같은 것들이 사막에 산다. 물리면 죽는다. 그런데 모세가 무슨 대책을 내어 놓았는가? 장대에 구리 뱀을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쳐다보면 산다는 것이다. 왜? 장대에 매달아 놓은 구리 뱀은 독이 없다. 독이 없는 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말이다.
지금 독이 없는 뱀이 누구인가? 독 없는 뱀이 누구인가? 예수다. 에덴동산에 왔던 뱀은 뭔가? 독이 있는 독사이다. 그런데 놋뱀은 독이 없다.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놋뱀을 쳐다보면 내 몸에 들어있는 독이 없어지는가? 참 신기한 일이다.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자기로 비유했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한다고 했다.
예수 아니면 이것이 해석이 안 된다. 예수님이 그 놋 뱀이 아니라면 해석이 안 된다. 어떻게 놋 뱀을 쳐다봤는데 뱀독이 없어지겠는가? 성경이 신기한 책이다. 몇 천 년인가? 민수기 22장이 언제인가? 그런데 그 놋 뱀을 쳐다보고 사람들이 다 살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놋 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왜? 예수를 보면 된다. 죽은 사람 살리고 하는데 쫓아다녀봐야 소용이 없다. 나하고 너무 멀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보면 바로 내가 거기 있다. 나만 있는가? 여러분도 다 거기 있다.
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자기를 찾는다고 평생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 떠나기는 어디를 떠나. 자기 속에서 계속 돌고 있는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나긴 어딜 떠나는가? 자기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데 어디를 떠나는가? 자기를 발견했다고 해봤다. 도로 그 자기이다. 나를 발견하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평생 애쓰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도 닦을 필요도 없다. 빤히 보이는데 뭘 도를 닦고 있는가? 내 운명이 다 보인다. 나는 연합하지 않으면 말짱 허당이다. 나는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말짱 헛날이다. 내가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으면 말짱 허당이다. 확실히 보이지 않는가.
고린도후서 6장 2절에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이런 말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왜 은혜 받을만한 때인가? 여러분 아브라함만큼 믿음을 가져서 은혜를 받겠는가? 모세만큼 믿음을 가져서 은혜를 받겠는가? 못해도 괜찮다. 그만큼 믿음이 없어도 괜찮다. 왜 괜찮은가? 은혜 받을만한 때가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때니까, 영어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했다. Now is the time of God‘s.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때니까 지금 받으라는 것이다. 언제가 자비가 있는 때인가? 독생자를 아끼기 않고 주신 이것이 자비가 있는 때가 아닌가. 그런데 그 주신 예수도 잘못 받아서 엉뚱한 것만 받아서 제자들처럼 그렇게 헤매면 되겠는가? 나를 구속하신 그분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너무 쉽게 믿음 없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 종교적인 천재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천재가 아니라도 가능한 때가 왔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 바겐세일 할 때가 아니면 못 산다. 이것은 완전 바겐세일이다. 우리 주머니 사정 다 아시고 내 믿음 사정 다 아시고 내 충성사정 다 아시고 하신다.
제주도 말에 재미있는 말이 할머니들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 아방께서 내가 앞에 고를 말쌈 뒤에 고르고 뒤에 고를 말쌈 앞에 고라도 하나님 아방께서 내 맘 다 아시매 그런 말이 있다. 앞에 고할 말을 뒤에 고하고 뒤에 고할 말을 앞에 고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맘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서툴러서 재미가 없는데 그 말을 제주 말로 하면 너무 재미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언제인가? 지금이다. 집에 가서가 아니다. 지금이다. Now, 희랍어로 니히네트 지금 바로이다. 이때가 아니면 어디서 은혜를 받겠는가? 이렇게 값싼 은혜를 어디 가서 받겠는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믿음을 내 놓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충성을 내놓고 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항상 믿음이 모자라서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때는 옹색할 때니까 그렇다. 그때는 은혜가 옹색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믿음이 조금만 더 있으면 받을 텐데 믿음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될 텐데,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늘 목회하면서 한 생각이 그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믿음이 좀 컸으면 좋은데, C.C.C.에 들어가니까 이것을 강조하더라. 큰 믿음을 주십시오. 큰 믿음을 주십시오. 자꾸 큰 믿음을 달라는 것이다. 김**목사님이 믿음이 굉장히 큰 분이다.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 정동가보면 알겠지만 정동 채플이 완전히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인데 그 건물을 어떻게 지었냐 하면 미국으로부터 돈을 구하러 갔다. 빌브라이트 세계총재 그 사람이 괴짜인데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옆구리를 찌르더니 저 사람이 아주 부자라고 하더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접촉해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김**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접촉했다는 것이다. 접촉해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돈을 낸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갖기 쉬운가? 그런 것을 보니 우리는 열등감이 생긴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그때는 한국 교회에서 한 푼도 도와주지 않을 때이다. 그런데 전부 그것을 그런 식으로 모금을 해서 지었다. 그러니까 엑스플로 74를 했다. 그 정도 믿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다.
30만 명을 서울에 모아서 전도자로 훈련을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삼십만 명을 훈련을 시키면 열 명씩 전도하면 삼백만 명이 된다. 그 열 명을 다시 한 번만 전도 훈련을 시켜서 내 보내면 3천만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때 희망이 벅차오르더라. 야! 대한민국이 금방 복음화 되겠구나. 생각해봐라 전도훈련을 받고 나가서 전도를 하라고 하면 가보면 아주 쉽다. 그렇게 못할 것 같은 데 그 훈련 그대로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열 명 만나면 두 명 데리고 온다. 4영리를 읽어주는데 뜻도 모르면서 듣고 펑펑 우는 사람이 있다. 신기하다. 일주일 동안 이런 경험을 하고 간다. 우리가 엘티시를 하는데 그런 경험을 하는데 삼십만 명을 그런 식으로 훈련을 시키겠다는 것이 엑스플로 74운동이었다.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가. 삼십만 명을 일주일 동안 먹이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는가.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밤이면 여의도 광장에 150만 명이 모여든다.
30만 명을 한꺼번에 밥을 먹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보통 믿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삼십만 명분의 밥을 무슨 수로 하겠나. 그것을 우리나라 최초로 기계를 제작해서 전기로 해서 서랍식으로 하는 밥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여의도에서 30만 명분의 식사를 만들어 잠자고 있는 각 학교에 배급하도록 했다. 그런데 쌀을 넣어서 했는데 쌀이 익지 않아서 삼십만 명분의 쌀을 버렸다. 또 했는데 또 안 된다. 하루 동안 밥을 못 먹었다. 그러고 나서 성공을 했는데 그런 믿음을 따라갈 사람이 몇 사람이 안 된다. C.C.C. 간사들은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오늘 부른 찬송 속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이 찬송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모른다. 매일 그 노래를 불렀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영화도 바꿀 수 없네 하면서 자기 목숨을 바치자고 맹세하고 나와서 전도를 한다. 그런데 못 따라 갈 것은 못 따라 간다. 아무리 그래도 믿음 큰 사람을 따라 가려면 어렵다. 나 같은 사람은 따라 가려면 정말 안 된다. 나는 그 희망이 너무 좋아서 소망이 너무 벅차서 나도 했는데 믿음으로 하니까 되긴 되더라. 그렇게 큰일은 못해도 되기는 되더라. 내가 충주 중원 제천 단양의 네 지역을 맡았는데 순전히 믿음으로 삼천 명을 동원을 했다.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하지만 믿음 큰 사람을 만나면 어림도 없다. 조지뮬러는 오만번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이 섣달 그믐날이다. 개밥 퍼주듯이 막 퍼주는 날이다. 아니 쳐다보기만 하면 산다는데 이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쳐다보기만 해봐라. 그러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수만년 속아있던 내 자신이 불교로 말하면 몇 억겁을 속아 있던 내 자신이 벗겨지고 하나님이 창조한 내가 보인다. 이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무슨 수로 이것을 알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필요로 한다. 왜? 그 사람하고만 연합이 가능하다. 여자가 똑똑하다고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똑똑한 여자가 아들을 잘 낳는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는다.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둘이 맞으면 된다. 하나님에게 맞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지어놓고 심히 좋다고 한 그 사람이 딱 맞는 사람이다. 우리가 뭐 좋고 뭐 좋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딱 맞는 배필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너무 쉽다.
내가 마지막 이것을 몰랐더라면 어찌할 뻔 했나. 평생 예수 믿어서 남 고생만 시키고 갈 뻔 했다. 잘 믿어봐라. 뭐 해봐라 그러고 갔을 것이다. 내가 어려우면 남도 어렵게 만든다. 내가 어렵게 간 사람은 남도 어렵게 만든다.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쉬운 길을 찾은 사람은 쉬운 길을 준다. 여러분도 쉬운 것을 봤으니까 보기만 하지 말고 이것을 먹어보면 아주 쉬운 사람이 되게 된다. 사람 자체가 쉬워진다. 내 자체가 쉬워진다. 모든 무장이 해제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찾아갈 때 그 사람의 무장을 해제시켜야 된다. 단단히 긴장하고 있어서 절대로 문을 안 여는데 무슨 수로 문을 여는가? 내가 무장이 안 된 사람이라야 된다.
남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면서 북한에게 핵을 없애라고 하면 없애겠는가? 자기가 살려니까 절대로 안 없앤다. 그런데 남한에 핵이 없으니까 핵을 없애라고 하니까 돈만 주면 없애겠다고 나왔다. 내가 먼저 무장 해제된 사람이라야 남이 무장을 해제 시킬 수 있다. 무장이 해제되어야 친하게 되지 무장이 깔려 있으면 친하게 안 된다. 총 들고 있는 앞에서는 친해질 수 없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날이고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오늘 못 얻으면 아주 못 얻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이 있는가? 없다.
내가 한 번 죽어보니까 너무 허망하더라. 아니 나는 죽은 줄도 모르고 죽었다. 나는 언제 죽을 때 죽을 줄 알고 죽을 줄 알았는데 죽은 줄 몰랐다. 혼수상태에서 죽으니까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죽더라. 아무것도 모르더라. 인생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싸움해봐야 별것이 없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이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 지금이 행할 때이다. 지금이.
사람은 하나님을 한 사람을 지어놓았다. 두 사람을 지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명과를 먹은 사람과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둘로 갈라졌다. 그래서 두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어디 와서 합해지는가? 십자가에 와서 합해졌다. 사탄은 하나님 아들만 죽이려고 생각을 했는데 모든 인류가 그 자리에 와서 한 자리에서 만났다. 신기하지 않은가!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이런 구원을 주시겠는가?
수많은 인류가 많지만 종류는 두 종류다. 길이 두 길이기 때문에 사람은 많지만 종류는 두 종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종류의 사람이 딱 하나가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 그것이 교회가 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가 이방인이 합해진 것이 초대교회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마지막 구원은 두 인류가 합해지는 것이다. 무슨 수로 합해지겠는가? 절대로 안 합해진다.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아들하고 마귀의 아들하고 어떻게 합해지겠는가? 그리스도와 벨리엘이 어떻게 조화되겠느냐고 한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 같은 사람끼리도 안 되는데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세상의 특색 중에 하나가 절대로 둘이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이 특색 중의 특색이다. 절대로 안 된다는 것,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안 되는데 사람과 하나가 되겠는가. 눈에 차는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멸망이다. 우리가 배필을 못 찾으면 멸망이다. 내 배필을 못 만나면 나는 멸망이다.
이 십자가는 신기한 일이다. 분열된 인간을 하나로 합해 놓았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면 새 피조물이다. 새 피조물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새 피조물이다. 나도 옛날에 이 새 피조물은 어떻게 생겼나. 죽은 후에 다시 오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아니다. 새 피조물은 내가 예수와 합한 사람이 새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그것도 쉽다. 예수와 합해지니까 새 새사람이 됐다. 새 사람이 됐으니까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와 합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확실히 보고 내가 다르게 살 수 없다. 아직 다 못 봐서 그렇게 사는 것이지 보기만 보면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다. 옛 사람으로 살 수가 없다.
인간은 다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소고기를 먹고 크냐 안 먹고 크느냐에 따라서 체력이 다르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5.16혁명이 나고 바로 서울에서 일본 청소년과 우리 청소년이 축구 시합을 했는데 일본 아이들은 중학생 같고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 같더라. 원래 우리보다 일본 사람들이 작은데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이들을 잘 먹여서 그렇게 컸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5.16정부에서 분식을 장려하고 이렇게 해서 잘 먹여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사람들보다 우리가 크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못 먹으면 할 수 없다. 우리는 종자가 더 좋지만 못 먹으니까 중학생과 초등학생 같더라. 장충체육관에서 축구를 했는데 보면 확실히 표가 나더라. 우리가 오키나와에 가보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좀 작다. 그렇게 표가 나더라. 잘 못 먹어서이다. 잘 먹으면 미국 사람들처럼 클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들을 보면 180이 보통이다. 우리 때는 180이면 무조건 불합격이라 군대를 못 갔다. 구두도 없고 옷도 없어서 못 갔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가? 무엇 때문에 달라졌는가? 먹는 것 때문에 달라졌다. 아이들은 잘 먹여서 키워야 한다. 옷은 못 사 입혀도 먹는 것은 잘 먹여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다리가 길어진다. 우리가 왜 키가 안 컸냐 하면 고기를 먹지 않아서 다리가 짧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서 다리가 길다. 요즘 아이들은 다리가 얼마나 긴지 쭉쭉 뻗었다. 잘 먹어야 된다.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되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한다. 잘 먹어야 한다. 성경의 표현은 너무너무 노골적이고 진실하다. 먹는 것으로 표현했다. 인생의 노선을 두 노선으로 표현할 때 먹는 것으로 표현했다. 아주 실제적이다. 우리가 잘 먹으면 큰다. 여러분 잘 먹으면 미인 되고, 잘 먹으면 크고 화장을 할 필요 없다. 잘 먹으면 포장 안 해도 된다. 속에서 나오는데 어쩌겠는가. 아름다움이 속에서 막 나온다. 못 먹으면 발라도 안 된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나 따로 너 따로의 구원이 없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이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이다. 너무 귀중한 말씀이다.
우리가 따로 지혜롭고 우리가 따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온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예수는 또 하나님께로 나왔다. 나도 하나님께로 나왔고 예수도 하나님께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속아서 엉뚱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 두 사람의 출처가 똑같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너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러므로 자랑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의도 아니고 내 거룩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받은 것이다. 그분 안에서 받은 것은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아무리 벌어도 다른 사람이 내 돈 번 것에는 참여가 안 된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람이 얻어놓은 것 가운데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얻은 것은 내 것이지 남의 것이 안 된다. 좋은 것이 아니고 별것도 아니다. 남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돈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남에게 주기 어려운 것이 돈이다. 형제간에도 못 준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잘 못 준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는데 자식은 부모가 돈을 달라고 하면 잘 안준다. 아깝게 생각한다. 여러분도 부모 되어보라. 자식에게 뭐 한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처음 한번은 괜찮지만 아침에 그러고 저녁에 그러고 해봐라. 아니 영감이 무슨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고 대번에 그렇게 나온다.
요즘 노인당에 노인들이 앉아서 매일 그런 얘기 한다. 절대로 재산 물려주지 말아라. 재산 물려주면 천대받는다. 죽을 때까지 쥐고 있으라. 이게 노인당에 노인들이 하는 얘기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니까 부모는 있는 것 없는 것 자식에게 주고 싶다. 그런데 자식은 아무리 받아도 감사가 없다.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식은 잘 안 준다. 처음에는 잘 주는데 나중에는 아까운 생각이 든다. 부모는 아까운 생각이 안 든다. 부모는 자식에게 줄 때 기쁘다. 아깝지 않다. 없어서 못 준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에게 줄 때 아깝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성인군자가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대하지 말고 보물을 쌓아두려면 하늘에 쌓아두고 안 그러면 보험 들고 안 그러면 연금 들어놓고 그래야지 앞으로는 자식 기대하고 살면 안 된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는 가능 헸지만 지금은 안 된다. 여러분 정신 똑바로 차려라. 부모는 자식에게 주는 것이 행복이다. 알고도 준다.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도 도로 또 준다. 부모는 또 어쩔 수가 없다. 주고 싶은 것도 부모마음이고 아까운 것도 자식 마음이니까 이것이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니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정신 차려야지 별 수 없다.
새로운 피조물 속에는 불교인이든지 기독교인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다 하나다. 예수의 구속 안에는 다 하나다. 불교에서는 선악은 무근이라고 한다.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일 뿐이니까 선악은 원래 없다는 것이 불교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탄이 있으니까 선악은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뿌리가 있다고 한 사람이나 없다고 한 사람이나 다 소용이 없다. 십자가에서는 다 하나다. 거기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밖에 없으니까 다 하나다.
그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안에,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었다. 돈은 없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 예수는 돈은 없다. 돈은 없는데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있다. 진짜로 필요한 것이 다 있다. 그러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그 말이다. 돈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돈이 많이 생겼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나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그 말이다. 내 인생이 충만해지니까 내 인생이 충분해지니까 부족함이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난다. 진짜로 그 생각이 안 난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지면 되지 왜 다 똑같이 가질 필요가 뭐가 있나. 공산주의는 다 똑같이 갖자는 것이다. 다 똑같이 갖자고 하면 안 된다. 벌 수 있는 사람도 재주가 있어야 벌지 아무나 돈 버는 것이 아니다. 큰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특혜를 받아서 한다고 하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다. 돈 못 벌 사람은 특혜를 아무리 줘도 못 번다. 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돈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존경해야 한다.
그러면 부자들이 존경하면 그 재미에 돈을 쓴다. 부자를 욕하니 부자들이 돈을 쓰고 싶겠는가? 나라도 안 쓸 것이다. 누가 칭찬을 해 줘야 돈을 쓰지. 지금 돈이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도피시키려고 한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 공장을 짓지 않고 외국에 지으려고 한다. 대우를 못 받기 때문이다. 매일 불려 다녀야 하고 손에 수갑 차야 하지 돈 벌 맛이 안 난다. 돈 버는 사람을 존경해야 자본주의가 발전한다. 그것이 참 하기 어렵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독이 어렵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인데 그것이 가능한가 안 된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내가 만족해지면 넉넉해진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도 넉넉해지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넉넉해지고 무시해지지 않고 있으면 주고. 있으면 좀 주고 살면 좋지 먹고 배탈 날 것이 뭐가 있는가. 좀 나눠 먹었으면 배탈이 안 날 것이다. 그 사람들은 내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다.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있으면 나눠주고 그러면 다 칭찬한다. 그런데 나눠주지 않아도 칭찬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은연중에 나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을 우리가 다시 회수해 먹고 사니까 돈 잘 버는 사람은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 도둑질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잘 살게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된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내 속에 만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이 없으면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것이 말을 하려면 끝이 없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시간 관계상 할 수 없이 그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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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선누나에 수고가 아는사람이 생명의 씨앗시 풍성하계 나곘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빠이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