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허 열 웅
모든 꽃은 나름대로 아름답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지만,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를 수가 있다. 때와 장소, 분위기에 따라 그 감성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어릴 때는 내가 꽃이라 꽃이 예쁘게 안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더는 내가 꽃이 아니기 때문에 꽃이 정말 예쁘게 보인다고 한다. 젊은 나이일수록 활짝 핀 꽃을 좋아하지만 노년이 되면 꽃망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그 동안 별로 라고 생각했던 꽃들조차 예쁘고 부럽고 심지어 질투감과 함께 친근감도 느껴지게 된다.
꽃의 색감조차 차이가 나 젊은 사람들은 연하고 은은 한 컬러, 파스텔톤의 색감을 선호하고, 나이가 좀 있는 어머니 층은 컬러감이 조금 더 찐한 색, 할머니 할아버지 같이 나이가 드신 분들의 경우는 컬러감이 쨍한 색을 좋아한다고 한다. 계절 따라 피는 꽃의 배경과 굴절과 반사에 따라 색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오래 전에 고인돌과 선운사로 유명한 서정주의 고향인 전북 고창의 미당未堂시문학관을 찾은 적이 있다. 이 기념관은 고향의 생가와 묘역 근처에 있어서 더욱 뜻 깊은 공간이며,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었으므로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질마재 언덕에 선생님의 “국화 옆에서” 시비詩碑가 아담하게 서 있는 묘가 있고 그 아래 넓은 밭엔 백만 송이 노란 국화가 피어 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시 <국화 옆에서>를 응얼거려 보았다.
국화는 정원이 번듯한 집에서만 가꾸는 꽃이 아니다. 허름한 시골 농가의 울타리 밑이나 아무렇게나 대충 만들어진 화단에서도 그 향기를 내뿜는다. 그 소탈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매화나 라일락이 새 생명을 움트게 하는 섬세하고 짙은 향이라면, 국화는 봄, 여름에 들떴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침향 沈香에 가깝다. 오묘한 계절의 변화에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은은한 향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꽃들이 날씨가 차고 서리라도 내리면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어 시들고 만다. 그러나 국화는 찬 서리를 맞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활짝 펴 그 기개를 펼친다. 나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보니 늦서리를 맞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딜 가도 나도 모르게 약간 기가 죽어 나이를 말해야할 경우 어물거리며 나이를 밝히는 것이 민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다가 국화꽃을 보면 남은 삶을 당당하게 여한 없이 살다가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며칠 전 친구의 장례식에 가서 흰 국화에 묻혀 있다가 왔다. 장례식입구부터 즐비하게 의장대 사열처럼 늘어선 꽃 기둥, 넓은 흰 국화 밭 한 가운데 영정으로 웃고 있는 친구가 뛰쳐나와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것만 같았다.
국화는 매. 난. 국. 죽 사군자 중의 하나로 가을 서리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절개 있는 꽃이다. 흰 국화에는 죽은 혼을 기린다는 뜻있어 장례식에서는 흔히 흰 국화꽃을 헌화하고 있다. 유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과거에는 흰 상복과 삼베옷을 입고 향을 피우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흰 국화와 간소화된 검정 상복이 한국의 장례식 문화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국화가 고결과 엄숙을,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화를 사용한 것은 저승에 가서는 평화롭게 쉬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어제 동네 화원 앞을 지나다가 소담스럽게 막 피어오르고 있는 국화 화분을 사다 베란다에 놓았다. 분홍색으로 핀 베고니아와 진홍색으로 꽃을 감싸 안은 부겐벨리아 옆에서 귀엽다 못해 애기 부처처럼 의젓한 표정이다. 먼 옛날 내가 살던 초가집 마당에서 피던 꽃만은 못해도 답답한 거실에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 꽃잎들이 들리지 않는 소리로 툭툭 터지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