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광고 중에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이 광고를 조용히 들어보면, 먹는 것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광고의 멘트와 비슷한 말이 본문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들으며 보았으며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미 숱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감으로 접해 왔습니다. 하지만, 매일 먹는 음식이지만 먹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또한 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의 사귐”의 깊이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남녀간의 사귐에서부터 취미, 생각, 철학, 목표 등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진 사귐들이 있습니다. “사귐”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서로 얼굴을 익히고 가깝게 지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귐이 있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동기와 목적에 대해, 본문 3절에서 우리에게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며, 그 사귐에 대해서는 본문 1절에서, “생명의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임을 언급합니다. 본문의 “사귐”은 헬라어의 “코이노니아”로, 성도 간의 “교통,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교제를 동시에 아우르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둡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정면으로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부정하기에 하나님은 결코 육신으로 오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낱 사람일 뿐 하나님일 수 없다며,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헛된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사도 요한은 서신의 첫 시작을, 예수님에 대한 위대한 선포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는 “진리의 말씀”이고,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영원한 생명”이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믿음과 복음으로 세워진 신앙공동체를 향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며, 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요한일서의 시작부터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이십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예수님은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 땅에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믿음의 기초를 굳건히 붙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성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되신 겁니다. 요한은 우리가 그것을 보았기에, 우리가 그것을 증언할 수 있다며 담대히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분,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성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성부와 함께 계시던 성자께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여러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영원함 속에 계시던 성자께서, 시간과 공간의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성도들 역시, 성자 예수님과의 “사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사귐이 중요한 것은, 이 사귐으로 인해, 성도의 기쁨이 충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는 매 순간의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힘써야 하며, 그 바탕은 성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위에서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 교제,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 이로 인해 한 영혼이 새 생명을 얻는 것보다 놀라운 기쁨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하는 사귐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된 겁니다. 여기서, “사귐”이란,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썩지 않는다는 것과 성장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영적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에, 영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라 불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만졌기에 아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역시, 개인적으로 체험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는 우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복음을 듣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겁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풍성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 속에서 성도와 교제하는 영적 사귐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들은 소식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겁니다. 빛이신 하나님께 어둠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언제나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도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본절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성도된 우리 자체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자체 발광할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인 우리가 세상에서 빛을 잃고 세속화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때마다, 예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함으로, 그 빛을 세상 가운데 비출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빛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사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을 바탕으로 하는 성도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귐은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겁니다. 또,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은밀한 사귐의 시간이 지켜지지 않으면 빛의 자녀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세상의 빛이 아니라 맛을 잃은 소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사귄다고 말하면서, 빛 가운데 살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산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려면 또, 더 깊은 친밀한 관계로 관계가 깊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어두운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살면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며, 성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의 삶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 - 10절을 보시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을 속이는 자는 결코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겁니다. 이처럼 내가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사귐이 시작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게 하시는 이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하는 죄의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시작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죄의 고백이며, 성도인 우리가 누려야할 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교제 안에서 빛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럼, 올바른 그리스도인, 빛이신 주님과 사귐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택해야 하는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9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백”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일단 죄를 인정한다는 것에서 사귐이 출발한다는 겁니다. 성도인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의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며, 그 죄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가 연약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며,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성도이지만, 죄와 무관할 만큼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백입니다. 죄가 죄로 인정될 때 애통이 생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빛이신 예수님과의 사귐을 위해, 우리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면 가장 좋지만, 성도인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미쁘시고 의로우시기에,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본문에서의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의로우시다”는 말은,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 신실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양면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강과 기쁨,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한 측면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아파하며,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과의 사귐이 점점 더욱 깊어지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 깊고 아름답게 자라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크고 풍성하신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