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두 선생님께 (조선의 복고풍 정치와 규장각)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중국 고문과 백화를 배우는 일은
선생님뿐만 아니라 사실 저 자신이 더욱 절실합니다.
지금도 못 보던 용어나 상투어가 나오면 여기저기 찾아봐야 합니다.
남의 나라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석사과정에 입학할 때 대만대학 영문과 학생들의
교양과정 필수과목 국문을 수강하고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이야 잘 보고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만,
한국 한자 발음과 중국 발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헷갈리던지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대학 1학년 학생들의 고문 이해력을 보니까
한국에서 한문학과 박사과정 이수한 사람보다 낫더라구요.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국문 또는 역사의 수업량이 많았나 봐요.
나중에 보니까 석사과정 다니는 학생들도 공부하지 않으면 그냥 중고교 실력에서 더 올라가지 않더라구요.
옛날에도 과거시험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는 책들을 책꽂이에 쌓아놓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아 관원들의 보고서 작문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수능시험 국어가 어렵다는데
중국 대학입학시험(大学入学考试, 高考)의 국문(國文) 시험에 나오는 고문 인용문들을 보면 시기와 지역이 다양하고 수준도 꽤 높습니다. 사실 일반 대학생도 좋은 점수를 받기 쉽지 않더라구요.
한국에서 한문 교육보다는 차라리 중국 고문을 가르치는 것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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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을 말씀하셨는데요.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정조 연간에 잠깐 운영한 규장각이 규모도 작고 복고적인데 생각해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정조 임금도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복고적이었나봐요.
숙종 연간에 벌써 서양 천문관측기구를 이용하여 역법을 개정하였는데
또 정조 연간에는 거꾸로 한족의 복고적 한대 경학(漢代 經學) 연구성과도 수용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 임금이 주자학을 잘 지키겠다고 선언하셨더라구요.
아마도 정치적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주자학의 길을 다시 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규장각의 학자 출신 관원들은 과연 주자학에 관한 어떤 판본을 선택하겠습니까? 북송 시기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고 판본을 수정하는 학문 연구를 포기하고 정치적 입장에서 주자학 강화를 선택하였답니다. 사량좌 어록에서 “선생(先生)” 글자를 찾아내서 쓰겠습니까? 사실상 주희가 39살에 산정한 판본에도 분명히 “선생(先生)” 글자가 있는데 『성리대전』에는 “선왕(先王)” 글자입니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편찬된 사량좌 어록에서는 “선왕(先王)” 글자가 많습니다. 규장각 관원들이 이것조차도 닮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동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그저 베꼈을 뿐입니다.
둘째, 영조 정조 연간에 조선 자주노선의 길과 탈유학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숙종 31년(1705, 강희 44년)에 허원(許遠, 1662-1732)을 북경에 보내서 이듬해 흠천감에서 하군석(何君錫, 冬官正 재임 1672-1710년;春官正 재임 1711-1714년)을 직접 만나 아담 샬이 편찬한 『숭정역서(崇禎曆書)』와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에 관하여 배우고 일식(日食) 월식(月食) 및 행성(行星) 계산법을 배우도록 하였답니다. 허원은 돌아온 뒤에 조선 역법을 개정하였습니다.
허원은 서양의 천문학과 관측기구 사용법 및 과학기술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아담 샬(1591-1666, 湯若望)이 소개한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중국 명칭 第谷)의 태양계(the solar system)를 비롯하여 운행궤도의 경사각과 타원 운행까지도 잘 이해하였습니다.
명나라 숭정 연간과 청나라 초기에 아담 샬이 천문을 관측하고 예측한 자료가 중국 흠천감 관원들보다 정확한 것이 더 많다고 확인되었습니다. 사실상 중국 전통의 우주론과 혼천설은 폐기되었고 『주역』의 천문학 학술기초가 무너졌습니다. 중국 지식인들도 중국 전통 천문학이나 상수역을 믿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말기 내지덕(來知德, 1525-1604)이 27년간 연구하여 1599년에 『周易集注』를 완성하였는데, 서광계(徐光啟, 1562-1633)와 이천경(李天經, 1579-1659)이 숭정 연간에 역법 개정에 들어간 뒤에는 내지덕의 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다만 일부 민간 점성술가들이 오히려 내지덕 역학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청나라 초기에 반청(反淸) 의식이 강하였던 강남지역에서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일부 한족 지식인들은 서양 천문학보다는 한대(漢代) 상수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복고적 학술을 수용하면서도 주자학을 꼭 쥐고 놓지 않더라구요. 조선이 정체성을 되찾는 복고의 길이라면 오히려 단군 조선과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이 나았지 않겠습니까?
조선 숙종 재위 연도(1674)부터 정조 퇴위 연도(1800)까지는 청나라 태평성세(Qing high era, 康熙 재위 연도 1662, 건륭 퇴위 연도 1795)와 겹칩니다. 조선 정부와 관원들은 청나라와 동반화(companionship) 과정에서 만주족과 서양 선교사를 싫어하고 오히려 한족 복고적 지식인들과는 가깝게 교류하였습니다. 무슨 동병상린을 하는지요? 아무튼지 조선이 더욱 복고적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조선이 서양 학술과 과학을 수용하여 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또 조선의 자주노선을 찾아야 하는 데 못하였습니다. 차라리 서양에 대하여 개방하고 주자학을 폐기하고 자주노선을 찾아 나아갔다면 탈중국 또는 탈유학을 시작하였을 텐데요. 아쉽게도 정조 임금은 주자학을 다시 강화하고 규장각도 운영하였습니다. 정조 임금이 퇴위하고 건륭제가 퇴위한 1800년 뒤에는 조선도 청나라도 멸망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셋째, 만주족의 서양화와 한족 동화
만주족 지배층도 초기에는 아담 샬을 따라 천주교를 믿고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예의 발랐는데요. 생활방식(life style)이 바뀌었답니다. 만주족 황제와 관원들은 한족 관원들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실무적이었습니다. 또 서양 천문학과 역법 및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중국 전통의 역법을 수정하였답니다. 사실상 탈중국 또는 탈유학을 진행하였습니다. 청나라를 통치하여 태평성세까지 이룬 만주족이 무슨 오랑캐입니까?
물론 강희 연간에는 주자학을 강조하였고 건륭 연간에는 한대 경학 연구성과도 과거시험에 도입하였답니다. 이런 정책이 만주족의 한족 동화(assimilation into the chinese culture 이며 integration into the chinese culture 아닙니다)를 촉진하였고 결국에 만주족은 중국에서 거의 사라졌답니다.
청나라 옹정 연간에는 엄격하게(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강남지역의 세무 개혁을 실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준가르 전쟁에서도 패전하였습니다. 건륭 연간에는 옹정제의 신정(新政)을 조절하여 관대하였고(寬) 국가 재정 적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건륭 연간에는 겉으로는 태평성세이나 분식(粉飾)입니다. 따라서 한족 동화가 빨라졌습니다. 현재 일본과 미국의 막대한 재정 적자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에서는 건륭 연간에 연경에 가보았던 관원과 학자 모두 청나라를 배우자고 북학(北學)과 실학(實學)을 주장하였습니다. 연경의 번화한 풍물을 배우겠다는 것인지? 가보지도 못한 잘사는 강남지역의 경제 성장을 배우겠다는 것인지? 개혁개방 정책의 모델과 대상이 모호합니다. 물론 조선의 자주노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대다수 관원과 학자는 아무도 청나라가 저절로 멸망하기만 바랐습니다. 이들은 건륭 연간에 벌써 기울어가고 강남지역의 경제 성장이 정체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나온 답안을 보고 지나간 역사 문제를 푸는 것은 재미있거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답답하여 옛날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