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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27장
출애굽기 27:1-8(38:1-7)
번제단은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그물 등을 포함한다.
▸조각목에다 놋을 싸서 만든다.
▸크기는 장 5규빗, 광 5규빗, 고 3규빗이다.
▸그물을 분리할 수 있는 조립식으로 되어 있고, 네 모퉁이에 뿔과 네 개의 고리를 달아 놋으로 싼 채로 운반하였다.
▸희생 제물의 모든 것을 여기에 놓아서 태웠다.
출애굽기 27:9-19(38:9-20)
성막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성막을 바깥과 구별하는 울타리를 말한다.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은 갈고리를 달아 은가름대로 기둥들을 연결하고 이 기둥들은 놋받침 위에 놓여졌다.
▸크기는 남과 북의 장이 100규빗, 동과 서의 광이 50규빗, 출입문이 있는 동쪽에는 좌우 15규빗을 막고 중앙에 20규빗의 문을 내었다.
▸이 기둥들은 남과 북이 각 20개씩, 서쪽에 10개씩, 동쪽에 좌우로 3개씩 세우고 빙둘러 세마포장을 둘렀으며 그 고는 5규빗이다.
▸출입문은 청, 자,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휘장을 만들어 네 개의 기둥에 고리로 달았다.
이 성막의 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었다.
출애굽기 27:20-21
등불을 켜기 위해서 백성들은 감람유를 항상 공급하여야 했으며 이 불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간수하되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켜지 아니하였다.
■ 성막의 의미
성막에 대하여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한 부류는 성막의 구조 하나하나를 낱낱히 해체하여 각기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부류이고, 또 한 부류는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표라고만 생각하는 부류이다. 우리는 성막을 이해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뿐만 아니라 성막의 재료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연관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서 주신 계시에 의해 만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막을 알면 하나님께 이렇게 나아갈 수 있구나 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이다. 즉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 함께 계시는 방식은 성막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막이란 닫혀있는 공간이 아니라 열려있는 공간으로 이스라엘 속에 존재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언제든지 함께 거하실 수도 있고 또한 떠나가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막이란 어떤 구조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곳인가?
성막은 거룩한 인간들만 상대하는 장소이다. 거룩한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규정지어 놓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구원받고 싶고 영생을 얻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거룩한 자로 선택되어야 한다.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갈 때에 여호수아는 산 위까지 동행할 수 없었다. 부름받은 자는 오직 모세뿐이다. 그 원리가 이스라엘 속에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의 선택 원리가 기본적으로 작용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시기 위함이다.
사실 거룩이라고는 완전히 상실된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전환시키려 하시는 것이다. 거룩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구조물 구석구석에 거룩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세상에 오려고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 그것은 전쟁 수행이다.
창세기 32:1-2에 보면 일단의 천사들이 야곱을 찾아 온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천사들이 야곱과 관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한 것이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28:15).
야곱은 얼마 안가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시기는 밤에 천사를 만나고 난 후부터이다. 싸움을 해야만 하는 사명을 지닌 국가가 야곱 즉 이스라엘 허리로부터 나와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창 35:11).
실제로 히브리인들이 밤에 애굽을 탈출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불리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12:40-41).
그런데 이러한 군대가 탄생 내지는 창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애굽에 대한 최종 승리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작전이나 힘이 아니라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여호와의 심판에 대하여 애굽은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모든 애굽 가정의 맏아들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집에는 이런 재앙이 올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문설주에 발린 피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애굽 나라에만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4:22-23). 그런데 모세가 이 하나님의 아들의 취지를 모르니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4:24). 아내인 십보라가 얼른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피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라고 했다(4:25).
하나님의 아들은 이처럼 피와 연관되어 태어난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주신 할례의 의의를 제대로 보여야 아들이 된다. 할례의 피란, 인간의 혈통을 인정하지 않고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람의 핏줄과 무관한 관계에서 생성되기 위해 심판의 피를 흘려야 비로소 생성된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나고 난 뒤에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맏아들은 다시 이스라엘 각 가정의 맏아들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13:1-2).
그런데 이 본문에 보면 “거룩히 구별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속성이다. 거룩이 성사되려면 심판의 피와 연관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피는 기존의 인간 핏줄을 거부하고 거기서 이탈한 증거로서의 피이다. 이런 자가 거룩하다는 뜻은 기존의 인간 핏줄은 모두 더럽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렇듯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싸움이란, 기존의 인간 핏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 찾아든 장소가 바로 성막이다. 그렇다면 성막의 모든 구조물들은 처음 이스라엘이 성립되던 그 정황을 그 이후도 계속 반복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계속해서 거룩을 유발시켜야만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거룩을 계속 유발시킨다는 말은 심판의 피를 계속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막 안에서는 희생 제물이 매일같이 소모된다. 그 제물이 희생되는 현장에서는 심판과 긍휼이 항상 교차해서 일어난다. 이 활동이 제대로 일어나야지만 거룩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계속 아들로서 살아남게 된다.
인간 핏줄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분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왜 화를 내시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창조 본래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 형상은 사라져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담긴 인간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막 안에서는 제사장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제사활동을 위해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다. 제물을 잡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드러나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아들이 얻게 될 영광도 같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출애굽 사건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죄와 그 죄를 온전히 극복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의 피), 이 두가지를 보이는 장소가 성막이다.
성소는 사람들이 활동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바치고 또한 지시와 명령을 받기 위한 장소이다(30:6,36). 무엇을 바치고 무슨 지시와 명령을 받는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인간의 것을 인간의 생각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바친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지시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향을 바치게 되어 있다.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 향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30:37-38). 향은 또한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제사장의 옷과 기구에 바르는 기름에 함유되어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이는 물질이다.
또한 제사장은 매일같이 1년된 어린 수양 두 마리를 바치는데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 양 한 마리를 바치게 되어 있다(29:39). 여기서도 제물이 탈 때 나오는 향기가 있는데 그 향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29:41). 드려지는 장소는 회막문 앞이다. 이 장소는 하나님이 만나고 싶어하는 장소이다(29:42-43).
성소 안에는 12개의 떡덩어리가 항시 진열되어 있다. 금촛대 맞은 편에 놓여 있다. 이렇게 해서 성소에는 12개의 떡덩어리와 금촛대와 금향단이 대표적으로 안치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가 가능한 장소로 향으로 늘 충만해 있다.
금촛대와 향단은 재질이 금으로 되어 있는데 금이란 물질은 에덴동산에서 제일 먼저 거론되는 땅의 특성이다.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 2:11,12). 에덴동산의 고귀성과 정결성을 금이라는 물질로 표현하고 있다. 금 이외에 떡이라는 농산물로 된 것이 있다. 이 12개의 떡덩어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 세계의 모습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향과 빛과 풍성한 곡식, 이러한 세계의 구성은 성소 안에서 집약되어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 새 창조 세계와 더불어 있기를 원하신다.
12개의 떡덩어리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뜻한다. 그들은 인간이다. 새 땅에 필요한 자들이다. 떡은 땅의 소산물이다.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그것을 생산했다.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풍성한 곡식을 생산할 수 있다(신 8:8). 12지파를 제대로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입히신 것은 약속의 열매로서의 12지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감시로 이루어진다.
금촛대의 빛은 항상 진열된 12개의 떡을 비추고 있다. 하나의 불빛이 아니다. 원줄기는 하나이지만 촛대는 7개나 된다. 그 7개의 촛불이 하나로 된 원줄기의 속성을 보이면서 빛나고 있다. 7이라는 숫자로 보여지는 수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 활동의 지속성’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7일에 걸쳐서 창조 사역을 수행하셨다. 각기 다른 것들을 창조한 7일이지만 그 7일이 모여야 완성된다. 빛으로 시작된 창조 행위는 어두운 세계 안에 새로운 질서를 남기셨다. 7일동안 하신 것이 피조세계 안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안식하신다. 성소라는 공간에서 이 사실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표는 야곱에게 한 약속대로 12지파의 탄생이다. 7촛대는 그 12떡덩어리를 겨냥하는 식으로 빛을 품어내고 있다. 마주보도록 설치한 것이다(26:35). 이 배치를 향기롭게 하기 위해 향기를 실내에다 가득 피우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 거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이다.
만약 택한 이스라엘이 부실하거나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스가랴 4:1-14에 보면 세상을 감시하는 하나님의 눈이 새로운 성전에 등장한다고 되어 있다. 7등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3에 보면 7촛대 사이를 거니는 분이 계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에 의해서 7촛대는 제 기능을 다하고, 그리고 그 성소 안에 12지파의 선택은 온전하다(계 7:1-8; 12:1; 14:1-3).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 담길 향이다(계 8:3-5). 이와같이 성소는 하나님이 계속적 창조자로서 책임지고 완성하신다.
성소 앞 마다에 널려 있는 제단과 물두멍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기구들이다.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물두멍에서 두 손과 두 발을 씻지 아니하고 성소에 들어오면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30:19-21). 더러운 자가 깨끗지 못한 채로 거룩한 곳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땅으로 함부로 들어오려는 애굽인들에게 내린 그 심판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열왕기상 7:23-26을 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 물두멍에 해당되는 것을 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고자 하는 곳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 사이를 구분하고자 하는데 있다. 심판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이루어지는가? 제단의 늘 꺼지지 않는 불씨는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향단의 불씨로 이어져야 한다(레 16:12). 그리고 그 불씨의 간수자는 적절한 자격자이어야 한다. 곧 거룩한 자로 선택된 자에 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향에 담긴 불이 저주를 발한다(민 16:4-7, 31-40). 불이 향로에서 나오고 있다. 이 불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불로서 제단을 태우는 그 불씨임을 뜻한다. 늘 심판의 불씨이다.
레위기 9:22-24에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라고 되어 있다.
제단에 불을 제공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아론이라는 인간이 불을 붙이는 방식과 도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불로 제물을 태우는 방식이다. 결국 아론이 제물을 태우는 불이 단순한 인위적인 불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증거하는 불이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불로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분향 불은 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는 불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40:34-38에 보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하나님께서 성막 위에 머물러 계신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거룩과 심판을 가지고 이스라엘 속에 거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레 6:9, 12-13). 하나님은 완전한 심판이 성취되는 장소에만 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피로 속죄함으로써 제대로 성사되어야 한다.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말며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때때로 속죄할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30:9-10).
이처럼 성막(성전) 자체가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심판이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5-8).
성막 안에 그룹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25:18-22, 26:31-33). 하나님은 이스라엘 내부에 하늘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성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 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을 안고 있는 이스라엘에 심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어린 양의 희생의 피뿐이다. 바로 유월절을 재현하는 것이다.
국가 이스라엘이 대대로 이 정신이 이어지려면 계속해서 유월절의 취지가 반복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죽음이 거론되어야 하고 자신들을 죽이는 하나님의 행위가 정당화 되어야 한다. 이 정당함을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남게 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구원이 결코 생존에 대한 더 나은 확보가 우선이 아니라 ‘거룩한 국가’가 우선임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모세를 처음 부른 시내산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십계명을 주어서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과 거리가 먼 위치에 있는 자들인지를 열려주시고 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들이 멸망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애굽적이었다. 그것은 애굽에서 따온 금송아지 형상을 자기들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한 신으로 숭배하는 것에서 증명되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십계명을 산에서 가지고 내려 오다가 깨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자신과 만난 모세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한다는 뜻으로 십계명 판을 만들어 주시고는 그것을 “증거의 판”이라고 하셨다(34:29). 즉 백성들의 범죄를 증거하는 증거판이다. 그리고 그 돌판이 있는 곳은 증거궤가 되고(40:3,5), 그것을 덮는 막은 증거막이 된다(38:21). 그 증거궤 뚜껑이 바로 백성들의 죄를 씻어주는 속죄소가 된다(31:7). 여기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혜의 자리이다(시은좌).
하나님은 고정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기 위한 공간을 이스라엘에게 제공하시겠다고 이미 선언하셨었다(신 12:5,11,14,26; 16:2,6; 17:8; 18:6 등). 이러한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다윗이 약속의 땅을 모두 점령하고 그 최종 점령지에 법궤를 안치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목표였다. 계속해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극대화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시는 목표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며 안식과 창조의 회복이다.
만약 국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제대로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성은 이스라엘을 향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정작 싸움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하게 된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셨던 그 적들에게 이스라엘을 붙이실 것이다(렘애 2:7; 겔 7:21; 11:9).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다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실 것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