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늘은 어땠나요? 당신의 인생에서 오늘은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십중팔구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늘도 언제나처럼 바빴으며, 오늘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직장인의 일상은 무척 바쁘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사회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야 하며,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외로움을 피하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사회 관계망을 관리하는 등 처리해야 할 일의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우리는 이렇게 바삐 살아도 괜찮을까?
20년 이상 바쁜 직장 생활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공황발작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꾼 사람이 있다. 이본 탤리는 건강한 삶을 위한 식생활과 운동 프로그램을 처방해온 라이프 스타일 코칭 전문가였다. 그녀는 공황발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정말 바쁘게 일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날 출근을 위해 욕실에서 화장을 하다 쓰러졌다. 그녀는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지금은 안 돼. 난 할 일이 너무 많아!’라는 생각뿐이었다니 워커홀릭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녀는 정신적 관리에 소홀했던 지난날을 뉘우치고 심리치료사의 길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이본 탤리는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를 강조한다. 그러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신처럼 병원신세를 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처럼 바쁨에 치여 병원으로 실려 온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내 속도를 되찾기 위한 일상 안내서’인 <바쁨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썼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자신의 에너지가 무한하다고 착각해서, 때로는 누구보다 완벽히 일을 처리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때로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믿는 까닭에 다양한 역활을 수행한다.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전문가,
척척박사 부모, 이해심과 사랑이 넘치는 파트너, 그리고 훌륭하고 믿음직한 친구가 되겠다는 목표를 동시에 세운다.
이본 탤리는 바쁨의 이유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에서 찾는다. 자신의 에너지를 과신하거나 조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신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등 가정과 조직생활, 사회적 관계 등의 면에서 바쁨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바쁨이 지니는 사회적 속성을 잊지 않는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바쁘다’는 말을 ‘잘 지낸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 항상 바빠야 하며, 만일 바쁘지 않다면 틀림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거나 게으른 사람이라는 문화적 기대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쁨’은 이상야릇한 신분적 상징이다. 가짜 명품 의류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바쁨을 선택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의 안정을 취한다.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안정일 뿐, 바쁨에 휘둘린 속마음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병들어간다. 이본 탤리가 말하는 것처럼 “바쁨은 밑이 보이지 않는 수렁”과 같기 때문에 한 번 바쁨의 함정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다.
바쁨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느림이다. 바쁜 게 잘 지내는 것으로 통하는 시대에 느림은 뭔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느림을 멀리하고 바쁨을 가까이 한다. 바쁨이 추앙받을수록 느림은 루저의 문화로 밀려난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세계관이 얼마나 협소한지 모르는 것 같다. 느림의 가치를 따지지도 않고 루저의 문화라 깔보는 사람일수록 그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모를 뿐이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림은 감각의 둔함이나 의지의 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가치관이자 세계관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느림은 이처럼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내 박자에 시간의 흐름을 맞추고, 찾아낸 내 자신 안으로 세상을 듬뿍 받아들이겠다는 호연지기가 바로 느림이다. 느림이 겉으로는 느긋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대단히 치열하다. 느긋한 기다림의 대가 하면 우리는 강태공을 떠올린다. 사마천은 <사기> 세가편 제32권 제태공세가에서 강태공을 “낚시질로 주 서백에게 접근하려고 하였다”고 기술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2세였으며, 서백은 나중에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의 문왕이 되는 사람이다.
사마천은 이와 함께 두 가지 설도 소개하는데, 둘 다 강태공이 서백을 적극 찾아 나섰다는 내용이다. 이런 설을 감안할 때 강태공이 위수에서 낚시를 즐긴 것은 서백이 그쪽으로 지나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강태공의 느긋함은 바쁜 사람들이 생각하는 루저의 느림이 아니라 아주 계획적이고 치열한 승자의 느림이었던 것이다.
느림이 느긋함과 통한다면 바쁨은 조바심과 통한다. 바쁨이 가벼움이라면 느림은 깊이다. 땅을 깊이 갈아줘야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듯 인간도 깊이 생각할 때 인생의 맛과 멋이 잘 익어간다. 바쁜 일상에 깊이를 더하고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래 표를 참고해 바쁜 일상에 느림을 녹여내 균형 잡힌 일상을 되찾아보자.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첫댓글 하루 한가지 씩 이라도 실천 해 봐야 겠읍니다.
의미 있는 글 감사 드립니다~
감사
좋은 말씀
감사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