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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의 전신 F6D미사일리어와 AAM이글
1950년대 말 미해군은 장거리 공대지/함 미사일을 장착한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에서 발사하는 사정거리가 수백km가 넘는 미사일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당시 기술로는 작은 미사일을 격추시키는 것은 무리여서 미사일 발사모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미리 탐지해서 격추시킬 수 있는 장거리 수색/추적/공격 능력을 갖춘 함상 전투기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미 해군은 유사시 핵공격 수단으로는 항공모함 밖에 없었고 소련에서도 유사시 미 항모전단의 공격에 대비하여 수백기의 장거리 폭격기와 수백기의 장거리 미사일로 미 항모전단을 격멸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제아무리 미 항모전단이라도 이러한 미사일러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으므로 장거리 수색/추적이 가능한 레이더와 장거리 대공미사일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따라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1958년 밴딕스/그루만팀이 개발한 미사일이 선정되어 XAAM-N-10 이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글은 핵탄두에 최대속도는 마하 3.4에 육박했고 사정거리는 무려 160km에 달했다. 유도방식은 발사후에 무선유도방식에 따르고 중반이후 미사일 내부에 탑재된 레이더로 스스로 목표를 찾아가는 액티브 호밍방식으로 현재 F-14톰캣이 운용하는 AIM-54피닉스와 그 성격이나 제원이 매우 비슷했다.
한편 이글을 탑재할 전투기는 1959년 미 해군이 제시한 요구사항에 맞춰 6개의 제작사에서 설계안을 내놓았다. 1960년 7월 그중 더글라스사의 D-9766이 선정되어 F6D라는 제식명칭을 부여받았다.
F6D는 대형 레이더 안테나와 화기관제장치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주익에 6발까지 이글AAM을 탑재할 수 있었고 함대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하여 4~6시간 동안 초계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항속력을 갖출 예정이었다. 최대속도는 마하 0.9의 아음속에 불과한데 그 이유는 아무리 초음속 전투기라도 이미 미사일 공격이 시작되면 늦으므로 F6D는 초음속 능력을 포기하고 대신 장거리 초계능력을 살려서 미사일 러시를 막자는 구상이었다.
F6D의 주안점은 항속능력인 만큼 엔진도 연료소모가 적은 터보팬 엔진인 JTF10A 2기를 장비할 예정이었다. 이 엔진은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으로 나중에 TF30-P-2란 제식명칭으로 F-111과 F-14에도 탑재되게 된다. 그리고 장시간 비행을 위해 조종사2명과 미사일관제사 3명이 탑승하고 레이더는 1956년 부터 웨스팅하우스사가 개발중이었던 APQ-81을 장비할 예정이었던 이 레이더는 16개의 목표물을 추적하여 동시에 8개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성능을 갖춘 F6D와 이글이었지만 전혀 범용성을 갖추고 있지 않고 오로지 함대방공만을 위한 기체였으므로 생산대수도 적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비용대 효과면에서 아주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 결국 1961년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취임한 로버트 맥나라마 국방장관에 의해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미 해군에는 계속해서 다수의 목표추적/공격능력을 갖춘 전투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조합한 함대방공 전투기 구상은 미 해군의 숙원사업으로 계속 남게 된다.
♤ 또 다른 시작 TFX와 FADF 그리고 VFX에서 F-14로
F6D의 개발중지 이전에도 미 해군은 제공전투가 가능한 새로운 함대방공 전투기인 FADF(Fleet Air Defence Fighter)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것은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본격적인 전투기로 F6D도 이 전투기의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편 미 공군은 F-105 선더치프의 후계기를 찾고 있었는데 마하2.5의 최대속도에 핵폭탄을 비롯한 대량의 탑재량과 장거리 침투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차세대 전투기에 대해서 NASA에서는 새로 개발중인 가변익을 채택할 것을 미 공군에 건의 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TFX(Tactical Fighter eXperimental)이란 명칭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1961년 케네디 정권 출범과 함께 국방장관에 취임한 맥나라마는 포드 자동차의 부사장 출신 답게 국방비 지출에 비용 대 효과를 철저히 검토하였다. TFX와 FADF도 그 도마에 올라서 결국 합쳐지는 운명이 되고 만다. 하지만 두 계획의 차이는 너무 많았다. 결국 맥나라마는 두 계획간의 85%의 유사성을 유지하면서 3,000대 이상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시작해 버렸다.
1961년 이 계획의 새로운 제안요구서가 제출되었고 심사 끝에 1962년 11월에 제너럴다이내믹스/그루먼사의 안이 채택되었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기체가 바로 F-111이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는 F-111, 사진은 공군형인 F-111A이다.
공군형인 F-111A는 비교적 성공작이었지만 해군형 F-111B는 A6D 미사일리어와 비슷하게 피닉스AAM과 장거리 탐색/추적 레이더를 탑재해서 약간은 근접한 성능을 보이지만 그 성능을 위해서 중량이 엄청나게 불어나 버렸고 그 불어난 무게를 줄이기위해 또다시 설계를 했더니 공군형 F-111과의 유사성 28%로 줄어버렸다. 그래서 제작비가 엄청나게 상승해버렸고 결국 해군형 F-111B는 취소되고 만다.
하지만 그루먼사는 F-111B가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F-111B용으로 개발된 엔진과 무장시스템을 이용한 새로운 함상 전투기 모델인 303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303은 VFX-1으로 불리우며 함대방공, 제공전투, 공격기부대 호위, 요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그루먼사는 그동안 보우트와 맥도널사에 패배한 실패를 만회하고자 VFX-1에 회사 자체부담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후 1967년 8월, F-111B가 한창 개발중일 때에 VFX-1의 제안서를 해군에 내밀었다. 해군은 중량때문에 골치아픈 F-111B보다 그루먼의 VFX-1에 큰 관심을 보이고 1967년 11월 부터 1968년 3월까지 F-111B와 VFX의 비교검토를 실시하여 VFX가 F-111B와 당시 해군의 주력 함대방공전투기 였던 F-4J팬텀 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당시 베트남전의 교훈에 따라 VFX의 기동성에도 주목하였다.
한편 1967년 모스크바 에어쇼에 등장한 MiG-23, MiG-25, Su-15등의 러시아의 신형전투기가 F-4를 능가한다고 알려짐에 따라 미 해군은 그루먼의 VFX를 더 빨리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각 군용기 메이커에 VFX의 요구조건 사양서를 보냈고 곧 설계경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해군은 이미 VFX를 채택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미 해군의 제안요구로 총 5개사가 응모하여서 최종적으로 그루먼사의 303E형이 채택되었고 F-14A란 제식명칭으로 원형기 6대가 발주되었다.(나중에 6대 추가발주)
F-14가 A6D와 F-111B를 거쳐 개발된 만큼 같은 성격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그 면모는 일신되었을 뿐 아니라 다목적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F-14의 장거리 수색/추적레이더인 AWG-9와 AIM-54 피닉스 미사일은 A6D부터 내려온 장거리 함대방공임무에 맞춰진 것으로 현재는 거의 쓸모가 없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MiG-25가 몰고온 이른바 MiG쇼크에 베트남전에서의 참패까지 이 모든것이 F-14안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F-14의 개발작업은 3단계로 나뉘어 시행되었다. 첫 단계는 F-111B의 기술을 이용하여 F-14A를 조기에 개발/실전배치하며 이어서 ATE계획에 따라 개발중인 F401-PW-400 엔진으로 바꾸어 대폭적인 파워 업을 해서 항속성과 기동성이 대폭 향상된 F-14B를 배치하고 마지막으로 ECCM능력을 증대시킨 경량 레이더 FCS를 장비해서 무장시스템이 강화된 F-14C를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 보통 레이더 장비는 기체 개발보다 장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F-14C가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F-14B는 원형 1호기 만으로 끝나버리고 F-14C는 실제 제작조차 취소되었다. 현재의 F-14B(F-14A+)와 F-14D는 당시의 F-14B/D의 구상을 그대로 계승한 기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루먼사와 미 해군의 F-14 3단계 성능 향상 계획은 20년이 지난후에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 F-14톰캣의 개발과정
F-14A의 개발과정은 당시의 긴박한 사정에 따라 급속도로 추진되어 1969년 3월에 기본설계를 끝내고 5월에는 모크업 심사를 끝냈다. 이어서 6월 부터는 원형기 제작에 들어가 11월에 지상에서의 가변익 작동테스트를 완료하였다. 개발 원형 1호기는 1970년 11월에 완성되어 12월21일 첫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이는 당초 계획보다 1달이나 빠른 것이었다.
12월 30일에 두번째 비행을 실시하였으나 유압장치 고장으로 시제기가 추락해서 대파되었으나 조종사는 무사히 탈출하였다. 이에 따라 무리한 일정을 다소 느슨하게 조정한 그루먼은 다시 1971년 5월 24일에 원형 2호기가 첫비행을 하였고, 1971년 말까지 7기의 시제기가 완성되어 비행테스트를 실시하였다.
F-14 시제기의 모습
한편 양산 1호기(통산 13호기)는 1972년 5월 12일에 첫 비행을 실시하였고 1972년 6월 28일에는 항공모함 포레스탈 호에서 최초의 이착함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0월에는 미라마 해군 항공대기지에서 전환훈련을 담당하는 VF-124가 F-14로의 기종개편을 개시하였고 같은해 10월에는 첫 실전부대인 VF-1, VF-2가 편성되어 1973년 7월 1일 톰캣 배치와 함께 12월 부터 실전 배치되었으며 1974년 9월 부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 탑재되어 1975년 4월 말 사이공에서의 미국인 구출작전인 [프리퀸드 윈드] 작전에 처음 출격하였다.
톰캣은 이로서 세계 최강의 전투기의 첫발 내딛게 되며 미 해군은 F-14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지닌 함상전투기"라고 자랑하였다.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비록 퇴역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실전 배치되어 있는 전투기들 중에서는 가히 최강의 전투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삭감되는 국방예산과 피닉스 무용론이 제기되고 작전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점차 F/A-18 호넷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있어 아쉽다.
♤ F-14의 각 형식
YF-14A의 구체적인 모습을 결정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안들
YF-14A
YF-14A는 F-14A의 프로토타입으로서, 2기의 모크업이 제작된 후에 만들어 졌다. 1970년 12월 21일 최로로 비행했으며, 1970년까지 모두 12기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테스트를 위해 사용?瑛만? 기체번호가 157986인 기체는 후에 F401 엔진을 장비한 F-14B의 프로토타입으로 전용되었다. YF-14A는 외관상 기수에 기다란 테스트용 프로브가 달린것이 특징이며, 2호기(147981)는 스핀 시험용 소형 카나드가 기수 앞부분에 붙어 있는 등 각 기체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다.
F-14A
F-14A는 F-14의 최초 양산형이다. 처음에는 A형을 양산하고 이어서 엔진을 강화한 B형, 전자장비를 강화한 C형이 생산될 예정이었지만, B/C형이 개발이 좌절되는 바람에 A형은 1985년까지 생산이 계속되어 총계 545기가 생산되었다. 하지만 같은 A형이라도 생산블록에 따라 각기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A형의 생산블록은 1971 회계연도분의 블록 60에서 1985 회계연도분의 블록 140까지 모두 18개이다.
하지만 뒤에 생산된 블록에 실시된 개수작업이 이미 생산된 기체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실전부대에서 사용되는 F-14A는 거의 대부분 같은 형태를 띄고 있다. 각 블록별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비버테일 부분, 에어브레이크, 기수 하면의 센서류, 발칸포용 배기구 등이며, 특히 초기형에서 기수하부에 장비되었던 IRST는 TCS로 불리는 AAX-1 텔레비전 카메라로 교체되어 1983년부터 포인트 머그에서 시험을 거친뒤 133기가 조달되어 F-14A에 장비되었다
각 블록별 진화를 살펴보면, 1971년 회계연도분의 블록 65부터는 소폭 개량형인 TF30-PW-412A엔진이 장착되었고, 72 회계연도의 블록 70부터는 글러브 페어링 상부에 펜스가 추가되었다. 비버테일과 에어브레이크는 73회계연도의 블록 75부터 개량되었고 블록 85 (74년도)부터는 AN/ARC-159 UHF 라디오가 도입되었다. 블록 90(75년)부터는 기수 끝부분에 AOA프로브 도입, 블록 95(76년)에서는 TF30-PW-414엔진이 장착되었다. 77회계연도의 블록 100에서는 플랩과 슬래트가 개량되고 연료계통 및 AWG-9 시스템의 개량으로 신뢰성이 향상되었다.
79년도의 블록 110 후기부터는 비버테일과 주익글러브 하면에 AN/ALQ-126 안테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TCS는 블록 125 (82 회계연도)부터 장착되었다. 1988년에는 모든 F-14와 F/A-18에 마틴 베이커제 신형 SJU-17A/V 이젝션 시트를 장착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F-14D에 와서 적용되었다.
F-14A중 4기는 F-14D용의 프로토타입으로 전용되었다. 그리고 블록85와 블록110의 기체중 18기가 F-14D(R)로 개수되었고 블록115와 블록120의 기체중 32기는 F-14A+(F-14B)형으로 개수되었다. A형은 1991년부터 대지공격력 강화를 위한 개수가 진행되었고, 1997년부터 일부 기체에 랜턴포드가 장비되기 시작하였지만 이것은 비행대 별로 2~3기 정도만 장착된다.
F-14A-GR
F-14가 수출된 유일한 국가가 바로 이란으로서, 이란은 1974년 국경근처에 소련의 MiG-25가 출몰하게 되자 강력한 방공전투기를 원하게 된다. 마침 1973년 파리에어쇼에서 보여준 F-14에 위용에 감탄하여 전투기 도입사업을 벌리게 되고 F-15, F/A-18L(지상형), F-14를 후보로 선정하여 F-14를 선택하고 1974년 6월에 40기를 발주하고 1975년 1월에는 추가로 40기를 발주하게 된다. 이란에 인도된 기체는 블록90에 해당하는 블록5형 30기, 블록10형 32기, 블록15형 18기의 총 80기이며, 테스트 목적으로 그루먼사에 남은 1기를 제외한 79기가 1976년 1월 27일 부터 모두 이란으로 인도되었다.
이란공군 사양의 F-14A는 미 해군의 F-14A 블록90형의 사양이지만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ECCM장비는 제거되었고 레이더 장비도 다운 그레이드가 실시된것으로 전해진다. 이란혁명으로 미국의 지원이 끊겨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버린 F-14A는 대 이라크전에서 몇 안되는 기체가 간이 조기경보기의 형태로 운용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이라크군의 미라지F1에 2기, MiG-21에 1기가 격추되는 등 최소한 7기가 격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란의 F-14A는 연구목적으로 소련으로 넘겨졌다는 설도 있다.
F-14B
F-14B는 당초 A형 양산이후 바로 신형 F401-PW-400으로 엔진을 강화하여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이것이 순조롭지가 못했다. 하지만 1973년 9월 12일의 프로토타입 비행이후 신형 엔진에 따른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여 계획이 취소되고 A형이 계속 생산되게 되었다. 이후 1979년 부터 다시 TF30을 대체 할 수 잇는 차기 엔진의 개발이 추진되었고 YF-14A의 7호기를 이용하여 신형 F101-DFE 엔진의 실험기가 만들어졌다. 이 기체에는 [F-14B 수퍼 톰캣] 이라는 명칭이 붙어져 1981년부터 각종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이런 가운데 다시 F-14D용 엔진으로 F110-GE-400이 결정됨으로써 수퍼톰캣은 다시 이 엔진으로 개장하고 테스트를 계속하게 되었다. 이 신형엔진을 장착한 수퍼톰캣은 결국 F-14D의 프로토 타입이 되고 최초비행은 1986년 9월 29일에 실시되었다.
F-14D의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기존의 생산중인 F-14A에 F-14D용 F110-GE-400을 장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이 신형엔진 장착형은 F-14A+형이라 명명되었다. 이 기체는 1987년 11월 14일에 처음으로 비행하고 1988년 10월 부터 실전배치되었다. F-14A+는 엔진이 변경되고 글러브 베인이 폐지되었으며, RWR을 일부 센서류가 개량되고 기관포 가스 배출구가 개량되었다. 그리고 1991년 5월 1일부터 F-14A+는 F-14B로 명칭이 바뀌었다.
F-14B의 생산은 86회계연도 부터 88회계연도분 36기가 생산되었고, 32기가 기존의 F-14A로부터 개수되어 1991년 걸프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F-14D
F-14D는 F-14의 개발당시에는 계획에 없던 것이었지만 B형과 C형의 좌절이후 1984년에 개발이 발표되었다. D형은 간단히 말해 F-14B의 에이비오닉스를 완전히 개량한것으로서, [F-14B 수퍼톰캣]을 기초로 만들어진것이다. F-14D형은 기존의 AWG-9 FCS대신에 APG-71 FCS를 도입하여 완전한 디지털화와 함께 본격적인 대지공격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신형 IRST및 TCS, AYK-14컴퓨터, ALR-67 레이더경보 시스템, ASN-139 관성항법장치 등이 도입되고 사출좌석도 마틴 베이커제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F-14D의 프로토타입은 A형으로부터 4기가 개수되어 만들어졌으며 최초비행은 엔진개수형 수퍼 톰캣이 1986년 9월 29일, 에이비오닉스 개수형이 1987년 11월 23일이었다. 그리고 양산형이 처음 롤 아웃한것은 1990년 3월 23일이었다.
F-14D의 생산은 당초 127기가 계획되었지만 예산문제로 88,89,90 회계연도분의 37기만이 생산되었으며 이밖에 기존의 A형을 개수하여 90 및 91 회계연도분으로 18기가 더 조달되었다. 이 A형을 개수한 F-14는 F-14D(R)이라 불린다.
기타
F-14는 A,B,D형 말고도 많은 실험형이 제시되거나 만들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들중 하나는 바로 F/A-14D로서 F-14D에 F-15E 수준의 지상공격력을 부여하여 본격 대지공격기로 변신시키는 계획이다. 이 계획은 당초 1995년 부터 4단계에 걸쳐 250기의 F-14에 적용, 4단계말에는 JDAM과 JSOW의 운용능력까지 부여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총계 92억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F-14의 또다른 발달형으로 제안된 것 중 [수퍼톰캣21] 이라는 것이 있다. 이 또한 기존에 생산된 F-14를 개조하는 것이었지만 스텔스성을 대폭 도입해 많은 변화를 보일 예정이었다. 우선 엔진은 F110-GE-129로 바꾸어 수퍼크루징을 가능하게 하고 전자장비도 대폭 개량한다는 계획으로 비용대 효과면에서는 상당히 우수한 것이다. 또한 [수퍼톰캣21]을 더욱 개량한 [어택수퍼톰캣21]도 제안되었다. 이 기체는 스텔스 공격기인 A-12 어벤져에 적용될 예정이던 레이더 및 전자장비를 도입하고 항속거리를 증가시킨 21세기형 공격기이지만 모두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첫댓글 함재기의 로망 톰켓 하지만 이제는 늙어서 퇴역중인 톰켓 현재 F/A-18로 바뀌어짐
늙어서가 아니라 엄청난 연료소비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