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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준 장로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거부였으나 계준이 13세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준은 한 상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의 성실성과 재능이 주인의 마음에 들어 사위가 되었고 탄탄한 사업을 이루게 된다.
유계준은 길에서 전도자를 만났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조사(助事)인 한석진과 홀 의료선교사의 조사인 김창식이다. 유계준은 그들을 관가에 고발하자 당장 구속되고 단두대에 서게 되었다. 이 사건이 서울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연락되고, 마포삼열이 즉시 고종(高宗)을 알현하여 상황을 고하니 즉시 어명(御命)이 내려 처형 직전에 구출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한석진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유계준의 부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술을 너무나 좋아하여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몰라요. 그리고 싸움만 터졌다 하면 치료비를 물어 주어야 했지요. 그런데 예수 믿고 중생이란 무엇인지를 남편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맹수 같았는데 복음이 들어가자 성품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유계준은 신앙인이 된 후에 토요일 저녁에는 목욕하고 주일을 준비했다. 또 주일에는 가게 문을 닫고 철저히 주일성수를 하였고 십일조를 하였다. 그는 장대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산정현교회가 설립될 때 이거 하여 열심히 봉사하던 중 조만식, 오윤선과 삼총사가 되어 함께 장로 장립을 받았고 주기철 목사의 오른팔이 되었다.
▲왼쪽에서 3번째 주기철 목사 4번째 유계준 장로
유계준은 모범적인 장로로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 앞에 충성을 다하여 존경받는 자가 되었다.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독립자금 모금에 힘썼고, 독립신문을 은밀히 배포하며 창씨개명과 학도병 제도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민족 지도자였다. 회사를 민족 기업으로 키웠으며 청지기 사상을 바탕으로 숭덕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당시 교육 사업이란 교사들의 월급을 회사 재정으로 충당해야 했던 때였다. 그는 또한 양로원을 세워 일제 강점기로 인해 젊은 가족들을 징병으로 떠나보낸 늙은 부모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산정현교회 당회에서는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
유계준 장로는 산정현교회 조만식 장로와 함께 충성을 다한 교회의 기둥이었다. 특히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옥바라지와 가족들 뒷바라지를 장장 5년 4개월간 묵묵히 해냈다.
북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산정현교회를 공장으로 헌납하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부했다.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교회를 내줄 수 없다. 일본 놈들도 교회를 빼앗아가지는 않았는데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라.” 그러나 며칠 후 1백 명의 무장 군인이 교회를 징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 부인과 자녀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낸 후 혼자서 교회를 지켰다. 전쟁이 발발한 즉시 공산당은 유계준 장로를 평양 형무소에 구속해 버렸고 9월 28일 국군의 공세에 도망하면서 반공 인사들을 총살할 때 함께 죽임당했다. 이때가 나이 72세이다.
유족으로 장남 유기원 장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의료원장, 2남 유기형 장로는 부산의대 교수, 3남 유기선 장로는 부산의 개업의, 4남 유기천 장로는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5남 유기진 장로는 포로수용소 의사였고, 6남 유기묵 장로도 의사이다. 장녀 유기옥 권사는 누가의료원 원장으로, 차녀 유기숙 권사는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빈 박사의 부인이자 숭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4년 10월 집계로 유계준 장로의 후손이 모두 106명인데 모두가 믿음의 사람으로 명문 가문을 이루었다.
김헌곤 목사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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