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 풍성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가운데 주신 것처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있어 복된 자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던 그날 저녁 제자들은 문을 딱 걸어 잠그고 두려운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로마 군사들의 발소리 뿐만 아니라 유대 종교자들의 그 발소리가 마치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것처럼 심판의 북소리처럼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거예요. 혹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잡혀가면 어떡하지 이러한 염려 속에서 서로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심장이 두근두근 급하게 뛰기 시작합니다. 가슴은 답답해 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에 문을 너머로 예수님이 그 한가운데 오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지난주의 말씀을 떠올려보면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장 먼저 오셔서 하신 말씀이 평강을 선물로 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음성은 그렇게 요동치던 심장이요. 점점 잠들기 시작했고, 손의 옆구리와 손의 못자국과 이 옆구리는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되게 되었던 것이죠.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 대신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두 가지 분명한 선물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요. 자신을 위한 평강이었습니다.
너에게 평강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너도 평강이 있어야겠지만 타인을 위한 평강도 있어야 된다.
그래서 너가 가진 평강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다오
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아라 그렇게 선포했던 것이죠. 이 놀라운 경험 속에서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가 없던 사이에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던 이 부활의 사건이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는 실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요. 그 상황 속에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향해서 일제히 외칩니다.
우리 주가 살아나셨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노라
경험을 했으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도마는요. 그 소리를 듣고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직접 그 못자국을 내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내가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의 손을 넣어보지 않는 이상, 내 손으로 그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는 이상은 나는 믿지 못하겠다.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부활의 밤 이후 일주일 동안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어났던 갈등, 그리고 일주일 후 여드레째 되었을 때에 그 도마에게 찾아와 주셔서 만나주셨던 이 사건 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도마이지만 연약하고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 오고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그날 밤 이후 도마가 겪어왔던 짧으면 짧은 시간이고 길면 긴 시간인 이 여드레 동안에 그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그 내면을 우리 한번 좀 들여다보면서 우리도 저런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한번 점검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여들의 후에 찾아오신 주님께서는요 동일하게 평강을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들 해가 지나서 다시 제자들 앞에 서신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여드레 동안 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지금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는 거예요.
야 우리가 따라다녔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어.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셨어.
여러분 그 부활의 기쁨이 가득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굉장히 격양돼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도마는 아마도 왜 나는 저기에 함께할 수 없을까?
그 안에 찾아오는 불신앙 그리고 외로움 저들은 다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데 나는 왜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외로움 속에 갇혀 있어야 했던 것이죠. 당시 함께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아마 자신에게 수 없는 질문을 했을 거예요.
혹시 나만 버려진 거 아니야? 왜 나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가 정말 그분이 다시 살아난 건 맞는 거 맞는 거야
라는 여러 가지 질문들로 자신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드레를 보내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천년처럼 매우 길었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제 길가에 들려오는 말 중에 흔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참 시간 빠르다. 하루 자고 나면 수요일 자고 나면 주일 일주일에 얼마나 빨리 가는지 제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렇게 있다 보니까 진짜 일주일이 빨리 가요. 일주일이 신속히 지나가요.
날아가듯이 가는데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시간이 빠를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진짜 안 간다 그럴 때도 있지 않겠어요?
제가 이렇게 쭉 생각해 보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시간이 안 갈 때가 언제였는가 죄송합니다.
군대 얘기를 해서 군대 말년 병장이 될 때 그때 시간이 진짜 안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이후로 100일 이 세 자리가 무너지고 두 자리가 되니까 시간이 더 안 가는 거예요. 그런데 카운트 다운이 들어가니까 이거 하루가 천 명 같은 거예요. 빨리 나가고 싶은데 아니야 시간이 안 간다 이거는 이제 제 개인적인 입장이고 그러면 남성들은 아마 대부분 공감이 되실 텐데 여성분은 언제 시간이 안 갈까?
아마도 만삭이 되어서 아이가 막 나오려고 진통이 오는데 병원에 갔는데 이 아이가 나오지 않고 진통만 10시간 12시간 20시간 하면 그 시간이 제가 경험은 안 해봤지만 진짜 길겠다. 1분이 막 1시간 갖고 1시간이 막 10일 갖고 그러지 않을까
제가 임신도 안 해보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한 번은 요로 결석 때문에 집에서 뒹굴뒹굴하던 때가 있었어요. 너무 아파가지고 도대체 이렇게 아픈 거야 도대체 뭔가 그리고 응급실에 간 적이 있거든요. 응급실에 갔는데 제 병은 병도 아니잖아요. 사실 요로 결석은 너무 급한 일들이 많으니까 저한테 와보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와보지도 않는 그 시간이 왜 이렇게 긴지 나는 지금 아파서 배를 움켜 잡고 있는데 그 시간이 저는 너무너무 길었어요. 그러면 이 병원에서 내가 수술을 받고 최고 아플 그 지점을 보내는 그 시간은 모두가 동일하게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고 시간 안 가는 때이겠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게 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채찍에 맞고 그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요?
십자가에 매달려가지고 숨을 헐떡헐떡거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거기까지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중요한 거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살면서 야 시간이 참 빨리 간다 그렇게 느끼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정말 시간 안 간다 느낄 때가 있는 거죠.
오늘 도마인 여들의 7일 동안의 이 과정은요.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길었던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의 여정 끝에 우리 주님께서 도마를 찾아와 주십시오. 오늘 26절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26절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그날도 여전히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닫힌 문도 여드레 전처럼 우리 주님은 문제되지 않았던 것 그 안에 찾아오신 것이죠.
그리고 여드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때에는 도마가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여드레 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토마는 예수님께서 찾아오는 자리, 은혜 받을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기뻐하는 그 순간에 기뻐할 수 없었고, 다른 제자들이 함께 대화하던 부활의 주님에 대해서 공감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반면 여드레를 지난 이때를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모여 있던 그 공동체 가운데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도마도 공동체 가운데 함께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날 이후의 이야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도마는요 놀라운 은혜 회복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날은 다른 제자들보다 도마가 가장 행복한 시간, 그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주님이 찾아오시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은요.
여러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지하는 자리, 은혜 받는 자리에 함께하시는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신흥 공동체 가운데 허락하신 여러분 은혜의 자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 자리를 어떻게든 내가 함께 해야겠다. 그 자리에서 찾아와 만나주시는 주님을 나도 그 현장에서 만나야겠다.
여러분 그러한 마음과 갈증을 가지고 모여야 공동체 가운데 찾아와 주신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은혜의 자리, 소홀히 여기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도마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왜 그 시간에 없었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드레 전과 동일하게 가장 먼저 평강, 샬롬 너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 여러분 두려움에 갇혀 있던 도마, 홀로 외로움에 싸워야 했던 그 도마,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그 도마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듣는 거예요.
샬롬 도마야 괜찮다. 나의 평안이 오늘 너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내 안에서 온전해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마에 닫혀 있던 문은 주님이 주신 평강으로 서서히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저와 여러분들은 동화처럼 아직까지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세상 일이 너무 바빠지다 보니 주님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주일날 한 번만으로도 이해해 주십시오라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점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 때문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주님 다시는 기대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짐하며 아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현실로 인해서 주님 이제는 못하겠네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서 한 겹, 두 겹, 세 겹 닫혀 있는 분들이 있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여드된 날이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와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마음의 문 좀 열어다오. 나의 평강이 니 안에 들어가서 함께하기를 소원한다. 그 즐거움, 그 행복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노크 하시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평강의 주님 앞에 저와 여러분들의 두려움의 문을 여시고 상처의 문도 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신의 문도 활짝 여는 큰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요. 한 번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만나지 못한 자를 위해서 또다시 찾아와 주신 은총이에요.
두 번째는요. 여러분 평강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도마가 이제 평강의 선포를 받았습니다. 그 평강의 선물을 선포해 준 후에 예수님께서 도마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번 우리 27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내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러분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주변에 제자들이 쭉 있고 예수님이 있고 앞에 아마 도마가 서 있었을 것입니다.
평강을 선물로 받았지만 뭔지 어색해요? 왜요?
처음 대면했으니까 너무 어색한 거 부끄럽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이 뒤섞이면서 평강과 내 안에 있는 내재돼 있는 마음들이 막 혼동이 되어서 이걸 믿어야 말아야 되는 거 뭐지 이러면서 내 안에 혼재돼 있는 이 마음 그러면서 어쩌면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부드러운 손을 내미시면서
야 도마야 야 도마야 여기 옆구리 이러시는 거예요. 와서 직접 한번 봐라. 네가 확신을 가질 때까지 내가 너 도와줄게 봐봐 만져봐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여러분 도마의 믿음 없음은 사실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은 도마가 믿음 없는 채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거예요. 주님의 마음이에요. 믿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성도님들이 믿음 없는 채로 그냥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그것은요. 이 도마의 의심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도마의 의심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도마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고집적인 불신앙을 흔들어 깨우는 시간이었어요.
여러분 도마가 앞서 제자들에게 했던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을 만져보고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라는 조건을 내세웠어요. 근데 여기에 보면 이중 부정이 들어가 있거든요. 원문에 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없이는 어떤 말도 난 믿지 않겠다 확고한 태도 자기만의 신념, 자기만의 생각이 고착화돼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가 되어서 어떤 조건을 보여주신 거예요?
야 여기 손 손 손, 야 여기 옆구리 니가 지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생각을 여기 와서 봐라 만져봐라
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신 말씀이
아피스토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피스토스 믿는 자가 되라.
지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믿음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해서 도마를 어루만져주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아피스토스 믿음 없는 자로 머물러 있지 말고 나를 만나 나를 만지고서라도 믿는 자 피스토스의 삶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도마처럼 고집스러운 불신앙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의심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뿌리 내린 내 삶의 태도지요. 내 기준 나 신앙생활 이렇게 하면 돼라는 나의 기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감정과 상황을 더 신뢰하는 모습 이것이 내 안에 고착화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도마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와 증거가 없이는 믿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는 거예요.
또한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찾아왔던 상처와 이 아픔들이 고통과 슬픔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진짜 하나님 살아계신 거 맞아 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거든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불신할 때도 있는 거 또한 하나님이 나를 안 사랑하는가 봐 다른 사람은 다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안 사랑하지?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는 거예요. 왜 내 안에 뿌리내려 형성되어져 있는 이 고착화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내 형편에 따라서 믿기도 하고 내 형편에 따라서 외면하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 형편에 따라서 그저 이 신앙생활 이대로 하면 되겠지라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자들에게 오늘 말씀은 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말씀하는 거죠.
여러분 그렇잖아요. 기도하면서 기대하지 않는 것 이거는 우리의 불신의 고착화죠. 기도하면서 응답을 소망해야 되는데 기도하는데 기대가 없어요.
어차피 안 될 건데 여러분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됩니까?
이런 마음이 있으면 기도의 자리를 찾고 싶습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문제를 가지고 있고 이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요. 기도하게 됩니다.
왜요?
그 확신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내려놓고 기도했을 때 확신을 경험한 사람은요. 그 자리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잖아요.
기도 응답에 대한 기대 가운데 어떻게 기도의 자리를 찾습니까?
기대가 있어야 찾는 거지 또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요. 회복을 바라면서 변화를 거부합니다. 이게 우리의 인간의 통상적인 모습이에요. 분명히 회복은 원해요. 그런데 변화하려고 하잖아요. 그래도 이대로가 좋사오니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세 제자들의 얘기가 사실 우리에게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근데 예수님 아니야 내려가야 된다. 내려가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여기 있으면 변하고 좋지 그러나 주님은 그 편한 자리 좋은 자리가 아니라 가야 할 자리를 가야 되겠다. 가야 할 그 길을 가자 사명의 자리를 가자라고 그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우리의 이 완고한 변화되지 않는 마음이요. 우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그러한 도마에게 와서 책망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거 와서 내 손을 보아라. 손가락도 넣어보고 옆구리도 만져봐. 그리고 그렇게라도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큰 울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 말씀은 도마를 변화시켰어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28절을 한번 보시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도마의 반응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 짧은 이 한 문장이 엄청난 고백인 거 아십니까?
그저 영혼 없이 흘러가는 말이 아닙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믿음의 응답이었다는 거예요. 이 고백은 도마가 평생 살아오면서 그가 알고 있던 신학 개념 경험들을 완전히 뛰어넘어서 인격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도마는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고백은요. 엄청난 고백인 거예요. 이 고백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가장 명확하게 부른 최초의 고백입니다. 도마는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떤 조건도 더 이상 내세우지 않아요.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워 숨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부활의 주님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과 함께 도마의 인생 전체를 주님께 맡겨버립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영역에 물으시는 거예요. 정말 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니, 나를 내 인생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니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마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도마는 작은 믿음 하나를 주님께 드린 거예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본다고 해서 다 이해되지 않잖아요.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의심이 완전히 깨끗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그 고백 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평강의 주님이 오셨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면서 말씀하시는 그 주님 앞에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실제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고백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잠잠할 수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어떻게 잠잠합니까?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고요. 기쁨으로 경비하게 되는 것이고요. 다윗처럼 춤을 추게 되는 것이고 주를 향한 열정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믿음의 요청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도마처럼 응답하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 말씀하십니다. 도마의 고백 끝에 주님은요. 마지막으로 이제 도마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는데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말씀하는 거예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죠.
29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거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러분 도말은 부활의 주님을 본 후에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복되다는 이 표현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이라는 단어인데 기쁨이라는 것 있잖아요. 기쁨을 뛰어넘어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깊은 행복, 기쁨보다 더 더 큰 행복, 영원히 충만해지는 복 이것을 우리는 마카리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어도 주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고 하늘의 복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여기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활의 흔적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요. 그 옆구리에 상처 난 것을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 이 말씀은 오늘 이 시간에도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죠.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주님께서 복되다고 칭찬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본래 믿음이라는 것은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믿겠습니다. 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아요?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따라서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눈으로 확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눈으로 확인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이 있어서 주님이 보이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이 있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믿음은요. 말씀을 들을 때 성령 감동이 있을 때 마음이 열리고 진리 앞에 서게 될 때에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믿게 되어진다는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님은요. 오늘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너는 보지 않고도 나를 사랑하는 너는 보지 않고도 나를 믿느냐
오늘 이 시간 이 주님의 음성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이 음성이 저와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도마 이야기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도마는 처음에 믿지 아니하겠다 했어요. 왜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고집 불신앙 이것이 방어막이 되었던 것이죠. 확실한 증거 없이 믿지 않겠다 완전히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그의 완고함을 꾸짖지 않으셨어요 그에게 찾아와서 부드럽게 평강이 있기를 소망했고, 그래 니 조건대로 한번 와서 만져봐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거기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복음 있는 믿음 말고 보지 않고 있는 믿음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데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은 개인 차가 다 있겠죠. 그렇죠 그러나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오늘 주님이 도마를 중심으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지 않고 있는 믿음이 점점 커집니다.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