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과 파리, 어디가 나을까? | ||
| ||
예전에 프랑스라는 나라를 좋아했다. 프랑스는 1789년 시민 혁명의 나라, 인권 선언을 발표한 나라, 파리 코뮌의 나라, 예술의 나라, 매력적인 사람들의 나라, 패션과 스타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이었고, 아마도 두 번째로 큰 영향을 준 것은 홍세화 선배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2년 배낭여행과 2002년 신혼여행 때의 즐거웠던 기억도 프랑스라는 나라를 좋아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2010~2011년 영국에 와서 살면서 다시 프랑스 파리를 찾아갔다. 그러나 영국에 살다가 찾아가본 프랑스는 한국에 살다가 찾아가본 프랑스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영국과 한국 사이의 차이가 커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사회나 도시에 대한 내 생각이 변한 것일까? 파리 신시가 라 데팡스에 있는 그랑드 아르슈 앞의 거대한 광장. 김규원. 영국이라는 사회와 프랑스라는 사회를 통째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웃 나라인 만큼 그 사이에는 수많은 다른 점과 같은 점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또 잠시 이 두 나라를 방문한 내가 그 사회의 상당한 부분을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차이를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로 좁혀서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국가라는 큰 단위에 비해서는 공간적으로 한정돼 있고, 그 두 나라의 특징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표 도시들이니 말이다. 더욱이 두 도시에는 내가 장기간 살지 않고 잠시 여행을 했거나 학교를 다닌 정도의 인연밖에 없어 심리적으로도 비슷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런던의 국립 미술관 앞 트라팔가 광장. 김규원. 2011년 파리에 가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파리는 런던보다 도시의 공간 스케일(잣대, 눈금)이 크고, 구획이 정연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파리의 대표거리인 샹젤리제 거리는 왕복 8~10차로 정도 되는 대로이고, 그 옆의 보행로도 차로만큼이나 넓다. 그리고 파리의 길은 런던과 비교할 때 넓은 동시에 직선으로 반듯하게 놓인 경우가 많다. 또 파리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르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그랑드 아르슈로 연결되는 동-서 선이 도시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도로가 이 중심축과 연결돼 있다. 특히 개선문은 거대한 원형 교차로인데 무려 12개 도로가 여기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파리는 1853~1870년 조르주 오스망 시장의 도시계획에 의해 중세 도시에서 근대 도시로 크게 틀을 바꿨다. 파리 도심의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 김규원. 반면 런던은 인구가 750만명으로 파리 인구 217만명의 3배가 넘지만, 도시의 공간 스케일(잣대, 눈금)이 그렇게 크지 않고 구획이 혼란스럽다. 런던의 대표거리라고 할 화이트홀은 남북으로 뻗어있는데, 곡선으로 완만하게 굽은 길이고 너비도 4~6차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 옆의 보행로도 좁지는 않으나, 보통 너비의 길이다. 런던의 길은 직선과 곡선이 뒤섞여 있고 방향도 일정하지 않으며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골목이나 샛길 같은 불규칙한 길들도 많다. 예전에 있던 길들을 조금씩 넓히거나 고쳐가면서 도시를 만들어왔기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런던에는 파리의 샹젤리제 같은 강력한 중심축도 없으며, 개선문과 같은 거대한 교차로도 없다. 런던에서는 대부분의 거리에서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옥스퍼드 스트리트 정도에서나 방향 감각이 생긴다. 런던의 도심의 주요 거리인 화이트홀. 김규원. 둘째로 파리의 주요 건축물은 아주 규모가 크고 상징성이 매우 강하게 설계돼 있다.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끝인 파리의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이 착공한 것으로 높이가 50m인데, 20세기 후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이었다. 높이가 50m이면 그렇게 클 것 같지 않지만, 직접 가서 보면 부피감 때문인지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개선문의 원조인 로마의 개선문들은 저리가라 할 규모다. 그런데 1982년 북한의 김일성은 평양에 자신의 독립투쟁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60m의 개선문을 세워 파리의 개선문을 2등으로 밀어냈다. 7년 뒤인 1989년 다시 프랑스 파리의 라 데팡스 지역에 두 개선문의 규모를 무색하게 만든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바로 그랑드 아르슈인데, ‘인류의 형제애’를 상징하는 이 개선문은 높이 110m, 너비 108m, 깊이 112m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개선문의 양쪽 기둥은 프랑스 정부 건물, 지붕은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그랑드 아르슈 앞에는 엄청나게 넓은 광장이 있는데, 트라팔가 광장은 아마도 5개 이상 들어갈 것 같다. 세계 최대의 개선문 라 데팡스의 그랑드 아르슈. 김규원. 파리를 대표하는 또다른 건물인 에펠탑은 지금부터 두 갑자 전인 1889년 세계박람회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324m이고 81층으로 이뤄져 있다. 이 역시 가까이 가서 보기 전에는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기 어렵다. 너무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에펠탑을 한 눈에 제대로 보려면 센강 건너편 사요 궁전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또 최근에 들어선 또 하나의 거대한 건물은 1996년 파리 동쪽 베르시 지역에 들어선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프랑스 국립 도서관 본관)이다. 20여층의 4개 고층 건물이 직사각형의 꼭지점에 서로 마주 선 형태로 돼 있는데, 동쪽의 2개 건물에서 서쪽의 2개 건물로 가려면 150~200m 정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꼭지점을 이루는 건물 안쪽에는 거대한 내부 숲이 조성돼 있다. 이 도서관의 4개 건물의 규모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지만, 넓은 터에 건물들이 서로 많이 떨어져 서있어서 이를 한 눈에 보려면 그 옆에 있는 시몬 드 보부아르 보행자 다리로 한참 걸어가야 한다. 도서관 터가 너무 넓어 도서관 안에서의 이동도 보통 일이 아니다. 프랑수아 미테랑 국립 도서관과 시몬 드 보부아르 다리. 김규원. 런던의 킹스 크로스 부근의 브리티시 도서관. 김규원. 이밖에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앞 튈르리 정원, 앵발리드 앞 정원, 에펠탑과 사관학교 사이 샹 드 마르스 공원 등은 각각 이 건물들의 앞마당 노릇을 하는데, 길이가 600~1000m, 너비가 300~400m 가량이어서 보는 맛이 시원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장애인이나 어린이·노인 등 교통 약자들이 다니기에는 너무 멀고, 어른이 걷기에도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파리의 상징 건축물들은 ‘거대한 스케일’, 또는 ‘과장된 스케일’을 사용하고 있다. 파리의 앵발리드와 그 앞의 넓은 잔디밭과 도로. 김규원. 런던에는 이런 장대한 상징 건축물이 별로 없다. 런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경관은 세인트 폴 대성당과 영국 의회(웨스트민스터 궁전)이다. 두 건물 모두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지만, 너른 마당이나 진입로를 두지 않아서인지 파리의 상징 건축물에 비하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이 이 건물들은 개선문, 에펠탑, 그랑드 아르슈처럼 상징성에 중점을 둔 건물이 아니고, 하나는 교회, 하나는 의회 건물이다. 런던의 또다른 역사적 상징인 런던 타워와 타워 브리지는 그냥 평범한 규모의 건축물들이다. 2004년 문을 연 스위스 재보험 건물(30세인트 메리 액스 빌딩, 또는 거킨이라고도 함)은 높이 180m에 40층으로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하는 건물이 됐다. 그런데 거킨의 높이는 에펠탑의 절반 정도이고, 이만한 규모의 건물은 런던에 여러 개가 더 있다. 2000년에 등장한 커다란 관람바퀴 ‘런던아이’는 높이 135m다.
런던 도심 시티의 대표 건물인 30 세인트 메리 액스 빌딩. 김규원. 셋째로 파리 도심의 건물들은 근대적인 양식 일색이다. 거의 통일돼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맨 위층에 머리띠를 두른 것 같은 19세기의 양식이 압도적으로 많다. 다만 라 데팡스 같은 도심 외곽의 건물들은 초현대식으로 지어졌다. 파리 도심의 건물 최고 높이는 30~40m 정도로 엄격하게 제한돼 있다. 런던 도심은 튜더 시대 건물에서 스위스 재보험 건물 같은 초현대식 건물까지 다양하게 들어서 있다. 커내리 워프 지역에 라 데팡스처럼 사무용 건물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기도 했지만, 시티와 웨스트민스터 등 런던 곳곳에 옛 건물과 새 건물이 공존한다. 런던의 대표적 건축 제한은 ‘보호된 경관’으로 주요 지점 13곳에서 세인트 폴 성당과 영국 의회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3곳에서 바라볼 때 이 두 건물을 가리는 건축물은 들어설 수 없다. 런던을 대표하는 2대 경관 가운데 하나인 영국 의회. 김규원. 넷째로 파리는 14개 지하철 노선과 2개 지하철 지선, 버스, 3개 전차 노선, RER 등이 거미줄처럼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역 사이는 매우 가깝고 어떤 역 사이는 너무 멀다. 이를테면 1호선 샤를 드골 에투알 역과 조르주 생크 역 사이는 300m 가량이고, 14호선의 샤틀레 역에서 가르 드 리옹 역 사이는 2㎞ 가량 된다. 샤틀레 역 안에서의 환승 거리는 직선 거리로 200m 정도 되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멀다. 이것은 4호선 샤틀레 역과 시테 역 사이의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교외 장거리 노선인 RER는 속도가 빠르지만, 역 사이 거리는 지하철 노선의 역 사이 거리보다 더 길다. 파리는 도심 외곽에 6개의 기차역이 있어 교외나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연결된다. 파리에서 지하철 역 입구를 찾는 것은 보물찾기와 비슷해서 역 표지판이 잘 보이지 않고 역 입구가 뜬금없는 곳이 있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경우가 많지 않아 휠체어를 타거나 유모차를 미는 사람이 지하철을 타기가 쉽지 않다. 또 휠체어나 유모차가 통과할 수 있는 넓은 검표기가 없어서 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부탁하거나 심지어 비상전화를 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
런던은 11개 지하철 노선과 도클랜드 경전철, 오버그라운드 등 13개 도시철도 노선이 있다. 템스강 북쪽 지역은 지하철이 촘촘히 놓여 있으나, 템스강 남쪽 지역은 노선이 상대적으로 성기게 깔려 있다. 역 사이의 거리는 대체로 일정한 편이며, 환승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도심이나 도심 바로 외곽에 기차역이 14개가 있어 교외나 다른 지방으로 연결된다. 런던에서는 라운델 로고 덕에 지하철역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버스 정류장 표시와 거의 같기 때문에 헷갈리기도 한다. 런던 지하철역에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충분하지 않지만 파리보다는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휠체어나 유모차가 통과할 수 있는 넓은 검표기가 대부분 지하철역에 설치돼 있다. 런던 지하철. 김규원. 런던에서는 평일에 도심 지역에서 혼잡 통행료를 10파운드(1만8천원)씩 물리기 때문에 도심에 자동차가 적은 편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꽤 많으며, 모터바이크를 타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길이 좁고 거리 구획이 작아 걸어다니기에 비교적 편리하다. 길이 좁고 차량이 적은 편이어서 건널목이 잘 마련돼 있는데도 사람들이 거의 아무데서나 길을 건넌다. 런던의 도심에서 보행자들은 아무데서나 길을 건넌다. 김규원. 여섯째 파리에는 레스토랑과 브라세리, 비스트로가 거리에 넘친다. 그러나 원래 간이 음식점인 브라세리나 비스트로도 저렴한 곳이 드물다. 이들 음식점에서는 10파운드(12유로) 이하의 프랑스 음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심에서는 맥주 값도 500㎖이면 5유로(4파운드) 이상이다. 웨이터가 시중을 들기 때문에 봉사료도 줘야 한다. 런던에는 레스토랑도 많지만, 펍도 많다. 펍에서는 영국의 여러 전통 음식을 10파운드 이하로 먹을 수 있다. 맥주값은 도심에서도 1파인트(568㎖)에 4파운드 이하다. 펍에는 웨이터가 없어서 봉사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 일곱째 파리의 미술관·박물관은 시설과 작품이 우수하나 대부분의 미술관·박물관이 유료다. 런던의 미술관·박물관은 시설과 작품이 우수하며 7개 주요 국립 미술관·박물관이 무료다. 런던의 국립 미술관 등 주요 문화시설은 입장이 무료다. 김규원. 결론으로 보면, 파리는 스케일이 크고 장대한 것들이 많다. 대체로 구획이 정연하게 돼 있으며, 거리나 건물이 일정한 양식으로 구성돼 있다. 도시의 tm케일이 커서 걸어다니기에 불편함이 있으며, 지하철 이용도 조금 불편하다. 보통의 음식과 술값이 비싼 편이고, 무료인 미술관·박물관이 거의 없으며 가격도 만만치 않다. 런던은 인구가 많지만, 도시의 스케일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고 좁다. 거리나 건물의 모습이 여러 가지여서 혼란스럽다. 스케일이 작으니 걸어다니기에 편리하고, 지하철도 이용하기에 편리한 편이다. 물가가 비싸지만, 펍의 음식과 술값은 매우 싼 편이며, 주요 미술관·박물관은 대부분 무료다. 이상의 평가는 두 도시의 사실에 대한 비교도 있으나 인상 비평인 것도 있다. 런던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파리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공간의 다양성, 실용성,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차원에서 보면, 런던이 파리보다 상대적인 강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