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 / 허일
젖샘을 보채다가 허깃잠 든 나를 업고
풋바심 한 철 건너기 강물보다 깊던 날에
흰 무명 옷솔기에 밴 소쩍새 울음소리
감꽃이 별똥처럼 떨어지는 빈 뜨락에
가난한 목숨 길어 정화수 달 띄우면
사르르 물무늬 일어 바람조차 삼갔어라
산울림 타고 넘는 아득한 정토라도
지긋이 눈감으면 가슴 속은 열반이라
합장한 이승 그 밖을 우러르던 눈길이여
모정이 이리 멀고도 깊은 것인가. 첫째수는 시인의 유년 시절이요 둘째수, 셋째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간절한 바램이다. 자식은 어머니에게는 하나의 종교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잘 되기만을 위해 일생 구도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이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이근배 시인의 해설을 들어본다.
여기 와서 허일의 향토적 서정이 종교의 깊이에 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인간의 삶의 근원과 그 회귀를, 하나의 서정으로 이끌어 올려, 한국인의 전통적으로 감추고 살아 온 한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보는 그의 시적 결구는 시를 하나의 기능으로 하지 않고 보다 오랜 사고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구도의 길에 서 있음을 본다.
젖샘을 보채다가 허깃잠 든 나를 업고 풋바심을 나간다. 이 바쁜 바심 한철 건너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강물보다 깊다고 했다. 엄마의 흰 옷솔기에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묻어있다. 어머니는 여름 내내 소쩍새 우는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감꽃이 별똥처럼 떨어지는 새벽 빈 뜨락이다. 가난한 목숨을 길어올려 정화수에 달을 띄우면 새벽 바람은 사르르 물 무늬가 인다. 삼가 새벽 바람도 이를 비껴가는 것인가. 바램은 산울림 타고 넘는 아득한 정토요, 지긋이 눈 감으면 어미 가슴은 이미 열반에 든다. 합장한 어머니의 이승 그 밖을 우러르던 어머니의 겨운 눈길이다.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깊고도 간절한가.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애절한 그리움이다. 나직이 불러보는 서러운 내 어머니인「사모곡」도, 한생 가슴 야위 내 어머니「어머니」도 시인에게는 차마 비껴갈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이며 아픈 그리움들이다.
두 번째 엮은 시조집 「이 시대를 살아가며」는 단수만 읊은 선생님의 시조집이 다. 시조는 애초부터 단수이며 그것이 원형이다.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단수라야 가곡이나 시조창 가락에 사연을 얹어 부를 수 있다. 그래야 시조의 제맛이 나는 법이다. 음악성이 있는 단시조라면 얼마든지 옛 창에 사연을 얹어 부를 수 있다. 단시조에서 연시조로 바뀌어 간 것은 1920년 대 이후부터이다. 노래하는 시조에서 짓는 시조, 바로 읽는 시조로 탈바꿈하면서 음악과 문학은 서로 남남이 된 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어언 100여년이나 되어간다. 이로 인해 노래와 문학이 함께였던 시조는 노래는 문학을 잃고 문학은 노래를 잃었다. 현대에 와 시조가 자유시화 되어가는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조의 근원은 음악이면서 문학이었으니 따져보면 음악성을 잃고서는 시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시조가 자유시화해가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아픈 시조의 진화를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묘 / 허일
어머니!
이 그리움 돌에다 새기리까
당신의 이 아들이
당신 곁에 왔습니다
보세요
여기 이렇게
손주놈도 왔고요
「성묘」는 시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림이다. 언어로 그린 세밀한 크로키라고나 할까. 시조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12개의 각기 다른 붓질로 그야말로 여백이 있는 멋진 문인화 한폭을 완성해내야한다. 12 도막들은 의미를 가지면서 새롭게 연결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때의 연결고리가 느슨한가 팽팽한가에 따라 시조의 우열을 결정해준다. 특히 종장의 첫 소절 3음절은 일대 반전을 꾀해야하는 시조의 운명축이다. 시조의 생명은 여기에 달려있다.
종장 첫소절 3음절 ‘보세요’가 의미를 반전시키고 있지 않은가. 성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머니 이 그리움을 돌에다 새기리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손주놈도 이렇게 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움을 돌에 새기지 않아도 손주놈이 왔으니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묻고 있다. 한 마디 3음절이 천지를 바꿔놓는다.
아내
-그 곱던 시절에는 / 허일
가시 돋힌 장미더니…
그대 곱던 시절에는
잔잔히 물결치는
눈썹 위로 달 지는데
내 가슴 저문 뜨락에
목련으로 피는가
젊은 시절의 모습과 나이 든 지금의 모습이다. 장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시 돋혔어도 예쁜 장미가 젊어서는 참 좋았다. 잔잔히 물결치는 것은 잔주름일진대 40대 중년의 세월을 그리 에둘러 말했다. 그 눈썹 위로 달이 진 것이다. 이제 내 가슴의 저문 뜨락에서는 목련이 피어나는 것이다. 목련은 아무래도 장미같은 미모는 아니나 소박하고 따뜻한 여인일 것이다. 젊음과 늙음을 장미와 목련으로 대비한 것이 이채롭고도 아름답다.
전원범 시인은 허일의 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어의 조탁에 의해서 빈틈없이 구성해놓은 시적 골격이며 , 말의 절제 그리고 인위적 이거나 가시적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우리말이 갖는 본질적인 리듬을 살펴 시조의 어떤 정형을 보여주고 있다.
허일 시인의 시조는 시조의 전형이다. 시인에게는 화려한 기교도 없고 꾸밈도 없는 소탈한 모습 그 자체이다. 편안한 읽기만큼 의미 또한 울림이 크다. 감동은 독자와 텍스트, 작가와 텍스트와의 거리가 적당히 유지될 때 생겨난다.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독자와 텍스트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작가와 텍스트 사이가 멀면 독자와 텍스트와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이 거리 조정이 글에서는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 달리 말하면 객관성의 확보이다.
-해설/신웅순
*옮겨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