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함이 중요한 이유
마가복음 9:38~42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언젠가 한 번은 40대 남성분에게 전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죽기 직전에 믿음을 갖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우편 강도처럼 하나님 나라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하여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는 ‘비켜서, 옆쪽으로, 가장자리로, 대각선으로’ 등을 뜻하는 부사입니다. 즉 옆으로 걸어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뜻으로 ‘그 방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어떻게 하든 들어만 가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서울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삶이 주어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천국도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다드리는 순간부터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내게 주어진 육체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령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타나는 영광이 다릅니다. 그리고 생명의 성숙에 따라서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척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서 끊임없는 변화가 이뤄지고 이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영원한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보낼 때 가져야 할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인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단 한 구절이지만 ‘우리’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열두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은 개인들이 ‘예수’ 이름의 능력을 보고는 그것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앞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능히 쫓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들었던 것과는 비교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네가 속한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탁월한 능력이 나타날 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예수님은 39절과 40절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십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온유란 영어로 ‘meek’ 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을 어떤 사건과 사람에 대하여 탄력성있게 수용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에 대하여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모세의 온유가 뛰어남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온유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아나'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고대시대는 종은 명령하였고 이에 대답하는 사람은 종을 의미하였습니다. 주인만이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 주어진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절대 순종하였기에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 중 세 번째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온유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음이 굳어지므로 평안을 잃고 재앙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지니면 미래와 희망을 주게 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영혼이 잘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온유함을 누릴 수 있는지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하며 이웃에게 너그러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것이 온유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온유함이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음 말합니다.
막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은 참으로 친절한 행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은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그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자신을 일체화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 각 사람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을 고백할 때 이를 진정성있게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복음이 떨어져 자라납니다. 막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살아있고 활력있는 말씀은 자라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하여 함부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나를 만들어가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하나님 나라에 멋진 걸작품을 만드시려고 성령은 내 안에 보내셨고, 그를 통하여 기필코 이루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역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예수님께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희망을 찾습니다. 막 4:31,3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아주 작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더라도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런 마음이 온유함입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흔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든가‘싹수가 노랗다’라는 표현으로 사람을 섣부르게 규정하고 억누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렇게 사람을 보편적인 잣대로 바라보았다면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적인 천재로 일컫는 아인슈타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에는 발육이 늦고 세 살까지는 말도 하지 못해 부모는 그가 저능아가 아닌가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동작이 굼뜨고 의욕도 없었으며 성적 역시 형편이 없어 그의 담임 선생님은 ‘이래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성적표에 기재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어머니는 아인슈타인에게 “너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을 거야. 이 세상에는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길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면서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격려하는 마음이 온유함입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관용을 쉬운 말 성경에서는 ‘너그러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Show a gentle attitude toward everyone.”이라고 하였습니다. ‘너그러움’이란 넓은 마음으로 상대를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막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여 그를 정죄하거나 믿음을 방해할 때 오는 형벌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상처를 주고 절망을 주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 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에게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힘을 실어 주면 그것이 내게로 복으로 돌아와 땅에서 기업을 누리며 평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모두 다릅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각종 연구를 통해 사람마다 지문(指紋)의 형태가 다른 것처럼 목소리도 각기 다른 성문(聲紋)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 사람은 각기 독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나 다운 것’이라고 표현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내가 모든 인류 중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성을 이뤄내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천한 것과 귀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으로 보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잠잠히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뤄가시는 과정에서 내게 나타나는 현상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때가 되면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유함을 가졌더니 그 믿음을 보시고 광야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2백만 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40여 년간 먹을 것에 부족함이 없었고, 목마름이 없었으며 의복이 해하거나 신발이 닳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온유함을 잃어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온유함이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통로가 될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성령님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평안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마음이 담대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이 땅에서 기업을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