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33/191112]歸去來辭와 日日仙
나는 지금도 고교시절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수업이 있다. 안성호 선생님. 작달막한 키에 낚시를 아주 좋아한다는 한문 선생님. 어쩌면 내가 ‘역사 이야기꾼(히스토리 스토리텔러)’이 된 것도 그분의 영향일 수 있겠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사자성어四字子成語들(계명구도, 계륵, 칠보시 등등등등)을 얼마나 실감나게 들려주던지, 적벽대전에서 대패해 쫓기는 조조曹操와 그를 살려주는 관우關羽의 얘기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귀를 쫑긋거린 수업은 오직 한문시간이었을 터. 또 하나,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소동파의 ‘적벽가’ 그리고 제갈량의 ‘출사표’ 등을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외우던 그 모습. 그분의 그 모습에 반해, 나도 대번에 외우고 눈을 지긋이 감고 친구들 앞에서 낭송하는 ‘천재성’을 발휘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아, 그리울 손! 지금은 ‘똥머리’가 된 나의 기억력이여!
오늘 새벽 왜 그 장면, 그 구절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마도 최근 내가 ‘몹시도’ 행복하기 때문일 터. 아런무 부러움이 없다는 것은, 세상 다 살았다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 삶은 이제부터인 것을. 우리 연배가 자주 떠벌리는, 시중에 떠도는 건배사로 ‘청바지’가 있다.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라나? 굳이 청바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귀거래사’ 구절이 느닷없이 떠오른 것은 고향에 내려와 나의 탯자리 집을 편리하게 고치고, 나 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아 ‘행복의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성호 선생님은 제스처도 죽여줬다. 倚南窗以寄傲(의남창이기오:남쪽 창가에 기대어 있노라니) 구절을 설명할 때 창가에 기대 ‘뻐기는 듯한’ 모습을 취하거나, 景翳翳以將入(경예예이장입: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홀로 서성거리네)의 대목,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물오른 나무들 싱싱하게 자라나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샘물은 퐁퐁 솟아 졸졸 흘러내린다)를 풀이할 때 남발하던 의성어들(해가 뉘엿뉘엿, 나뭇가지가 너울너울, 샘물이 졸졸졸)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중에 나로선 압권은 단연코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친척 이웃들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글 즐기니 근심은 사라진다) 구절이었다. 거문고는 기타로 대체하면 되건만, 기타를 칠 줄 모르니, 나는 수담(手談: 바둑)을 들겠다. 바둑과 독서. 이만하면 대장부의 삶으로 무엇이 부족할 것인가.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내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그리고 사랑하는 3명의 여동생 가족들이 자주 찾아와 정화(情話: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이르러선 도대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러니 ‘어찌 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胡不歸)? 그래서 나는 ‘40년 로망(소원)’을 꿈꾸며 돌아온 것이다. 已矣乎(이의호: 아서라. 말아라)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세상에 이 내 몸 얼마나 머무를 수 있으리오)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물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가고옴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더 늦기 전에 이뤄야 할 일을 이룬 지금, 2%도 부족함이 없다면 지나친 말일까?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부귀영화는 애초부터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도교道敎의 최고 바람은 신선神仙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고교 1학년 겨울방학때 잠깐 배웠던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한 구절에 필feel을 받았다. ‘一日淸閒 一日仙(일일청한 일일선)’. 어찌 하여 이 구절이 이날 평생 내 뇌리에 꽂혀 있었던가? 설악산 수학여행때 유일하게 사온 것이 ‘이 구절을 인두로 지져 쓴 나무판’이었다. 역부러 이 구절을 써달라고 졸랐다. 이 명패를 오래도록 간직했는데, 어느 해 이사할 때 없어졌다(아마도 아내가 나 몰래 버렸을 것이다). 청한淸閒의 한閒은 한閑과 같은 자이다. 하룻동안 마음을 잡생각 없이 깨끗하게 먹고, 한가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하루의 신선一日仙’이 된다는 것. 나아가 생각했다. 그럼, 날마다(每日) 그렇게 청한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날마다 신선(每日仙)’이 되는 게 아닐까?라고. 이후 나의 좌우명은 ‘매일청한 매일선’이었는데, 한국고전번역원의 한 한문학자가 그 말을 듣더니 “매일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날마다’는 ‘일일日日’이 더 맞고 어울린다”고 말하여 곧바로 수정했다. 일일선이 나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 ‘고수高手’는 우리집 당호 ‘애일당愛日堂’을 초서로 멋지게 써주어 편액을 달았다.
아무튼, 나는 이제부터 죽는 날까지 ‘일일선’을 지향志向할 셈이다. 신선이 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하룻동안 마음을 청한하게 가지면 되는 것을. 날마다 신선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날마다 마음을 청한하게 가지면 되는 것이어늘, 사람들은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는가?) 하는가 말이다.
이제야 알겠다.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신선 사는 곳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리오)일 터.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만물은 제 철을 만나 신명이 나겠지만)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이제 나의 삶이 휴식년임을 절실히 느낀다). 그러니,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 뜰 앞 나무를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짓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 때로는 고개 들어 먼 곳도 바라볼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연의 섭리攝理도 유심히 살펴보자.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무심한 구름이 산골짝을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가 둥지로 돌아오는구나). 어찌 건강 관리를 게을리하랴.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깊고 굽이져 있는 골짜기를 찾기도 하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험한 산길 가파른 언덕길도 날마다 오르네).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이웃집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며 할 일을 알려주네),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서쪽 밭에 나가 씨를 뿌려야지). 그런 후,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좋은 시절 바라며 홀로 나서서),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지팡이 세워두고 김 매고 북돋울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