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질적으로 나무와 함께 살아간다
3장15, 고찰(考察)의 특징에 관하여
『존자여, 고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동라(銅鑼)(징 같이 생긴 타악기)를 칠 때, 계속 여운이 생기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 때 동라를 치는 것은 성찰로 볼 것이며, 여운은 고찰로 볼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계속해서 생각해 내는 것이 고찰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홍해에 쓸어 버리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위대한 왕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힘센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아모리 왕 시혼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시편> 136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동라를 치는 것은 성찰로 볼 것이며, 여운은 고찰로 볼 것입니다"를 보자.
여운은 고찰이라? 성찰은 치밀히 하지만 간단히 서술하고 여운이라는 고찰 내용을 좀 길게 쓰면 글이 괜찮을 것 같다.
오늘 시편에서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를 보자.
나의 위험 요소를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내용 같다.
“힘센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를 보자.
이것도 마찬가지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를 보자.
당연히 감사할 일이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감사를 받는 존재는 인자해야 한다. 하늘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숱하다. 그들에게도 감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감사는 어렵다. 그래도 범사 감사가 삶을 좋게 만드는 것 같다. 범사에 감사하자.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이런 동시적 개화와는 반대로 각 나무가 연이어 꽃을 피워 한 서식지에서 1년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긴 개화기를 보이는 식물도 있다. 대표적 식물이 동남아시아 원산이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무화과이다. 무화과꽃은 꽃차례가 둥근 항아리같이 형성되고 작은 꽃들이 항아리 안쪽에서 생기기 때문에 바깥에서 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무화과, 즉 ‘꽃이 없다’라는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이름을 왜 고치지 않을까?
<성경 속 나무 스토리텔링>에 나오는 글을 보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창세기 21:33~34)
아브라함과 그랄왕 아비멜랙의 종들은 브엘세바 부근의 우물로 인해 분쟁이 잦았으나, 아브라함은 암양새끼 일곱 마리를 선물로 주고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우물의 소유권을 확보한다. 그래서 이 우물은 브엘세바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일곱 우물(일봉 암양 새끼로 산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나무를 심어 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는 한편, 영원한 하느님, 여호와 엘오람(영원한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하필 에셀나무를 심고 기도했을까? 에셀나무는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몇 안되는 나무 중 하나이다. 소금처럼 짠 에셀나무 잎은 새벽녘에 이슬을 머금었다가, 태양 아래서는 그 이슬이 증발하면서 기화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나무에 비해 5~10도 정도 낮은 그늘을 제공해준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에게는 이만한 휴식처가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녹음수 에셀나무를 심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에셀나무가 위성류란다. 소개를 보자.
[에셀나무의 학명은 타마릭스(Tamarix, spp.)이고, 영어 이름은 타마릭스 트리(tamarix tree)이다. 중국어 이름은 위성류(渭城柳)이며, 우리나라도 위성류라는 중국어 이름을 그대로 빌려 쓰고 있다. 성경에서는 에셀(eshel)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성지에는 민위성류(T. aphylla), 만나위성류(T. mannafera), 프랑스위성류(T. gallica), 나일위성류(T. nilotica) 등이 자생한다.
에셀나무는 지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와 중국에 이르는 지역의 염분도가 높은 사막이나 산악지대 및 반건조 지대에 약 75종이 분포한다. 지중해 연안에는 약 10여 종이 자생하고 있다. 건조한 기후에 매우 강하지만 물기가 많은 수습지(水濕地)를 좋아하며, 염분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 요르단 유역, 네게브 사막, 아라바 계곡 등 다른 식물들이 살기 어려운 곳에서도 자생한다.]
이 위성류가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만나라는 음식의 원재료란다. 계속 보자.
[만나가 서쪽 시내 산에서 발견된 어떤 자연적인 식용물질이라는 주장이 많은데,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는 만나가 위성류에서 나오는 분비물이라는 것이다. 패각충과의 곤충인 연지충이 나무껍질에 구멍을 내면, 끈적끈적한 수액이 나뭇가지에 쌓이거나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아침 햇빛에 녹기 전에 이 작은 것들을 모은 것이 만나라고 하였다.]
나무 하나가 팩트를 일구어간다. 나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그러나 법정이 반드시 사이프러스에 반감 있는 이들의 편을 들라는 법은 없다. 래넉셔의 주택 소유주들이 끊임없이 자라는 상록수 담장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괴로움을 겪은 끝에 그들의 이웃을 고소했을 때, 마지막 판결은 쑥쑥 자라는 15미터 나무를 6미터 높이로 베라는 것이었다. 이는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타협안이었다.]
인간이 자연계의 중심이라는 점은 물리적으로 맞는 것 같다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퍼거토리어스의 출현 이후 몸집이 큰 원숭이와 인간의 특징이 섞여 있는, 최초의 유인원인 프로콘술(Proconsul)이 등장하기까지는 4000만 년이 걸렸다. 꼬리가 없는 프로콘술은 나뭇가지 위를 구부정한 자세로 다녔고 보기 드문 크기의 뇌를 가졌다. 땅으로 내려온 프로콘술의 후손 중에는 600만 년에서 250만 년 전에 살았던 영장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있다. 인류의 등장을 알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수십 미터를 직립 보행했지만, 여전히 나무를 잘 탔고 엄지발가락을 침팬지처럼 사용했다.
고고인류학자 파스칼 피크가 ‘이동하는 거대 원숭이’로 표현한 인간이 나무와 멀어진 지는 불과 30만 년 전이다. 인간은 위도를 따라서 그리고 고도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정복하러 나섰다. 인간이 나무를 떠난 것은 영장류의 기나긴 진보의 역사에서 5,000분의 1도 안 되는 기간이며, 나무와의 길고 깊은 관계로 인해 우리에게 그만큼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가 나무를 떠나면서 벗어버린 흔적들은 미미하다. 퇴화한 꼬리와 움켜쥘 수 없는 발가락, 거대한 몸을 보호할 수 없는 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에 사라진 것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무와 함께 살아간다.]
위 글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무와 함께 살아간다”가 어려우면서도 어렵게 다가온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생물 세계의 이해>에 나오는 글을 보자.
[환경의 확대라 함은 인식 세계의 확대이며 인식의 확대는 생물에 있어서 통합성의 강화라든지 집중화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정신현상이라든지 의식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과 같은 세계에서 생활하는 것들에게 비로소 필요로 되는
통합성이 요청되는 곳에 있으며, 하등 동식물의 경우는 아마도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하다고 해서 그들 생물이 생물로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경우는 결코 없을 줄 안다. 오히려 그들 생물마저 각각의 세계를 인정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결코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참된 진화론적인 해석이 성립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위 글에서 “인식의 확대는 생물에 있어서 통합성의 강화라든지 집중화 등을 의미한다.”를 보자.
많은 것 아니 이 우주 모든 것을 끌어안으며 이해해보려는 인식의 확대를 도모하다 보면 이 우주와 그 구성물들은 형태적으로는 나뉘어져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해낼 수 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고 공부한 것을 세포에 쌓는 사색과 명상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초월해서 살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과정 중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그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모두 각자의 유전자 조합으로 살면서 죽어갈 뿐이다. 죽어서 살아갈 뿐이다. 말은 이렇지만, 참 어렵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마치 해면(海綿)이 물을 가득 머금을 때까지 물을 흠뻑 빨아들이듯, 그는 사방에서 구토와 죽음을 자신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의 마음은 권태와 번민, 그리고 죽음으로 온통 가득 찼으며,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것,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 문장이 극적으로 보이려면 이따금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넣는 것 같다. 부드러움은 없고 날카로움만 있다. 그래야 감정의 기복이 심해 보이고 정신의 분열이 양극단을 왔다갔다해서 세포의 균열이 커지게 되고, 그래야 마음이 움직이며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이게 예술인 것 같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무와 함께 살아간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것은 나무에서 살았던 퍼거토리어스, 프로콘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우리 몸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콘술을 찾아보았다.
나무에서 살아가는 것은 좋은데 우리에게 그 모양이 있다는 게 섬뜩했다.
하지만 지구의 모든 것은 거슬러 가면 하나의 세포가 된다.
모두가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다시 세포로 분해되는 그날까지 그걸 인지하면서 살아가보자.
그런데 왜 나는 나무에 오르지 못할까?
왜 갈수록 그런 나태한 몸이 될까?
그러려니 하면서 살자.
나무에 오르지 못하면 시선이라도 열심히 던지자.
그게 좋을 것 같다.
나도 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