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다, 어떤 것 외 1편
이대흠
나는 옥수수를 먹는다
알알이 박힌 시간 같다
여관에서 나온 한 여자가 울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기 너머에 있을 누군가의 표정을 상상해보는 시간
여관은 도시가스 배관과 연통을 맨 채
비를 맞고 있다
빗방울은 반지에 박힌 보석 같다
아무에게서나 빛난다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이 허락한 시간에 빗방울 목걸이를 해주고 싶다
호우경보가 발령되었으니
외출을 삼가시고
오래된 건물 위쪽의 검은 얼룩이 짙다
눈물로 짓물러진 마스카라 자국
어떤 울음은 너무 깊어서 청동 같다
나는 모르는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이건 외출
아니면 방문
칩거가 좋겠다
초침은 외날 면도기처럼 시간을 깎는다
뚝뚝뚝 잘리는 눈물에는 뿌리가 없다
로드킬
책을 만드는 중입니다
일종의 자서전이지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잘려야 하듯이
내 생이 싹둑 베어집니다
살아갈 날들을 미리 쓸 수는 없습니다
반죽을 펴듯이 바닥에 나를 납작하게 눕히고
잉크 대신 피의 글씨를 써나갑니다
바람이 읽고 가고
먼 데서 구름은 곁눈질로 스쳐갑니다
나를 가장 깊이 있게 읽는 자는
살해자입니다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에
나의 표정을 발라줍니다
피 맛 좀 보세요
이게 살아있음이었거든요
죽음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말을 가진다는 것
활자에서 싹이 나면 읽을 수 없을 겁니다
딱딱한 바퀴들에게 온기를 가르치고 싶지만
완성된 책은 말을 만들 수 없습니다
둥근 바퀴들은 납작한 나를 읽고 갑니다
바퀴들의 상처가 닿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조금씩 떼어줍니다
내 자서전은 그렇게 팔려갑니다
이대흠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코끼리가 쏟아진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등이 있다.
연구서로는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시톡 등이 있다.
조태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