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949년 12월호 제43권 제12호 통권 1017호(183〜185쪽)
최도마 신부 전기(九)
2. 귀국도상에(속)
최도마신부께서 육해험노를 발섬하며 입국의 길을 열려고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그 수고는 수포로 돌아갔다.
백절불굴의 용기로 그는 항구하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느 자기의 의무을 다하기위한 노력이었고, 또한 자신을 믿느니보다 주의 섭리와 성모의 도우심을 더욱 믿었다. 최신부께서는 이번 계획성취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주의 안배로 오히려 가장쉽게 성공하게된다.
여기에 관하여 최신부님의 편지일절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15)
一八四九년 十二월에 나는「페레올」주교님의 분부에의하여 입국차 변문을 향하였나이다. 「메스트르」신부께서도 큰 희망은 없어보이나 입국하실 기회가 열린다면 동행하시려고 내게 오섰었나이다. 변문에 와서 페레올주교께서 보내신 영접군들을 만났나이다. 나는 매스뜨르신부까지 모시고 입국하기위하여 가급적 모든방법을 강구하였나이다. 그러나 만사는 슬기롭게 하여야하므로, 매스뜨르신부님께서 섭섭하여하시나, 중국에 더 체류하시도록하고, 나만 혼저 국경의 철벽을 깨치려고 전진하게 된 것은 대단유감이였나이다.
국경의 경계망을 뚫고 지나갈 가능성이 내게는 조금도 보이지않었나이다. 오직 인자하신 주의 전능만 믿고 바랄뿐이였나이다. 천주의 팔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하에 암야를 이용하여 국경선에로 나는 달렸나이다. 의례히 압녹강위에와 변문주위 성곽위에 순초하는 병정들이 있었을것이었나이다. 그러나 밤은 깊고 이릭는 대단 험악하여 강한 바람과 뼈에 사맟는 치위를 이기다못한 병정들은 아마 다 집안에 들어앉았던것이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경을 지나는동안 아무도 만나지못하였고, 조고마한 문제에도 걸린일이 없었나이다.
이 위험지대를 버서난다음에 우리는 큰 불편이없이 서울에 도착하였나이다.…」
산해만리 격하여있던 고국에 들어오기위하여 형언키어려운 고초와 싸우시던 최신부님은 이윽고 본국의 수도 한양성안에 들어와 숨으섰다. {필자 註 도마신부의 친족들의 전하는데 의하면 최신부의 귀국이 一八四九년 十二월 三일 이다}
귀국하신 신부님의 소감이 어떠하섯을까 추측한다.
1. 화조월석 동경하시던 목적지에 도착하섯으니, 그 기쁨은 필설난기다. 그러나 2. 육정상 부모생각이 아니날쑤없는것이오, 교회상으로 이미 입국하섯다가 순교하신 주교신부님들, 그중에도 동창신부님 생각이 치밀었을 것이다. 바라보니 문앞에 의구한 남산이오, 둘러보니 한강수 여전이 흐른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아니로다. 주야에 흘러가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길도 물과같아여 가고아니오더라.
3. 해외의 문화를 호흡하던 신부님이시라, 본국의 문화수준을 볼때에 남의 일 같잖어 딱하섰을 것이다.
4. 가톨릭을 몰리해하는 당국인지라, 유학한 이 인물을 반도의 자랑꺼리로 환영하고 등용하기는커녕, 돌아오면 목을 버히려고 날카롭게 준비한 칼날을 맹수의 눈보다도 더 명맹하게 어느한구석에서 신부를 노리고 있음을 직감하섯을 것이다. 성주예수 도성을 보시고 울으시며 하시던 탄식을 우리신부께서도 몇 번이고 되푸리하섯을 것이다.
「슬푸다 네게 평화함을 주시는 사적을 너 과연 오늘이라도 깨다르면 다행하였마는 지금 다 네 눈앞에 가리웠도다」(루가 十九․42)
(1) 달레 二, 306-308. (2) 달레 이, 336. (3) 달레 二, 336 (4) 달레 二, 349. (5) 달레 二, 336 (6) 달레 二, 338. (7)다불류 二, 137. (8) 달레 二, 340. (9) 달레 二, 341-343. (10) 달레 二, 343. (11) 달레 二, 344. (12) 달레 二, 343. (23) 달레 二, 344. (14) 달레 二, 344. (15) 달레 二, 344.
3. 포교선에서
「사람들을위하여 저들의 대표자로 선정된」(헤브레서 五」․1)「탁덕들은 정문과 제단사이에서 체읍하리라」(요엘 二․17).
책임은 희생을 요한다. 박해당시에 종교가들에게있어 더욱 그랬다. 최도마신부 입국은 하섯으나, 앞으로 할 일은 첩첩산과같다. 당시 국내에 「페레욜」주교와 「다블류」신부계섯으나, 그들이 외국인이니만치 그 활약은 곤난하다. 외국인으로하기 곤난한일은 다 최신부님의 손을 빌어야 할 형편이었다.
입국이후 최신부님은 피고닝 풀릴틈없이 곧 포교에몸을던저 활약하섯다. 이에 그편지를 다시 참고하면 아래와같다.(1)
「……서울까지 득달하여 나는 하루를 숙박하고 주교를 뵈옵기위하여 층청도로 가려하였으나, 다블류신부께서 위중한 병중에 계시다 하므로 나는 다블류신부께로 달려가 종부성사를 드렸나이다.」잠시 최신부님의 서간문을 중단하고 이상에관한 다른 문헌을 참고하기로 한다.
입국한 최도마신부님의 첫성무는 다블류신부께 종부성사 드리는것이였다. 그당시 다블류신부님의 병환은 대단 위험하였고 교우들은 신부의 임종을 염려하여 매일밤 신부님방에로 모여들었으며, 다블류신부는 약 二개월간 미사성체를 드리지못하시다가 차차 쾌차하섯다.(2)
다시 최신부님의 서간을 계속한다.
「그후 나는 주교를 찾아가뵈오니, 주교님께서 역시 마라리아에 걸려, 고생하시고 계섯나이다. 하루동안 주교를 모시고있다가, 나는 도무지 쉬지못하고 전라도에 전교를 떠나, 六개월간 다섯고을을 천주의 안배로 무사히 다녔으나, 두곳에서는 좀 위험스러운 일을 당하였나이다.
한번은 적은 동리에 사는 여교우 셋을 찾았나이다. 그들의 장부와 부모가 다 외교인이었나이다. 나는 그들에게 성사를 주려고 해 저물때를 이용하여 복사하나를 데리고 그 협착한 집에 들어갔더니, 들어가는 우리를 본 외교인들이 나를 서양인이라고 오인하고 동장(洞長)에게 말하여, 그밤에 동리사람들을 소집하고 나를 잡아 죽이기위하여 공론하였나이다. 나는 원수들의 수중에 있고 도망은 불가능한일이였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