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 명상에 도움이 되는 책
*허형만 교수의 시창작을 위한 명상록 중
1.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
(최대환 신부, 파란북, 2018)
1. 겨울 여행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요절한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가곡의 왕'이라 불립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은 시인 빌헤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이
겠지요. '낯선 이로 왔다가 낯선 이로 간다네'로 시작되는 이 연가곡은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로 끝납니다.
저편 마을 한구석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얼어붙은 손가락으로/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그의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어/아무도 들어줄 이 없고/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네/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되는대로 내버려두고/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우리는 그의 예술을 통해 연민과 자비의 문을 열 기회를 얻습니다.
차가운 겨울 풍경 속 한 모퉁이에 서서 온기를 애타게 찾는 이웃들의 얼어붙은 몸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에 눈물도 잊은 지 오래인 이웃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2. 선한 마음의 힘
어떤 경험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미움을 이겨내는 것, 그것은 오직 선한 마음, 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선한 마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흔들릴 때면 간절히 만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입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위고는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과 만나기 전에 목자로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길게 설명하는데, 여기에서 이미 이 장대한 소설의 주제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를 알고 있듯이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오오, 참으로 훌륭한 위안자였다! 그는 잊음으로써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희망으로써 그것을 키우고 숭고하게 하려고 했다.
미리엘 주교의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빛을 기다리는 시간
독일 아침교구의 주교 클라우스 헴메를레 (1929 1994)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교구 사람들에게 성탄을 맞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하나의 창문이니/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색 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그리고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가 빛을 보게 될 것임을
그의 글이 알려주듯 성탄을 기다리는 때인 '대절'은 빛을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눈 역시 뜨게 해주시기를 갈망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주님이 마련하신 '존재의 창'이 빛으로 밝혀지기를 기다립니다. 빛이신 그분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눈먼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성탄의 초대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정신은 잠에서 깨어 총기를 얻고 마음은 설레어야 합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신비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며,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 비로소 신비와 만나게 됩니다.
4. 반더러, 순례자, 산책자
예부터 사람들은 심지를 맑고 굳건히 하기 위해 '걷기'를 즐겼습니다. '걷기'와 함께 막연한 불안과 혐오를 이겨내고, 이웃과 공감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생각과 마음의 깊이를 더하기를 희망합니다.
리베카 솔닛은 저서 걷기의 인문학(원제: 반더루스트 Wanderlust,-'걷기의 방랑의, 산책의 욕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서 '걷기'를 그윽하고 구체적으로 성찰하여 독자가 개인의 인생길이 가지는 고유
함에 대해 알고 그 길을 존중하게 합니다.
이 책은 '걷기'라는 하나의 예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매일 경험하고 수행하는 일상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다 깊이 통찰하게 합니다. 성지순례에 대해서도 '은총을 찾아가는 오르막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더군요.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의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간절했을 마음과 연결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솔닛은 순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쓴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순례라는 행동의 근본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
다. 순례를 이끄는 원동력이 영혼의 가장 내밀한 갈망과 그 갈망을 담는 나의 몸에 있는 것이지요. 순례는 오직 '몸'의 수행을 통해서만 고귀한 종교적 이상이 체현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교황의 복음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간이 공간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강조합니다.
시간은 우리 앞에 언제나 열려 있는 지평의 표현으로서 충만함과 관련되지만, 개별적인 순간들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한계의 표현입니다.(222항)
시간은 공간을 지배하고 밝혀주며, 그것들이 퇴보하지 않고 계속 확장되는 연결 고리로 만들어 줍니다.(223항)
5. 이 아름다운 5월에
독일의 낭만주의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독서가였고 필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는 슈만의 글 젊은 음악가를 위한 조언에 자기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곁들여 젊은 음악가를 위한 슈만의 조언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슈만의 조언입니다.
기존의 작곡가들을 깍듯이 존경하고, 새로운 이들에게도 따뜻한 관심을 주어라. 당신이 모르는 이름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
6. 여름날, 여행의 권유
프랑스의 작가 실뱅 태송은 지리학을 전공한 후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그 깨달음을 글로 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여행의 기쁨>에서 고되게 걷는 여행과 유랑이 사물들의 본모습을 보여
준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의 글에서 말하듯이 말입니다.
내가 신발 밑창만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통을 즐기는 취향때문이 아니라,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차나 자동차의 유리창 뒤로 풍경을 흘려보내면서 풍경의 베일을 벗길 수는 없다.
7. 가보지 못한 리스본을 그리며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파스칼 메르시에라는 필명으로 베른의 한 나이든 라틴어 교수가 주인공인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썼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 (1888~1935)의 불안의 책 (47세에 작고한 페소아 사후 47년 만인 1982년에 유고로 발견되고 출판됨)에서 다음의 문장을 읽고 시계처럼 철저했던 일상을 내버려둔 채 홀린 듯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
페터 비에리는 소설의 첫머리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 나오는 구절: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불가능한 것 중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므로 날마다 열망하는 것이고, 슬픈 순간마다 체념하는 것이다. 따라서 때때로 나의 인생이 나 자신에게 '낯설어'야 한다.
8.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입니다.
독일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슈테판 클라인이 저명한 과학자들과 나는 대담을 모은 책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의 제목은 영국의 천문학자 마틴 리스와의 대담 중에서 따왔습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남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에서도 이 표현은 공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 속에 있을 때나 옷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만물이 '별의 먼지'라는 것은 과학적 진술일뿐더러, 깊은 의미에서는 시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이 신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별의 먼지이자 신에게서 온, 그래서 신을 닮은 사랑의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9. 슬픔의 노래
1980년생인 노르웨이의 젊은 작곡가 킴 안드레 아르네센이 작곡한 <비록 그분이 침묵할지라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쾰른의 한 지하실 창고에 적혀 있던 다음과 같은 기도문에 곡을 붙였습니다
나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믿습니다/나는 사랑이 주변에 없는 듯 느껴져도 사랑을 믿습니다/그리고 나는 그분이 침묵하신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습니다.
10. 토성의 영향 아래
단 3편의 소설만을 남긴 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한 독일 작가 W. G. 제발트(1944-2001)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사멸과 덧없음, 신음과 부르짖음이 배어 있는 폐허와 파편들 속에서 문명의 전보다 희생자의 아픔을 바라볼 줄 아는 성정이 멜랑콜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아래와 같은 조지프 콘래드가 마르그리트 포라도스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걸어서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강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패배자들의 투쟁과 깊은 절망의 끔찍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방관하는 영혼이 불행한 사람들을 맨 먼저 용서해야 한다.
미국 지성계의 스타였던 수전 손태그(1933~2004)는 발터 베냐민에게 토성의 영향 아래서」라는 글을 헌정했습니다. 수전 손태그는 다음과 같이 베냐민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11. 감사함에 대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을 읽다가 「아침산책」이란 아름다운 시를 발견하고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가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 말들/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뱀은 뱅글뱅글 돌고/비버는 연못 위에서 꼬리를 친다/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황금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른다/사람은, 가끔, 말러의 곡을 흥얼거린다/아니면 떡갈나무 고목을 끌어안는다/아니면 예쁜 연필과 노트를 꺼내 감동의 말들, 키스의 말들을 적는다.
우리가 존재의 신비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어떤 성공과 성취를 했다고 해도, 아니면 많은 희생과 절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일 뿐입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마주치는 사건들, 작은 자연의 존재들, 이 모든 만남 안에서 감사함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맺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