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동 당산 설화
시월이 하순에 드는 월요일이다. 새벽잠을 깨 며칠 전 고향서 온 누렁 호박을 글감으로 시조를 남겨 사진과 함께 지기들에게 아침 안부를 전했다. “유년기 흙내 연상 햅쌀이 부쳐 올 때 / 밭둑에 넝쿨 나가 영그는 누렁 호박 / 곁들여 보태 실려와 고향 내음 맡았다 // 새벽에 잠이 없어 거실로 모셔 놓고 / 칼 잡아 덩이 잘라 속살을 벗겨내니 / 동기간 육친의 체온 감전되듯 닿는다”
‘호박 속살’에서 고향을 지키고 평생 농사를 짓는 큰형님을 떠올려봤다. 아침 식후 자연학교는 주남저수지 근처 들판에 바위가 있는 한 마을을 찾아갈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원이대로로 나가 대방동을 출발해 강변 대산 상리마을로 가는 32번 버스를 탔다. 승객은 출근길 회사원과 교육단지 등교 몇몇 학생들로 충혼탑과 창원대로에서 내리고 명곡교차로로 되돌아와 도계동으로 갔다.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주남저수지를 비켜 갈 때 저지대 농지에 가꾼 연들은 잎이 시들어 성장을 멈췄다. 차창 밖으로 수초가 무성한 주남저수지 수면 일부와 갯버들이 드러났다. 야산과 밭뙈기는 고물이 찬 단감이 영글어 누렇게 착색되어 수확을 앞두었다. 전문 노인요양원과 작은 회사로 출근하는 이들이 내리니 승객은 줄어 초등학교 직원인 듯한 여성만 남았더랬다.
나는 마지막 승객이 되어 산남을 지난 죽동 당산마을에서 내렸다. 야트막한 산의 남쪽이라 산남이라 불리는 마을은 청동기시대 유적 고인돌을 볼 수 있는 동네다. 낮은 산을 동쪽으로 돌면서 형성된 큰 마을이 죽동이고 그 곁 외딴 동산에 딸린 마을이 ‘죽동 당산’이다. 예닐곱 농가가 위치한 마을 뒤에 바위가 더미로 뭉쳐 몇 그루 소나무가 자라는 자그마한 산을 당산이라 불렀다.
들녘 한복판을 지나는 정류소에서 내려 마을 어귀로 드니 인적이 없어 초행길 안내를 받을 데가 없었다. 골목이 끝난 집 앞에 한 할머니를 뵈어 얘기를 나누려니 청력에 장애가 심해 소통이 어려워 당산 바위로 가는 길과 유래를 여쭤보지 못했다. 거기가 막다른 집이라 되돌아 나와 동편으로 가니 작은 산은 단감단지와 이어졌고 진입로가 없어 멀리서 살피다가 가까이 다가가 봤다.
얼핏 봐 마애불을 새겨도 될 듯한 지기가 뭉친 신령스럽게 보인 바위는 아니었다. 화산지대 분화구처럼 구멍이 뻥 뚫려 좀 괴기스럽게 생겨 어쩌면 전설이 서렸을 법했는데 어디 알아볼 길이 없어 난감했다. 골목에서 나와 동구 밖을 서성이다 찻길로 나오니 마침 공동 창고를 돌보는 노인을 만나니 내력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오래전 어느 방송에서 전설을 취재해 갔다고 했다.
일흔 중반의 노인에 따르면 어릴 적 바위 아래 제단으로 쓰던 당집이 있었는데 태풍에 훼손되어 장소를 옮겨 당제를 지내다가 오래전 끊겼다고 했다. 바위 구멍 틈에 예지를 띠고 비운으로 태어난 장군이 숨었다가, 관군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위틈에서 준비하던 병사와 말과 함께 장군도 죽은 얘기였다. 억새로 탯줄을 끊는 지리산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 변형이었다.
우투리 설화에는 산간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는 말이 달리는 소리로 나왔는데 죽동 당산은 들녘이라 다르게 전해왔다. 장군이 타려고 했던 말을 벌판으로 뛰쳐나가 바위 앞 논두렁에서 주인을 잃고 슬피 울었다 하여 이곳을 '울음말등' 혹은 '우루말등'으로 불렀더. 그 말이 다시 한 바퀴 돌아 큰 늪에서 죽어 썩었다 하여 늪지를 '썩은디미늪'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주남저수지 일대였다.
현지 노인과 작별하고 산수유나무가 줄지어 자라는 죽동천 천변을 따라 걸었다. 지난여름이 무척 더워서인지 올해 산수유 열매는 예년에 비해 성글어 보였다. 가술에 닿아 점심을 요기하고 삼봉 어린이공원에서 죽동 당산을 폰으로 검색해 보니 성혈(性穴) 설화와 곁들여져 있었다. 바위틈 구멍으로 작은 돌을 10개 던져 5개 이상 들면 아들을 낳는다는 기자(祈子) 설화 현장이기도 했다. 2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