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 4300억 달러라도 적다? 높은 환율이 부른 '실탄' 우려=한국(1) / 12/26(금) / 중앙일보 일본어판
25일 서울 명동 환전소 전광판에 환율이 표시돼 있다. 전날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이후 원-달러 환율은 크게 뛰었다(환율은 하락). 뉴스1
최근 한국에서는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약 62조 2800억엔)를 둘러싸고 적정 수준의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환율 급락을 막기 위해 '방위선'을 구축하고 있는 데다 연간 2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겹쳐 있기 때문이다.
외환보유액은 국제수지 불균형을 보완하거나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외화자산을 뜻한다. 한마디로 국가의 달러 체력이자 외환위기 때 꺼내 쓰는 비상용 자금이다. 1997년 달러 부족으로 어려운 경제위기를 겪었던 한국은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간주하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말 현재 4306억 6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 9위 수준이다. 외환보유액은 2018년 6월 처음으로 4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2021년 코로나19 사태에는 4600억 달러 안팎까지 증가했다. 이후 감소와 반등을 거쳐 최근에는 4000억 달러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외환보유액 적정성 논란이 다시 불붙은 것은 1달러=1480원대까지 치솟자 정부가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한은은 환율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자체적인 시장 개입(스무딩 오퍼레이션)을 병행하고 있지만 시장 안팎에서는 당분간 외환보유액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한국 정부가 24일 강력한 개입 의사를 밝히자 하루 만에 33.8원이나 오른 1440원대를 기록했다.
여기에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따른 연간 200억달러 상한선의 대미 직접투자도 부담 요인으로 추가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4000억 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진다며 지금의 외환보유액을 사용해 환율을 방어하기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4000억 달러라는 실탄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외환위기의 경험을 감안할 때 외환보유액은 최소한 1년간 재화·서비스 수입액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게 근거다. 지난해 한국의 연간 수입액(약 6320억 달러)을 기준으로 하면 현재 외환보유액(4306억 달러)은 약 8개월치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5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계획을 추진하는 일본은 지난해 수입액(7426억7000만 달러)에 비해 외환보유액(1조 2307억 달러)이 약 19개월분에 해당한다.
◇ 세계 9위 규모 환율 하락에 방어심리 확대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율로 봐도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적은 부류에 속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의 명목 GDP(1조 8697억 달러) 대비 외환보유액(4156억 달러)은 약 22.2%다. 일본은 30.6%에 이른다. 반면 대만의 명목 GDP(7970억 달러)는 한국의 절반에 못 미치지만 외환보유액은 5767억 달러에 이른다. GDP 대비 73.7%로 상당히 높다. 대만의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9월 6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앞으로 10년간 2000억 달러의 대미 직접투자 등은 달러 부족과 환율 불안을 키울 수 있다며 외환보유액을 국제기구 권고 기준에 따라 최소한 2배 이상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이 제시한 지표를 반영할 때 5200억~9000억 달러를 비축해야 한다는 근거다.
외환보유액 4300억달러라도 적다? 높은 환율이 부른 '실탄' 우려=한국(2) / 12/26(금) / 중앙일보 일본어판
◇ '금액보다 방위력…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그러나 반론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이에 앞서 IMF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광범위한 외부 충격에 대응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 거시경제조사사무국(AMRO)도 최근 외환보유액이 단기 대외채무의 2.6배로 잠재적 충격에 대해 상당한 완충효과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IMF의 정량지표는 주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산식이라며 한국은 완전변동환율제 국가로 그 기준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했다.
대미 투자에 대해서도 양해각서(MOU)에는 한국 외환시장에 불안감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한은은 최근 1조달러가 넘는 순대외자산(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부채) 증가로 환율 상승 압력이 높아졌지만 외화 안전판과 대외건전성은 강화됐다는 진단도 내놨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외환보유액을 무작정 늘리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정식 교수는 환율 급등(원화가치 하락) 국면에서 달러를 사들이면 오히려 환율을 자극할 수 있고, 미국이 외환시장 개입을 환율조작으로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달러 매수는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발행한 통화안정증권(통안증권) 이자로 지난해에는 4조원이 나갔다. 달러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이자도 올해는 6000억원에 이른다.
외환보유액 규모보다 방위력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외환시장은 숫자와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심리전 성격이 강하다. 정부와 외화당국이 어떤 전략과 메시지로 시장 불안을 관리하느냐가 '방위력의 핵심'인 셈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어려울 수 있지만 정부가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