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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성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고,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마르티노 주교는 그 삶과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으니
저희에게 놀라우신 은총을 새롭게 베푸시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제1독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의 말씀입니다.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돔에서 탈출했더라도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박해윤 작가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4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의 한 시골에 들어왔습니다. 박해윤 작가가 박사학위를 마친 2013년에 남편도 갑자기 퇴직을 선택합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박해윤 씨도 교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초등학생이었고 둘째는 취학 전이었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이전 경쟁의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시골 생활이 7년이 지났고 아직은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은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의 오래된 조립식 집에서 삽니다. 서울에서는 방 한 칸도 얻지 못하는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집입니다. 먹기 위해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처음에 시도했다가 사슴들이 채소 순을 다 뜯어먹어 아예 수렵 채취하며 삽니다. 곳곳에 자라나는 블랙베리와 야생초를 채취하고 통밀을 갈아 빵을 구우며 야생 동물들이 먹지 않는 깻잎이나 방울토마토를 반야생으로 야산에 키워 먹습니다.
네 식구가 한 달을 지내는 데 사용되는 돈은 100여만 원이라고 합니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합니다. 통신비는 약 10만 원입니다. 스마트폰은 없고 통화와 문자만 되는 2G 휴대전화 두 대를 네 식구가 나누어 씁니다. 전기세는 여름에 2만 원 겨울엔 15만 원입니다. 에어컨은 없고 난방, 급수, 취사, 모두 다 전기입니다. 물은 우물물이고 정화조를 이용합니다. 유류비는 15만 원보다 조금 덜 나오는 수준입니다. 자동차 유지비는 월평균 10만 원 정도입니다. 4인 가족의 한 달 식비는 40만 원입니다. 필요한 돈은 시간이 날 때 쓰는 글을 메일로 보내거나 시골 생활과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은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의 인쇄비로 충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신없는 경쟁사회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인물 중에 붉은 여왕이 나옵니다. 붉은 여왕은 항상 앨리스의 손을 잡고 달립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앨리스는 무척 힘이 드는데 여왕과 신하들은 아무리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붉은 여왕과 신하들은 쉬지 않고 달리는데도 언제나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왕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는 말이야, 같은 자리에 있고 싶으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하는 거야.”
여기서 박해윤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을. 모두가 열심히 달리지만 결국 그 욕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붉은 여왕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일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일이 나에게 불가능한 고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욕망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을 줄이면 ‘나’가 사라집니다. 내가 사라지면 그제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27년간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산에 숨어 살았던 크리스토퍼 노마스 나이트(Christopher Thomas Knight)의 사례를 들기도 합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나가 혼자 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훔쳐 그 오랜 시간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27년간 혼자 살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외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박해윤 작가는 이러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욕망만 남으면 나가 사라지고 그러면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완벽한 자유란 곧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도 27년의 여정이 끝난 후,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독은 저의 지각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죠. 늘어난 지각을 스스로 적용하니, 제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관객도 없었고, 저를 보여줄 대상도 없었죠. 저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 완벽히 무의미해졌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가 사라지면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요? 크리스토퍼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완벽히 무의미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모기처럼 산 것입니다. 남의 음식을 훔치며. 자유롭기는 하겠지만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 노아의 배에 들어가지 못해 수장당한 사람들이나 소돔 땅에 그대로 머물러 유황불에 죽은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들이 노아의 배, 곧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세상 욕망과 함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붉은 여왕에게 잡혀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그렇게 멸망한 것입니다. 소돔 땅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비록 교회 안에 들어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세속, 육신, 마귀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교회에 머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박해윤 작가처럼 세상 사람들을 붉은 여왕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진정한 자신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욕망만 버린다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불교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버리는 이유가 자기 정체성이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알려줍니다. 롯과 그 가족을 데리고 소돔 땅을 빠져나올 때 그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서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배가 곧 교회를 상징하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성체를 영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머무는 것이 곧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욕망을 버린다고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욕망이 곧 나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붉은 여왕이 추구하라고 하는 욕망과 반대입니다. 그것이 사라져야 사랑의 욕망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랑하면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이 말씀과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우리 정체성을 바꿔줄 은총과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복음에서 노아의 방주와 소돔의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해 주셨을까요? 하나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이고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여 사랑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소돔을 탈출하지 못하면, 곧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곧 삼구에서 벗어나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가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정신과 의사 ‘에릭 번’은 인간에게 3가지 인생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각본은 평범한 각본입니다. 나답기보다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하게 하는데….’, ‘내가 뭐 특별하다고….’ 등의 말을 합니다.
두 번째 각본은 패배자 각본입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고,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나는 나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각본에 따라 사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승리자 각본을 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평범한 각본, 패배자 각본에 더 가깝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절대로 평범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 각자를 보면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분명히 다릅니다.
패배자 각본 역시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아오스딩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시간입니다. 후회하며 뒤를 바라봐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닥치는 날이고, 모든 가치 판단이 뒤바뀌는 날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은 그 소명만을 향하여 가야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의 길을 따라가다가 남기고 온 재산이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다보고 죽었다는 기사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구원의 피난 길을 떠났으면 그저 그 길만을 향하여 가야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자 각본에 맞춰서는 사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이 세상의 법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 나라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소크라테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