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블랙베리의 알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고, 아디다스 Y3 트레이닝복을 입고, 켄우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보덤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담고, 거기에 야마모토마타 녹차를 넣고, 로버츠 라디오를 켜고, 맥 컴퓨터를 켜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에이지 오븐을 켜고, 리페르 냉장고를 열고, 퀘이커 오츠로 오트밀 죽을 끓이고, 솔가 비타민을 먹고, 이케아 테이블에 앉아 이케아 접시와 이카아 식기들로 아침을 먹고, 심플 비누로 샤워를 하고, 아베다 샴프로 머리를 감고, 존 루이스 타월로 젖은 몸을 닦고, 콜게이트 치약과 칫솔로 이를 닦고, 심플의 방취제를 몸에 뿌리고, 캘빈클라인 속옷을 입고, 말프로렌 양말을 신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헬무트랭 재킷을 입고, 몰스킨 노트를 노스페이스 가방에 넣고, 트렉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가판대에서 가디언 신문과 에비앙 생수를 사고, 루이비통 지갑에서 꺼낸 돈을 지불한다.
영국의 평범한 소시민 닐 부어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명품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 대부분을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는 데 쏟아 부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내 자아에 대한 긍지를 확인하기 위해 브랜드와의 관계에 길들여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브랜드 제품이 갖는 차별성과 위상은 단순히 그것을 구매한 사람의 기호와 취향과 느낌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쓰느냐 하는 소비의 문제는 곧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소비자는 그가 사용하는 브랜드 제품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문화는 마음에 일종의 감옥을 만듭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생활필수품에 대한 욕망외의 잉여의 욕망을 생산함으로써 소비자의 몸을 식민지화합니다. 그 순간부터 소비자의 몸은 욕망을 생산하는 소비주의에 포획된 몸일 뿐입니다. 과거 노예상인들이 노예의 이마나 가슴에 불로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듯이,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한 브랜드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우리 신체에 찍힌 낙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브랜드는 ‘길들여지고 착취당하는 동물의 표식’일 뿐입니다.
닐 부어맨은 어느 날 문득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은 격렬한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브랜드 중독자로 만든 자본주의 체제와 자신의 삶을 단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비주의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명품들을 전부 모아 런던의 한 광장에서 깨부수고 불태우는 ‘명품 화형식’을 갖습니다. 그가 그 화형식에서 태워버린 것은 단순히 명품 제품만이 아니라,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던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그릇된 강박관념과 소비주의가 유포한 행복에 대한 거짓 이데올로기였습니다.
현재 닐 부어맨은 아주 값싼 제품들을 사용하며 불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대신 그는 과시적 소비를 위해서 쓰던 시간을 회수해서 고즈넉하게 산책을 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아다니고, 친구들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 식사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명품 제품 너머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열망으로 이 여정을 시작했다......나는 아이비엠도 아니고 맥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일 뿐이다” 그가 쓴 책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는 소비주의에 굴종하지 말고 온전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는 선동적이고 실험적인 보고서입니다.
2. 오늘날 번영설교자(=종교 장사꾼)들은 예수님께서 큰 집에서 사셨고, 명품 옷을 입으셨으며, 후원금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재정 담당자를 따로 세워야했다고(=가룟 유다) 주장합니다.
믿음운동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인 존 해기는 예수님께서 최고의 명품 옷을 입으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이음매가 없는 겉옷을 가지고 계셨는데, 얼마나 비쌌던지 십자가 앞에서 로마군인들이 그것을 놓고 도박을 할 정도였다. 그 옷은 당시 최고의 명품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번영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화려하고 부요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레데릭 프라이스는 자신이 “예수와 그 제자들이 가난했다고 생각하는 우중충한 생각에서 기독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분의 발자취를 좇도록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내가 롤스로이스를 타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존 해기에 따르면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빈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당신에게 아브라함의 부요함을 주셨습니다. 형제여, 세례자가 복도로 나와서 춤을 추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빈곤의 저주는 십자가에서 깨졌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빈곤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오는 형통의 원리들을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담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파지 않은 샘물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만들지 않은 포도원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짓지 않은 집을 주실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어마어마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을까요?
번영설교자들에 따르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글로리아 코플랜드는 <형통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 한 채를 내놓으면 100채를 받는다. 집 한 채 정도의 가치를 내놓으면 100배를 받는다. 비행기 한 대를 내놓으면 비행기 100대에 달하는 가치의 보상을 받는다. 차 한 대를 드리면 평생 사는 동안 무진장 차를 탈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마가복음 10장 30절은 수지맞는 장사다.]
이런 어마어마한 복을 받는 또 다른 비결 하나는 바로 번영설교자들 자신들을 통해서 주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란색 기도수건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그것은 저와 당신을 잇는 접촉점입니다... 보낸 수건을 만질 때...당신에게 안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당신이 이 수건을 만질 때는 제 손을 잡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기름부음을 원합니다. 제게 재정과 풍요의 기적을 가져다준 기름부음이 제 손에서 당신의 손으로 옮겨갈 것입니다...당신은 이 세상에서 왕처럼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번영설교자들은 자신들에게 헌금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주의 말까지도 거침없이 날리기까지 합니다.
오럴 로버츠의 다음과 같은 말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이 사역을 먼발치에서 관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돈을 드리기로 약속해놓고서도 이를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린 액수를 내지 않으면 며칠 내로 죽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누군가가 이 메시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 걸음만 나가면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게됩니다.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예언자의 말입니다.]
3. 어떻습니까? 어디서 많이 듣고 본 장면이 아닙니까? 정말 친숙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런 미국의 유명한 번영설교자들의 책과 테이프가 고스란히 한국교회에 수입되고 이식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한국교회에서 엘리야나 바울처럼 추앙받고 있는 미국의 번영설교자들이 얼마나 반성경적인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고, 얼마나 취약한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으며, 얼마나 많은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찼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번영신학을 토착화시킨,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한국의 유명 설교자들의 (영적)진면목을 안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말 옷을 찢고 가슴을 뜯으며 재위에 올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개인적으로 저는 비대위는 말할 것도 없고, 본당 안에 있는 상당수 성도들의 마음을 돌리기가 거의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분들이 단순히 <의로운 해>나 <킹덤비즈니스>의 영향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한국교회 전체가 물들어 있는, 곧 케이블 방송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번영설교들,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번영설교자들의 책들, 매 주일 전국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와 간증들의 직간접적인 수혜자이자 피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번영의 신앙에 깊이 물들어 있기에 그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어쩌면 그들의 눈에 보기에는 신사도운동이나 번영신학을 반대하는 저 같은 사람이 되려 이상한 목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단순히 제자교회 앞에 늘어선 비대위들을 제압한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먼 안목을 갖고 한국교회 전체의 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개조하고, 목회자들을 바르게 (재)교육시켜가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주 길고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다만 누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그 싸움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큰 숙제요 질문일 뿐입니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교회로 거듭나고 갱신되기 이해서는 가장 먼저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번영 신학과 신앙을 한 데 모아 광장으로 갖고 나와서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목사님! 공감 공감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고급옷이라서 로마 군병들이 서로 가질려고 제비뽑기했다는 설교를 수십년전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하는 것을 듣고 기가 막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비롯해서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천국의 도를 어떻게 그렇게 왜곡할 수 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말세를 맞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이 유독 심한 듯합니다.
그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의 말년이 얼마나 추하고 비루한지..천하가 생생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크고 작은 많은 교회에서 설교라는 형식을 통하여 성경이 왜곡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제가 뒤돌아봐도 많은 부흥목사들이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도록 난도질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제자교회사건은 아프지만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헌금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것이 내가 드린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채워주시겠지...라는 기대와 그 기대를 확신하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은행의 계산법대로, 드리고 나면 배가 되어 찾을 수 있는 '복리저축 비슷한 금전 거래를 한 것이죠.
또한 경계하는 것은, 서점에 나온 기독관련 책들을 이제는 쉽게 집어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진리임을, 성경을 몇십배 읽지 않고, 해설서를 이것저것 읽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자각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저의 신앙이 제정립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지금 저희교회의 번영신앙과 설교를 매주일 들어야 하는 저는 가슴이 답답해 큰 바위가 저의 가슴을 짓누릅니다...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타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찾아 들어야만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를 치울수가 있습니다. 그안에서 은혜받았다고 하는 이들을 바라보면 더 큰 아픔이 밀려옵니다...
목동제자들을 통해 신앙이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요인이 여럿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김요한 목사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올려 주시는 글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요.
목동제자들은 목사님께 크게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목사님 항상 좋은 말씀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