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 -2
8. 달마대사의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과 안심법문安心法門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에 제법부동적정문이 있다. 유정 무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에 인용한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만일 차遮자를 들으면 즉시에 일체 제행이 모두 비행非行인 줄을 안다.”(大智度論卷四十八 若聞遮字 卽時知一切諸行皆非行)라고 하고, “만일 차자를 들으면 바로 일체법이 부동상不動相인 줄을 안다.”(若聞遮字 卽知一切法不動相)라고 하며, 또 “수보리여, 네가 말하기를, ‘이 마하연摩訶衍은 온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며,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한다.’라고 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수보리여, 이 마하연은 온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며,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여, 일체 제법은 부동상이기 때문에 이 법은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느니라.”(須菩提 汝所言 是摩訶衍不見來處 不見去處 不見住處 如是如是 須菩提 是摩訶衍不見來處 不見去處 不見住處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法不動相故 是法無來處 無去處 無住處)라고 한다.
제법 일체법 또는 일체제법이라 말하면, 유정세간 기세간 지정각세간의 일체를 말한다. 어느 하나라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오온이나 육입 십팔계 유위법 무위법 보살 불 보리 등도 또한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이 없다. 부처가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불법佛法과 불여佛如 불성佛性 불상佛相도 또한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행行에는 변천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비행非行은 곧 부동不動하여 상주常住한다는 뜻이다.”(行有變遷不住之義 非行卽不動常住之義) 일체제행一切諸行은 상주부동常住不動하고, 일체제법一切諸法은 부동상不動相이다. 제법 부동상의 출처가 위와 같다.
1) 제법이 부동하여 적정한 문(諸法不動寂靜門)
묻는다. “어째서 여래의 혜일慧日이 유지有地에 잠겨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까?”(問 云何名如來慧日 潛沒於有地)
나의 견해: 여래의 지혜가 마치 일광이 비추어주는 것과 같이 밝고 밝아서 여래 혜일이라 하고, 삼유三有나 칠유七有 이십오유二十五有 등을 유지有地라 한다. 욕계와 색계 무색계가 삼유이다. 이는 모두 중생이 윤회하는 곳이다. 또 윤회하는 일체중생을 유지라 말하기도 한다.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원만히 구족했는데, 어째서 여래 혜일처럼 밝게 비추지 못하고 유정세간 속에 윤회하느냐? 어째서 여래장如來藏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또는 청정한 본각이 중생의 번뇌 망상 속에 감추어져 있느냐? 이 의문을 사뢴 것이다.
답한다. “비유非有를 유지有地로 보니, 혜일이 유정세간에 잠겨 들어갔느니라.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보니,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答曰 非有見有 慧日沒於有地 無相見相亦然)
나의 견해: 문장을 해석하는 법이 선후를 따를 수도 있고, 선후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에 무상無相부터 해석해보고자 한다. “무상을 상으로 본다.” 또는 “상이 없는데 상으로 본다.”(無相見相) 이는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일 제상諸相을 비상非相으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지니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명구名句와 배치된다. 이 비상非相은 무상無相과 그 뜻이 같다. 화엄경은 “일체법一切法은 모두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얻는다.”(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라고 하고, 반야경은 “일체제법은 부동상不動相이기 때문에 이 법은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一切諸法不動相故 是法無來處 無去處 無住處)라고 한다. 이 일체법을 반야경은 부동상이라 일컫고, 금강경은 비상 곧 무상이라 칭명하며, 화엄경은 무성이라 호칭한다. 그 차이는 어떠한가?
반야경의 대의를 심화학습深化學習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오온이라 한다. 이 색色이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색법色法과 색여色如 색성色性 색상色相도 또한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또다시 이 색상色相은 온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며,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한다. 모두 부동상이기 때문이다. 이 색상色相을 제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 수상受相이나 상상想相 행상行相 식상識相 그리고 안상眼相 이상耳相 비상鼻相 설상舌相 신상身相 의상意相 또는 보살상菩薩相 보리상菩提相 불상佛相도 모두 온 곳이 없고, 온 곳을 보지 못한다. 이 때문에 “무상을 상으로 보아서는”(無相見相) 안 되고, “상을 무상으로 보아야”(見相無相) 한다.
“무상을 상으로 본다.”(無相見相)와 같이, “비유非有를 유지로 본다.”(非有見有) 전도된 견해이다. 의역하면, “유정이 아닌데 유정으로 본다.” “예토가 아닌데 예토로 본다.” 비유를 유지로 보고, 무상을 상으로 본다. 이 때문에 여래 혜일이 유정세간에 잠겨 들어간 것이다.
모든 병통이 여기에 있다. 어째서 유정을 부처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색상을 법신으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예토를 정토로 보지 못하느냐? 영가대사의 증도가에 이르기를, “무명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 공신이 바로 법신이다.”(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이고, 돼지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이다.”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진실로 옳다. 불지견佛知見을 갖추고자 하면 시공관時空觀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이에 조백대사의 화엄론을 인용한다.
“시방의 제불은 고금古今이 없는 법성으로 대각을 이루시니, 일념에 견도하면 고금의 견해가 멸진하여 거래금去來今의 삼세가 모두 없다. 일찍이 과거 억천겁 부처님, 불가설겁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의 불가설겁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성불하니, 스스로 증득하여 삼세에 시제時際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며, 시제가 없기 때문에 곧 과거와 미래가 없다. 설령 중생이 자기 신심身心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 못할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의 정각전덕正覺全德은 본래 없어짐이 없으며, 설령 어떤 중생이 만일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라도, 자기 정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는 것이니, 본래 이와 같기 때문이고, 본래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깨달은 자가 있더라도 또한 이와 같은 본각은 본래 능각이나 소각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본각불本覺佛의 경계는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선정도 없고, 산란도 없으며, 닦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十方諸佛 以無古今性 成大菩提 一念見道 古今見盡 新故總無 還同已前億千劫佛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亦與未來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以自證見三世無時故 以無時即無去來 設使衆生 不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自己身心正覺全德 本無有滅 設有衆生 若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於自正覺 本來無生 本如是故 本無能覺所覺者故 若有覺者 還如是覺 本無能覺及所覺者故 如是本覺佛之境界 無凡無聖 無定無亂 不修不證 不智不愚 不生不滅)
묻는다. “어째서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問曰 云何名不動相)
나의 견해: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 중에 소제목의 하나가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이다. 제법의 형상形相은 동상動相이고, 제법의 실상은 부동상不動相이라 말해야 옳을 터인데, 어째서 제법의 형상이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
의상조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법성이 원융하여 두 가지 상상이 없나니,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적정하느니라.”(法成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제법의 자성이 곧 법성이니, 법성은 다시 법자성과 동일하다. 이 법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없고 무상無相도 없으며, 동상同相도 없고 이상異相도 없으며, 총상總相도 없고 별상別相도 없다. 일체 분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법은 부동하여 적정할 수 있다. 이를 적정문이라 한다.
답한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무정에서 무정을 얻을 수 없으니 무정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상상相狀을 찾아도 상상이 없으니 상상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부동상이라 일컫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答曰 不得於有有 有無有可動 不得於無無 無無有可動 卽心無心 心無有可動 卽相無相 相無有可動 故名不動相 若作如是訂者 是名自誑惑 上來未解 解是無法可解)
나의 견해: 위에서 부동과 부동상의 출처와 그 대의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비행非行은 곧 부동 또는 상주한다는 뜻이다.”(非行卽不動常住之義) 또 “아자阿字로부터 일체 자륜字輪을 출생할 수 있고, 그래서 아자는 ‘본래 생기지 않고’ ‘얻을 수 없다’는 뜻이며, 그 본신은 본래 상주하여 부동하니, 이 때문에 자륜이 부동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又從阿字能生出一切之字輪 然阿字爲本不生不可得之義 其本身爲本來常住不動 故字輪含有不動之義) 부동상주不動常住는 상주부동常住不動과 같고, 또 상주는 부동과 같으며, 그 근원이 불가득不可得이고 본불생本不生이니, 아자본불생阿字本不生이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쉽다. 왜 그러한가? 친근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라는 명문이 있고, 달마대사의 안심법문도 있으며, 덕산스님과 관련한 “삼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요기療飢하시렵니까?”(三世心不可得 點麽何心)라는 공안도 있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고, 유정에서 유정을 볼 수 없으며, 유정에서 유정을 취할 수 없다. 무정도 또한 그러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법성은 조작이 없고 변역시킬 수도 없나니,
오히려 허공이 본래 청정함과 같으니라.
모든 불성이 청정함도 이와 같나니,
본래 불성은 비성非性인지라 유무를 여의었느니라.
法性無作無變易 猶如虛空本清淨 諸佛性淨亦如是 本性非性離有無
제불의 진신도 또한 이와 같나니,
일체 법계에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신형을 나투시니라.
諸佛眞身亦如是 一切法界無不遍 不可得見不可取 爲化衆生而現形
80권 화엄경에 법성은 171번 나오는데, 불성은 위 게송에 나온 것이 전부이다.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법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수자의어 법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수자의어 법문인가?
법성은 조작이 없고 변역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불성도 또한 그러하고, 법성이 허공처럼 청정한 것과 같이 불성도 또한 본래부터 청정하다.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보리성菩提性이 없고, 법계성法界性이 없으며, 허공성虛空性이 없고, 또한 다시 성정각성成正覺性도 없느니라.”(無菩提性 無法界性 無虛空性 亦復無有成正覺性)라고 하니, 이 때문에 본래 법성에서 법성을 얻을 수 없고, 불성에서 불성을 찾을 수 없다. 본래 없기 때문이다. 보리성이 불성이고, 법계성이 법성이다. 제불여래와 일체중생은 모두 함께 일성一性이라 차별이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불성이 청정함도 이와 같나니, 본래 불성은 비성非性인지라 유무를 여의었느니라.”(諸佛性淨亦如是 本性非性離有無)라고 한 것이다. 비성非性이 바로 법성이다. 청량국사는 화엄현담에서 이 게송을 인용했는데, 제3구와 제4구가 약간 다르다. “제불의 경계도 또한 이와 같이 청정하나니, 체성은 비성非性인지라 유무를 여의었느니라.”(法性無作無變易 猶如虛空本清淨 諸佛境界亦如是 體性非性離有無)
“제불의 진신도 또한 이와 같나니, 일체 법계에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신형을 나투시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 어찌 제불의 진신뿐이랴. 법성도 그러하고, 불성도 또한 그러하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제법諸法이 무성無性이고, 공상空相이기 때문이다.
2) 안심법문安心法門과 안락심安樂心
“제자의 마음이 아직 안락安樂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마음을 안락하게 하여 주소서.”(弟子心未安 乞師安心)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에게 안락한 마음을 주겠노라.”(將心來 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 了不可得)
“그대를 위한 안심법문을 마쳤느니라.”(爲汝安心竟)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없으니 요동搖動할 만한 마음인들 어디에 있으랴. “열반은 적정하고 무위하며 안락하다.”(涅槃寂靜無爲安樂) 안락은 열반에 들어간 경계 중에 하나이다. 이 안락심安樂心은 요동하지 않고 적정하다. 이 때문에 찾을 수 없다. “일체 제법諸法 중에도 모두 안락성安樂性이 있다.”(一切諸法中 悉有安樂性) 하물며 어찌 일체 중생에 안락심이 없으랴. 이 안락심을 증득한 이가 가는 곳이 바로 안락국安樂國 곧 극락정토이다.
유정에서 유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또 무정에서 무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다시 제상에서 제상의 실상을 찾을 수 있느냐?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모든 것이 본불생이고 불가득이기 때문이며, 또한 부동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은 무슨 뜻인가? 정訂 자는 정정訂正 또는 수정修訂 등으로 쓰이니 ‘바로잡아 정하다’는 뜻이다. “만일 일체 사견을 바로잡아 제법적정부동상과 같은 정견을 세웠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시방세계를 좌단坐斷해도 오히려 이마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그래서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래上來를 상고 이래로 해석했다. 상고는 최초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정각을 이루기 이전을 말한다. 삼세 부처님이 모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불자여,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펼쳐낼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광설廣說할 수 없느니라. 단지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니라.”(佛子 諸佛菩提 一切文字所不能宣 一切音聲所不能及 一切言語所不能說 但隨所應方便開示) “불자여, 여래는 일체 비유를 써서 갖가지 사법事法을 말할 수 있지만, 어떤 비유로도 이 법을 선설宣說할 수는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심지心智의 법로法路가 끊어져 부사의不思議한 해탈경계이기 때문이니라.”(佛子 如來以一切譬諭說種種事 無有譬諭能說此法 何以故 心智路絕不思議故) 이 부동상의 경계는 어떻다고 내놓으면 바로 그르치느니라.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라고 끝맺은 것이다.
거듭 부연한다. 유정이나 무정 그리고 유정의 마음이나 무정의 법상을 모두 제법諸法이라 한다. 이 제법이 바로 부동상이고, 이 부동상은 본래 적정하여 곧 적멸상寂滅相이다. “제법이 본래로부터 상주常住하여 자체로 적멸상이니라. 불자佛子가 이 상도常道를 행만行滿하면 내세에 성불할 수 있느니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은 산하대지의 삼라만상이다. 비로자나불의 법신은 일체처一切處에 변만遍滿한다. 비로자나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본래本來는 상래上來와 같다. 위음왕불 이전부터 제법이 법위法位에 상주한다. 이 때문에 유정 무정의 일체 세간상世間相이 그대로 적멸상이다. “불자佛子가 이 상도常道를 행만行滿하면 내세에 성불할 수 있느니라.” 불자는 유정을 말한다. 어떻게 상도를 행만할 수 있는가? 이 유정의 번뇌망상이 상고이래로 적멸상인 줄을 체달하면, 곧바로 내세가 되는 것이다.
9. 혜충국사의 무정설법
달마대사의 후손이 창립한 종파를 선종이라 한다. 능가사자기는 능가종의 초조를 능가아발다라보경 4권을 번역한 구나발타라 삼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능가종의 2조로 본다. 능가종의 역대조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종의 특색이 전혀 없다. 경교를 매우 중시한다. 이를 정통으로 이은 조사가 바로 혜충국사이고, 달마대사의 진전을 사자상승한 분이 곧 혜충국사이다. “사향처럼 자연향自然香이 있다면, 구태여 바람 앞에 설 필요가 없다.”(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란 슬로건이 전혀 필요 없다. 일승 요의경이면 자각과 각타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혜충국사께서 무정설법을 자주 말씀하신 듯하나, 문헌상 장분 행자 그리고 남방의 선객과 문답이 남아있다. 아래와 같다.
1) 어떻게 해야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는가?
남양의 장분이 사뢰었다. “제가 무정설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큰스님께서 가리켜 보여주시기를 간청합니다.”(南陽張濆問 某甲聞有無情說法 未諦其事 乞師指示)
국사가 말씀하셨다. “무정설법을 그대가 그와 같이 들을 때 바야흐로 무정설법을 듣는다. 그 무정을 반연해야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나니, 그대는 오직 무정설법을 묻기만 할 뿐이니라.”(師曰 無情說法汝若聞時 方聞無情說法 緣他無情 始得聞我說法 汝但問取無情說法去)
나의 견해: 문답이 떨어져 있지 않는다. 언제나 질문에 답이 있다. “제가 무정설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대가 그와 같이 들었다면, 지금 들은 것이냐? 아닙니다. 과거에 들은 것이냐? 지금 들었다고 말했으니 과거에 들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 들은 것도 아니고, 과거에 들은 것도 아니다. 과거와 지금이 없는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무정설법을 그대가 그와 같이 삼세심이 없는 마음으로 들을 때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유정은 유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고, 무정은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 유정은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없다. 국사의 무정설법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는가? 그 무정을 반연해야 한다. 어떻게 무정을 반연하는가? 바로 무심을 반연한다. 무정은 삼세심이 없다. 무심도 또한 삼세심이 없다. 네가 무심하여 삼세심이 없는 무정이 되면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삼세심이 없는 그 마음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무정설법을 묻기만 할 뿐이고, 들을 수는 없다.
도는 무심하여 수행인과 계합하나니,
수행인도 무심하면 도와 계합하리라.
이 가운데 밀의密意를 알고자 하느냐?
노사가 하나는 있지만 하나는 없느니라.
道無心合人 人無心合道 欲識箇中意 一老一不老
장분이 사뢰었다. “다만 지금 유정의 방편 중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것이 무정의 인연입니까?”(張濆曰 只如今約有情方便之中 如何是無情因緣)
나의 견해: 장분은 남양의 행자行者이다. 출가하지는 않은 듯하다. 일승법문은 듣기도 어렵지만 묻기도 또한 어렵다. 유정의 방편과 무정의 인연이란 유무의 쌍검을 들고 나온다. “그 무정을 반연해야(緣他無情)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이 연타무정緣他無情을 무정인연無情因緣으로 이어받았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단지 지금 갖가지로 움직여 쓰고 있는 그 안에서 시전施展할 뿐이고, 오로지 범정凡情과 성해聖解 두 견해에 모두 조그만큼도 기멸하는 마음이 없을 따름이니라. 바로 6식에서 벗어나나니, 유정의 불꽃처럼 일어나는 견문각지에는 예속하지 않느니라. 다만 그와 같이 연계시키는 집착이 없을 따름이니, 그래서 6근이 6경을 상대하는 분별도 6식은 아니니라.”(師曰 但如今於一切動用之中施爲 但凡聖兩流都無小分起滅 便是出識 不屬有情熾然見覺 只是無其繫執 所以六根對色分別非識)
나의 견해: “어떤 것이 무정의 인연인가?”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당처를 여의지 않는다. “단지 지금 갖가지로 움직여 쓰고 있는 그 안에서 ‘무정의 인연’을 시전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유정의 방편’이다. 나날이 쓰고 있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일체 일용사가 하나도 유정의 방편이 아님이 없다. 이 가운데 “오로지 범정凡情과 성해聖解 두 견해에 모두 조그만큼도 기멸하는 마음이 없을 따름이니라.” 이는 또한 ‘무정의 인연’이 분명하고, 이는 다시 ‘무정의 설법’이 명백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정의 설법을 제법에서 찾지만, 지혜로운 이는 이 당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무정설법을 보고, 들으며, 말하고, 아느니라.
이에 유정의 방편을 “단지 지금 갖가지로 움직여 쓰고 있는 그 안에서 시전할 뿐이다.”라고 한정하고, 무정의 인연을 “오로지 범정과 성해 두 견해에 모두 조그만큼도 기멸하는 마음이 없을 따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를 간단히 말한다. 단진범정但盡凡情이고, 별무성해別無聖解이다. 이는 유정의 경계를 벗어난다. 유정은 6근이 6경을 상대하여 불꽃처럼 일어나는 견문각지가 모두 번뇌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무정은 그러하지 않고, 법성이나 불성 또는 법신도 또한 이와 같으며, 청정각성을 수순하는 경계도 또한 그러하다. 아래와 같다.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망심에서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고, 명백히 알려고 함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변별하지도 말지니라. 저 모든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서 신해하고 수지하며 두려움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각성을 수순하는 것이니라.”(善男子 但諸菩薩 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 亦不息滅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眞實 彼諸衆生 聞是法門 信解受持 不生驚畏 是則名爲 隨順覺性)
마지막 육근대색六根對色 분별비식分別非識은 우두법융牛頭法融스님의 심명心銘에 있고, 육근대경六根對境과 그 뜻이 같다. “6근이 6경을 상대하는 분별도 6식은 아니니라.” 눈으로 색상을 상대하여 보면, 이 보는 것을 식이라 하며, 견문후상각지見聞嗅嘗覺知를 6식이라 한다. 그런데 어째서 보고 듣는 분별이 6식이 아닌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심히 보고, 무심히 듣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다. 이는 사리불존자의 심견心見이고, 보현보살의 심문心聞에 상당하기도 하니, 이도 또한 능엄경의 원통법문이 아닐 수 없다.
2) 불법불이佛法不二
내가 남방선객의 첫째 질문과 혜충국사의 답변을 의거하여 이 소제목을 ‘불법불이佛法不二’라 명명하고, 그 대의를 구하고자 인터넷을 검색하니, 아래와 같은 자료가 있다.
거사 질문: “지금 화상을 뵈오니 이미 승보는 알겠나이다. 무엇을 불법이라 하나이까?”(居士云 今見和尙 已知是僧 何名佛法)
이조혜가 답변: “이 마음이 부처이고, 이 마음이 법이니, 부처와 법은 다르지 않고, 승보도 또한 그러하느니라.”(師云 是心是佛 是心是法 佛法不二 僧寶亦然)
부처도 이 마음이고, 법도 또한 이 마음이니, 부처와 법이 다를 것이 없다. 승보도 또한 이 마음이라면, 불법승 삼보는 차별이 없다. 이는 60권 화엄경 중에 한 게송과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는다. 80권 화엄경은 제3구와 4구가 조금 다르다.
이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이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도다.
이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여,
이 셋은 차별이 없느니라.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이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이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도다.
부처와 이 마음을 마땅히 알지니,
그 체성은 모두 끝이 없느니라.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각설하고,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은 법성이고, ‘고불의 마음’은 불성이다. 이를 취하여 ‘불법불이佛法不二’라 명명한다.
어떤 남방의 선객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나의 견해: 조당집이나 전등록을 보면 고불심古佛心을 많이 묻고 답한다. 아마도 남방선객과 혜충국사의 문답이 효시嚆矢일 것이다. 시간을 삼세로 나누어 보면 고불이 있고 금불今佛이 있으며 내불來佛이 있다. 그러나 삼세불의 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불심, 곧 부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길을 걷다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한테 물으면 대자대비하다고 말할 것이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일체 처소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不住一切處心)을 불심이라 정의했다. 무의주지無依住智와 다를 바가 없다. 화엄경의 보현보살 게송은 이러하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느냐?
마땅히 부처님의 지혜를 관할지니라.
부처님의 지혜는 의지하는 곳이 없나니,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欲知諸佛心 當觀佛智慧 佛智無依處 如空無所依
이 게송을 의거하여 불심을 관할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응당 그 마음을 허공처럼 청정하게 하라.”(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이 게송을 의거하여 또한 부처님의 경계를 관할 수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의 고래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유정은 무정의 세계를 알 수 없고, 중생심으로 불심 또는 제불경계를 알 수 없다. 불심을 알고자 하느냐? 불지를 관하라. 부사의한 변재를 가지고 있는 부처님도 중생한테는 불지를 직설할 수 없다.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유를 쓴다. 부처님의 지혜 또는 지바라밀이 허공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의지하는 바가 없는 허공을 비유하여 불지를 알게 한다. 일승의 묘법을 설명하는 일체 비유 중에 이 허공이 가장 가깝다. 그래서 허공의 비유가 제일 많다. 원각경에도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이라 하지 않는가?
국사가 말씀하셨다.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師曰 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나의 견해: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노주露柱에게 물어보라.”(問取露柱去)
남방선객의 질문과 혜충국사의 문답은 공안문답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당송 이후 선사의 문답에 무정을 도입한 일체 공안의 효시로 보아도 또한 무방하다. 취죽황화翠竹黃花나 장벽와력廧壁瓦礫이 다를 것이 없다. 취죽황화가 문수보살의 경계라면, 장벽와력은 어찌 보현보살의 경계가 아니랴. 이 때문에 일체 공안의 낙처落處는 무정을 여의지 않고, 또 일성一性의 무성無性을 여의지 않는다.
경에 무수한 부처님의 명호가 나온다. 금불今佛은 서가모니불이고, 내불來佛은 미륵불이며, 과거칠불을 위시하여 다른 부처님은 모두 고불古佛이다. 서가모니불은 금불이라 말해도 옳고 고불이라 해도 또한 옳다. 그래서 고불의 마음을 금불의 마음이라 해도 좋다.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곧 장벽와력牆壁瓦礫의 출처가 열반경이다. 열반경의 원문은 장벽와석牆壁瓦石이다. 원문을 그대로 갖다 쓰거나 뒤집어서 쓰거나를 막론하고, 옛날의 학불자學佛者는 경에 나오지 않는 말은 쓰지 않았다.
선객이 사뢰었다. “경과 매우 다릅니다. 원래 열반경에 말씀하시기를,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을 여의었기 때문에 불성이라 일컫는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온갖 무정이 모두 부처의 마음이라 이르시니, 마음과 성품이 다른지 다르지 않는지 미심쩍습니다.”(禪客曰 與經太相違 故涅槃經曰 離牆壁瓦礫無情之物 故名佛性 今云一切無情皆是佛心 未審心與性爲別不別)
나의 견해: 위 인용문은 원문과 다르지만 그 뜻은 다르지 않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불성이 아니란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無情物이니, 이와 같은 등의 무정물을 여읜지라 이를 불성이라 일컬었느니라.”(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
하나는 불성이라 말하고, 또 하나는 고불심이라 말한다.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명견名犬은 흙덩이를 쫓아간다.”(獅子咬人 韓盧逐塊) 선객의 경계가 그러하다. 국사의 법문은 곧바로 수용되지 않고, 불성과 고불심의 분별만 보인다. 그래서 위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미혹한 사람은 곧 다르지만, 깨달은 사람은 바로 다르지 않느니라.”(師曰 “迷人卽別, 悟人卽不別.”)
나의 견해: 이 미인迷人을 속인俗人 호도인糊塗人 미혹인迷惑人 등으로 해석한다. 어리석은 사람 또는 판단력을 잃은 사람을 말한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을 현성이라 호칭하고 보면, 미인은 범부로 보면 적당할 것 같다. 미인과 오인의 대구는 부지기수이다.
선가구감 언해본에 있다. “오인은 대번에 보는데, 미인은 아득한 세월만 기약한다.”(悟人卽頓見 迷人期遠劫)
육조단경에 있다. “미인은 점차 계합하고, 오인은 단번에 닦는다.”(迷人漸契 悟人頓修) “미인은 염불하여 피안에 연화탁생蓮花托生을 구하고, 오인은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迷人念佛 求生於彼 悟人自淨其心)
대주혜해大珠慧海 스님의 말씀이다. “미인은 인행因行을 닦고 과위果位를 기다리지만, 오인은 마음이 본래 공적함을 아느니라.”(迷人修因待果 悟人了心本空) 또는 “오인은 마음이 형상이 없는 줄을 아느니라.”(迷人修因待果 悟人了心無相)
선객이 사뢰었다. “또다시 경과 서로 어긋납니다. 원래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상주하고, 마음은 무상하다.’라고 했는데, 오늘은 다르지 않다고 하시니, 이 대의는 어떠한지 미심쩍습니다.”(禪客曰 又與經相違 故經曰 善男子 心非佛性 佛性是常 心是無常 今日不別 未審此義如何)
나의 견해: “마음은 불성이 아니다.”(心非佛性)라는 구절은 열반경에 있다. 상주와 무상이 대비하는 것과 같이, 불성의 대구로 중생의 마음이 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선남자여, 그대는 오래전부터 불성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중생을 위하여 짐짓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일체 중생은 진실로 불성이 있느니라.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이 만일 불성이 있다면, 응당 처음 보리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선남자여,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마음은 무상無常하고, 불성은 상주常住하기 때문이니라. 그대가 말하기를, ‘어떤 연고로 퇴심退心하는 이가 있습니까?’라고 하지만, 진실로 퇴심이란 없느니라. 마음이 만일 퇴심이 있다면, 끝까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느니라. 더디게 얻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퇴심이라 하느니라. 이 보리심菩提心은 진실로 불성이 아니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일천제 등이 선근善根을 끊으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면 어떠한가? 일천제 떼거리도 곧바로 일천제라 호명할 수 없기 때문이고, 보리의 마음도 또한 무상하다고 칭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 때문에 보리의 마음은 진실로 불성이 아닌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佛言 善哉善哉 善男子 汝已久知佛性之義 爲衆生故作如是問 一切衆生實有佛性 汝言衆生若有佛性不應言有初發心者 善男子 心非佛性 何以故 心是無常佛性常故 汝言何故有退心者 實無退心 心若有退終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遲得故名之爲退 此菩提心實非佛性 何以故 一闡提等斷於善根墮地獄故 若菩提心是佛性者 一闡提輩則不得名一闡提也 菩提之心亦不得名爲無常也 是故定知菩提之心實非佛性)
“마음은 불성이 아니다.”(心非佛性)라는 마음은 원래 중생의 마음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보리의 마음을 말하고, 이를 불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어째서 보리의 마음은 불성이 아닌가? 불성은 상주하지만 보리의 마음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일천제는 선근을 끊기 때문에 지옥에 타락한다. 상주하는 불성은 끊을 수 없고, 무상한 보리의 마음은 끊을 수 있다. 만일 보리의 마음이 상주하는 불성이라면, 일천제는 선근을 끊을 수 없다. 보리의 마음은 무상하기 때문에 일천제도 또한 선근을 끊을 수 있다. 이를 의거하면, 이 선근의 원두源頭는 불성이 아니고, 보리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 보리의 마음을 끊은 것을 퇴심이라 한다. 인연이 도래하여 다시 보리의 마음을 내면 성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천제도 인연이 도래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다. 작심하고 삼일을 넘기지 못하면 이를 퇴심이라 하고, 삼년을 넘기면 이를 불퇴심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심과 작심이 다르지 않다. 하나는 출세간용이고, 또 하나는 세간용일 따름이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말에 의지하고, 뜻에는 의지하지 않는구나. 비유하면 한랭한 겨울에는 물을 얼려서 얼음이 되었는데, 따뜻한 시절에 이르면 얼음을 녹여서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는 불성을 엉기게 하여 마음을 이루고, 중생이 깨달을 때는 마음을 풀리게 하여 불성을 이룬다. 그대가 만일 무정은 불성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경에서도 응당 ‘삼계는 유심이고 만법은 유식이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삼계의 모든 법, 일체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라고 하였느니라. 이제 다시금 그대에게 묻노라. ‘무정물은 삼계의 안에 있는가, 삼계의 밖에 있는가? 무정물은 혹은 마음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도 아닌가?’ 만일 마음이 아닌 것이라면 경에서 응당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고, 만일 마음인 것이라면 응당 ‘무정은 불성이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니라. 그대가 스스로 경을 어겼고, 내가 어기지 않았느니라.”(師曰 汝依語而不依義 譬如寒月 結水爲冰 及至暖時 釋冰爲水 衆生迷時 結性成心 衆生悟時 釋心成性 汝若定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萬法唯識 故華嚴經曰 三界所有法 一切唯心造 今且問汝 無情之物 爲在三界內 爲在三界外 爲復是心 爲復不是心 若非心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若是心者 不應言 無情無佛性 汝自違經 吾不違也)
나의 견해: “중생심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상주하고, 중생심은 무상하다.”(心非佛性 佛性是常 心是無常) 불찰미진수 불국토의 일체 부처님은 일승만 말씀하신다. 청법대중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경우 방편이 필요하면 권승權乘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 사바세계처럼 성인과 범부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근기가 하열한 이는 삼승 설법이 마음에 칭합稱合한다.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할 수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할 수 없다는 견해도 또한 그러하다. 이에 혜충국사는 여러 경전을 인용하여 무정에도 불성이 있음을 고구정녕하게 밝혀준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 그리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은 수자의어이고, “불성은 상주하고, 마음은 무상하다.” 이는 수타의어이다.
선객이 사뢰었다. “무정도 이미 마음이 있다면 또한 설법도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지 못합니까?”(禪客曰 無情旣有心 還解說法也無)
나의 견해: 유정은 무정과 대응하고, 범부는 부처와 대응한다. 부처님도 화엄을 상설常說하고, 무정도 설법을 상설한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들은 치열하게 설하고, 영원히 설하며, 늘 설하되, 잠시도 쉬는 때가 없느니라.”(師曰 他熾然說 恒說常說 無有間歇)
나의 견해: 무유간헐無有間歇을 줄임말로 무간無間이라 한다. 부정적으로 쓰이며, 무간지옥이 대표적이다. 혜충국사는 긍정적으로 썼다. 직역하면 “쉴 틈이 없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의 가운데, 시간 때 겨를 공간 사이 기회 등을 넣어도 또한 좋다. 이 간헐間歇은 사전에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하여 일어남” 또는 “동작이나 변화 따위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멈추었다 하다”라고 해석한다. 일야日夜 곧 하루에 만사만생萬死萬生한다. 끝없이 죽고 살기를 반복한다. 무간지옥의 고초苦楚가 이와 같다.
이 무정의 설법은 바로 비로자나 법신의 진경眞境을 상설하는 화엄법문이다. 위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에,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이 모두 일체지지경계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이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있고, 또 “비정성불非情成佛 초목성불草木成佛 또는 무정유성無情有性이라 말하기도 하며, 길게는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이라 말하기도 한다.”라는 문구도 있다. 이를 의거하면 무정설법도 그 유래가 자못 길다.
선객이 사뢰었다. “저는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합니까?”(禪客曰 某甲爲什摩不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가 스스로 듣지 못하니, 그들이 무정설법을 들으시는 것을 방애妨碍할 수 없느니라.”(師曰 汝自不聞 不可妨他有聞者)
나의 견해: “불자여, 비유컨대 해가 떠서 두루 세간을 비춰주면, 일체 정수기淨水器 가운데 그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두루 일체 처소에 이르지만 가고 옴이 없느니라. 간혹 한 그릇이라도 깨지면 바로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느니라. 불자여, 너의 뜻은 어떠하냐? 저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해의 허물이냐?”(佛子 譬如日出 普照世間 於一切淨水器中影無不現 普遍衆處而無來往 或一器破便不現影 佛子 於汝意云何 彼影不現爲日咎不)
“아니옵니다. 단지 그릇이 깨졌기 때문이고, 해에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不也 但由器壞 非日有咎)
무정설법의 설자說者와 청자聽者도 또한 이와 같다. 무정설법을 듣지 못하는 허물이 남방선객에게 있고, 무정의 설법에 있지 않다.
이 본은 조당집을 의거했는데, 다른 본은 대부분 유有자가 없다. “그들이 무정설법을 듣는 것을 방애할 수 없다.”(不可妨他聞者) 경덕전등록에는 전자만 있고 후자는 없다. 이 유有자의 용법에는 ‘일부 동사의 앞에 쓰여 존경 또는 겸양을 나타낸다.’ 그래서 유자가 있으면 더 고품격의 언사가 된다.
방해妨害하다(헤살을 놓아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다)와 방애妨碍하다(짓궂게 훼방을 놓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다)에는 그 뜻에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방妨자는 ‘지장이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불방不妨은 무방無妨과 같다. 중간에 가可자가 들어가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전체 대의는 “그대가 스스로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도 또한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정설법을 들으시는 것을 지장이 있게 할 수 없다, 또는 방애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떤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進曰 誰人得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모든 성인이 들을 수 있느니라.”(師曰 諸聖得聞)
나의 견해: 경덕전등록에는 성聖자가 불佛자로 바뀌어 제불득문諸佛得聞이라 되어 있다. 청문할 수 있는 자격이 십지보살의 성인에서 불지로 격상된 느낌이다. 좀 심한 듯하다.
선객이 사뢰었다. “이와 같다면 중생은 응당 들을 자격이 없겠습니다.”(禪客曰 與摩卽衆生應無分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을 위하여 설하지, 그러한 모든 성인을 위해서 설할 수는 없느니라.”(師曰 我爲衆生說 不可爲他諸聖說)
선객이 사뢰었다. “저는 귀머거리나 소경처럼 우매하여 무정물의 설법을 듣지 못합니다. 화상께서는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시라 반야바라밀다를 설하시니, 무정설법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某甲愚昧聾瞽 不聞無情說法 和尙是爲人天師 說般若波羅蜜多 得聞無情說法不)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듣지 못하느니라.”(師曰 我亦不聞)
나의 견해: 겸사謙辭이다. 그러나 실어實語일 수도 있다. 현성의 일은 불가사의하여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하십니까?”(進曰 和尙爲什摩不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다행하게도 내가 무정설법을 듣지 못하는구나. 내가 만일 무정설법을 듣는다면 내가 바로 모든 성인과 동등할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으며, 틈타서 나의 설법을 듣겠느냐?”(師曰 賴我不聞無情說法 我若聞無情說法 我則同於諸聖 汝若爲得見我 及聞我說法乎)
선객이 사뢰었다. “모든 중생은 구경에 이르러도 또한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一切衆生 畢竟還得聞無情說法不)
국사가 말씀하셨다. “중생이 만일 듣는다면 곧 중생이 아니니라.”(師曰 衆生若聞 卽非衆生)
나의 견해: 한국인이 영어를 모르면 영미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국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국어를 써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불자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 비불자非佛子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낯설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인의 말씀이랴. 비중생非衆生은 둘이 있다. 하나는 성인이고, 둘은 무정이다. 중생이 성인의 법문을 듣지 못하는 사례를 아래에 제시한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자기 마음에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 여래는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나니, 모두 여래가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하고 있느니라.”(佛子 菩薩摩訶薩應知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 何以故 諸佛如來不離此心成正覺故 如自心一切衆生心亦復如是 悉有如來成等正覺)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생각마다 그 생각을 따라서 일체 제불이 정각을 성취하신다. 그 일을 모르기 때문에 범부이다. 내 6척의 몸 안에서 일체 제불이 팔상으로 성도하시지만 또한 모른다.
“보현보살은 마음으로 듣는다.”(普賢菩薩以心聞)라고 한다. 능엄경의 원통법문에 있다. 아래와 같다. “보현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부처님의 발에 대고 절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는 진작 항하사 여래의 법왕자法王子가 되었고, 시방의 여래께서 그 제자 중에 보살의 근기가 있는 이들로 하여금 보현행普賢行을 닦게 하시니, 저로 좇아서 그 이름을 세웠습니다. 세존이시어, 저는 마음으로 보고 중생의 모든 지견知見을 분별합니다. 만일 타방의 항하사 세계 밖에 한 중생의 마음속에 보현행을 발명發明하려는 이가 있다면, 저는 그때 육아상六牙象을 타고, 분신한 백천 개의 화신이 모두 그 처소에 이릅니다. 비록 그의 업장이 깊어서 응당 저를 보지 못하더라도, 저는 그 사람한테 은밀히 이마를 만져주고 옹호하여 위안하며, 그로 하여금 보현행을 성취하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저에게 원통을 물으시고 본인本因을 말하라고 하시니, 마음으로 듣고 발명하여 자유자재로 분별하는지라, 이 심문心聞이 제일인가 합니다.’”(普賢菩薩即從座起 頂禮佛足而白佛言 我已曾與恒沙如來爲法王子 十方如來教其弟子菩薩根者 修普賢行 從我立名 世尊 我用心聞 分別衆生所有知見 若於他方恒沙界外 有一衆生心中發明普賢行者 我於爾時乘六牙象 分身百千皆至其處 縱彼障深未合見我 我與其人暗中摩頂 擁護安慰令其成就 佛問圓通我說本因 心聞發明分別自在 斯爲第一)
내가 만일 사홍서원을 하고 보현행을 발명하고자 하면, 보현보살이 육아상六牙象을 타고 나의 처소에 이르러 은밀히 이마를 만져주어도 나는 모른다. 범부는 성인의 법문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의 법문도 듣지 못하는데, 어찌 무정의 설법을 들으랴.
선객이 사뢰었다. “무정설법은 또한 전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無情說法 還有典據也無)
국사가 말씀하셨다. “말이 전고典故와 연관되지 않으면 군자가 말한 것이 아니니라. 그대는 어찌 보지 못했는가? 아미타경에 말씀하시기를, ‘물이나 새와 수풀도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스님들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느니라. 새는 유정이지만 물과 나무는 어찌 유정이겠는가? 또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찰토刹土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삼세의 일체가 설법한다.’라고 하였느니라. 중생은 유정이지만 찰토가 어찌 유정이겠는가?”(師曰 言不關典 非君子之所談 汝豈不見彌陀經云 水鳥樹林 皆是念佛念法念僧 鳥是有情 水及樹豈是有情乎 又華嚴經 刹說衆生說 三世一切說 衆生是有情 刹豈是有情乎)
나의 견해: 무정이 설법하는 전거는 부지기수이다. 논외로 쳐도 또한 무방하다. 무정은 불성이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의 핵심이다. “말이 전고典故와 연관되지 않으면 군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바이다.”(言不關典 君子所慚)라는 명구가 있다. “찰토가 설법하고” 이하는 60권 화엄경에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고 보살이 설법하며, 찰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삼세 일체가 설법하는데, 보살이 분별하여 아느니라.”(佛說菩薩說 刹說衆生說 三世一切說 菩薩分別知)
선객이 사뢰었다. “이미 무정도 불성이 있다면야 유정은 또 어떠한지 미심쩍습니다.”(客曰 旣是無情有佛性 未審有情又如何)
국사가 말씀하셨다. “무정도 오히려 이러한데, 어찌 하물며 유정이랴.”(師曰 無情尙爾 豈況有情乎)
선객이 사뢰었다. “만일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불성이 있다면, 유정을 죽여서 그 몸의 일부분을 먹으면 곧 원죄怨罪를 결성하여 앙갚음할 것이지만, 무정을 손상시켜서 오곡이나 채소 과일 밤 따위 물건을 먹으면 죄가 되어 상호간에 보복한다고 듣지는 못했습니다.”(禪客曰 若有情無情俱有佛性 殺有情而食噉其身分 卽結於罪怨相報 損害無情 食噉五穀菜蔬果栗等物 不聞有罪互相讎報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유정은 정보正報인지라 비롯함이 없는 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허망과 전도로 나와 나의 것으로 계산하여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원한이 맺히면 곧 원한의 보응이 있느니라. 무정은 의보依報인지라 전도되어 원한을 맺는 마음이 없으며, 그래서 보복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느니라.”(師曰 有情是正報 從無始劫來 虛妄顚倒 計我我所而懷 結恨卽有怨報 無情是依報 無顚倒結恨心 所以不言有報)
나의 견해: 정보와 의보에 대하여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선객이 사뢰었다. “경교經敎 중에 단지 유정만은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고 미래세에 부처가 되면 아무개 등이라 호칭한다는 것은 보았을 뿐이고, 무정이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고 부처가 된다는 국토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현겁의 1천 부처님 중에 어느 분이 무정으로 성불하셨는지를 청컨대 제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客曰 經敎中但見有情授三菩提記 於未來世 而得作佛 號曰某等 不見無情授菩提記 作佛之處 只如賢劫千佛中 阿那個是無情成佛 請爲示之)
국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묻노라. 비유하면 황태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에 혹은 태자 일신만 왕위를 받게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국경선 안에 하나하나를 다 받게 되는가?”(師曰 我今問汝 譬如皇太子受王位時 爲復太子一身受於王位 爲復國界一一受也)
선객이 대응하여 사뢰었다. “단지 태자로 하여금 왕위를 받게 하면 국토 안의 모든 것은 저절로 왕에게 예속됩니다. 설마 따로 받기야 하겠습니까?”(對曰 但令太子受得王位 國土一切自屬於王 寧當別受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지금의 이것도 또한 그러하니라. 다만 유정으로 하여금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게 하는 때에는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국토가 모두 비로자나불의 불신佛身에 예속한다. 불신 밖에 어찌 다시 무정이 있어서 수기를 받는다고 할 수 있으랴.”(師曰 今此亦爾 但令有情授記作佛之時 三千大千世界 一切國土 盡屬毗盧遮那佛身 佛身之外 那得更有無情而得授記耶)
나의 견해: 혜충국사의 변재는 그 끝이 없다. 변재는 지혜의 발로發露이다. 무정과 유정으로 양분하면 그 분쟁이 끝이 없고, 유정과 무정을 둘로 보지 않으면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선객이 사뢰었다. “일체 대지가 이미 불신이라면 일체 중생이 불신 위에서 생활하며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히고, 또 구멍을 뚫으며 불신을 짓밟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客曰 一切大地旣是佛身 一切衆生居佛身上 便利穢汙佛身 穿鑿踐踏佛身 豈無罪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전체가 불신인데, 누가 죄가 되겠느냐?”(師曰 一切衆生全是佛身 誰爲罪乎)
나의 견해: “지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로지 간택을 꺼릴 따름이다. 단지 증애만 없다면, 훤하여 명백할 것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증애도 간택이지만, 정예淨穢도 또한 간택이다. 어린아이들이 방구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똥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자기 오줌을 받아먹는 사람도 있다. 분뇨에 대한 정예관이 같지 않다. 원효대사도 또한 이 정예관 때문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대수행인이 어찌 대소변을 더럽다고 여기느냐.
일체 대지가 불신이고, 일체 중생 전체도 또한 불신이다. 무정도 불신이고 유정도 불신이다.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전신체이다. 비로자나불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마땅히 알라. 조그만큼 허공에도 불신이 없는 곳이 없느니라.”(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6조 혜능대사 문하에서 혜충국사도 나오고 신회대사도 나왔는데, 어째서 무정불성관은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져 있을까? 또 어째서 혜충국사는 6조대사의 무정무불종 취지를 이어받지 않고, 강력히 배척하고 있을까?
선객이 사뢰었다. “불신은 함이 없고 걸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함이 있고 장애가 있는 것으로 불신을 삼는다면, 어찌 성지聖旨와 어긋나지 않겠습니까?”(客曰 佛身無爲 無所罣礙 今以有爲質礙之物而作佛身 豈不乖於聖旨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보지 못하는가? 대품경大品經에 말씀하시기를, ‘유위를 여의고 무위를 말할 수 없다. 또 무위를 여의고 유위를 말할 수도 없다.’라고 하셨느니라. 그대는 색이 바로 공인 줄을 믿지 않는가?”(師曰 汝今不見大品經曰 不可離有爲而說無爲 又不可離無爲而說有爲 汝信色是空不)
나의 견해: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간략히 대품경이라 한다. 유위는 상종相宗이고, 무위는 성종性宗이다. 형상이 있는 것으로 형상이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형상이 없는 것으로 형상이 있는 것을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선객이 대응하여 사뢰었다.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對曰 佛之誠言 那敢不信)
국사가 말씀하셨다. “색이 이미 공이라면 어찌 걸림이 있겠는가?”(師曰 色旣是空 寧有罣礙)
나의 견해: 불교를 조금만 공부해도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안다. 당대 대전大顚선사의 게송은 명품이다.
십년 동안 축융봉祝融峯을 내려가지 않았더니,
색色을 관조觀照하는 관觀이 공적空寂하여 곧 색이 공空이로다.
어찌 조계曹溪에서 전수받은 한 방울의 물인들
기꺼이 홍련紅蓮의 한 이파리 위에 떨어뜨리랴.
十年不下祝融峯 觀色觀空卽色空 如何曹溪一滴水 肯墮紅蓮一葉中
선객이 또 물었다. “중생이 부처와 이미 동일한 자라면 단지 한 부처님만 수행해도 일체 중생은 응당 일시에 해탈할 것인데, 지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하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又問 衆生與佛旣同者 只用一佛修行 一切衆生應一時解脫 今見不爾 同義何在)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화엄경 가운데 육상의六相義를 보지 못했는가? 동상 가운데 이상이 있고, 이상 가운데 동상이 있으며, 성상 가운데 괴상이 있고, 괴상 가운데 성상이 있으며, 총상 가운데 별상이 있고, 별상 가운데 총상이 있다. 중생과 부처가 비록 동일한 불성이지만, 제각기 스스로 수행해서 스스로 증득하는 것도 무방하다. 남이 밥을 먹는 것을 보아도 끝내 자기가 배부르지는 않느니라.”(師曰 汝不見華嚴經中六相義 同中有異 異中有同 成中有壞 壞中有成 總中有別 別中有總 衆生與佛雖同一性 不妨各各自修自得 看他人食 終自不飽)
나의 견해: 한 보살이 등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제불이 일시에 성불한다. 이는 총상이다. 국사의 말씀은 별상이다.
선객이 또 물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울울창창鬱鬱蒼蒼한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하지 않고 삿된 말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확신하며 불가사의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又問 古德曰 靑靑翠竹 盡是眞如 鬱鬱黃花 無非般若 有人不許 是邪說 亦有人信 言不可思議 不知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나 소인이 믿고 받을 수 있는 경계는 아니니라. 이 모두는 대승요의경大乘了義經의 뜻과 부합하나니라.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여 두루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지만, 항상 여기 보리좌菩提座에 안좌安坐하셨느니라.’라고 하셨도다. 취죽이 이미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또 마하반야경에 말씀하시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심원한 말씀이시라,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염두에 두기가 어렵도다.”(師曰 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 非諸凡小而能信受 皆與大乘了義經意合 故華嚴經云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翠竹旣不出於法界 豈非法身乎 又摩訶般若經曰 色無邊故 般若無邊 黃花旣不越於色 豈非般若乎 此深遠之言 不省者難爲措意)
나의 견해: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법문은 무정설법의 결정판이다. 이 문단을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선객이 또 물었다. “어떤 선지식이 말씀하시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만 본심을 알기만 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에 한쪽으로 껍질을 훌쩍 벗어던지고, 영대靈臺의 각성이 저 멀리 떠나가는 것을 일컬어 해탈이라 한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어떠합니까?”(又問 有善知識言 學道人但識得本心了 無常來時 拋却殼漏子一邊著 靈臺覺性 迥然而去 名爲解脫 此復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히려 이승이나 외도의 양지量知를 여의지 못했다. 이승의 수행인은 모두 유위 생사를 싫어하여 여의려 하고 무여열반을 기뻐하고 좋아한다. 노자도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내가 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명제冥諦를 좋아하여 지도至道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수다원 행인行人은 8만겁, 사다함 행인은 6만겁, 아나함 행인은 4만겁, 아라한 행인은 2만겁, 벽지불 행인은 1만겁을 선정에 머무르고, 외도도 또한 8만 대겁을 비상비비상천에 머문다. 이승은 그 겁이 차면 오히려 회심하여 대승으로 회향하는데, 외도는 그 겁이 차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師曰 此猶未離二乘外道之量 二乘之人 皆猒離有爲生死 忻樂無餘涅槃 老子亦曰 吾有大患 爲吾有身 忻樂冥諦 而爲至道 乃趣冥諦 須陀洹人八萬劫 斯陀含人六萬劫 阿那含人四萬劫 阿羅漢人二萬劫 辟支佛十千劫 住於定中 外道亦八萬大劫 住非想非非想天 二乘劫滿 猶迴心向大 外道劫滿 不免輪迴生死)
나의 견해: 노자도 명제를 좋아하여 지도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명언이다. 명언 중에 명언이다. 제자백가의 위상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초모랑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말라야 산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모랑마를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바로 그 앞에서 보기는 했다. 안나푸르나는 멀리서도 보이지만 초모랑마는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그 얼굴을 드러낸다. 마치 수줍은 새색시 같다. 암산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부처님 당시 96종 외도들의 경지는 제자백가의 사상보다 훨씬 높다. 그 위에 불교가 있다. 마치 히말라야 군봉 위에 군림하고 있는 초모랑마처럼. 유불선儒彿仙은 같지 않다. 삼교논형三敎論衡의 역사도 유구하고 강론도 치열했다. 한퇴지의 논불골표論佛骨表와 장상영의 호법론護法論이 특히 유명하지만, 한퇴지도 결국은 태전화상에 귀의했다. 불교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선객이 또 물었다. “모든 사람의 불성은 혹은 한 종류가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류도 있습니까?”(又問 一切人佛性 爲復一種 爲復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한 종류일 수는 없느니라.”(師曰 不得一種)
나의 견해: 부처님의 법문에 수자의어가 있고, 또 수타의어가 있다. 후자에 속한다. 청량국사는 “이 중에 불성이 여러 가지라 유성과 무성의 같지 않음이 있음을 밝힌 것이고, 중생이 여러 가지라 유성과 무성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은 아니다.”(此中明佛性多種有無不同 不明衆生多種有性無性)라고 했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째서 다른 종류가 있습니까?”(進曰 云何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되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有人佛性 全不生滅 有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誰人佛性 全不生滅 誰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耶)
국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여기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지만, 저기 남방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我此間佛性 全不生滅 彼南方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의 불성은 어찌하여 전혀 생멸하지 않고, 남방의 불성은 어찌하여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和尙佛性 若爲全不生滅 南方佛性 若爲半生滅半不生滅)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의 불성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아서 몸 밖에 다른 것이 없나니, 그래서 전혀 생멸하지 않느니라. 남방의 불성은 몸이 무상하고 심성은 상주한다고 하니, 그래서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師曰 我之佛性 身心一如 身外無餘 所以全不生滅 南方佛性 身是無常 心性是常 所以半生滅半不生滅也)
나의 견해: 이 몸은 마음과 같이 일여一如하다. 이 마음이 생멸生滅이 없으면, 이 몸도 또한 생멸이 없다. 이 마음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 이 몸도 또한 불생불멸한다. 법신法身은 불생불멸한다. 이 몸이 바로 법신이다.
이 몸을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면, 의식작용은 유정이고, 사대로 된 구성체는 무정이다. 산하대지가 비로자나 전신체이다. 사대로 구성된 이 몸인들 어찌 비로자나 전신체가 아니랴. 신수대사의 신시보리수身是菩堤樹는 이 몸을 법신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6조 혜능대사는 심시보리수心是菩堤樹라 하니, 이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며, 한참 그 격이 떨어진다. 특히 혜능대사의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 종지는 또한 남방불성에 상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정무불종의 종지는 혜능대사의 본의일까? 아니면 신회대사의 가탁일까? 신회대사는 그렇다고 하자. 마조대사의 제자 대주스님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의 몸은 색신인데 어찌 법신과 동일하게 생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進曰 和尙身是色身 豈得便同法身不生滅耶)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사도에 들어가려고 하느냐?”(師曰 汝今那得入邪道乎)
선객이 사뢰었다. “제가 조만간에 사도에 들어가겠습니까?”(禪客曰 某甲早晚入於邪道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나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느니라. 그대가 이미 안색顔色을 바꾸고 나를 보니, 어찌 사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師曰 金剛經曰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汝旣作色見我 豈非入邪道乎)
나의 견해: 여래의 몸을 법신이라 일컫고, 중생의 몸을 육신이라 말한다. 혜충국사는 이 육신을 법신으로 본다. 이는 일승경에 부합하는가? 이에 여래출현품을 인용한다.
“불자여, 여래는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佛身 가운데서 일체 중생이 정각을 성취함을 두루 보시고, 더 나아가 일체 중생이 열반에 들어감을 두루 보시느니라. 모두 함께 일성一性이니, 이른바 무성無性이니라. 어떤 성性이 없는가? 이른바 상성相性이 없고, 진성盡性이 없으며, 생성生性이 없고, 멸성滅性이 없으며, 아성我性이 없고, 비아성非我性이 없으며, 중생성衆生性이 없고, 비중생성非衆生性이 없으며, 보리성菩提性이 없고, 법계성法界性이 없으며, 허공성虛空性이 없고, 또한 다시 성정각성成正覺性도 없느니라. 일체법一切法이 모두 무성이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얻고, 대비大悲로 상속하여 중생을 제도하시느니라.”(佛子 如來成正覺時 於其身中普見一切衆生成正覺 乃至普見一切衆生入涅槃 皆同一性 所謂無性 無何等性 所謂無相性 無盡性 無生性 無滅性 無我性 無非我性 無衆生性 無非衆生性 無菩提性 無法界性 無虛空性 亦復無有成正覺性 知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 大悲相續 救度衆生)
불신은 어째서 중생신과 동일한가? 불신과 중생신이 모두 함께 일성一性이기 때문이고, 이른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다. 중생성衆生性이 없다면 어찌 중생상衆生相인들 있으랴. 중생상衆生相이 없다면 어찌 중생신衆生身인들 있으랴.
그리하여 선객이 절을 올리고 찬탄하며 사뢰었다. “화상의 이러한 설법은 사법事法으로도 극진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이법理法으로도 주도면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제가 만일 화상을 뵙지 못했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습니다.”(於是禪客作禮而嘆曰 和尙此說 事無不盡 理無不周 某甲若不遇和尙 空過一生矣)
나의 견해: 세간에서 말을 잘하는 것에는 시비가 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 말을 잘하는 것은 찬탄할 만하다.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변재는 부처님을 제외하면 문수보살이 으뜸이다. 물론 묘각보살의 지위에 있는 분들이야 그 우열을 가릴 수 없기는 하다. 어떻든 변재로 말하면 유마거사도 빼어놓을 수는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 것이고, 입을 더 이상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결석結舌이라 말하기도 한다. 혜충국사도 또한 변재가 빼어나다. 그 명백한 지혜에 탄복을 금치 못한다.
10. 취죽황화翠竹黃花와 무정풍광無情風光
무정도 불성이 있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최초 근거는 아마도 도생법사道生法師(355~434)가 아닌가 한다. 송조宋朝 목암선경睦庵善卿스님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취죽황화翠竹黃花 편에 있다. 권미卷尾 발문에 의하면 대관大觀 2년(1108)에 출간된 듯하다. 그 중간 7백여 년 동안 단편적으로 전승되었을 뿐이고, 증거로 삼을 만한 문서는 없었던 듯하다.
1) 도생법사의 무정불성과 취죽황화翠竹黃花
조정사원: “도생법사가 말씀하시기를, ‘무정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고, 다시 주장하시기를, ‘푸릇푸릇한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니, 세상에서 믿어주는 극소수가 이르기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증명할 수도 없구나.’라고 했다. 법사가 이에 10년 동안 단정히 앉아 경이 와서 증명해주기를 기다렸다. 뒤에 담무참曇無讖삼장이 열반후분경涅槃後分經을 지니고 왔는데, 과연 이 설說이 있었다. 법사가 열람해 마치고 불자拂子가 바닥에 떨어지자, 안석案席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道生法師說 (無情亦有佛性 尸云 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 世少信者 謂無佛語所證 法師乃端坐十年 待經而證 後三藏帶涅槃後分經至 果有斯說 法師覽畢 麈尾墜地 隱几入滅)
나의 견해: 조정사원 취죽황화의 초두에 “무정도 또한 불성이 있다.”(無情亦有佛性)라는 구절은 “천제도 또한 불성이 있다.”(闡提亦有佛性)라고 수정해야 옳을 듯하다. 시尸자에는 주장하다는 뜻이 있다. 도생법사의 저술이 있다고 하지만 단행본으로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취죽황화의 직접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
불자와 관련하여 이설이 있다. “법사가 원가11년(434) 11월 경자일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라 설법을 마치고, 중인이 보는 앞에서 불자拂子가 어지럽게 바닥에 떨어지자, 법상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元嘉十一年十一月庚子 于廬山升座說法將畢 衆見麈尾紛然墜地 隱几而化) 이상 해설은 동림십팔고현전東林十八高賢傳에 의거한 것이다.
열반경은 소승부와 대승부를 합하여 15종이 있는데, 도생법사는 먼저 6권 본을 보았다. “경에 이르기를, ‘일천제를 제외하고 모두 불성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법사가 이르기를, ‘무릇 품질稟質의 이의二儀는 모두 열반의 정인이 있다. 천제도 중생의 부류인데, 어찌 홀로 불성이 없을 수 있는가? 어쩌면 경의 전래傳來가 미진할 따름이다.’라고 했다.”(經云 除一闡提 皆有佛性 師云 夫稟質二儀 皆有涅槃正因 闡提含生之類 何得獨無佛性 盖是經來未盡耳) 이에 대중의 공분을 사고 쫓겨났으며, 10년을 기다린 이후에 40권 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행품聖行品에 이르기를, ‘일천제인一闡提人이 설령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니, 이때에 스님들이 모두 탄복했다.“(聖行品云 一闡提人 雖復斷善 猶有佛性 於是諸師皆爲媿服)
2) 문수보현의 대인경계
이 무정불성론이 혜충국사(675~775)와 하택신회荷澤神會스님(684∼758)에 이르러 다시 화려하게 무대에 등장한다. 도생법사(355~434) 이후 3백여 년 동안 치열한 찬반논쟁이 있었던 듯하다. 이를 반박한 대표주자 중에 하나가 신회스님과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이고, 긍정하는 이의 선봉장이 또한 혜충국사이다. 차례로 들어보겠다.
선객이 또 물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울울창창鬱鬱蒼蒼한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하지 않고 삿된 말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확신하며 불가사의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又問 古德曰 靑靑翠竹 盡是眞如 鬱鬱黃花 無非般若 有人不許 是邪說 亦有人信 言不可思議 不知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나 소인이 믿고 받을 수 있는 경계는 아니다. 이 모두는 대승요의경大乘了義經의 뜻과 부합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여 두루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지만, 항상 여기 보리좌菩提座에 안좌安坐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 취죽은 이미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또 마하반야경에 말씀하시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심원한 말씀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염두에 두기가 어렵도다.”(師曰 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 非諸凡小而能信受 皆與大乘了義經意合 故華嚴經云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翠竹旣不出於法界 豈非法身乎 又摩訶般若經曰 色無邊故 般若無邊 黃花旣不越於色 豈非般若乎 此深遠之言 不省者難爲措意)
나의 견해: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佛身充滿於法界) “마땅히 알라. 조그만큼 허공에도 불신이 없는 곳이 없느니라.”(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취죽은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법신이 분명하고, 또한 취죽은 허공 안에 있으니 불신이 명백하다.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반야가 분명하다. 반야는 여래지혜如來智慧이고, 여래지혜는 여래심如來心이며, 불심은 법성이고, 법성은 국화이다. “마음 밖에 경계가 없고, 경계 밖에 마음이 없으며, 이 마음은 경계의 마음이고, 경계도 마음의 경계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융합하면, 어찌 반야가 아니랴. 이 때문에 이르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다.’라고 하며, 이 때문에 알지니, 색을 여의면 마음이 없고, 마음을 여의면 색이 없다.”(以無心外境 亦無境外心 以心是境心 境是心境故 如是融鎔 豈非般若乎 所以云色無邊故 般若無邊 故知離色無心 離心無色) 종경록 84권에서 인용했다. 이를 의거하면, 색이 마음이고, 또한 국화가 반야이다.
3) 삼승 권설로 일승 실설을 힐난하다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선종을 말할 때 달마대사를 초조로 삼고,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 6조 혜능대사로 끝마친다. 그런데 이 초조부터 6조라는 명칭이 신회선사 제7조를 시원始原한다. 초조를 먼저 세우고, 차례로 제2조 제3조를 세운 것이 아니며, 최초로 제7조를 세운 다음에 거슬러 제6조부터 초조를 세운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신회스님의 법손인 종밀스님의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에 의하면, “정원貞元 12년(796) 칙령으로 황태자에게 모든 선사를 회집會集하여 선문의 종지를 해정楷定하게 하고, 마침내 신회선사神會禪師를 제7조第七祖로 내세웠다. 신룡사神龍寺 경내에 칙령으로 안치한 비기碑記가 현존하고, 또 덕종이 친히 칠조찬문七祖讚文을 지었는바, 현재 세간에 유행한다.”(貞元十二年 敕皇太子集諸禪師 楷定禪門宗旨 遂立神會禪師爲第七祖 內神龍寺 敕置碑記見在 又御製七祖讚文 見行於世)라는 명문明文이 있다. 해정楷定은 시비를 결정하고 후세에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다.(楷定則意謂決定是非 以爲後世楷模之義)
지금은 개명시대開明時代이다. 새벽녘에 동트고 햇빛이 비치면 만상이 밝게 드러난다. 하나도 감출 곳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조단경은 신회스님을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폄하한다. 이도 또한 적반하장이다. 선종의 기반을 조정과 재야에 확고하게 다진 선사가 첫째 신수국사이고, 둘째 신회대사이며, 셋째 혜충국사이기 때문이다. 정사正邪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가 있는 학자라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하택신회선사어록荷澤神會禪師語錄에 있는 글을 인용하겠다. 우두산牛頭山 원선사袁禪師가 질문하고 신회스님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우두산 원선사가 질문했다. “불성이 일체 처소에 두루 미칩니까?”(牛頭山袁禪師問 佛性遍一切處否)
신회스님이 대답했다. “불성은 일체 유정에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습니다.”(答曰 佛性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나의 견해: “불성은 유정에 두루 미치고,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 신회스님의 이 견해는 어떠한가?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니, 일체 초목은 성도成道하거나 법륜法輪 등을 굴릴 수 없다.”(有情有佛性 無情無佛性 一切草木不能成道轉法輪等) 이를 화신불化身佛의 권교權教라 한다. 만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면,”(佛身充滿於法界) 어찌 불성인들 법계에 충만하지 않으랴. 또한 어찌 법계에 유정만 있고, 무정은 없으랴. 유정과 무정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으니, 또한 불성은 유정에도 무정에도 두루 미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조그만큼 허공에도 불신이 없는 곳이 없느니라.”(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불성도 또한 그러하다.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은 제불경계이니, 성문이나 연각은 알 바가 아니니라.”(善男子 衆生佛性諸佛境界 非是聲聞緣覺所知) 제불의 경계는 일체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선배 대덕스님들이 모두 이야기하기를,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는데, 지금 선사는 어떤 연고로 ‘불성은 단지 일체 유정에만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까?”(問曰 先輩大德皆言道 青青翠竹盡是法 鬱鬱黃花無非般若 今禪師何故言道 佛性獨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나의 견해: 신회스님이 취죽법신 황화반야의 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바로 불성은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삼승 권설이다. 삼승 권설로 어찌 일승 실설을 힐난할 수 있으랴. 어불성설이고, 언어도단이다. 이 언어도단은 세간의 통설을 빌린 것이다.
“어찌 푸릇푸릇한 취죽이 공덕법신功德法身과 동일하며, 어찌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가 반야의 지덕智德과 동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청죽青竹과 국화가 법신이나 반야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는 곧 외도의 설입니다. 여래가 어느 경에서 청죽과 국화가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았다고 설했습니까? 열반경에 구체적으로 명문이 있는 바,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答曰 豈將青青翠竹同於功德法身 豈將鬱鬱黃花等般若之智 若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如來於何經中 說與青竹黃花授菩提記 若是將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此即外道說也 何以故 涅槃經云 具有明文 無佛性者 所渭無情物是也)
나의 견해: 무정의 수기 여부는 위에서 혜충국사가 천명했다. 이에 해설을 생략한다. 공덕법신功德法身은 다섯 가지 불신佛身 중에 하나로, 만행의 공덕으로 성취한 불신이니, 보신이다. 일체 제법을 관찰하는 제불의 지혜를 지덕智德이라 한다. 취죽은 진여이고 국화는 반야이다. 신회스님은 이 견해를 반박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취죽과 국화는 무정물이고, 열반경에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는 법문을 근거로 내세운다.
신회스님이 열반경에서 인용한,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라는 말의 출처는 어디인가? 대반열반경 37권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이르기를, “불성이 아닌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 무정물이며, 이와 같은 등 무정물을 여의면 이를 불성이라 일컫는다.”(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라고 한다. 신회스님은 열반경을 인용하되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인용했다. “불성이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非佛性者 所渭無情物)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 양자의 의지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무정물은 불성이 아니라고 하면 그 이웃사촌은 될 개연성蓋然性은 있다. 그러나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고 단정하면 다시는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다. 열반경 경문은 위에서 설명했다.
신회스님은 6조 혜능대사의 전법제자 중에 일인一人이고, 혜충국사와 함께 조정과 재야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렇지만 “불성은 일체 유정에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佛性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라는 견해는 삼승 권설을 벗어날 수 없고, 이는 또한 혜능대사의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라는 종지를 충실하게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4)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여, 면면무절기綿綿無絶期로다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은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생몰연대는 알지 못한다. 마조도일선사어록馬祖道一禪師語錄에 초참문답初參問答이 있다. 아래와 같다.
대주스님이 처음 마조스님을 참방參訪하자, 마조스님이 물으셨다.(大珠初參祖 祖問曰)
“어디서 왔는가?”(從何處來)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曰越州大雲寺來)
“여기에 와서 어떤 일을 구하려 하는가?”(祖曰 來此 擬須何事)
“불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曰來求佛法)
“자기 집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려두고 사방으로 치달리니, 무슨 짓을 하는가? 나의 이곳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한단 말인가?”(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 作什麼 我這裏一物也無 求甚麼佛法)
대주스님은 드디어 절하고 물었다.(珠遂禮拜問曰)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 보물창고입니까?”(阿那個 是慧海自家寶藏)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니라. 그대의 보물창고는 일체를 구족하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운용運用이 자재하거늘,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祖曰 即今問我者是 汝寶藏一切具足 更無欠少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대주스님은 언하言下에 친히 본심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알았다. 환희용약하며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珠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踴躍禮謝)
6년 동안 사사師事한 다음 월주로 돌아가서 친히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 1권을 찬술했다. 마조스님이 이 책을 보고 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師事六載後歸 自撰頓悟入道要門論一卷 祖見之 告衆云)
“월주에 대주大珠가 원명圓明하고, 광명을 놓아 자재하며, 가려져 막힌 곳이 없구나.”(越州有大珠圓明 光透自在 無遮障處也)
나의 견해: 나개那個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말한다. 옥나개阿那個의 옥阿은 조사이다.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니라.”(即今問我者是)
한 문장을 여기서 끊는다. 바둑은 수가 보이는 대로 둔다. 글도 보이는 대로 끊어 읽는다. 법거량法擧揚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붙을 곳이 없다.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느냐?”(欲識佛去處)
“단지 이 말하는 소리뿐이니라.”(只這語聲是)
자시者是와 성시聲是의 시是자는 그 용법이 동일하다. 촌보寸步도 떨어져 있지 않다. 묻는 그놈이고, 말하는 소리이다. “당처를 여의지 않고 언제나 담연湛然하다. 찾으면 바로 알지니, 그대는 볼 수 없느니라.”(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본체를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어도 장님이나 다름없다. 제1구를 수용하지 못하니, 부득이 제2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에 연이어 그 묘용을 파설한다.
“그대의 보물창고는 일체를 구족하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운용運用이 자재하거늘,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본심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는다.” 지각知覺은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육식의 작용이다. 본심은 근본이고, 지각은 지말枝末이다. 지말은 근본을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찌 근본이 지말을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으랴. 본말의 차서가 그러하다.
“본심은 지각을 말미암지 않는다.” 이 경계는 어떠한가?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라는 힐난詰難에 대한 수응隨應이다.
6년 동안 사사師事했다면 남음이 없이 탁마상성琢磨相成했을 것이다. 마조스님의 찬탄은 제자 대주스님과 그의 저서 돈오입도요문론을 함께 기리는 것이다.
“월주에 대주大珠가 원명圓明하고, 광명을 놓아 자재하며, 가려져 막힌 곳이 없구나.”(越州有大珠圓明 光透自在 無遮障處) 통상 “월주에 대주가 있다.”라고 번역한다. 또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 그대의 보물창고이다.”(即今問我者是汝寶藏)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면 뜻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이 문장의 주어는 대주이기 때문이다. 이 유有자는 “보통명사나 고유명사 또는 형용사 앞에 놓여 이음절어를 구성하며, 번역할 필요는 없다,”라는 용법과 같이, 보통명사 명주 앞에 놓인 조사이다. 조사로 보고 해석해야 비로소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구 대주원명大珠圓明은 체體로 보고, 제2구 광투자재光透自在는 용用으로 보며, 제3구 무차장처無遮障處는 상相으로 볼 수도 있다. 말구는 통연명백洞然明白으로 보아도 또한 좋다.
대주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 무정법문과 관련하여 두 편의 글이 있다. 먼저 온광대덕과 문답이 있고, 다음 화엄좌주와 문답이 있다. 아래와 같다.
온광대덕韞光大德이 물었다. “선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아십니까?”(有韞光大德問 禪師自知生處否)
대주대사가 대답했다. “일찍이 죽은 적이 없는데 어찌 출생을 상론할 필요가 있습니까? 생멸을 안다면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는데, 말하기를 생사가 있다 없다고들 합니다. 마조대사가 이르기를, ‘당금當今 출생出生해도 곧 불생不生이다’(當生即不生)라고 하셨습니다.”(師曰 未曾死何用論生 知生即是無生法 無離生法 說有無生 祖師云 當生即不生)
나의 견해: 온광스님이 생사의 근원을 묻는다. 대주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다고 답한다. 유정의 생로병사나 무정의 생주이멸이 다르지 않다. 생사가 바로 생멸이다. 생을 안다 또는 생멸을 안다는 것은 생멸을 멀리 여의었다는 생멸멸이生滅滅已를 말한다. 생멸은 일체 세간의 대대경계待對境界이다. 이에 반하여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절대경계이다. 이 세계는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다. 이 도리를 모르는 이들이 설왕설래하며 생사의 유무를 가지고 힐난한다.
마조대사의 4구게 중에 결구만 인용한 바, 전체를 이른다면 아래와 같다.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시니,
보리법문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사사와 이사가 모두 무애하니,
당금 출생해도 바로 불생이니라.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礙 當生即不生
수시隨時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시세에 순응하다, 시의에 부합하다, 둘째, 어느 때나, 하시를 불문하고, 셋째, 시속을 따라 등이다. 만일 심지법문이 화엄법문이라면 상설常說이 될 것이다. 지녕只寧은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해석한다. 녕寧은 여시如是와 같다.
심지함종心地含種이란 말이 있다. 심지心地가 불종佛種을 함축하고 있다. “법달아, 나는 항상 원하노라. 일체 세인世人의 심지로 언제나 친히 불지견佛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지니라.”(法達 吾常願 一切世人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生知見) 이 심지는 중생의 심지이다. 경문에 “시방 여래의 최고 수승한 비밀의 심지법문”(十方如來最勝祕密心地法門)이란 말이 있고, 불심지佛心地란 말도 있다. 이 심지는 제불의 심지이다. 중생의 심지는 사의思議할 수 있고, 제불의 심지는 사의할 수 없다.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식識이고,(有分別是識)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지혜(無分別是智)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심지법문도 또한 양분兩分할 수 있다. 심지법문은 중생의 심지로 보면 수타의어이고, 여래의 심지로 보면 수자의어이다. 보리법문은 실설로 수자의어이다. 이에 마대사의 심지를 중생의 심지로 보고 해석한다.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시니, 보리법문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사사와 이사가 모두 무애하니, 당금 출생해도 바로 불생이니라.”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면 보리법문이 되는 것이고, 보리법문도 또한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면 심지법문이 되는 법이다. 권설이라 실설이라 단정하지 말라. 단정하면 막히고, 자재하면 융통하여 사사가 무애한다. 이 경계에 어찌 출생과 불생에 분별이 있으랴.
“자성을 보지 못한 이도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曰不見性人亦得如此否)
“스스로 자성을 보지 못한 것이고,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보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이 없으면 볼 수 없고, 아는 것이 바로 자성이기 때문에 자성을 안다고 말하며, 깨닫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을 통달한다고 이르고, 만법을 출생할 수 있어서 법성이라 부르며, 또한 법신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마명조사가 이르기를, ‘이른바 법이란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라고 하시니, 만일 마음이 생기면 이 때문에 일체 법이 생기고, 만일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일체 법도 생기는 곳이 없으며, 또한 명칭도 없습니다. 미인迷人은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줄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큰소리칩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수록收錄할 만하겠습니까? 대면對面하고 진불眞佛을 미혹하여 장겁을 희구하며, 모두 체법體法 가운데서 미혹하여 밖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이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달은 이는 종횡으로 자재해도 이 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師曰 自不見性不是無性 何以故 見即是性無性不能見 識即是性故名識性 了即是性喚作了性 能生萬法喚作法性 亦名法身 馬鳴祖師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若心生故一切法生 若心無生法無從生 亦無名字 迷人不知法身無象應物現形 遂喚青青翠竹總是法身欝欝黃華無非般若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法身即同草木 如人喫筍 應總喫法身也 如此之言寧堪齒錄 對面迷佛長劫希求 全體法中迷而外覓 是以解道者行住坐臥無非是道 悟法者縱橫自在無非是法)
나의 견해: 원문 “미인迷人은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줄을 알지 못한다.”(迷人不知法身無象應物現形)
1차 요약: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룬다.”
2차 요약: “법신이 무정에 응하여 형상을 이룬다.”
나의 결론: “법신이 취죽에 응하여 취죽이란 형상을 이루고, 법신이 황화에 응하여 황화란 형상을 이룬다. 그러나 취죽과 황화는 여전히 무정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취죽과 황화는 법성만 있고, 불성은 없다. 이 법신은 불성이 아니고, 법성이다.” 이는 또한 신회스님의 견해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마침내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큰소리친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큰소리치는 이의 허물인가? 큰소리친다고 말한 이의 허물인가?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다.” 육조대사의 무정무불종 종지는 대주스님까지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이다.”
“일체 대지가 이미 불신佛身이라면 일체 중생이 불신 위에서 생활하며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히고, 또 구멍을 뚫으며 불신을 짓밟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客曰 一切大地旣是佛身 一切衆生居佛身上 便利穢汙佛身 穿鑿踐踏佛身 豈無罪乎)
“일체 중생은 전체가 불신인데, 누가 죄가 되겠느냐?”(師曰 一切衆生全是佛身 誰爲罪乎)
사람이 죽순법신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중생불신이 대지불신 위에서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힌들 무슨 죄가 되느냐? 대주스님과 혜충국사의 견해는 명확히 엇갈린다. 천지현격이다.
“대면對面하고 진불眞佛을 미혹하여 장겁을 희구한다.” 대면하고 진불을 미혹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타인을 걱정할 형편이 아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함이 또한 옳다.
“모두 체법體法 가운데서 미혹하여 밖에서 찾는다.” 반야경의 핵심은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니니, 색이 바로 공이다. 색을 멸진한 공이 아니고, 색성色性 자체가 공하다.”(色空爲二 色即是空 非色滅空 色性自空) 만사萬事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니, 만법萬法은 자성이 없다. 석법析法을 의거하지 않고, 이 색법色法 자체가 공적空寂함을 통달하니, 이를 체법體法이라 말한다. 만사나 만법 색 색법 등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이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달은 이는 종횡으로 자재해도 이 법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도’를 가지고 아승지겁을 수행해도 불지를 수용할 수는 없다. 이 누구의 허물인가? 그 근원이 어디인가?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화엄경을 강의하던 지좌주志座主가 질문했다. “선사는 무슨 연고로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구절을 수긍하지 않습니까?”(講華嚴志座主問 禪師何故不許 青青翠竹盡是法身 欝欝黃華無非般若)
대주화상이 대답했다. “법신은 무형무상無形無象하니 취죽에 수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것이고, 반야는 무지무상無知無相하니 국화에 대응하여 형상을 드러낸 것이며, 저 국화와 취죽은 반야나 법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진법신眞法身이 마치 허공과 같고, 중생에 수응하여 신형身形을 나투심이 물속에 달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취죽도 또한 묘용에 수응할 수 있습니다. 좌주는 알겠습니까?”(師曰 法身無象應翠竹以成形 般若無知對黃華而顯相 非彼黃華翠竹而有般若法身 故經云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翠竹還能應用 座主會麼)
“이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曰不了此意)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습니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습니다. 만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취죽을 말하면 취죽에 집착하고, 국화를 말하면 국화에 집착하며, 법신을 말하면 법신에 집착하고, 반야를 말하면 반야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논쟁을 이룰 뿐입니다.”(師曰 若見性人 道是亦得 道不是亦得 隨用而說 不滯是非 若不見性人說翠竹著翠竹 說黃華著黃華 說法身滯法身 說般若不識般若 所以皆成爭論)
지좌주가 절하고 물러서서 나갔다.(志禮謝而去)
나의 견해: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는다.” 이는 이사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명언이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주스님의 견해가 투철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천지는 장구하지만 다할 때가 있으리라. 이 한은 면면하여 끊어질 기약이 없을지니.”(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이를 차용하여 위 소제목을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여, 면면무절기綿綿無絶期로다’라고 명명했다.
5)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의 사자상전師資相傳 여부
육조스님의 법보기 중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에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란 문구가 있다. 이를 자세히 구명해보고자 한다. 성상性相을 여의고서는 단 일구도 설법할 수 없다. 동정動靜도 성상 중에 하나이다. 이 동정을 진가眞假로 수식하면 진동眞動 진정眞靜과 가동假動이 가정假靜의 4개 조합이 생길 수 았다. 동정動靜 중에 후자 정靜을 부동不動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하면 진동 진부동眞不動과 가동이 가부동假不動이 된다. 진동과 진부동은 보살행이고 여래행이며, 가동과 가부동은 범부와 이승의 행이다. 그 게송은 아래와 같다.
유정有情은 곧 동행動行을 알지만,
무정無情은 바로 부동행不動行이로다.
만일 유정이 부동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부동행과 같아지느니라.
有情即解動 無情即不動 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만일 진실한 부동행을 찾고자 하면,
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느니라.
부동행은 바로 부동행이라,
무정은 불종佛種이 없느니라.
若覓眞不動 動上有不動 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게송이다. 복행福行과 죄행罪行 그리고 부동행을 삼행三行이라 한다. 십선 등 복행을 닦으면 욕계 중에 인천의 과보를 받고, 죄행을 저지르면 욕계 중에 삼악도의 과보를 받으며, 부동행 또는 무동행無動行 곧 유루有漏의 선정을 닦으면 색계나 무색계의 과보를 받는다. 부동행과 상응하여 복행과 죄행을 동행이라 한다. 이는 유루의 동행과 부동행이니, 곧 범부행凡夫行이고 이승행二乘行이다. 또 하나의 동행과 부동행이 있다. 바로 무루無漏의 동행과 부동행이니, 바로 보살행菩薩行이고 여래행如來行이다.
“유정有情은 곧 동행動行을 알지만, 무정無情은 바로 부동행不動行이로다.”(有情即解動 無情即不動) 동행은 둘이 있다. 하나는 몸의 동행이니,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다. 둘은 마음의 동행 곧 심행心行이니, 일체 의식의 작용이다. 유정은 의식작용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경계를 상대하여 견문후상각지見聞嗅嘗覺知할 줄 안다. 그러나 무정은 의식작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육경에 대하여 동행하지 않는다.
“만일 유정이 부동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부동행과 같아지느니라.”(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부동행은 수행이다. 제법이 부동하여 적정하다. 이것이 무정의 부동행이다. 유정은 성문사과의 계위를 올라가며 부동행을 닦는다. 노자도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내가 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명제冥諦를 좋아하여 지도至道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수다원 행인行人은 8만겁, 사다함 행인은 6만겁, 아나함 행인은 4만겁, 아라한 행인은 2만겁, 벽지불 행인은 1만겁을 선정에 머무르고, 외도도 또한 8만 대겁을 비상비비상천에 머문다. 이것이 모두 부동행이다.
“만일 진실한 부동행을 찾고자 하면, 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느니라.”(若覓眞不動 動上有不動) 진실한 부동행은 보살행이고, 불행佛行이다. 보살의 수행은 동행 중에 부동행이 있고, 부동행 중에 동행이 있다.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 성성하다. 곧 성적惺寂이 등지等持하고, 적조寂照가 쌍류雙流한다. 상주부동常住不動한다.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러 세간의 제상이 상주한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열반적정涅槃寂靜 무위안락無爲安樂이 또한 부동행이고, 불행이다.
“부동행은 바로 부동행이라, 무정은 불종佛種이 없느니라.”(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 동행 가운데 동행이 있으면 호사난상胡思亂想이다. 부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으면 바로 무기無記이다. 이 때문에 무정은 불종이 없느니라.
“너희들은 모두 좌정坐定하시라. 내가 너희들에게 몇 수의 게송을 주노니, 이름을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라 한다. 너희들이 이 게송을 암송하고, 나와 더불어 그 게의偈意를 함께하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그 종지宗旨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汝等盡坐 吾與汝等一偈 名曰 眞假動靜偈 汝等誦取此偈 與吾意同 依此修行 不失宗旨) 육조대사가 임종을 앞두고 하신 법문이다. 이 때문에 육조대사의 수타의어로 보기도 어렵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은 일승 실설이 아니고, 삼승 권설이다. 이 무정무불종의 종지는 달마대사 이후 대대로 사자상전師資相傳한 것일까? 아니면 육조대사 전유專有일까? 그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능가사자기 중에 4조 도신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고, 여기에 매우 중대한 법문이 하나가 있다. 또 6조 혜능대사의 법보기에 5조 홍인대사의 전법게도 있다.
해석 1: “열반경에 이르기를,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라고 했는데, 어찌 장벽와석이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없다면) 어떻게 설법할 수 있으랴.”(涅槃經云 一切衆生有佛性 容可說牆壁瓦石而非佛性 云何能說法)
해석 2: “열반경에 이르기를,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라고 했으니, 어쩌면 장벽와석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설법할 수 있으랴.”(涅槃經云 一切衆生有佛性 容可說牆壁瓦石 而非佛性 云何能說法)
위와 같이 문단의 띄어쓰기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모두 무정도 불성이 있다는 쪽에 방점을 찍었다. 하나를 간택한다면 아래 해석을 취한다. 6조 혜능대사는 명백하게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라 말하고 있다. 무정은 불종이 없다, 부처 종자가 없다, 불성이 없다. 모두 같은 뜻이다. 만일 4조 도신대사는 무정은 불성이 있다고 했다면, 사자상전師資相傳하는 그 법맥이 어떻게 될까? 이를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까?
법보기에 있는 5조 홍인대사의 게송이다. 앞 게송은 돈황본에 있고, 뒤 게송은 통용본에 있다. 제2구는 완전히 다르고, 제4구도 그 차이가 적지 않다.
유정有情이 종자를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바로 피어내도다.
무정이 다시 종자가 없다면,
심지心地에 또한 피어날 수 없도다.
有情來下種 無情花即生 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유정이 종자를 뿌리니,
땅을 인하여 열매가 다시 열리도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무성無性이라 또한 결실할 수 없도다.
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既無種 無性亦無生
래來자는 어기사로 구체적인 뜻은 없다. 구 가운데 쓰여 음절을 완전히 채우거나 어기를 느슨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첫째 돈황본 게송의 제3구를 가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확정으로 볼 것인가? 이에 대한 결정권은 제2구에 있다. “유정有情이 종자를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바로 피어내도다.”(有情來下種 無情花即生) 씨앗의 종자는 무정이고 유정은 아니다. 비유이다. 무정이 유정과 상응한다. 유정이 부처종자가 있다면 무정도 또한 부처종자가 있다. 만일 “무정이 다시 종자가 없다면, 심지心地에 또한 피어날 수 없도다.”(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무정이 불성이 없다면 성불할 수 없다. 이사가 부합한다. 제3구를 “무정은 다시 종자가 없다.”라고 단언하면, 제1구와 제2구를 상반되게 해석해야 한다. 한번 상반되게 해석해 보시라.
둘째 통용본 게송이다. “유정이 종자를 뿌리니, 땅을 인하여 열매가 다시 열리도다.”(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이는 더 논란할 것 없이 바로 유정 성불이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무성無性이라 또한 결실할 수 없도다.”(無情既無種 無性亦無生) 이는 단적으로 진가동정게 중에 무정무불종과 그 취지가 동일하다.
만일 5조 홍인대사의 전법게를 정본으로 돈황본을 취하면, 홍인대사가 무정성불의 취지를 수용하는 것이고, 통용본을 취하면 무정무불종의 종지를 사자상전師資相傳하는 것이 된다. 나는 전자를 취한다.
6) 무정법문의 종초지말從初至末이 모두 불설佛說이다
“또다시 불자여, 비유하면 대해에 그 물이 사천하四天下의 땅속과 80억의 모든 작은 섬 속에 잠류潛流하니, 구멍을 뚫는 이는 모두 물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저 대해는 ‘내가 물을 내보냈다.’라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불지佛智의 해수海水도 또한 이와 같이 일체중생의 심중心中에 유입流入되느니라. 만일 모든 중생이 경계를 관찰하고 법문을 수습修習하면, 바로 지혜가 청정하고 명료明了해지지만, 여래 지혜는 평등무이平等無二하여 분별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의 품류品類를 따라 심행心行이 다르기 때문에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심의 셋째 심상心相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알지니라.”(“復次 佛子 譬如大海其水潛流四天下地及八十億諸小洲中 有穿鑿者無不得水 而彼大海不作分別 ‘我出於水’ 佛智海水亦復如是 流入一切衆生心中 若諸衆生觀察境界修習法門 則得智慧清淨明了 而如來智平等無二無有分別 但隨衆生心行異故 所得智慧各各不同 佛子 是爲如來心第三相 諸菩薩摩訶薩應如是知”)
범부의 입장에서 보면 견성見性이란 진실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도 또한 그러하다. 달마대사가 동토로 와서 선종을 개창한 뒤 2조 혜가대사와 3조 승찬대사는 은둔 수행에 전념했지만, 4조 도신대사 이후 산문을 열고 대중교화에 힘쓰셨다. 이에 전법제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무정불성에 대하여 4조와 6조의 견해가 다르고,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돈점 논란이 두드려졌으며, 6조의 문하에 혜충국사와 신회스님의 무정관無情觀이 현저히 다르다. 또한 6조의 무정무불종 종지가 4세 법손 대주스님까지 전승되었지만, 당말 송조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가 끊어졌다. 이 논란을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는가? 이 때문에 위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인용한 것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경계를 관찰하고 법문을 수습하면, 바로 지혜가 청정하고 명료明了해지지만, 여래 지혜는 평등무이하여 분별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의 품류를 따라 심행心行이 다르기 때문에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느니라.” 이 화엄경의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다’라는 말씀을 인정하면 논란은 간단히 끝난다. 이를 인정하겠는가? 아니면 삽삼조사의 전법은 부처님의 심인을 밀전密傳했기 때문에 전혀 다를 수 없다고 주장하겠는가?
이에 나는 또 하나의 방패를 준비했다. 연수스님의 종경록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때문에 알지니, 지혜는 있지만 다문多聞이 없거나, 다문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이는 모두 실상을 통달하지 못하고, 다문과 지혜를 구족해야 심원心原을 있는 그대로 보느니라.”(故知有智慧無多聞 有多聞無智慧 俱不達實相 聞慧具足眞見心原)
이를 의거하면, 4조 도신대사와 혜충국사는 다문과 지혜를 구족했다고 말할 수 있고, 6조 혜능대사와 신회스님 그리고 대주스님 등은 다문과 지혜를 구족하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문의 판단 기준은 화엄경의 파지把持 여부로 결정한다.
무정은 차치하고, 유정도 또한 불성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끝이 없다. 하물며 무정이랴. 유정의 불성 유무도 부처님의 설법에 근원하고, 무정의 불성 유무도 또한 부처님의 법문에 시원始原한다. 무정법문의 종초지말從初至末이 모두 부처님의 설법에 있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부처님이 병을 주고 약을 주신 것은 아니다. 중생의 병이 갖가지라 처방도 또한 그에 상응할 따름이다. 갖가지 불성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 그리고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이다. 이 삼어三語를 알면 일체 논란이 그 자리에서 바로 쉬고, 이를 모르면 면면히 이어져서 그 끝이 없을 것이다.
11. 무정설법의 선가수용禪家收容과 그 폐단弊端
무정설법은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며, 일체 공안의 귀결처歸結處이다. 이와 같은 무정설법의 선가수용禪家收容은 그 시원을 명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일단 인도를 제외하면 도생법사의 취죽황화가 시원에 상당할 것이다. 취죽황화의 그 지취를 선가에서 널리 휘날린 이가 바로 혜충국사이다. 이후 당말과 송조에 이르러 만개했다.
1) 무정설법의 문답 사례
사례 1: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나의 견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선가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좌는 이 판치생모를 들고 참선할 수 있다. 부처님은 금불今佛도 있고, 내불來佛도 있으며, 또한 고불古佛도 있다.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이냐?”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
이 조약돌을 화두로 삼고 참구할 수도 있다. “어째서 고불심을 조약돌이라 말했을까?”
사례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석두화상石頭和尙이 답변했다. “노주露柱에게 물어보라.”(師曰 問取露柱去)
나의 견해: 노주露柱는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기둥’(露在外面之柱)이라는 뜻이다. 보통 법당이나 불전佛殿 앞에 있는 원주圓柱를 말한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다. 곧 “나의 본신本身이 이 동토東土에 온 것은 불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이에 조사서래의는 ‘불법의 적실한 대의’(佛法的的大意)와 그 뜻이 같고, 또한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와도 그 뜻이 동일하다. 이 때문에 광의로 해석하면, 확연무성廓然無聖이나 문취노주問取露柱도 그 낙처落處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례 3: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조주화상이 답변했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師云 庭前柏樹子)
나의 견해: ‘뜰 앞에 잣나무니라’라는 화두는 용장龍藏에도 없다고 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화두 또는 공안을 성문이나 벽지불 또는 삼현이나 십성은 필요하지 않는다. 공안이 일승 실설보다 존귀하여 용장에 없는 것이 아니고, 현성의 분상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이 공안 수행법이 부처님의 수행 법문보다 수승하다면, 조사의 지혜가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말세 근기가 지극히 하열한 학자한테만 필요하다. 말세 학자는 번뇌 망상이 치열하다. 이 처방전이 바로 공안 수행법이다.
사례 4: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수룡睡龍스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에게 맡겼는데, 고불의 마음을 묻지 않는구나.”(我委你 不問古佛心)
나의 견해: 내가 그대에게 고불의 마음을 맡겨두었는데, 어째서 묻는 당처에 있는 그 고불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고, 달리 먼 곳에 있는 고불의 마음을 묻느냐?
사례 5: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면전에 드러내주어도 유由는 알지 못하는구나. 부처를 묻는 사람한테 어찌 고불심을 맡길 수 있을까?”(覿面相呈由不識 問佛之人焉能委)
나의 견해: 유由는 자로子路를 말한다. 출처는 순자荀子 유화편宥坐篇에 있다. “유는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너한테 일러주마. 얘야, 이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등용되더냐? 왕자 비간은 심장을 가르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孔子曰 由不識 吾語女 女以知者爲必用邪 王子比干不見剖心乎)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 이야기를 할 수 없다.(痴人面前 不得說夢)
사례 6: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보봉寶峰스님이 말씀하셨다. “마침내 흙과 나무 기와 조약돌이라 말씀하지 않았던가?”(終不道土木瓦礫是)
또 자복資福스님이 말씀하셨다. “산하대지니라.”(山河大地)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흥평興平스님이 말씀하셨다.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卽汝心是)
“비록 그러하다고 할지라도, 또한 제가 묻는 곳은 아닙니다.”(雖然如此 猶未是某甲問處)
“만일 그러하다면 목인木人에게 물어보라.”(若與摩 問取木人去)
나의 견해: 국사의 말씀처럼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도 고불의 마음이고, 질문하는 선객의 마음도 또한 고불의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본래 구족한 청정진여심淸淨眞如心도 또한 고불의 마음일 것이다.
사례 7: 앙산스님이 누워계시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師臥次 僧問云)
“법신도 설법할 줄 압니까? 알지 못합니까?”(法身還解說法也無)
“나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있다.”(我說不得 別有一人說得)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說得底人在甚麼處)
스님은 목침을 내밀었다.(師推出枕子)
나의 견해: 목침은 어떤 사람의 분수가 있을까? 또 어떤 법신을 물었을까? 무정법문이 당말唐末과 송조宋朝에 이르러서는 선가에 일상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보고 말하는 것과 알고 말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무정설법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의 대인경계라야 들을 수 있는데, 당송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사는 무정법문이 일상사가 되어 입에 달고 산다. 어쩌면 신회스님과 대주스님이 후대 선사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2) 조사교祖師敎의 출현과 쇠퇴
“모든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일미一味로 귀착歸着하는데, 이 일미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일심一心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뜰 앞에 잣나무니라’라는 화두는 용장龍藏 처소에도 저본底本이 여전히 없다고 이른 것이다.”(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나의 견해: 선가에서 보면 위 말씀은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만일 교가에서 보면 어떠한가? 이 경우에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이 없다. 이사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전자는 곡설曲說이고, 후자는 직설直說이며, 전자는 수타의어隨他意語 또는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이고, 후자는 수자의어隨自意語이며, 전자는 권설이고, 후자는 실설이며, 또 전자는 일미로 귀착하고, 후자는 일심을 드러낸다는 주장이다. 일미一味와 일심一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 무미無味와 무심無心도 다른가? 이는 불교의 선종이 아니고, 조사교祖師敎이다. 조사교의 주장은 일승 실교법문 일체를 선문으로 삼고, 삼승 권교법문을 교문으로 한정하며, 여래선 위에 조사선이 있고, 선문이 교문보다 더 수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조사교의 시조로 진귀조사를 내세우기도 한다.
부처님은 세칭 활 같은 설법으로 불찰미진수 보살을 교화했다. 그 지위가 모두 십지보살 이상이다. 조사는 활줄 같은 법문으로 교화한 보살의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설자說者와 청자聽者의 지위가 전혀 다르다. 이보다 더한 적반하장이 있는가? 서가 세존이 입멸한 이후 어떤 조사가 성불했는가? 누구인가? 마명보살도 제이의 부처라 경칭敬稱하고, 용수보살도 또한 제이의 서가라 존칭하지만, 능가경에 의하면 환희지보살로 기재되었고, 무착보살도 초지보살이라 전해 내려올 따름이다. 이 밖에 삼현보살의 지위에 올랐다는 스님들이 더러 있다. 세칭 조사라는 분들도 초지보살 이상은 없는데, 그 밑에서 수학한 이들이 어찌 불찰미진수 십지보살에 상당하랴.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성불이 묘각위를 증득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언어의 유희이다. 그래도 또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여래선 위에 조사선이 있느니라. 가비가통이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있느니라.”(州云 有)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가죽포대를 치고 들어갔습니까?”(僧云 旣有 爲甚麽卻撞入這箇皮袋)
“그이를 위하여 알지만 짐짓 범했느니라.”(州云 爲他知而故犯)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又有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없느니라.”(州曰 無)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데, 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없습니까?”(僧云 一切衆生皆有佛性 狗子爲什麽卻無)
“그이를 위하여 업식業識이 있구나.”(州云 爲伊有業識在)
나의 견해: 수행인이 불성의 유무를 묻는 것은 신심을 확립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불성을 묻는 것은 불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불성을 철견徹見한 수행자라면 구태여 타인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조주스님을 고불이라 한다. 그 출처는 설봉스님이다. 이백의 시에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있고, 또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도 있다. 이 고불이 딱 그러하다. 내가 조주스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스님의 문손이 스승을 추앙하고자 칠지보살이라 덕칭德稱했는데, 후인이 이르기를 대혜스님은 칠지보살이 아니고 불지보살이라 말한다. 조사교의 문손이 이와 같다. 이는 또한 조사교의 폐단이 아니랴.
12. 결어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은 그 시원始原을 도생법사道生法師의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라는 취죽황화翠竹黃花로 상정想定할 수 있다. 이를 법거량法擧揚 곧 문답의 양식을 빌려서 정리한다.
“어떤 것이 진여법신眞如法身이냐?”(如何是眞如法身)
“취죽翠竹이니라.”
“어떤 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이냐?”(如何是實相般若)
“황화黃花이니라.”
이 취죽황화라는 무정설법은 전적으로 교종의 문제이고, 그 원조元祖는 도생법사이다. 혜충국사는 취죽황화의 무정설법을 절대 긍정하며, 또다시 장벽와력廧壁瓦礫이라는 무정설법을 제시한다. 이에 혜충국사는 화엄의 무정설법을 맨 처음 선문으로 수용한 또 하나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입니까?”(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師曰 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도생법사(355~434)는 혜충국사(675~775)와 출생년도로 비교하면 320년의 차이가 난다. 도생법사가 취죽과 황화라는 무정설법을 제창한 이후 3백여 년 동안 무수한 고승들 사이에 찬탄과 힐난詰難이 동시에 교차했다. 동진東晉 의희義熙14년(418)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삼장이 60권 화엄경을 번역했고 보면, 화엄경을 공부한 일승학인은 찬탄했을 것이고, 삼승교설을 국집한 학승들은 힐난에 동참했을 것이다.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 그리고 고불의 마음이 또한 불성과 다를 것이 없다. 이 글의 제명이 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이다. 취죽과 황화 그리고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은 모두 무정이지만, 또한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도 되고, 그리고 다시 고불의 마음도 된다. 이 무정설법은 “일체 법이 모두 무성인 줄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는다.”(知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 라고 하는 무성법문無性法門과 함께 지고무상의 법문이다. 혜충국사의 논법을 빌리면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의 경지라야 비로소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어떻든 달마 7세손 혜충국사가 선양한 이후 8세손 석두스님을 위시하여 10세손 위산스님 운암스님이나 11세손 동산스님 등은 무정설법을 선문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선가의 제사諸師가 수용한 무정설법은 달마대사가 상전한 선문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가 도생법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상전한 선문이다. 이에 나는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을 남양선南陽禪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화엄선華嚴禪이라 말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공안선을 굳이 화엄선이라 정의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당말과 송조에 이르러서는 선가에서 무정설법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는 화엄에 대한 선가의 절대 수용이고, 또한 항복 선언이다. 선가의 일체 무정공안은 무정설법에 대한 주석이고, 그 밖에 공안은 무성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선종의 자긍심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어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양언揚言도 또한 적반하장이다.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을 종취로 삼고, 무문을 법문으로 삼는다.”(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라는 명문과 명백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불심을 대표할 수도 없다. 육바라밀 중에 불심을 대표할 수 있는 바라밀은 오직 지혜뿐이다.
동일한 달마대사의 법손法孫이지만, 4조 도신대사와 혜충국사는 무정불성을 수용하고, 6조 혜능대사와 신회대사 그리고 6조의 4세 법손 대주스님은 무정무불종의 종지를 견지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육조스님이 무정설법을 몰랐다고 하여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무정설법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묘각보살이라야 수용할 수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도 관음보살을 눈앞에서 친견하고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삼현보살은 십지보살의 출몰出沒을 알 수 없고, 십지보살은 십일지보살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효보살이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을 몰랄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위 법거량에서 두 개 관문觀門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상상근기上上根機가 취하는 관문이니, 바로 고불심古佛心이다. 불심과 여래심 고불심은 말만 다르고 그 뜻은 같다. 고불심에서 어떻게 관문을 얻을 수 있을까?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欲知諸佛心 當觀佛智慧 佛智無依處 如空無所依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게송을 그 본문을 인용하여 부연敷衍한다. “불자여, 여래의 심의식心意識은 모두 알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응당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을 알 수 있느니라.”(佛子 如來心意識俱不可得 但應以智無量 故知如來心)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如來心을 알 수 있고, 여래의如來意를 알 수 있으며, 여래식如來識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도 또한 본문을 인용한다.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 만물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허공은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는 일체 세간 지혜와 출세간 지혜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여래의 지혜는 의지하는 곳이 없느니라.”(譬如虛空爲一切物所依 而虛空無所依 如來智慧亦復如是 爲一切世間出世間智所依 而如來智無所依)
불심이나 여래심 또는 고불심을 관하는 차서가 이러하다. 내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처나 여래 또는 고불도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지혜이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것이 바로 상상근기의 관이다. 상상근기는 삼매에 들어가 경문을 읽기 때문에 저절로 관이 되지만, 범부는 망상 속에 읽는데 어찌 관을 이룰 수 있으랴.
이미 고불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았거나와, 지혜가 없는 이 중생은 또한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후자를 취한다. “고불심을 어째서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라 했는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하여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어째서 조약돌이라 했는고?”
2023년 1월 21일, 임인년 12월 30일 세모일歲暮日 74세 길상묘덕 74쪽의 글을 씀
추기
제8장의 일부를 수정 보완하니, 75쪽의 글이 되다. 이에 말미를 다시 쓴다.
2023년 1월 22일, 계묘년 1월 1일 세단일歲旦日 75세 길상묘덕 75쪽의 글을 씀
|
첫댓글 최종 수정본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충하면
위의 게송은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 60권 화엄경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보리여, 네가 말하기를, ‘이 마하연은 온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며,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한다.’라고 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수보리여, 이 마하연은 온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며,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여, 일체 제법은 부동상이기 때문에 이 법은 온 곳이 없고, 가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느니라.”(須菩提 汝所言 是摩訶衍不見來處 不見去處 不見住處 如是如是 須菩提 是摩訶衍不見來處 不見去處 不見住處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法不動相故 是法無來處 無去處 無住處)라고 한다.
이상을 추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몸을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면, 의식작용은 유정이고, 사대로 된 구성체는 무정이다. 산하대지가 비로자나 전신체이다. 사대로 구성된 이 몸인들 어찌 비로자나 전신체가 아니랴. 신수대사의 신시보리수身是菩堤樹는 이 몸을 법신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6조 혜능대사는 심시보리수心是菩堤樹라 하니, 이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며, 한참 그 격이 떨어진다. 특히 혜능대사의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 종지는 또한 남방불성에 상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정무불종의 종지는 혜능대사의 본의일까? 아니면 신회대사의 가탁일까? 신회대사는 그렇다고 하자. 마조대사의 제자 대주스님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오늘 아침 수정 보완한 부분입니다.
결어의 하단을 마지막으로 보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