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옛길 보광재 길
신정일(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가끔은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자연 속에 있고 싶을 때, 그런데,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분신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휴대폰, 잠시라도 없으면 불안하고, 아무런 신호가 없으면 불안한, 휴대폰, 그 분신같은 휴대폰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곳이 있다. 지리산 속도 아니고, 망망대해도 아닌 전주시 흑석골에서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로 넘어가는 보광재 가는 길의 중간쯤에서 정상부근에 이르는 구간이 그런 곳이다. 사람들로부터, 문명의 이기로부터 벗어나 혼자가 될 수 있는 이 길이 전주에서도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길은 고려 말의 문장가인 이규보와 이인로, 그리고 가정 이곡 등 수많은 천재들이 걸어갔던 길인데, 지금도 그때나 다름없이 깊고도 깊은 산중처럼 나무숲이 울창하고도 아스라하다. <한국지명 총람>에 죽은 소를 닮았다고 쓰여진 흑석골에서 보광재 가는 길을 걸었다. 그 푸르던 녹음이 점차 사위어 가는 길, 물봉선 꽃이 무리를 지어 피었고, 졸졸 흐르던 시냇물 소리, 행여 가재가 있을까 싶어 돌멩이를 들췄지만 보이지 않았다.
돌 하나만 들춰도 전라도 말로 오개오개, 또는 고물고물 모여 있기도 하고, 느닷없는 불청객에 놀라 잰걸음으로 도망치던 그 많던 가재는 어디로 갔을까?
울창한 나무숲을 헤치며 서서히 오르다 보니 작은 샘이 보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올라가자 금세 보광재에 닿는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하더라도 보부상들이 임실에서 전주 장 보러 넘나들었던 길이며, 평촌 사람들이 땔나무를 팔기위해 넘었고, 그리고 학생들이 전주에 있는 학교로 오가던 길, 그 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남아 있는데, 그 길을 걷는 사람만이 다를 뿐이다.
이 훅석골에서 전주의 명물인 한지를 많이 생산했었다. ‘전주 한지’는 조선시대 교지와 과거지, 외교문서 등으로 쓰인 종이계의 최고봉으로. 조선후기에는 전북 지역에서 출판된 완판본의 원자재로 이름을 날렸다.
예로부터 흑석골은 ‘한지골’로 불려졌을 만큼 전주 한지의 대표적 생산지였다. 흑석골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풍부해 명품 한지 공장이 밀집해 있으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이 일대에는 전통한지 공장이 30여 곳이 넘게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값싼 중국 선지(宣紙) 탓에 급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그 옛날 전주 한지의 원형 보존과 한지의 세계화로 발돋음하기 위해 전통한지 생산시설이 흑석골에 들어섰다.
그렇다.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모든 萬物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만물이 가고 오는 우주의 이치 속에서 변하고 또 변하는 사물의 모습같이 흑석골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접어든 것이다.
보광재라는 이름은 보광사라는 전주 일대의 큰 절이 있어서 그 길로 가던 길이라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여지도서>에 실린 보광사에 대한 기록을 보자.
”보광사 관아의 동남쪽 10리 고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못 쓰게 되었다.“ 그 보광재에 오르면 마치 양평의 구둔재나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갈재처럼 V자로 움푹 패여져 있어 초심자가 보아도 오래 된 옛길임을 알 수가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으면 저렇게 길이 세월이 되고 역사가 되었을까?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남고산성으로 해서 고덕산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서쪽으로 가면 평화동의 학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평촌리 가는 길이다.
길은 약간 가파르다. 한참을 내려가면 평촌리에 이르고 새만금에서 포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이어진다. 평촌에는 이곳 보광재의 이름을 딴 자그마한 보광서원이 있고, 보광재터가 멀지 않다.
그 옛날 한 때는 금산사보다 더 규모가 컸다는 이 절을 두고 이색의 아버지인 가정 이곡은 <보광사 중창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절의 완공을 알리기 위해 중향스님은 보광사 절에서 목소리를 높여 불경을 크게 암송을 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신도들은 불전에 재물을 내놓으니 전부 합한 것이 일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5천명 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것이 15근이고, 백금으로 그 기명器皿을 장서한 것이 39근이요, 무릇 지은 건물이 1백여 간이었다.......
정축년 봄에 시작하여 계미년 겨울에 준공되었는데, 그 달에 산인참숙山人旵淑 등과 함께 단월檀越과 인연 있는 사람들을 널리 청하여 화엄법회를 크게 열어 낙성식을 하였으니, 모인 대중이 3천 명이요. 날 수로는 50일어었다.
분주히 쫓아다니는 사녀士女들과 공양하고 찬양하며 칭송하는 이가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성이에 넘쳐서 헤일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견甄氏가 본국으로 들어 온 것이 4백년이 넘었고, 절은 비록 백제(견훤 백제) 때에 창건하였으나 여러 번 전쟁으로 불타서 비碑라든가 기記 같은 것이 어어서 지난 날을 상고할 수는 없다.....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가정 이곡 선생의 <중흥대화엄보광사기重興大華嚴普光寺記>
흑석골에서 평촌 거쳐 보광사에 이르는 길, 언제나 걸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뿐해지는 길이 전주 도심속에 있는 보광재 길이다. 보광사를 중창했을 때 삼천명이 모였다는 보광사는 간데 없고 터만 남아서 옛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그렇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변하고 변하는 것이 세상이다. 강물이 흐르고 흐르면서 항상 새롭듯이 순간이 지나면 이미 그것은 내가 느낀 그 순간이 아니다. 오래 된 옛길 보광재를 국가 명승으로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걸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