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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정련>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말라 3,3-4)
주님 성탄을 하루 앞둔 오늘 교회 전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얘기를 전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제련사와 정련사로 얘기합니다.
제련(製鍊)은 광석에서 금속을 빼내는 것이고, 정련(精鍊)은 빼낸 금속을 더욱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이런 정확한 구분 없이 비슷한 뜻으로 두 말을 쓰는 것은 둘 다 무엇에서 무엇을 빼냄으로써 순수하게 만드는 공통점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오실 주님을 합당하게 맞이하게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무엇을 빼내고 무엇을 순수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당장 생각나는 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냄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순수하게 하는 것이지요.
저에게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사랑을 받고도 싶어하지만 더 원하는 것은 주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개나 꽃이라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러므로 인간이건 개건 꽃이건 사랑이란 것이 다 귀찮아지면 그런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운 거라는 얘기가 있지요.
그런데 제게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믿음도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예외 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성인일지라도 그의 사랑에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있는데, 성인과 속인의 차이는 그 불순물이 얼마나 적고 많으냐의 차이일 뿐이고, 불순물이 적을수록 불순물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거지요.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열망과 갈망에서 욕망을 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사랑인 열망과 갈망에서 세상 욕망을 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욕망이란 우리의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이 빠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랑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이 빠지고 하느님 사랑만 남아야 하는 것과 반대지요.
그러므로 이 대림절 막바지에 우리의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은 물론 세상 욕망을 빼냄으로써 주님과 주님 사랑이 우리에게 오실 평탄한 길을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마련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어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를 주는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은 까닭에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지으려고 합니다.
당시 보통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즈카르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묶여있던 혀가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혀가 묶이는 고통을 통해 세상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세상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을 어쩌면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대체 미움받을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쥔 냄비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면 그 냄비를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흰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하지 말아보십시오.
그러나 지금 3초간 느닷없이 나온 북극곰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뇌는 무언가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그 생각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먼저 지금 시각이 몇 초 몇 분인지 정확하게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다른 것에 신경 쓰면 됩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평생 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꾸르실료 한 봉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대낮에 건널목을 건너는데 음주 운전자에게 치인 것입니다.
워낙 심하게 다리를 들이받아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을 부정적으로 끌어내리는 자아가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나에게 교통사고를 낸 그 사람의 잘못은 분명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던 꾸르실료 봉사자는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낸 사람이 자주 찾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 사람도 옆 본당에서 핵심 봉사자까지 하다가 어떤 연유로 몇 년 동안 냉담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회복이 되어 꾸르실료 봉사자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사고를 낸 사람과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 사건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혀가 묶인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반성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즈카르야로 짓겠다고 고집부렸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나의 것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적인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줍니다.
판단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안톤 룰릭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1996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자리에 초빙되어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 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안톤 룰릭 신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 십자가의 장막을 넘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심장이 찢어졌을 때 장막도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때 장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장막을 통과했을 때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나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모든 일이 ‘좋은 것’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좋은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의 힘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요한 3,30)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했습니다. (루카 1,66)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이 되어 기뻐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를>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루카 1,57-58)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루카 1,14-17)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사실상 ‘메시아 강생 예고’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강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의 생각을 나타낸 말일 뿐입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는 “축하했다.”인데, 만일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출생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큰 자비’를 받았음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천사가 전해 준 이름입니다(루카 1,13).
그래서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야 한다고 의사 표현을 한 것은 천사가 한 말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니까(루카 1,20), 믿게 되면서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이 말은 ‘제가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징이라도 보여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일과 아기가 태어난 뒤에 말을 다시 하게 된 일을 그가 얻은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말’일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선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는데, 바로 뒤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가 그 찬미일 것입니다.
그 노래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말한 것은 두 절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하느님과 메시아의 인류 구원 사업을 찬미하는 말입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던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즈카르야의 노래’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적은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은 ‘주님의 손길이 우리 모두를(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만 보살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보살피셨습니다.)
아무리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도 그 일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느님(메시아)께서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축하하려고 모인 이웃과 친척들은 요한의 출생을 ‘남의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도 ‘남의 집 아기’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그들이 ‘즈카르야의 노래’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이 아기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성탄은 메시아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나의 일’이고, 성탄절은 ‘나의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날’입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탄절을 ‘예수쟁이들만의 잔칫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고, ‘남의 날’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라고 열심히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은 너희의 말일 뿐이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의 날’이 되지 못하고 ‘나의 날’과 ‘남의 날’로 갈라져 있는 것은 신앙인들 쪽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신앙인들끼리만 모여서 신앙인들만의 축일로 지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이유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인정 없음’ 때문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관심과 인정 없음’이 어떤 ‘작은 이들’을 그런 처지로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더욱 특별히 명심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5)
- 전주교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신(神)의 한 수(手) -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攝理) 안에 있다>
우연은 없습니다.
요즘 새삼스럽게 깊이 깨닫는 진리입니다.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모두가 신의 한 수 같은 만남입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 안에,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만 해도 제가 예전 어느 때도 여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와서 생면 부지의 형제들과 만나 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여기 지금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사는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인연을 맺고 신연(神緣)중에 만나며 살아가는 숱한 영적 도반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신의 한 수 같은 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삶의 신비요 만남의 신비요 존재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 대해 참 많이 말해 왔습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병 같은 허무와 무의미, 절망 또한 하느님이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성서는 모두가 하느님을 만남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삶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근원적 요소들을 잊고 잃고 무지와 허무에 노예되어 살아가다가 삶을 마친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무지의 탐욕속에 멋대로 살아온 결과가 오늘날 코로나의 전 지구적 재앙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요 중심이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두를 계시합니다.
하느님을 만나 알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요즘 예수님 탄생을 앞둔 말씀의 배치 및 나오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앞선 하느님의 섭리가 얼마나 완벽한지 깨닫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에 오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오늘 제1독서 말라기는 이미 그 아득한 옛날에 우리 예수님 오심에 앞서 엘리야의 재림을 예언하고 있고, 바로 그 예언이 오늘 예수님 탄생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코 우연한 탄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의 부모인 즈카리야, 엘리사벳 부부도 정말 신의 한 수 같은 존재들입니다.
아마 벙어리로 침묵 중 피정같은 시간을 지내면서 즈카르야는 하느님은 삶의 신비의 열쇠임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요한 아기의 할례식에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부르려 하자 아기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강력히 항의했고, 순간 하느님의 섭리임을 직감한 즈카르야가 판을 달라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는 순간 그는 혀가 풀려 말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니 말 그대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요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가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말하니 그대로 그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화두같은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화두같은 물음은 ‘신의 한 수’ 같은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에 해당되는 물음입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요한에 머물러 보살피고 계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때마다 물어야 할 질문이며,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당신만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깊이 깨우쳐 주십니다.
얼마 전 나눴던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란 기도시를 세 번째 인용하며 다시 성탄 선물로 나눕니다.
어제 고백성사 시 수녀님들과 나누며 공감했던 제 영적 삶의 모두를 종합하는 새롭게 보완된 내용의 기도시입니다.
이런 간절한 청정욕(淸淨慾)의 기도는 하느님께서도 기뻐 환호하시며 열렬히 호응(呼應)하시며 응원(應援)하실 것입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선미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품이
당신의 배경이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경청이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온유가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섬김이
당신의 친절이
딩신의 연민이
당신의 치유가
당신의 지혜가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정의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당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바로 그러하셨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 나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망
이것 하나뿐이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당신으로 태어나게 하소서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 2021.12.8.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하느님께 드린 헌시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외도로 아내에게 큰 상처를 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깊이 깨달았고, 평소 죗값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에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못한다면서도 미움을 겉으로 표시했습니다.
부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면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꼬투리 잡아 평생 종으로 부리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아내는 남편을, 또 반대로 남편도 아내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용서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랑했던 만큼 배신을 느끼면 그만큼의 미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랑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계속된 노력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즉 자신의 신앙생활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이를 만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습니다.
이 할례식 때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용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들이 할 사명을 가리키는 일종의 예언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명명식이 중요했습니다.
그 권리는 부모에게 때로는 친척들에게도 개입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지 않는 한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통례를 따르지 않고 ‘요한’으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묻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일러준 말을 듣지 않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하느님의 뜻을 새기는 데 노력했고 더 굳게 믿고 따르는 데 집중했기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을 얼마나 굳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믿고 따라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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