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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닫힌 말문이 열리기까지>
지난 17일 이후 복음을 유심히 읽은 분들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분들 가운데서 오직 즈카르야만 말문이 막히고 그래서 찬미할 수 없었음을 보셨을 텐데, 그것은 즈카르야만 성령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하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같은 부모인데 즈카르야의 찬미는 엘리사벳의 찬미와 시차가 있고 오늘 비로소 성령에 가득 차 외칩니다.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달리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의 합리적인 생각이 믿음보다 강해 믿기보다 의심케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의심이 성령이 들어올 문을 막았고, 성령께서 들어오실 문을 막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찬미의 말문뿐 아니라 아예 모든 말문을 막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이 더 그렇지만, 의심도 말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막히게 합니다.
불신과 의심은 나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게 하잖습니까?
나 외에 모든 사람을 도둑으로 의심하거나 불신하면 모든 문을 걸어 잠그겠지요.
반대로 누구나 믿으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요.
그런데 그 의심엔 하느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하느님을 더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아예 존재 자체를 불신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교만한 사람은 성령 대신 불신과 의심의 망령(妄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그런 의심은 아닐 것이고 보통 사람의 그 합리적인 생각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 의심은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의처증처럼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심이 인간적으로는 병적이지 않더라도 영적으로는 병적이거나 적어도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생각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가능성이고 구원인데, 합리적인 생각에 갇히면 하느님의 능력과 가능성과 구원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시차인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형제가 외국에서 살다가 아주 큰 병이 들어 돌아왔습니다.
그 부모도 제가 같이 잘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말을 듣고 고칠 수 없다고 체념하고 대비하는 데 비해 어머니는 단순해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고 그 형제가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맞다고 제가 말해주면서 형제도 어머니처럼 믿으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의사도 손 놓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의 단순성은 한편으로는 믿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입니다.
아무튼 즈카르야는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말문이 막히는 고통을 겪은 다음 구원을 체험하고 찬미하는데, 우리도 즈카르야와 다르지 않다면 말문이 열리는 그날을 고대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어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 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즈카르야의 노래’ 부를 자격; 내 자녀가 세례자 요한이 된다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요한을 낳고 입이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즈카르야의 찬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루카 1,68)
그리고 자기 아들이 메시아의 예언자가 될 것을 기뻐합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운명은 실로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받고 고통과 십자가의 삶인데, 아버지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자녀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살겠다고 할 때 기뻐 주님을 찬미할 수 없다면 아직은 즈카르야처럼 혀가 묶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예언자입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예언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누군가의 말을 전해서 그 사람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아 예언하는 대상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바알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살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손에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허상이 되고 다시 욕망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이 남아있기에 한 인간은 또 살아간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게서 나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사는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는 ‘타자(他者: 나 외의 다른 이)의 욕망을 충족시켜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어떤 다른 욕구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 욕구도 창조자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절대 두 발로 서서 걷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게 된 것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타자, 곧 부모에게서 그 욕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의 ‘뜻’을 따라주면서 우리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라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주는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을 올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러니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동물은 인간으로 말하면 자아와 자기 자신이 곧 하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아와 자기 자신이 다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아가 타자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타자인 자아의 뜻을 따라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절대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났더라도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영광을 돌리려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뜻을 따라 그 영광을 위해 살아 그 사람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람의 세상에 속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예언자에 의해 어떤 세상에 속하게 되어 있는데, 빛과 어둠 두 세상밖에 없습니다.
영화 ‘저스티스리그: 스나이더컷’(2021)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히어로들이 우주의 악당 다크사이드와의 싸움에 관한 내용입니다.
허황한 내용 같지만 사실 이런 영웅 장르들 안에도 우리 삶이 반영이 안 된다면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크사이드가 지구를 침공하자 영웅들이 뭉칩니다.
여기에서 대장은 배트맨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감당하기에 지구의 영웅들은 턱없이 힘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죽은 슈퍼맨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지구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슈퍼맨은 살아나고 싸움에서 이겨 일단은 다크사이드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데, 지구는 다크사이드에 의해 황폐해졌고 슈퍼맨이 배트맨과 자신의 옛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왜 슈퍼맨은 다크사이드 편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슈퍼맨의 아기를 가진 아내 루이스 레인이 배트맨의 방치로 고통스럽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에게 지구를 지켜야 하는 어쩌면 가장 큰 원인은 루이스 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이 자신의 아내와 아기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이 다크사이드였습니다.
슈퍼맨은 다크사이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더는 ‘누군가를 위해’, 곧 누군가에게 영광을 주려는 대상이 사라졌고 다만 원한만 쌓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복수심으로 다크사이드 편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또 하나의 반전은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영원한 원수, 곧 조커가 배트맨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은 슈퍼맨도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조커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지구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 때문에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갈라지게 되는 이유는 슈퍼맨이 더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데 있고, 배트맨과 조커가 친구가 되는 데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 누군가가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복수심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어둠의 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조커도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뜻에 합류한다면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빛으로 나아오는 예언자였고, 슈퍼맨에게 다크사이드는 어둠으로 가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곧 그 세계의 문입니다.
빛이건 어둠이건 우리를 그 빛과 어둠의 세상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에서 오는 ‘뜻’에 의해서입니다.
어둠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은 피조물을 희생시키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건, 부모건, 선생이건, 다크사이드건 상관없습니다.
피조물에서 오는 모든 뜻은 피조물을 파괴합니다.
세상을 보존하려는 뜻은 세상을 만든 창조자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이 빛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그 율법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도 인간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온 율법을 지킴은 곧 모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결국엔 피조물에 영광을 돌리고 피조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서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자체이신 분이 당신을 위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리며 살라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름은 모세의 십계명을 따름과 다릅니다.
조커가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이유는 배트맨의 뜻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창조자의 뜻입니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해도 그 인간을 위해서 살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것에 머뭅니다.
히틀러도 아리아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영광을 돌리며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부모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합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좋은 가르침을 준 부모를 살해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게 만든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뜻을 준 이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준 사람이고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가르쳐주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부모의 세상 안에서만 통용됩니다.
집단 이기주의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자는 오로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태어나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삶의 이유로 삼으면서 작은 벌레 하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뜻을 따라주는 존재가 곧 나의 삶의 의미이고 한 몸이 되며 그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참 삶의 의미요 하느님 나라인 그리스도의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빛의 세상에 있는 것이고 빛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다른 사람도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예언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가 그리스도의 예언자가 되어야만 주님을 찬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어떤 피조물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오직 빛의 예언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다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혀가 풀려 즈카르야의 노래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려면 주님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언자가 되어>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와 모두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 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 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 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 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 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기 몫을 알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이 닦은 길을 바탕으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오신 분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의 예언자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노래를 ‘즈카르야의 노래’라고 하는데, 라틴어 “Benedictus Dominus Deus Israel”의 첫 단어에 따라 ‘Benedictus’라고 부른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복음 찬가(Canticum evangelicum)라 불립니다.
시간 전례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는 아침기도, 마리아의 노래는 저녁기도, 그리고 시메온의 노래는 끝기도에서 노래하지요.
즈카르야의 노래는 희망찬 하루를 여는 기도로, 마리아의 노래는 오늘 하루동안 우리를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기묘한 행업에 감사하는 기도로, 시메온의 노래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면서 주님을 만나 뵈었으니 더 이상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는 마음으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는 기도로 바치기에 잘 어울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즈가르야의 노래에 대해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즈가르야의 노래 안에는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시간의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미 성조와 구약시대로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전해지고 또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것은 기나긴 여정이었으며 지금도 계속 걷는 '우리의 길'이기도 합니다.
구원된 우리 모두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루카 1,75) 한발한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길'(1,76)과 우리 발로 걷는 '평화의 길'(1,79)이 맞춰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 또한 이 노래를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67)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마리아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41) 외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마니피캇을 노래한 마리아도 이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의 말대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을 것'( 루카 1,35)이기 때문입니다.
또 노인 시메온도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계셨고, 성령께서 죽기 전에 꼭 주님을 뵙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고,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가서"(루카 2,25-27)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요.
사실 즈카르야도, 엘리사벳도, 마리아도, 시메온도 성령의 감도 없이는 이렇게 아름다운 하느님 찬송가를 지어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럴만한 유명 시인이나 작곡가도, 아름다운 목소리의 가수도 아니었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죠.
즈카르야의 노래는 또한 다른 복음 찬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늘 우리를 하느님 찬미에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시편 34,9)라고 시편 작가가 노래하듯이, 주 하느님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에게 해 주셨고 지금도 해 주시고 앞으로도 해 주실 그 구원 업적과 희망을 노래하며 영광과 감사와 찬미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바치도록 초대받는 성무일도 시간경들은 이렇게 '성령으로 가득 차' 불러야 하는 노래이기에 영가(靈歌)이고,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불만으로 가득 차' 혹은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혹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부른다면 되겠습니까?
성무일도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예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정말 곧 오실 우리 구세주 예수님 오심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우리도 '성령으로 가득 차'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복음찬가와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불신의 대가로 얻은 열 달의 침묵이 풀린 뒤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67) 선포한 예언은 구원 역사를 총정리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에 의하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 목적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루카 1,74)이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물질과 쾌락과 명예를 최고 가치로 여기고 내달리지만, 사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로서, 그중에서도 신앙의 길로 부름받아 살아가는 존재로서 이보다 더 보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소명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당신 앞에서 섬김의 몫을 살도록 주님께서는 "한 곳을 정하고 제자리에 살게 하겠다. 그러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불의한 자들이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2사무 7,10) 하고 약속하십니다.
창조된 목적에 맞갖게 "제자리"에서 "한평생"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오히려 별스럽게 비춰지는 이 시대에, 자칫 이상주의자 아니면 염세주의자로 보여질 수 있는 우리의 이 길을 소신껏 꿋꿋이 걸어가기 위해서는 즈카르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셔야만 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루카 1,78-79)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오실 겁니다.
꼭 오실 겁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어제로 끝난 “오” 후렴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한 오늘 복음환호송이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 탄생을 목전에 둔 우리에게 기쁨을 가득 선사합니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
“우리 조상님”
“나의 뿌리”
“신부님의 본관은 어디세요?”-
어제 최씨 성의 자매로부터 카톡을 받고,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17째 아드님, 영해군 자손”이라 대답해 놓고, 새벽 다시 보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나의 영적 뿌리, 영적 본관은 그리스도 예수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나 우파, 진보파나 보수파가 아닌 그리스도파입니다.
오매불망, 학수고대하던 주님께서 오실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세 번째 코로나와 함께 하는 주님 성탄입니다.
올해는 성탄의 기쁨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노래도 트리도 거의 볼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미사 경문 중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특히 ‘항상’이란 말마디에 늘 힘을 줍니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암울한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도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우리 삶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말미에서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로 정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성경책을, 삶의 문장을 깊이 잘 들여다보면 주어는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우리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수도원에 우리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섭리의 존재, 은총의 존재, 유일무이한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자리로 파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성경의 주어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매해 만날 때마다 새롭게 확인하는 깨달음의 진리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는,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셨음을 환기시키는 나탄의 신탁을 들어보세요.
다윗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로 이끄는 나탄 예언자입니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문장들의 주어는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하느님께서 친히 다윗을 위해 활동해 주신 동사의 나열들입니다.
동사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이어지던 신탁은 주님의 위대한 약속으로 끝맺고 마침내 예수님의 출현을 통해서 완료됩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신탁은 그대로 탄생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아버지가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2천년 동안 끊임없이 함께 마음을 모아 아침 성무일도 시편 말미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한나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즈카르야의 노래 등 모두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불렀던 아나뷤의 노래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한민족처럼 ‘노래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한맺힌 노래가 아닌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였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입니다.
화답송 후렴이 이를 요약합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바로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는 주님의 자애를 위업을 노래합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이 할 자랑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삶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긴 참으로 겸손한 찬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향한 겸손한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찬가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다윗의 신탁처럼, 즈카르야의 찬가 역시 주어는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제1독서 나탄의 다윗에 대한 신탁이 이뤄졌음을 고백하는 즈카르야입니다.
이어 주님께서 주어가 되어 행하신 위업의 문장들이 계속되는 찬가는 말미에서 아름다운 고백으로 끝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암울한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코로나로 인한 우울의 어둠은 말끔히 걷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백배하여 희망찬 기쁨과 평화, 빛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삶의 성경책에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죽어야 끝날 아직은 미완의 내 성경책이지만, 마음이 혼란하고 어두워질 때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시며 위로와 힘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 감으로 내 삶의 성경책에서 주어인 하느님이 실종되고 내가 주어가 될 때,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의 어둠이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흔적 없이 몰아 내시고 당신의 기쁨과 평화의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네.”
(루카 1,68)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매사에 긍정적이고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밝게 웃으며 일하는 형제님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즐거워했지요.
그래서 한 후배가 선배인 이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배님은 늘 행복하시죠? 걱정이 하나도 없으실 것 같아요.”
이 말에 형제님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셨는데, 말기 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수치상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는 커다란 불행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면서 힘차게 살아가고, 누구는 자그마한 불행에도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외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불행을 불행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변화된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이를 즈카르야가 불렀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잘못을 벌하시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내려 주십니다.
즈카르야는 믿지 않은 탓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자 혀가 풀렸고 성령까지 받아 예언의 노래를 오늘 복음과 같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노래의 시작을 우리는 유의 깊게 바라봐야 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성경을 보면 많은 찬미의 노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래가 즈카르야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작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찬미와 감사가 우리 모든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찬미와 감사보다 불평과 불만의 기도로 더 많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밤,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찬미와 감사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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