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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U_vuKSP2Z0?si=LNz6eKfaq47B1QJy
( Mahler - The Song of the Earth (Ct.rc.: Kathleen Ferrier, Bruno Walter, Wierner Philharmoniker)
1. Das trinklied vom jammer der erde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
2. Der einsame im herbst 가을에 슬픈 사람
3. Von der jugend 젊음에 대하여
4. Von der schonheit 아름다움에 관하여
5. Der trunkene im fruhling 봄에 취한 자
6. Der abschied 고별
말러가 이 곡을 완성한 것은 1908년 봄 티롤의 토블라크라는 곳에서였다 .
이무렵 돌이킬 수 없이 건강이 나빠진데다(심장병) 심한 허무주의적 심경에 빠져 있던 그는 자기의 목숨의 불이 껴져 가고 있음을(1911년 죽음) 예감하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며 덧없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그래도 그대로 뿌리칠 수만은 없는 이승에 대한 집착을 되씹고 있던 그에게 한 권의 시집이 눈에 띄었다.
한스 베트게 (Hans Bethge)가 독일어로 역편한 <중국의 피리(Die Chinesische Flote)> 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은 중국시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산문으로 번역(한스 하인리만)한 것을 다시 시 형태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어떤 시는 본래의 것과는 딴판이 된 것도 있을 정도였지만, 당시의 탐미적인 정취와 동양적인 제행무상의 사상에 깊이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말러의 이 곡 제목에 대한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 보아야겠다.
당시의 말러의 심경이나 이 곡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대지의 노래>라는 우리말은 잘못된 것 같다 일본인의 번역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특히 이 경우는 심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Das Lied von Der Erde(=The Song Of The Earth)에서 Erde(=Earth)는 <흙>, <땅> 등의 뜻이 있지만 이렇듯 추상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저승>에 대한 <이승>, 즉 <현세>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현세의 노래>가 합당할 것 같다 말러의 염세적이면서도 현세에 대한 떨칠 수 없는 인간적인 집착 등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수긍이 갈 것이다
만약 이 곡명에서 <대지>를 고집한다면 첫째 곡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를 대지의 고통이라고 하는 넌센스가 생긴다
말러가 <중국의 피리>에서 가려 뽑은 시는 이태백, 전기, 맹호연, 왕유 등의 것이다 그러나 베트게가 정확한 번역을 하지 않은 데다가 또 말러가 작곡할 때 여기저기 손을 대서 악장에 따라 본래의 시를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특히 전 6악장 중 제1<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제2<가을에 슬픈 사람(Der Einsame im Herbst)>, 제3<젊음에 대하여(Von der Jugend)>의 세 악장은 원시를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4악장 이후는 비교적 충실한 편이다 제4<아름다움에 관하여(Von der Seh nheit)>는 이태백의 <채련곡>에서 비롯되었으며 여름날 연꽃을 따는 아가씨들에게 불량한 사내들이 말을 타고와 휘날려 떨어진 낙화를 밟고 가버려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제5<봄에 취한 자 (Der Trunkene im Fruhling)는 원시가 <봄날에 취해서 일어나 생각을 말하다>이다
사람의 일생은 한바탕 꿈과 같다 무엇을 그리 허둥댈게 있느냐
그저 종일 취해서 늘어진 채 기둥에 기대어 있는다 깨어나 뜰앞을 보면 새 한 마리 꽃 사이에서 운다 대체 지금이 어느 계절인고? 봄바람이 꾀꼬리와 수작한다 이에 느낀 바 있어 탄식하다가 술을 보면 저절로 또 기울인다 목청 돋우어 명월이 뜨기를 기다리려 했건만 노래가 끝나자 세상사 모두 잊고 취해 버렸다
이상이 대강 원시의 뜻이다
마지막 제6<고별(Der Abschild)>은 맹호연의 <업사 산방에서 묵고 정공을 기다려도 오지 않음>과 왕유의 <송별>의 시를 말러가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다 곡의 후반부에 쓰인 왕유의 시만을 대장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을 권한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디로 가는가?
그대에게 말하노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노라 돌아가 남산 밑에 누우리라
어서 가게나 다시 물을 것 없네 흰 구름은 머흘머흘 끝간데 없어라
말러는 여기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노라 돌아가 남산 밑에 누우리라>라는 부분을 <벗이여, 이 세상 행복은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내 고독한 영혼의 휴식을 얻기 위해 산으로 헤매어 든다네>라고 고쳐 놓았다
이런 부분만을 보아도 당시의 말러의 하염없는 심경이 엿보인다 실제 음악에서도 이 <고별>의 서두 부분에는 목관악기가 독특한 선열을 노래한다 그 온몸과 마음이 꺼져 들어가는 듯한 쓸쓸함, 그리고 이 세상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절실한 고백에 이어 한없이 사랑한 현세의 아쉬움과 수없이 다시 되풀이돼 돌아오는 봄에 대한 기대와 찬미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하고 허공 속에 녹아 들듯 사라져 버리는 아름다운 알토의 목소리로 끝나는 부분의 절망적인 아름다움은 탐미주의자 말러가 아니면 절대로 남길 수 없는 곡이다
이 곡의 결정적인 명반은 의당 초연자이며 또 최고의 말러 해석자였던 브루노 발터 지휘의 것이다 발터는 이 곡을 세 번이나 녹음했고 모두 다 손꼽히는 명반이지만 특히 빈 필과 훼리어(알토), 파짜크(테너)가 협연한 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발터의 깊은 감동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과 뛰어난 독창자들, 그리고 싱싱한 빈 필의 연주는 그야말로 삼위일체라 아니할 수없다
특히 캐들린 훼리어의 마지막 악장에서의 비극적인 목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드는 특이한 애절함과 야릇한 감명을 안겨 준다 몇 안되는 그녀의 음반 중에서도 이 <대지의 노래(현세의 노래)>와, 같은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Seraphim mono 60203),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Alto Rhapsody)>, <네 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ange)>(이상 Decca mono ACL 306, 307) 등은 레코드 음악사상 불멸의 명반으로 꼽아도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일찍이 발터에 의해 전화 교환수에서 일약 대가수가 된 훼리어는 그러나 하늘이 그녀의 뛰어난 노래에 감동했음인지, 바로 이 <대지의 노래>를 녹음(1952, 5 빈)한 이듬해 말러의 <고별>의 노래를 자기의 노래로 대신하고 현세를 떠났다 당시 훼리어의 나이 42세(1912--1953)였다
(CD해설 발췌)
캐슬린 페리어 (Kathleen Ferrier, 1912-1953)
성악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가장 높은 음역을 커버하는 소프라노(soprano)와 그보다는 낮은 음역을 커버하는 메조소프라노(mezzo-soprano), 그리고 가장 낮은 음역을 커버하는 콘트랄토(contralto)로 나뉘어집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역(聲域, 독일어로는 "Fach"라고 하지요)은 물론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차지하는 소프라노입니다만, 메조소프라노도 많은 오페라에서 비중있는 조역을, 그리고 적지않은 수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성역인데 유독 콘트랄토(우리나라 학교 음악시간에는 그냥 '알토'라고만 합니다)만은 '존재하지조차 않는 듯이 여겨지는 일이 많은' 성역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면 역시 오페라의 주역이나 비중있는 조역을 노래해야 하는데, 오페라에서 콘트랄토가 주역이나 비중있는 조역을 노래하는 경우는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오르페오 역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全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오르페오 역도 원래는 카스트라토(남성 거세 가수)를 위한 역이었던 것이 카스트라토의 소멸로 콘트랄토에게 넘어오게 된 것이지, 본래부터 콘트랄토를 위해 씌여진 역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 역마저도 메조소프라노들이 노래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메조소프라노와 콘트랄토의 구분 자체가 모호하거나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콘트랄토 가수들의 정체성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는데, 실제로 콘트랄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야인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의 종교음악 연주에서조차 메조소프라노들이 콘트랄토의 파트를 노래하는 바람에 마침내는 순수한 콘트랄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콘트랄토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각각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출중한 두 콘트랄토 가수들에 의하여 콘트랄토는 비로소 정당한 음악적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이란 바로 미국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과 영국의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영어권 출신입니다.)
그런데 앤더슨은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인종주의에 물든 미국 사회에서 무수히 겪었던 가혹한 인종차별과 그것을 극복하고 정상에 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반면, 페리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의 독일 가곡 애호가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독일 가곡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특히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가곡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아직도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들이 말러를 교향곡 작곡가로만 알고 계십니다만, 말러는 슈트라우스와 더불어 20세기의 위대한 독일 가곡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페리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Kathleen Ferrier (1912-1953)
1. 초기 생애 : 어려웠던 가정 환경... 성악에의 입문...
런던 유학
본명은 캐슬린 메리 페리어(Kathleen Mary Ferrier), 1912년 4월 22일 영국 랭카셔 주의 하이어월튼에서 가난한 교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비록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음악 교사이자 그 지방의 열성적인 합창단원이기도 한 아버지와 음악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음악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만, 애초의 시작은 성악이 아닌 피아노였습니다.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되던 해에는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 신문사 주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피아노 강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실력을 쌓으며 장차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지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도, 상급학교 진학도 모두 포기하고 우체국에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열정마저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페리어는 좌절하지 않고 우체국에 근무하는 동료들과 함께 합창단을 구성하여 자신은 동료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를 맡는 한편 노래도 함께 부르며 취미로서 음악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주위의 권고와 격려로 1935년에 지방의 음악 경연대회 성악 부문에 출전했지만 아직 공부도 경험도 부족했던 탓에 결과는 예선 탈락! 대신 페리어는 여기서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딱하게도 막상 결혼하고 보니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데다 남편은 음악에 대한 아내의 열정을 이해하지도 못해,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녀의 남편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커리어에 공헌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937년의 칼라일 음악제(Carlisle Festival)에서 개최된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과 성악 부문에 그녀가 모두 출전하려 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당신이 성악 부문에서 예선에 통과하는 데 1실링을 걸겠다'고 비아냥거리자 오기가 발동한 페리어는 성악 부문에 보다 심혈을 기울여 결국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남편과 이혼하면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되리라 결심하여 정식으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역설적으로 그녀의 커리어의 시작을 도운 셈이죠?
1939년에 페리어는 칼라일 지방의 성악 교사인 J.E.허친슨(J.E.Hutchinson)에게서 최초의 정식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스승과 제자는 얼마 안 가서 제자의 목소리가 지닌 비범한 가능성을 발견하자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이 무렵부터 페리어는 지방의 각종 연주회(주로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연주회)에 콘트랄토 독창자로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면서 실제 무대에서 연주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마침내 스승 허친슨은 제자에게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제 런던으로 가서 음악적 완성을 위한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유명한 지휘자 맬컴 사전트 경(Sir Malcolm Sargent) 역시 그녀에게 런던으로 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리하여 페리어는 '큰 물'인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 커리어의 시작 : 콘서트와 오페라 무대에의 데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런던에서 왕년의 유명한 바리톤 가수였던 로이 헨더슨(Roy Henderson)을 사사하면서 음악성을 갈고 닦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던 페리어는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Dame Myra Hess) 여사에 의해 시작된, 런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에서의 유명한 점심 시간 콘서트(Lunchtime Conert) 시리즈에서 브람스, 슈베르트, 볼프의 가곡을 (비록 영어 번역 가사로서였지만) 노래함으로써 리사이틀 데뷔를 장식했습니다.
1943년 5월 17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지휘는 레지널드 자크(Reginald Jacques), 독창진은 소프라노에 이조벨 베일리(Isobel Baillie), 테너에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베이스에 윌리엄 파슨즈(William Parsons), 그리고 콘트랄토에 바로 당년 31세의 캐슬린 페리어였습니다. 대성공을 거둔 이 공연에서 비평가들과 청중들은 특히 '신인 콘트랄토 가수' 페리어의 목소리가 지닌 그 깊고 풍부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습니다.
이후 페리어는 전시의 영국 노동자들을 위문하기 위한 오라토리오 공연단의 일원으로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오라토리오와 칸타타의 독창자로 활약하면서 영국 음악계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영국의 주도적인 콘서트 전문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굳히게 됩니다.
페리어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46년에 찾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재개된 영국의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Glyndebourne Opera Festival,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전통있는 오페라 페스티벌로, 많은 유명 성악가들이 신인 시절 이 페스티벌을 통해 영국 무대에 데뷔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그의 신작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The Rape of Lucretia)를 세계 초연하게 되었는데, 브리튼은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루크레티아를 노래할 콘트랄토 가수로 처음부터 1943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의 "메시아" 공연에서 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던 페리어를 염두에 두고 루크레티아 역의 음악을 그녀의 목소리에 맞추어 작곡했습니다.
당연히 브리튼은 페리어에게 루크레티아 역으로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아냈고, 페리어는 영국이 자랑하는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벤자민 브리튼과는 평생을 함께 한 음악적 동지이자 동성애인[同性愛人] 사이이기도 했지요)와 함께 공연한 이 "루크레티아의 능욕" 세계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kathleen ferrier(coltralto), Julius patzak(tenor)/ Bruno walter,Wiener Philharmoniker 1. Das trinklied vom jammer der erde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 2. Der einsame im herbst 가을에 슬픈 사람 3. Von der jugend 젊음에 대하여 4. Von der schonheit 아름다움에 관하여 5. Der trunkene im fruhling 봄에 취한 자 6. Der abschied 고별 말러가 이 곡을 완성한 것은 1908년 봄 티롤의 토블라크라는 곳에서였다 . 이무렵 돌이킬 수 없이 건강이 나빠진데다(심장병) 심한 허무주의적 심경에 빠져 있던 그는 자기의 목숨의 불이 껴져 가고 있음을(1911년 죽음) 예감하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며 덧없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그래도 그대로 뿌리칠 수만은 없는 이승에 대한 집착을 되씹고 있던 그에게 한 권의 시집이 눈에 띄었다. 한스 베트게 (Hans Bethge)가 독일어로 역편한 <중국의 피리(Die Chinesische Flote)> 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은 중국시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산문으로 번역(한스 하인리만)한 것을 다시 시 형태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어떤 시는 본래의 것과는 딴판이 된 것도 있을 정도였지만, 당시의 탐미적인 정취와 동양적인 제행무상의 사상에 깊이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말러의 이 곡 제목에 대한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 보아야겠다. 당시의 말러의 심경이나 이 곡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대지의 노래>라는 우리말은 잘못된 것 같다 일본인의 번역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특히 이 경우는 심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Das Lied von Der Erde(=The Song Of The Earth)에서 Erde(=Earth)는 <흙>, <땅> 등의 뜻이 있지만 이렇듯 추상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저승>에 대한 <이승>, 즉 <현세>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현세의 노래>가 합당할 것 같다 말러의 염세적이면서도 현세에 대한 떨칠 수 없는 인간적인 집착 등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수긍이 갈 것이다 만약 이 곡명에서 <대지>를 고집한다면 첫째 곡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를 대지의 고통이라고 하는 넌센스가 생긴다 말러가 <중국의 피리>에서 가려 뽑은 시는 이태백, 전기, 맹호연, 왕유 등의 것이다 그러나 베트게가 정확한 번역을 하지 않은 데다가 또 말러가 작곡할 때 여기저기 손을 대서 악장에 따라 본래의 시를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특히 전 6악장 중 제1<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제2<가을에 슬픈 사람(Der Einsame im Herbst)>, 제3<젊음에 대하여(Von der Jugend)>의 세 악장은 원시를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4악장 이후는 비교적 충실한 편이다 제4<아름다움에 관하여(Von der Seh nheit)>는 이태백의 <채련곡>에서 비롯되었으며 여름날 연꽃을 따는 아가씨들에게 불량한 사내들이 말을 타고와 휘날려 떨어진 낙화를 밟고 가버려 슬퍼한다는 내용이다 제5<봄에 취한 자 (Der Trunkene im Fruhling)는 원시가 <봄날에 취해서 일어나 생각을 말하다>이다 사람의 일생은 한바탕 꿈과 같다 무엇을 그리 허둥댈게 있느냐 그저 종일 취해서 늘어진 채 기둥에 기대어 있는다 깨어나 뜰앞을 보면 새 한 마리 꽃 사이에서 운다 대체 지금이 어느 계절인고? 봄바람이 꾀꼬리와 수작한다 이에 느낀 바 있어 탄식하다가 술을 보면 저절로 또 기울인다 목청 돋우어 명월이 뜨기를 기다리려 했건만 노래가 끝나자 세상사 모두 잊고 취해 버렸다 이상이 대강 원시의 뜻이다 마지막 제6<고별(Der Abschild)>은 맹호연의 <업사 산방에서 묵고 정공을 기다려도 오지 않음>과 왕유의 <송별>의 시를 말러가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다 곡의 후반부에 쓰인 왕유의 시만을 대장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을 권한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디로 가는가? 그대에게 말하노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노라 돌아가 남산 밑에 누우리라 어서 가게나 다시 물을 것 없네 흰 구름은 머흘머흘 끝간데 없어라 말러는 여기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노라 돌아가 남산 밑에 누우리라>라는 부분을 <벗이여, 이 세상 행복은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내 고독한 영혼의 휴식을 얻기 위해 산으로 헤매어 든다네>라고 고쳐 놓았다 이런 부분만을 보아도 당시의 말러의 하염없는 심경이 엿보인다 실제 음악에서도 이 <고별>의 서두 부분에는 목관악기가 독특한 선열을 노래한다 그 온몸과 마음이 꺼져 들어가는 듯한 쓸쓸함, 그리고 이 세상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절실한 고백에 이어 한없이 사랑한 현세의 아쉬움과 수없이 다시 되풀이돼 돌아오는 봄에 대한 기대와 찬미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하고 허공 속에 녹아 들듯 사라져 버리는 아름다운 알토의 목소리로 끝나는 부분의 절망적인 아름다움은 탐미주의자 말러가 아니면 절대로 남길 수 없는 곡이다 이 곡의 결정적인 명반은 의당 초연자이며 또 최고의 말러 해석자였던 브루노 발터 지휘의 것이다 발터는 이 곡을 세 번이나 녹음했고 모두 다 손꼽히는 명반이지만 특히 빈 필과 훼리어(알토), 파짜크(테너)가 협연한 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발터의 깊은 감동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과 뛰어난 독창자들, 그리고 싱싱한 빈 필의 연주는 그야말로 삼위일체라 아니할 수없다 특히 캐들린 훼리어의 마지막 악장에서의 비극적인 목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드는 특이한 애절함과 야릇한 감명을 안겨 준다 몇 안되는 그녀의 음반 중에서도 이 <대지의 노래(현세의 노래)>와, 같은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Seraphim mono 60203),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Alto Rhapsody)>, <네 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ange)>(이상 Decca mono ACL 306, 307) 등은 레코드 음악사상 불멸의 명반으로 꼽아도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일찍이 발터에 의해 전화 교환수에서 일약 대가수가 된 훼리어는 그러나 하늘이 그녀의 뛰어난 노래에 감동했음인지, 바로 이 <대지의 노래>를 녹음(1952, 5 빈)한 이듬해 말러의 <고별>의 노래를 자기의 노래로 대신하고 현세를 떠났다 당시 훼리어의 나이 42세(1912--1953)였다(CD해설 발췌) 캐슬린 페리어 (Kathleen Ferrier, 1912-1953) 성악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가장 높은 음역을 커버하는 소프라노(soprano)와 그보다는 낮은 음역을 커버하는 메조소프라노(mezzo-soprano), 그리고 가장 낮은 음역을 커버하는 콘트랄토(contralto)로 나뉘어집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역(聲域, 독일어로는 "Fach"라고 하지요)은 물론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차지하는 소프라노입니다만, 메조소프라노도 많은 오페라에서 비중있는 조역을, 그리고 적지않은 수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성역인데 유독 콘트랄토(우리나라 학교 음악시간에는 그냥 '알토'라고만 합니다)만은 '존재하지조차 않는 듯이 여겨지는 일이 많은' 성역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면 역시 오페라의 주역이나 비중있는 조역을 노래해야 하는데, 오페라에서 콘트랄토가 주역이나 비중있는 조역을 노래하는 경우는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오르페오 역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全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오르페오 역도 원래는 카스트라토(남성 거세 가수)를 위한 역이었던 것이 카스트라토의 소멸로 콘트랄토에게 넘어오게 된 것이지, 본래부터 콘트랄토를 위해 씌여진 역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 역마저도 메조소프라노들이 노래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메조소프라노와 콘트랄토의 구분 자체가 모호하거나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콘트랄토 가수들의 정체성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는데, 실제로 콘트랄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야인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의 종교음악 연주에서조차 메조소프라노들이 콘트랄토의 파트를 노래하는 바람에 마침내는 순수한 콘트랄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콘트랄토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각각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출중한 두 콘트랄토 가수들에 의하여 콘트랄토는 비로소 정당한 음악적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이란 바로 미국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과 영국의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영어권 출신입니다.) 그런데 앤더슨은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인종주의에 물든 미국 사회에서 무수히 겪었던 가혹한 인종차별과 그것을 극복하고 정상에 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반면, 페리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의 독일 가곡 애호가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독일 가곡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특히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가곡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아직도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들이 말러를 교향곡 작곡가로만 알고 계십니다만, 말러는 슈트라우스와 더불어 20세기의 위대한 독일 가곡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페리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Kathleen Ferrier (1912-1953) 1. 초기 생애 : 어려웠던 가정 환경... 성악에의 입문... 런던 유학 본명은 캐슬린 메리 페리어(Kathleen Mary Ferrier), 1912년 4월 22일 영국 랭카셔 주의 하이어월튼에서 가난한 교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비록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음악 교사이자 그 지방의 열성적인 합창단원이기도 한 아버지와 음악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음악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만, 애초의 시작은 성악이 아닌 피아노였습니다.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되던 해에는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 신문사 주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피아노 강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실력을 쌓으며 장차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지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도, 상급학교 진학도 모두 포기하고 우체국에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열정마저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페리어는 좌절하지 않고 우체국에 근무하는 동료들과 함께 합창단을 구성하여 자신은 동료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를 맡는 한편 노래도 함께 부르며 취미로서 음악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주위의 권고와 격려로 1935년에 지방의 음악 경연대회 성악 부문에 출전했지만 아직 공부도 경험도 부족했던 탓에 결과는 예선 탈락! 대신 페리어는 여기서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딱하게도 막상 결혼하고 보니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데다 남편은 음악에 대한 아내의 열정을 이해하지도 못해,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녀의 남편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커리어에 공헌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937년의 칼라일 음악제(Carlisle Festival)에서 개최된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과 성악 부문에 그녀가 모두 출전하려 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당신이 성악 부문에서 예선에 통과하는 데 1실링을 걸겠다'고 비아냥거리자 오기가 발동한 페리어는 성악 부문에 보다 심혈을 기울여 결국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남편과 이혼하면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되리라 결심하여 정식으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역설적으로 그녀의 커리어의 시작을 도운 셈이죠? 1939년에 페리어는 칼라일 지방의 성악 교사인 J.E.허친슨(J.E.Hutchinson)에게서 최초의 정식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스승과 제자는 얼마 안 가서 제자의 목소리가 지닌 비범한 가능성을 발견하자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이 무렵부터 페리어는 지방의 각종 연주회(주로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연주회)에 콘트랄토 독창자로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면서 실제 무대에서 연주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마침내 스승 허친슨은 제자에게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제 런던으로 가서 음악적 완성을 위한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유명한 지휘자 맬컴 사전트 경(Sir Malcolm Sargent) 역시 그녀에게 런던으로 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리하여 페리어는 '큰 물'인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 커리어의 시작 : 콘서트와 오페라 무대에의 데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런던에서 왕년의 유명한 바리톤 가수였던 로이 헨더슨(Roy Henderson)을 사사하면서 음악성을 갈고 닦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던 페리어는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Dame Myra Hess) 여사에 의해 시작된, 런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에서의 유명한 점심 시간 콘서트(Lunchtime Conert) 시리즈에서 브람스, 슈베르트, 볼프의 가곡을 (비록 영어 번역 가사로서였지만) 노래함으로써 리사이틀 데뷔를 장식했습니다. 1943년 5월 17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지휘는 레지널드 자크(Reginald Jacques), 독창진은 소프라노에 이조벨 베일리(Isobel Baillie), 테너에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베이스에 윌리엄 파슨즈(William Parsons), 그리고 콘트랄토에 바로 당년 31세의 캐슬린 페리어였습니다. 대성공을 거둔 이 공연에서 비평가들과 청중들은 특히 '신인 콘트랄토 가수' 페리어의 목소리가 지닌 그 깊고 풍부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습니다. 이후 페리어는 전시의 영국 노동자들을 위문하기 위한 오라토리오 공연단의 일원으로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오라토리오와 칸타타의 독창자로 활약하면서 영국 음악계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영국의 주도적인 콘서트 전문 가수의 한 사람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굳히게 됩니다. 페리어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46년에 찾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재개된 영국의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Glyndebourne Opera Festival,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전통있는 오페라 페스티벌로, 많은 유명 성악가들이 신인 시절 이 페스티벌을 통해 영국 무대에 데뷔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그의 신작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The Rape of Lucretia)를 세계 초연하게 되었는데, 브리튼은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루크레티아를 노래할 콘트랄토 가수로 처음부터 1943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의 "메시아" 공연에서 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던 페리어를 염두에 두고 루크레티아 역의 음악을 그녀의 목소리에 맞추어 작곡했습니다. 당연히 브리튼은 페리어에게 루크레티아 역으로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아냈고, 페리어는 영국이 자랑하는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벤자민 브리튼과는 평생을 함께 한 음악적 동지이자 동성애인[同性愛人] 사이이기도 했지요)와 함께 공연한 이 "루크레티아의 능욕" 세계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46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의 "루크레티아의 능욕" 공연 후 피터 피어스(왼쪽), 벤자민 브리튼(오른쪽)과 함께 - 사진기자는 세 사람에게 "루크레티아의 능욕" 악보를 함께 보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마침 악보가 없어 '꿩 대신 닭'으로 전화 번호부(!)를 펼쳐 들고 찍은 사진입니다.^^ |
"루크레티아의 능욕"은 같은 해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도 초연되었는데, 페리어는 글라인드본에서의 세계 초연의 성공에 힘입어 네덜란드 초연(영국 이외의 나라에서의 초연이기도 했습니다)에서도 역시 루크레티아 역을 노래하여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의 데뷔를 장식하며 국제적인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청중은 이 "영국인 신예 콘트랄토"의 유니크한 목소리와 음악성에 완전히 매혹되어 열광해 마지않았고, 페리어는 이후 네덜란드에서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에 자주 서게 됩니다.
3. 발터와의 운명적인 만남... 재능을 활짝 꽃피우다
"루크레티아의 능욕" 네덜란드 초연의 성공으로 인해 그 때까지만 해도 영국 바깥에서는 무명에 불과했던 페리어의 이름이 유럽 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녀의 노래에 대한 높은 평판이 독일의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중 한 사람인 발터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생각되므로, 페리어와 관련되어 딱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발터는 구스타프 말러의 제자이자 친구이며 그의 작품을 계속 연주하여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장본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발터는 페리어가 말러 가곡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Bruno Walter (1876~1962)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연주한 공연은 1947년의 에딘버러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에서였는데, 레퍼토리는 바로 말러의 대표작인 '연가곡 형태의 교향곡' -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였습니다. 당시의 공연에서 피터 피어스가 테너 파트인 제1,3,5곡을 노래하고 페리어가 콘트랄토 파트인 제2,4,6곡을 노래했는데, 전곡 연주시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긴 곡이자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곡인 제6곡 "고별"(Abschiet)의 피날레 부분 - '언제나, 어디서나 / 지평선은 밝고 푸르게 빛나리라 / 영원히, 영원히...'에 이르러 페리어는 너무나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쏟는 바람에 마지막 '영원히(ewig)'를 그만 빼먹고 말았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나고 청중의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페리어는 혼비백산하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다시피 허겁지겁 무대 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아마추어처럼 이런 바보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이제 발터 선생님께서 나를 얼마나 야단치실까!'
연주자 대기실에서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던 페리어는 이윽고 다른 사람도 아닌 발터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제가 너무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바람에 그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당장에라도 벼락이 내릴 것을 예상하면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우리의 페리어...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발터는 "친애하는 페리어 양"(My dear Miss Ferrier) 하면서 그녀의 두 손을 다정하게 잡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처럼 진정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예술가라면, 우리들 모두가 그 대목에서 울고 말았을 겁니다."
야단은커녕 이렇듯 다정한 말에 페리어는 당연히 감격해 마지않았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말러 음악의 스승과 제자로서, 반주자와 가수로서, 그리고 음악적 동지이자 친구로서 페리어가 타계할 때까지 끈끈한 유대를 맺게 됩니다.
실로 발터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페리어는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러 해석의 최고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또한 페리어가 있었기에 발터는 "대지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3편의 노래" 등 레코드의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말러 음악의 위대한 명반들을 그녀와 함께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지휘자와 성악가 사이에 이렇듯 깊은 음악적, 정신적 유대관계가 이루어진 경우는 발터와 페리어를 제외하면 헝가리의 대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Ferenc Fricsay)와 스위스의 명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Maria Stader) 이외에는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1947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의 페리어
4.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다
발터에게 인정받고 난 후의 페리어는 글자 그대로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1947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무대에 올려진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오르페오 역을 노래하여 절찬을 받은 이후 발터의 지휘로, 또한 그의 피아노 반주로 빈, 잘쯔부르크, 파리, 베를린 등 유럽 각지의 연주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말러의 "대지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의 가곡들(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와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작곡가들의 가곡들이 그녀의 주요 레퍼토리였습니다.
1948년 1월 18일에는 발터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웨덴의 명테너 세트 스반홀름(Set Svanholm)과의 협연으로 뉴욕 카네기 홀에서 "대지의 노래"를 노래하여 뉴욕 무대에 데뷔하였는데, 당시 공연에 임석했던 명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뉴욕 필하모닉 협회에 편지를 보내 '이렇듯 빼어난 콘트랄토 가수의 노래를 들을 기회를 마련해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페리어는 영국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잘쯔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더아벤트(독일 가곡 연주회)를 가져 절찬을 받았으며, 1950년 빈에서 개최된 바흐 페스티벌에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지휘로 바흐의 "미사 B단조"와 "마태 수난곡"을 노래하였습니다.
당시의 "미사 B단조" 공연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노래했던 독일의 명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50년 바흐 페스티벌 당시를 회고하며, 카라얀이 "미사 B단조" 공연 당시 페리어가 노래하는 유명한 '아뉴스 데이'(Agnus Dei)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합니다. 카라얀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정말이지 그의 일생을 통틀어 극히, 아주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의 페리어
페리어는 콘트랄토인 자신의 목소리로는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할 여지가 별로 없는데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오페라에는 종교음악이나 예술가곡에 대해서만큼의 친화력을 느끼지 못하여 위의 두 편 이외에는 더 이상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오페라 가운데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만은 매우 좋아하여,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 작품의 공연에 출연하였습니다. 특히 1951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네덜란드 음악제에서의 공연 실황은 네덜란드 라디오 방송국에 의해 녹음되어 오늘날 페리어의 유일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전곡반으로 출반되어 있습니다.
1949년 암스테르담에서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공연을 마치고 - 사진 왼쪽부터 아모르 역의 소프라노 루이즈 드 브리(Louise de Vries), 지휘자 피에르 몽퇴(Pierre Monteux), 오르페오 역의 페리어, 에우리디체 역의 그레트 코에만(Greet Koeman), 무대 감독 아브라함 판 데어 피에스(Abraham van der Vies, 뒷줄 가운데)
1951년 1월, 네덜란드 음악제에의 출연을 위해 항공편으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Schiphol) 공항에 도착한 페리어
5. 콘서트 가수로서의 맹활약
페리어는 근본적으로 콘서트 가수였으니만치,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역시 종교음악과 예술가곡(독일 가곡)에서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페리어는 비(非)독일어권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가곡 가수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인정받은 가수입니다. 비록 정규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부단한 노력과 독학으로 독일어를 마스터했고, 타고난 음악적 지성과 남달리 풍부한 감수성을 조화시킨 개성있는 해석으로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초상 사진의 하나 - 드레스를 입고 가곡 연주회를 준비하는 페리어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오르페오 역으로 분한 페리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피아노 반주에 의한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의 가곡, 그리고 특히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말러의 가곡에서 당대의 내노라하는 독일 성악가들도 페리어의 탁월한 해석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음악적 해석의 스승이자 때로는 피아니스트로서, 때로는 지휘자로서 뛰어난 반주로 그녀를 뒷받침해준 발터의 공도 컸음은 물론입니다.
발터와 더불어 당대 제1의 말러 지휘자였던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역시 페리어의 목소리에 매혹되어, 1951년 네덜란드 음악제에서 유럽 굴지의 명문 악단인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과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연주하면서 콘트랄토 독창자로 그녀를 기용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제2번, 제3번, 제4번 및 제8번은 성악 파트가 포함되는 곡들입니다.)
하지만 페리어 자신은 온후하고 상냥한 발터와는 전혀 상반되는 불같이 격렬한 클렘페러의 성격을 솔직히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클렘페러 선생은 꼭 광란한 사람처럼 오케스트라에 마구 소리를 질러대곤 해요"라고 그녀는 리허설 도중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 있습니다. ^^
어쨌든 당시의 공연 실황은 정말 기쁘게도 Decca 레이블에 의해 CD로 발매되어 오늘날 접할 수 있는데, 잡음 투성이의 열악한 음질이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특히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에서는 마스터테이프의 노이즈가 대단히 심합니다) 연주 자체만큼은 정녕 비길 데 없는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명연입니다.
6.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 -
너무나 빨리 찾아온 죽음
그러나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서양 속담은 정녕 사실이었는지... 성악가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1년,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은 페리어는 유방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습니다. 당시는 이렇다할 항암제도 방사선 치료도 없었고 수술 요법의 성과도 신통치 않았으니, 암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단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절망과 불안의 와중에서도 페리어는 불굴의 의지로 병마와 싸우며 노래를 계속했습니다. 1952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이름가르트 제프리트, 율리우스 파착, 호르스트 귄터와 함께 브람스의 "사랑의 노래 - 왈츠"(Liebeslieder-Walzer)를 노래하고 (역시 당시의 공연실황이 Decca 레이블에 의해 CD로 출반되었습니다) 이어 5월에는 빈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그녀의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 된 말러의 "대지의 노래"와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3편의 노래"를 Decca 레이블로 녹음했습니다.
이 "대지의 노래"를 녹음하기에 앞서 페리어는 또 다시 암이 재발했음을 발견하고 두 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요양을 마치고 녹음을 위해 빈에 도착한 페리어는 Decca의 전설적인 레코딩 프로듀서 존 컬쇼(John Culshaw)에게 "이제 저는 괜찮아요"라며 활짝 웃었다지만, 불행히도 이미 그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사진작가 세실 비튼(Cecil Beaton)이 촬영한, 페리어의 공식적인 초상 사진의 하나 (1951년)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이제는 백혈병으로 요절한 천재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브장송 고별 연주회와 더불어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1953년 초,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은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존 바비롤리 경(Sir John Barbirolli)의 지휘로 무대에 올리면서 페리어에게 오르페오 역을 노래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페리어는 주치의를 위시한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5회의 공연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던 존 바비롤리 경과 페리어
그러나 계속 나빠져만 가던 그녀의 상태는 리허설과 2월 3일의 첫 공연으로 인해 급기야 악화 일로를 치닫기 시작했고, 진통제를 맞아가며 2월 6일의 두 번째 공연을 마치고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관객들을 위해 앙코르곡을 부르고 난 뒤 도로 무대 뒤로 돌아간 페리어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병원에 실려간 페리어는 두 차례의 수술도 헛되이 결국 이 두 번째 공연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무대에 서지 못한 채, 이후 수 개월간의 투병생활 속에서 말기 암환자의 혹독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문병하기 위해 슬픈 마음으로 찾아간 친구들과 지인(知人)들은 오히려 병상에 누운 그녀가 암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명랑하고 유쾌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늘어놓는 최신 유행의 농담에 실컷 웃고 돌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1953년 10월 8일 아침,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악가의 한 사람인 캐슬린 페리어는 런던의 한 병원에서 만인의 애도 속에 41세의 짧은 생을 조용히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안나 파블로바, 지크문트 프로이트 등의 위대한 인물들이 화장(火葬)된 곳이기도 한 런던 Hoop Lane의 Golden Green 화장장(火葬場)에서 화장되어, 이 화장장 안의 아름다운 정원 한 곳에 고이 뿌려졌습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나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휴식을 취하려 하는 거에요."
- 타계하기 직전 페리어가 남긴 마지막 말
*1952년에 처음 출시된 장미 품종 "Kathleen Ferrier" - 네덜란드의 장미 육종업자 Buisman 씨에 의해 개발된 품종으로, 페리어의 팬인 Buisman 씨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함
사람들은 여성 성악가의 목소리가 지닌 매혹을 논할 때 흔히들 "여성적인 따뜻함과 부드러움", "모성애(母性愛)가 느껴지는 친근하고 다정한 울림" 등의 표현을 쓰곤 합니다. 로테 레만,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몽세라 카바예 등 여러 위대한 여성 성악가들이 이러한 "여성적인 따뜻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엄마 품처럼 포근하며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에 담긴 "근원적인 여성성(femininity)" - 연인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그 포근함과 다정함 그리고 따사로움,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고 어루만져주는 것입니다.
페리어의 목소리야말로 그러한 "근원적인 여성성"에 가장 충만한 목소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의 따뜻함과 부드러움 그 자체로 이루어진 친근하고 다정한 울림, 마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나오는듯한 그 울림이야말로 다른 어떤 성악가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적인,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녀가 종교음악과 예술가곡에서 오늘날까지 최고의 해석자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이리라 믿습니다.
페리어는 성악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기간이 채 10년도 못되었고, 스테레오 시대로 돌입하기 전에 타계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녀의 음반은 모두 모노 녹음들이고 그나마도 음질이 열악한 실황녹음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최첨단 음질의 하이파이 녹음을 접하며 성장한 젊은 음악 애호가들이 여전히 그녀의 낡은 녹음에 경탄하며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은, 우리가 음반에서 느끼는 진정한 감동은 음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예술혼에 좌우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다행히도 페리어의 음반은 감상에 부족함이 없이 그녀의 레퍼토리를 대부분 커버하고 있을 정도로 시중에 충분히 나와있는데, 특히 그녀의 전속사였던 Decca에게 있어 페리어는 마리아 칼라스가 EMI에게 그러한 것처럼 (상업적으로는 칼라스에 못미치지만 음악적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지라 Decca는 자신들이 보유한 페리어의 녹음 음원을 빠짐없이 CD화하여 내놓고 있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의 마이크로폰 앞에 선 페리어
출처:http://blog.naver.com/boccacio?Redirect=Log&logNo=6215578
글쓴이 : 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