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의 가을
ㄹ ㅇ
흔들리면 안 되는데
흔들리면 안 되는데
자꾸만 흔들린다고
도반에게 귀엣말로 속삭이던
학승 하나가
낡은 바랑을 메고
가랑잎 굴러가듯 소리소문없이 ,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다는
산문을 등지고 말았다
가을이 와서 온 산하에,
도시의 거리거리, 쇼윈도까지도 남김없이
색을 쓰던 바람이
세파 와는 돌아앉은
고적한 산사의 담장까지도
잉여의 물감으로 칠갑을 하는 가을
절의 담벼락마다
줄줄이 담쟁이를 올리고
면벽 중 임을 알리는
금지 구역 표지판이 버젓이 서 잇는데도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행동거지와 말을 삼가해야 하거늘
마스크로 입은 틀어막고도
눈은 뜬 행각들의 호기심이
귀엣말로 속삭이며
이미 금기를 넘어서
수행 처까지도 기웃기웃.
지난 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와
눈꺼풀을 내리 누르는 천근만근의 잠과
밤 낮없는 사투를 벌이면서도
기어이
하안거를 끝낸 학승들이
요사채를 오가는
뒤꿈치조차 끄을지 않는 반달같은
고요로운 걸음걸이
하지만 그들인들 이미 속세를 떠났다하나
어쩔 수 없이 피가 끓는 젊음들인지라
색에 눈길이 안 갈수는 없었을 터
터질 듯 팽팽한 허벅다리의
청 나팔바지가
절 마당에 일구고 다니는 바람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만 색에 물 들어버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해버린다는
마이더스의 손이 닿은 것처럼
마음 안 자락에 받들어
고이 모셔온
금동 불상까지도 스르르 녹아 내리고 말았네
주장자가 내리치는
죽비 세례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눈썹 짙은 학승의
면벽삼매 용맹정진이
하루아침에 다 헛것이 되어 버리고 .
새파란 학승은
남녀가 굳이 몸을 섞지 않아도
눈으로 라도 색을 가까이하고 탐하면
색에 물드는 섭리를
진작에 몰랐을 터
산문에 들던 날의 초심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마스크를 쓴 아리따운 처녀 행객은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코로나 바이러스같은 색을
산문 도처에 전염시켜놓고는
무책임하게 떠나 버리고.
소소리 바람 이는
스산한 겨울의 입구
달랑
앙상한 마음의 지도 한장
절의 담벼락에다 걸어두고
학승 하나가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기어이 뇌피셜 속의
눈부처를 찾아내겠다며
충혈된 눈으로
사하의 저자거리로
홀연히 떠나갔다
산사의 빈 담벼락을
겨울 바람이 스켄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