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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사일 : 2005년 3월 6일 (일요일 당일)
2. 여행장소: 강릉일원
3. 여행일정
07:00 서울 압구정동 공용주차장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
10:00 굴산사지 도착
11:30 신복사지 답사
12:30 초당순두부 033-646-6890
13:00 선교장 답사
14:00 경포대해수욕장
14:30 허난설헌 생가 및 숲길 산책
15:30 참소리박물관
16:30 강릉출발
20:00 서울도착예정
강릉의 유래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후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 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 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강릉시청]
강릉단오제
강릉 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돼있다. 특히 이 축제는 옛부터 백성이 중심이 돼 치러져왔는데 여기에 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른바 '민관 공동의 축제'로 줄곧 열려왔다.
강릉 단오제에는 강릉지역 주민들의 삶을 관장하고 보호해주는 국사서낭신에 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제례의식이 행해진다. 특히 남신과 여신을 합사하는 봉안의식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지역 축제만의 독특한 것이다. 강릉단오제에서 모시는 신은 '대관령산신' '국사서낭신', 그리고 '국사여서낭신'등이다.
'대관령산신'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을 지칭한다. 또 '국사서낭신'은 신라말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사서낭신의 '짝'인 '여서낭신'은 국사서낭신이 호랑이로 하여금 데려오게 하여 아내로 삼았다는 '강릉의 정씨 처녀'라는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이 가운데 주신은 국사서낭신이지만 제의는 이 '세 분'의 신을 차례로 모시는 순서로 진행된다.
매년 음력 4월 보름이면 대관령에 올라 대관령산신에게 산신제를 먼저 올리고, 국사서낭신을 모셔오는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다. 강릉단오제례는 유교적 방식의 제례와 전통적인 무속이 어우러져 행해지는데 제사가 끝나면 무당이 굿판을 벌인다. 굿판이 끝나면 이어 신목을 베는데, 신목을 국사서낭신의 신체를 의미하기에 전체 제례의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각별하다. 먼저, 요란한 제금소리에 함께 무녀의 축원이 시작된다. 무녀의 축원에 따라 신장부가 잡은 나무가 떨리면서 신이 내리면 신목을 베어 내려오는데, 이 때 사람들은 다투어 오색의 예단을 걸며 각자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한다. 국사서낭신의 위패와 오색예단이 걸린 신목을 모신 일행은 무악을 울려대면서 대관령을 내려온다. 무리는 강릉시내를 한바퀴 돈 뒤 비로소 국사여서낭신이 모셔진 여서낭당으로 향한다. 당 안에 나란히 두 신의 위패와 신목을 모셔놓고는 제관들이 유교식 제례를 올린 뒤 무당들이 부정굿과 서낭굿판을 벌인다. 이 때부터 여성낭당에 모셔진 위패와 신목은 단오제가 시작되는 음력 5월 3일까지 그 곳에 모셔진다. 국사서낭신이 정씨 처녀를 데려다가 혼배한 날이 바로 음력 4월 보름이었다. 하여 두 분을 합사하는 일종의 봉안의례인 셈이다. 국사서낭신은 단오제가 끝나면 짧은 기간 동안의 합사를 끝내고 다시 대관령 서낭당으로 모셔진다. 이 때 역시 작은 축제판이 벌어지는데 이를 송신제라고 한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 말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禪宗)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선종 사상을 초석으로 아홉개의 산문(山門)이 형성 되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처음으로 실상산문(實相山門)이 개설된 828년(신라 법흥왕 3)에서 부터 마지막 수미산문(須彌山門)이 만들어진 932년(고려 태조 15)까지는 실로 104년의 긴세월이 흐른다. 현재 우리 불교의 종가를 이루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맥도 바로 이 구산선문에서부터 비롯 되었다. 수미산문 광조사는 북한지역에 있다.
■ 실상산문(실상사)
구산선문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이 실상산문이다. 개조(開祖) 홍척스님(?∼828)은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해 산문을 만들고 “정(靜) 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이는 그가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의 제자로는 편운과 수철이 있었는데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구산선문중 실상선문이 가장 왕실과 밀착 됐었음을 알 수 있다.
평평한 절마당 곳곳에 잘 보전돼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와 석등(보물 제35호), 창건주의 유골을 모신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탑비(보물 제39호) 등은 실상사의 내력과 함께 고찰의 역사를 웅변해 준다. 단층 기단위의 탑신 전체에 난간·신중(神衆)·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들이 정교하게 조작돼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은 통일 신라 시대의 지혜와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근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이 있다.
■ 가지산문(보림사)
도의선사(783∼821)는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에 머무르며 김언경 등의 후원 아래 사원 세력을 확장시켜 가지산문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난다(心足意興)는 화두를 강조했다. 이후 가지산문은 염거·체증·형미·진공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한 보림사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사천왕상과 긴 세월 속에서 자태와 위용을 한껏 뽐내는 삼층석탑, 석등(국보 제44호)을 만날 수 있다. 또 왼쪽 어깨에 새겨진 8행의 기록을 통해 보림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커다란 불상인 철제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근처에 있는 운주사와 쌍봉사도 가 볼만하다.
■ 희양산문(봉암사)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킨 희양산문의 개창자 지증선사(824∼882). 그는 다른 선문 개산조와는 달리 유학에 밝았고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 탄생·금기·출가 등 6이(異)와 불사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6시(是) 등을 주장했다.
봉암사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1년내내 오직 참선으로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다. 이 사찰의 최대 자랑 거리는 장중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지증대사적조탑(보물 제137호)과 탑비(보물 제138호). 인근에 김용사와 대승사가 있다.
■ 동리산문(태안사)
중국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또 하나의 산문이 바로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스님(785∼861)은 839년(신무왕 1)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해 산문을 이끌고 나갔다. 그의 제자로는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한 도선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찰에서 순례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맞배지붕 건물인 옛 누각 능파각. 긴 역사에 비해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수가 적어 전체적으로 단촐한 느낌을 준다. 선원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인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부도 이외에도 1454년(단종 2)에 만든 대바라 한쌍(보물 제956호)과 1581년(선조 14)에 제작된 명문이 새겨진 대웅전 동종, 해회당 마루에 걸려 있는 직경1m의 금고(金鼓) 등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인근에는 화암사와 천은사가 있다.
■ 사굴산문(굴산사지)
사굴산문은 범일스님(810∼889)에 의해 개창됐다. 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라 말한 그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그 뒤 진귀대사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다”고 설해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행적·개청·신의 등이 있으며 이 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굴산사는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범일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는 매우 유명했던 사찰이다. 전성기때에는 승려 수만도 2백여명이 넘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에 까지 흐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실돼 세인의 관심 밖에서 사라졌었다. 이후 1936년 강릉지방의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됐고 이때 부근 주민이 ‘사굴산사’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4m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또 이 절터에는 ‘굴산사지 부도탑’(보물 제85호)과 ‘굴산사지 석조 비로자나 삼존불상’이 남아 있다. 인근에는 등명낙가사와 보현사가 있다.
■ 봉림산문(봉림사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선사(787∼868)이다. 현욱은 824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의 법을 받아 837년에 귀국한 뒤 봉림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제자 심희는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율희와 연결해 봉림사를 열었고 이어 918년에는 왕건의 권유로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했다. 이어 심희의 제자 찬유는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했고 천태사상을 받아 들이기도 했다.
현재 봉림사 절터에는 남아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봉건사지에는 본래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 그리고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었는데 탑과 탑비는 일제시대때 경복궁으로 이건됐고 석탑은 1960년 사지 3㎞ 밑에 있는 상북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인근에는 성주사와 장위암이 있다.
■ 사자산문(법흥사)
사자산문의 개창조인 도윤스님(798∼868)은 825년(헌덕왕 17)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먼저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산문을 열었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오면서 부터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때인 7세기 중엽에 자장 율사가 문수 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 세 곳을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기도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곳에 들러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이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흥녕사에서 법흥사로 절이름을 바꾸었다. 옛날 흥녕사 시절에는 구산선문으로서 이름을 떨치며 전국의 도속(道俗)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었다. 하지만 오늘의 법흥사는 적멸 보궁 도량으로서 수많은 불자들이 바치는 ‘나무석가모니불’ 정근 소리가 사시사철 그칠날 없이 도량에 메아리 친다. 월정사, 구룡사, 정암사 등이 가깝다.
■ 성주산문(성주사지)
성주산문은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개창됐다. 무염국사는 821년(헌덕왕 13) 중국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 남포지역의 호족인 김흔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이 산문은 나말 여초에 가장 번창했으며 무염국사는 여엄·대통·심광·자인·영원 등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특히 이 산문은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성주사는 백제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 행랑 800여칸, 수각(水閣) 7칸등 성주사의 규모를 거의 1천칸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돼 그 장엄하던 절이 송두리째 자취를 감췄다.
성주사터에는 오층석탑, 금당터의 석조 연꽃대좌, 세 기의 삼층석탑 등 돌로된 것들만이 그 형체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 부도비중 가장 큰 것으로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의 부도비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옛 명성을 자랑하고 서 있다. 인근에는 무량사와 장곡사 등이 있다.
■ 수미산문(광조사지)
구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스님(870∼936)이다. 그는 896년 중국에 들어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15)에 귀국해 산문을 열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 제공과 왕유·이척량 등 전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띠었다.
광조사는 진철대사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됐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 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산문의 중심 도량인 광조사는 오래전에 소실됐고 이엄 즉 진철대사의 보월승공비(寶月乘空碑)와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황해도지>에 기록돼 있다.
구산선문 사찰의 특징
실상산문, 북종선 전수…왕실과 가장 밀착
가지산문, 도의선사 개창…性相不二 강조
희양산문, 순수국내 산문…일년내내 안거
사자산문, 최대 번성 문파…적멸보궁 갖춰
성주산문, 千칸 규모 대찰…화엄사상 융합
수미산문, 이엄이 해주에 세워…왕정 도와
동리산문, 中 서당法이어…고려창건 한몫
사굴산문, 범일국사 창립…조사선 일으켜
봉림산문, 마조선맥 부흥…일심근본 주장
굴산사지
굴산사는 신라 말기의 고승 범일(梵日:초명은 품일)이 문성왕(文聖王:850년경)때 창건한 사찰로 신라 불교의 종파인 5교9산(五敎九山)의 하나이다. 지금 남은 유적으로는 당간지주와 부도탑 두 국가지정 보물 외에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류와 초석(礎石) 그리고 전설로 전하는 석정(石井)등이 산재하고 있으며 사찰 규모는 약 15만평으로 추정할 수 있는 넓은 유지이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도 수천의 승려가 기거하는 웅장한 사찰이었으나 고려말 우왕(禑王)의 학산피신 사실과 전해오는 전설로 미루어 고려의 멸망과 함께 굴산사도 조선조 초기에 회철된 것 같다.
굴산사지로 추정되는 일대는 현재 농경지로 변하여 확실한 규모와 배치는 알 수 없으며 1936년의 대홍수로 농경지 일부가 유실되어 초석일부가 노출되면서 건물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굴산사지부도(국가보물 85호), 굴산사지당간지주(국가보물 86호), 굴산사지석불좌상(문화재자료 38호)등이 남아있다.
1) 굴산사지 석불
굴산사지에는 모두 4구의 석조불상이 유존하고 있다. 그중 2구는 1968년 후에 세워진 굴산암자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다시 보호각을 세워 정비하였고, 나머지 1구는 석천내에 있던 것을 그 주위에 방치된 부도탑재 위에 올려놓아 보호막을 세워 함께 정비하였다.
굴산암자에 봉안된 불상중 1구는 현 암자부근에 있었으며, 함께 봉안된 1구는 원래 석천부근에 있었던 것을 봉안한 것이다. 초안에 봉안된 것은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이며 지금 석천에 있는 석불은 산신지 부근에 있던 것을 이전하여 석천 중축시에 축석으로 이용하였다. 이들 4구의 석불은 모두 석조비로사나불좌상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굴산암자에 봉안된 2구의 석불은 좌고가 각각 110㎝, 83㎝ 이며 모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손 모습은 지권인을 취하여 있는데 그중 하나는 우수가 좌수의 상위에 있는 정형을 취하고 있으나 나머지 하나는 반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암내에 있는 석불은 화강암으로 된 좌상으로 통견의에 머리는 나발이며 손모습은 지권인이다. 상호는 완만하며 어깨가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머리에 커다란 관이 얹혀져 있다. 최근 세멘트로 메워 단을 만들었으므로 하부는 보이지 않는다. 전체높이 160㎝, 둘레 250㎝, 머리둘레 51㎝, 어깨넓이 124㎝, 가슴둘레 70㎝이다. 나머지 1구인 석천내의 탑재위에 올려져 있는 석불은 머리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지권인은 통식을 벗어난좌수가 우수위에 오는 변형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밖에 현 굴산암자 앞마당에 옥개석 1기가 방치되어 있으며 굴산사지에서 발굴 수집된 비편, 명문기와편, 막새류, 토기, 청자편 등이 관동대, 강릉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굴산사지 부도
굴산사지 부도는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식으로 하였으나, 부분 부분 새로운 수법이 가미되었다. 그 중 지대석의 양식이 특이하다. 이 지대석은 8각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넓은 석재 위에 이중으로 조각하고 그 중심에서 갑자기 줄어든 높은 굽을 만들어 하대석을 받게 하였고, 밑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어 접시 모양을 이루게 하였다.
하대석은 원래 2단으로 되었던 듯 하나, 현재 윗 부분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하대석은 밑에 8각의 굄이 있으나, 위는 원형으로서 화려하게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하대석의 윗 부분 중앙에는 중대석 굄이 마련되었으며 그 주위에는 홈이 패여 있다.
중대석도 둥근 모양인데 구름 모양의 무늬로 된 3단의 모양으로 여덟 개의 기둥 모양을 조각한 사이에 피리, 비파 등을 연주하는 천인상이 새겨져 있다. 조각의 섬세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 여덟 천인상의 아래 하대석에 구름띠를 형성함으로서 중앙에 자리한 천인상을 부각시켰다. 그 위 상대석에는 여덟 개의 앙련(仰連)을 조각하였는데, 판내(瓣內)에는 큼직한 화문(花紋)이 양각되었으며, 밑바닥에는 받침이 윗 부분에는 탑신 굄이 1단씩 있다.
탑신은 8각이지만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옥개(屋蓋)도 8각으로 특별한 조식이 없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고 전각(轉角)에 장식이 없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단판연화(單瓣蓮花)를 이중으로 돌린 보주(寶珠)가 얹혀 있는데 조각이 일품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8각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기단 일부에 원형을 겸하고 있다.
3) 굴산사지 석천과 범일국사 탄생설화
범일국사의 어머니는 성이 문씨라고도 하고 이씨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아직 처녀였을 때 일이다. 물 길러 석천 우물에 와서 바가지로 물을 떴는데 해가 바가지의 물에 둥둥 떴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처녀가 물을 마셨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후로 배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불러지더니 열 달만에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두 달이 더 걸려 열 네달 만에 잘생긴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야단이 났어요, 아부지가 "처녀가 남새스럽게 애를 낳으니 이건 집안 망신이니 어서 저 애를 산에 갖다 버리도록 해라"하니 처녀가 애를 뒷산 학바위 밑에나 갖다 버렸다구 해요, 버릴 때 덤불이 있는 곳에 가랑잎 등을 모아 푹신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애를 가운데 눕혀 놓고 마른 덤불로 덮어 놓았다구 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엄마의 마음은 아들을 버리고 오는 마음에 천길 만길 찢어질 듯 아팠데요. 그래서 삼일이 지나서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돼서 그 곳을 찾아갔대요. 그런데 거기서 학이 휙 날아가더라고 해요. 어쩐 일인가 싶어 덤불을 헤쳐보니 죽었을 것만 같은 애가 멀쩡하게 살아있더라고 해요. 휘 날아간 학은 멀리 가지 않고 덤불 주위를 빙빙 돌며 날고 있길래 신기해서 집으로 가는 척 내려오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학이 하는 행동을 살펴보니, 이제 사람이 갔구나 안심을 한 학이 덤불 속 보금자리에 내려와 날개로 애를 따뜻하게 해줄려고 품어주더래요. 이런 광경을 본 처녀는 급히 아버지한데 단숨에 달려와 죽은 줄만 알았던 애가 살아있으며 학이 날개로 감싸주더라고 본대로 말을 했더래요.
처녀의 말을 듣고 잠자코 있던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면 애를 낳은 게 네 탓이 아니구나, 그건 필시 무슨 뜻이 있어 천지 음양의 조화로 애가 생겨난 것이 틀림없겠구나. 그 애를 데리고 오너라 잘 키우자"
그래서 처녀는 애를 데려와 키웠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 애가 잘 크기는 하는데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전혀 말을 하지 않더래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벙어린 줄 알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부지 어머이가 모두 밭에 일하러 나가고 집에는 처녀만 남아서 정지(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이리저리 뛰며 놀고 있던 애가 정지로 들어오더니 갑자기 "어머이 내 아부지는 누구래요?" 묻길래 처녀로 애를 난 어머이는 차마 아부지가 누구라고 말 할 수 없을 뿐더러 석천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다가 해가 둥둥 뜨는 물을 마셔서 낳았다고도 할 수 없었더래요.
그 후 애는 말문이 트고 머리도 똘똘하고 아주 말도 잘하게 됐더라고 해요, 그래서 신라시대니까 서울인 경주로 가서 공부도 하고 서해바다 건너 중국에 가서 불도를 열심히 닦아서 훌륭한 스님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굴산사를 세우고, 죽은 뒤에는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해마다 단오 때 제사를 지낸대요.
4)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
굴산사의 창건자는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이다. 15세 때 출가하였으며 21세떄 흥덕왕 6년(831)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여러 고승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다가 제안선사(齊安禪師)를 만나 성불(成佛)하는 법을 물었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범일국사는 제안선사에게서 6년 간 수도하였고 그 당시 이름을 날리던 유업(惟儼)선사를 찾아가서 선문답을 나누고 크게 인정을 받았다. 884년 중국의 무종(武宗)이 불교를 탄압하는 법난(法難)을 일으키자 상산(常山)의 산 속에 숨었다가 소주(韶州)로 가서 혜능대사(慧能大師)의 탑을 참배하고 847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면서 홀로 정진하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고향에 돌아와 굴산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범일국사는 굴산사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교화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으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국사로 받들어서 그를 신라의 서울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입적할 때까지 이 곳을 떠나지 않았다. 범일국사 사후에도 굴산사는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고려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굴산사의 역사와 폐사 시기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성기에는 사찰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쌀 씻는 물이 동해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질 뿐이다. 폐사 후 잊혀져가다가 1936년 병자년 대홍수로 주춧돌이 노출되고, 굴산사지임을 밝혀주는 명기와가 발견되었다.
5) 굴산사지 당간지주
신라 문성왕(文聖王)때 강릉 학산출신 범일(梵日) 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유적이다. 이 당간지주는 일석(一石)식의 거대한 석재지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당간지주의 하나이다. 사면은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는 평면이며 아랫부분은 돌을 다듬을 때 생긴 잡다한 정(釘)자욱이 마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상대하는 내면과 외측면은 수직을 이루었고 전후양면은 거의 상부까지 수직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주상단에 올라가서는 양측을 둥글게 깎아 곡선을 만들고 정상은 뾰죽하게 하였다.
상단 가까운 곳과 지상에서 지주높이 1/3쯤 되는 곳에 두 기둥이 서로 통하게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당간(幢竿)을 고정시키는 간목(竿木)을 끼우던 구멍이다. 이 지주는 거대할 뿐 아니라 거기에 걸맞는 강인한 수법은 통일 신라의 작품다운 웅대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詩) 굴산사지 당간지주
아직도 지켜야 할 약속 있다는 듯,
지금도 표시해야 할 영역 있다는 듯,
꼿꼿하게 서 있는 굴산사지 당간지주*
절간 일대를
당차게 알렸던 거대한 기둥,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도
더 지켜야 할 것 있다고 우뚝 서 있는
저 아름다운 고집
빈 약속들을 수 없이 해대는
이 시대
지상의 길들 가운데,
이곳에
이런 선명한 기둥으로
묵묵히, 천년의 시간을 단단하게 여며온 마음
신복사지
신복사지 석불좌상은 비로자나불좌상이다.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소재 신복사지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절터라기 보다는 암자 터로 자리하고 있다. 신복사는 효통대사 범일(梵日, 840∼889)이 문성왕 12년(850)에 창건한 사찰로 국사의 고향인 명주(강릉)지방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 굴산사지와 함께 범일이 창건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그리고 각종 <읍지> 등에 기록이 남아 있자 않은 걸로 봐서 조선 초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지에는 석불좌상(보물 제 84호), 삼층석탑(보물 제 87호)의 성보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석불좌상 옆으로 음석(陰石)이 놓여져 있어 강릉 지역에 뿌리깊은 기자신앙(祈子信仰)이 사찰에 까지 번져 있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신복사지 석불좌상은 공양 보살상으로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충남 유형문화재 제 91호)와 같은 용맹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원통형의 관 위에 이고 있는 팔각의 지붕돌이 이채롭다. 이것은 눈이나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돌을 씌운 것으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옥외에 불보살상을 조성하면서 유행된 것이다.
지붕돌 안쪽에는 각 모서리마다 세 개의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는데, 모두 장식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복사지 석불좌상은 삼층석탑을 향한 고려 초의 독립 공양상으로 왼쪽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아 있으며 왼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두 손을 모아 쥔 채 가슴에 꼭 붙이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고정시킨 금속주가 그대로 남아 있다.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 석불과 제작 연대가 흡사하고 창건자인 범일국사가 개산한 사굴산문 굴산사지의 주존불이 비로자나불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신복사지 석불좌상 또한 비로자나 석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풍만한 상호와 복스러움이 가득한 미소 등도 법신불 특유의 친근함을 표현하고 있어 범일국사가 굴산사지를 개산한 후 암자 터로 신복사를 창건한 사실을 알고 후대인에 의해 비로자나석불이 조성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복사지 삼층석탑은 고려 특유의 공예적 아름다움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각부의 가구수법에 있어서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옥신 사이에 첨석이 하나씩 끼워져 있는 것은 고려시대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강원도 일대를 강타한 태풍 루사로 인해 신복사지 전체가 토사에 매몰되어 석불좌상의 흉부와 탑 기단까지 흙이 차는 수해를 입었다. 그러나 심복사지 보수대상현황(89년) 조사시 이미 탑의 후편이 경사지여서 우천시 빗물이 보호책 너머로 흘러 들어오는 등 배수 불량 판정을 받았으나 개보수시 이와 같은 내용이 보완되지 않아 수행을 예방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강원지역은 여느 지역과는 달리 폐사지가 많고 비로자나불상의 분포도가 높은 곳이다. 허술한 문화행정으로 인해 사지의 유실과 비로자나불상의 훼손이 가중되고 특정 종교인들의 광신적 행위로 인해 성보문화재가 위협받는 등 총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강원지역의 불교 문화재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야산 암자 터 신복사지에서 범일국사가 열어 보였던 연화장 세계가 이 땅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문화를 사랑하고 성보를 보존할 줄 아는 성숙된 문화시민의식이 우선해야 될 것이다.
객사문
고려태조 19년(936년)에 창건된 객사의 유적으로 현존 건축물은 고려말의 건축양식으로 추정된다. 이 문에 걸려있는 현액의 글씨 "임영관"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객사문은 강릉우체국 뒷편 낮은 구릉에 위치하며 고려 태조 병신년(936년)에 강릉부 객사로 임영관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고려말에서 조선초 사이에 건립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문은 객사의 외문으로서 1929년 일제시대에 공립보통학교로 사용중 운동장 확장공사로 인하여 본채의 건축물은 헐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국보51호으로 지정되어 있는 객사문은 정면 3칸, 측면2칸(48.42척X15.36척)주고 10.85척 주심도리 높이 13.65척 깊이 7.3척 총 건물고22.75척 단일스판5량집 맞배지붕이며 붕은 약간 솟음을 하고있다. 정면3칸에 커다란 판장문을달고 있으며 막돌초서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중앙 대문짝을 닫게 된 기둥은 방주로 처리하였다. 객사문 평주 밑부분에서 1척 간격으로 직경이 1.84, 1.85, 1.87, 1.89, 1.87, 1.85, 1.80, 1.74, 1.64, 1.5, 1.38, 1.18척으로써 최대직경은 주고의 1/3되는 지점에 있으며 강한 배홀림을 가지고 있고 포작은 2출목 주심포 형식이다. 외목도리와 주심까지의 깊이는 1.75척으로 짧게 구성되어 간결하면서 장중하다. 기둥위는 쌍방으로 결구하고 첨차를 내어 주두위의 살미점차를 받치도 있다.
주두의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으며 헛점차의 밑면은 쌍S자로서 되어있고 그단부는 사면으로 끊겨있다. 우미량은 굴곡이 심하지 않고 평보보다 약간 굽게 하였고 7량으로서 대들보를 앞뒤 평주위에 걸고 중앙에 같은 높이의 방주로 받치고 있다. 종보는 구름무늬로 조각된 동자기둥과 이 위에 우미량 다시 소로에 의해 받치고 있으며 종보의 중앙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칠사당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 인조10년(1632년)에 중건하여 영조 2년(1726년)에 확장 중수하였다. 순조 24년(1824년) 칠사(七事) 즉, 戶口의 정리, 農桑의 진흥, 軍政의 엄정, 學問의 흥기, 賦稅세의 균정, 訟事의 簡明, 奸猾의 禁息등 일곱가지 정사를 보았다하여 칠사당이라 하였다. 고종4년(1867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자형의 건물인데 정면 좌측에는 누마루가 연접하여 세워졌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수비대가 사용하는등 고초를 겪다가 1980년대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선교장
1) 개요
강릉에서 벚꽃길을 따라 경포로 향하다 보면 왼편으로 나타나는 작은 마을이 하나있다. 작은 마을처럼 보이는 이곳은 실은 개인주택인데 넓은 대지와 건물들로 인해 하나의 마을처럼 보인다. 선교장이라고 하는 이곳은 조선시대 상류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주택인데 그 크기는 개인 주택으로는 강원도에서 가장 넓다고 알려져 있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경포호가 지금의 크기보다 훨씬 더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넌다고 하여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넓게 보이는 경포호가 예전의 4분의 1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예전에는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선교장에는 옛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전시품과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선교장의 안쪽으로는 한국의 전통 탈과 장승을 깍은 곳이 있다. 자그마한 전통찻집을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목기를 깍는 모습과 다양한 모양의 탈을 감상할 수 있는데 볕 좋은 날이면 창으로 비치는 햇살이 더 따뜻해 보인다. 빛의 그림자에 따라 깍아놓은 탈과 장승의 모습이 다양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반기는데 그 앞에서 마시는 녹차의 맛도 특별한데가 있다.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 별당(동별당), 정각(활래정)등 민가로서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2)쪽제비가 집터를 잡다.
수 백 그루의 늙은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 꽉 차도록 들어앉은 엄청나게 큰 이 집은 건평만도 300평이 넘고 일자로 길게 뻗은 행랑채 안에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덩그렇고, 밖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 연못 위에 정자까지 갖춘 호화로웠던 대저택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이 경포대 근처의 저동에서 살 적에 어느날 쪽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이곳까지 왔는데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시루봉 줄기가 둘려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이곳에 새집을 짖고 이사했는데 그 뒤로 가세가 번창하여 여러 대를 거치면서 만석꾼이 부자가 되었으며 많은 집들이 지어져서 이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주이씨 그 후손이 살면서 강원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관동 제일의 전통가옥을 관리하고 있다.
3) 가옥배치에 따른 특징
선교장의 전체적인 특징은 옛날의 양반집들과는 달리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건물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긴 행랑채 가운데에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동시에 두고 있다.
솟을대문에서 세로로 선교장(船橋莊)이라고 쓴 작은 현판과 가로로 선교유교(仙橋幽居)라고 쓴 큰 현판 두개가 걸려 있다. 배다리보다는 신선다리에 살고 싶었나 보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추운 지방의 건물양식과 따뜻한 지방의 건물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살림집들은 대부분 지역적인 특색이 있는데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의 건물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있는 집들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선교장은 이 두 가지의 특색이 하나로 혼합되어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시원한 느낌을 주고 안채의 낮은 마루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집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전면에 긴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에는 중앙부와 동쪽 끝에 두 개의 문이 나 있는데, 하난는 솟을대문이고 다른 하나는 평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서별당과 사랑채인 열화당으로 통한다.
열화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로 거의 일자형 평면을 이루며, 약간 돌출된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사랑채 전면에 가설된 차양은 당시의 주택에서 흔히 불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평대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별당과 서쪽으로 서별당의 중문간채와 연결된다.
행랑채 바깥 마당에는 넓고 네모난 연못(方池)파고, 못가에는 활래정을 세웠으며 가운데는 삼신선산을 모방한 산을 만들고 한 그루의 노송을 심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일부를 누마루로 만듦으로써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 되어 주변의 풍경과 함께 뛰어난 조형미와 조원(造園)을 엿볼 수 있다.
■ 열화당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중 <열친척지정화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신조로 삼았던 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이 사랑채를 짖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세상일은 잊어버리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하랴, 친척의 정겨운 이야기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을 벗하여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자."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라는 시구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장소로 썼다고 한다.
돌계단 위에 높직이 올라선 이 열화당은 보기에도 시원하고 처마가 높아서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전통양식을 약간 벗어 난 듯 아마도 개화기의 새로운 멋을 도입한 듯하다.
■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하였으며, 선교장의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안방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며 건넌방은 큰 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이라고 한다. 그 앞의 행랑은 옛날 주인을 모시던 노비들이 거쳐하는 공간인데 지금의 행랑은 민속 유물과 옛 정취를 알 수 있는 물건들을 놓아 선교장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현재 이 집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 대문으로 들어가는데 안방, 부엌,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었고 상당히 넓은 부엌이 대가족을 거느렸던 살임 규모를 보여 준다. 안채와 동별당은 출입대문이 구분되고 서별당과의 사이에 담장을 둘러 외래객의 출입을 금지하는 여성들의 공간을 만들었으며 안채는 주인 여자가 거처하는 곳으로써 일반 주택과 같은 대청과 안방을 갖추고 있어 민간적인 성격을 나타내어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다. 동별당은 가족과 친인척을 만나는 공간으로 선교장 끝에 있으며 방과 대청으로 만들어져 조금 높게 솟아 있다.
■ 서별당
서별당은 주인의 서재이며 솟을대문 전면에 있다. 서고는 통풍이 잘 되게 누마루 형식으로 하여 서책의 보관에 용이하도록 하였고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들을 두어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하였다.
■ 동별당
동별당과 서별당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이 있고, 안채의 부엌과 'ㄱ'자형으로 연결되어 이 집 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는 동별당만 남아 있어서 대가족 제도하에서 부부만의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던 다감한 모습을 살피게 한다.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연못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 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위유원활수래(爲有源活水來)'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은 연못에 떠 있는 수중 정자를 연상케 한다. 연꽃이 피어있는 활래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꽃동산이 된다. 노을지는 저녁나절 연분홍 연꽃잎에 녹차를 두었다가 이슬 떨어지는 아침에 연꽃이 봉오리를 피우면 향긋한 연꽃향이 스민 녹차로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는 선비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귀한 손님이 오면 연꽃차를 대접한다고 한다. 활래정의 장지문을 지르면 두 개가 될 수 있는 온돌방이 물 위에 떠 있는 마루와 합쳐져서 "ㄱ" 자형을 이루고 방과 다실을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손님에게 차를 접대할 때 차를 끓이는 다실이 있다.
연못을 따라 활래정의 둘레를 돌때마다 그곳에 앉아 차를 달여 마시는 상상을 해보고는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연못의 한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다리를 놓아 다닐수 있게 하고 그 섬 위에 소나무와 꽃나무를 심어 한층 더 활래정의 풍경을 정겹게 만들었다. 선교장의 주변으로는 아름들이 해송들이 많은데 선교장의 격조를 높여주는데 한몫하고 있다.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의 안으로 들어가면 동편으로는 안채, 왼편으로는 열화당(悅話堂)이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는 시구처럼 형제와 친척들이 모여 놀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선교장의 안채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분되는데 현재에도 전주이씨의 후손이 선교장을 관리하며 안채에 살고 있다.
선교장 입구의 활래정은 서울 비원의 부용정과 같이 연못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연못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수면공간을 건축적 요소와 결합하여 멋스럽게 외별당 사랑채를 이루고 있다. 장지문에 의해 온돌방과 대청으로 나누어지고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접객을 위한 다실이 있으며 외부는 전부 분합문의 띠살 창로로 만들어 지고 있다. 활래정 방지의 연못은 조선시대 선비의 피안의 세계이며 중앙의 섬은 이상향의 도착점이다. 그곳에는 수석이 있고 노송이 심어져 있어 건너가 자연과 대화하고 명상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보교가 사라져 그러한 멋스러움을 가질 수 없다. 조선 시대의 은거하였던 선비의 멋스러움과 한국 상류주택의 너그러운 품성이 함께 배어 있으며 옛날의 영화를 간직한 선교장은 '배다리' 라는 이름으로 강릉 경포호수 깊은 자락에 천연스럽게 가슴을 벌리고 함께 있다.
조선시대 차실의 원형-선교장 활래정
강원도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茶室인 활래정(活來亭)은 조선말 사대부의 차풍을 현 시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적이다.
여기는 특히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부속 차실이 있다는 건축양식과 8대를 전해 내려온 손때 묻은 야외용 차통 등 귀중한 茶具 97점도 볼 수 있다는데...
활래정의 나이 180년, 전국에 이만한 茶亭은 통털어도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유적이다.
가지마다 밝은 꽃과 빽빽한 대나무 들어 있는데
주인은 작은 연못 속의 정자에 있네
그름이 걷히니 푸르름이 산봉우리에서 그림처럼 드러나고
비가 내린 후 붉은 꽃은 젖어서인지 온갖 풀이 향기롭구나
느지막히 휘장치고 동자불러 차 한잔 얻으니
개인 난간에는 퉁소부는 객이 있어 차향속에 잠겨있네
그 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번이나 티끌 세상이 헛되이 긴 줄 알겠구나
활래정 지붕 안팎으로 걸려있는 빽빽한 현판 중 1850년께 판각된 오천 정희용(烏川 鄭熙鎔)의 칠언시다. 茶室로 쓰기 위해 오은거사 이후(鰲隱居士 李후:1773~1832)가 활래정을 지은 것이 순조 16년인 1816년, 46세 때였다. 이 시기는 바로 근세의 대표적인 茶人 해거도인 홍현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 스님등이 차 한잔으로 청교를 맺던 조선조말 차문화의 전성시대였다. 당시만 해도 한양에서는 멀기만 한 험준한 대관령을 넘어 이곳 활래정을 추사가 다녀갔고 편액과 병풍, 추사가 남긴 차시등을 봐서 활래정 주인 오은과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추사뿐 아니라 순조 때 영상이었던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근대에 와서는 소남 이희수(少南 李喜秀), 무정 조만조, 규원 정병조,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 일주 김진우, 백련 지운영, 농천 이병희, 성재 김태석,옥소 심형섭, 차강 박기정, 등과 신학문에 뛰어났던 성재 이시영, 몽양 여운형 등 수많은 거물급들이 이곳을 들러 詩畵를 남기고 갔다. 그야말로 신선의 풍류가 휘감아 도는 정자라 할 만하다.
선교장의 사계(四季)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단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출렁이고 그 물 위로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연못에서 연잎이 솟고 烏竹荀이 얼굴을 내밀며 아지랭이가 춤추는 앞 냇가 버들가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출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에서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노송, 고목 속에 온갖 새들의노래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이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만나는 활래정의 연꽃은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뽑아 올리고 자태를 뽐낸다. 이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으로 또 역대 주인들의 후덕함으로 선교장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기타
안채와 열화당 사이, 이가옥의 가장 고요하고 깊숙한 곳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이 건물은 6.25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또한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한편 건물의 측면에는 동진학교 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원래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였으나 한말 개화기때 신식 학문을 교육하던 곳으로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20개도 넘는 방과 부엌, 곳간, 마굿간으로 이루어 졌는데 현재 각 방은 민속유물을 전시하는 전시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행랑채에서는 농기구며 각종 생활용품을 제작하고 또 아픈 사람을 위한 약제를 제조하는 등 내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선교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넉넉한 선교장의 인심은 이들을 웃음으로 보내고 흉년이 들면 거침없이 창고 문을 열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어 활달하고 개방적인 심성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 집안을 통천댁이라 불렀던가...
아침을 여는 낮은 안개가 선교장 주위를 감싸며 선교장 장원의 한옥지붕 곡선과 주위 울창한 송림을 아련한 환상 속의 그림으로 만들면 가을은 끝이 나고 겨울이 시작된다. 열화당 사랑채 앞마당에 눈이 쌓이고 사방천지 사물은 성장을 멈추고 긴 겨울밤은 봄을 기다리면 풍류를 좋아하는 이곳 사랑방에는 시회가 열리고 당대 유명한 서화가들이 모여 그들의 재주를 즐기고 있다.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라는 열화당의 뜻과 같이 동별당에서는 친척들 간에 모여 가족의 화목을 다지고 내방객이 뜸하면 서별당 서재에서 책을 벗하고 선교장의 정신과 맥을 이을 자식을 교육시키고 있다.
선교장을 둘러싼 눈덮인 노송위에 때때로 학이라도 찾아오면 은둔하는 선비와 학과 푸른 소나무는 함께 어우러져 이곳을 신선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선교장을 하나의 건축물로서 평가하기에는 건축문화 내면에 있는 지역 문화의 중심적 구심체로서의 역할은 너무나 크다. 번창하였던 영동제일, 그 공간에 현재의 우리가 와서 바라볼 때 그들이 걸었고 생활하였던 그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선교장 식구가 잠시 되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안채, 서별당, 활래정을 걸어가며 그 문화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선교장은 벼슬과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대부로서의 은둔 생활을 즐기는 집안이다.
무경의 손(1773 - 1832) 오은거사가 대표적 인물로써 영정조때 건축한 안채와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활래정, 지금은 사라진 팔각정을 건축하여 현재 선교장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활달하고 개방적 성격에 맞게 건축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중문의 형식을 취하는 폐쇄적인 "ㅁ" 자 형의 배치가 아니고 인간적이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한눈에 집안 전면을 볼 수 있게 측면으로 펼쳐지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열화당은 높은 기단 위에 여름을 위한 넓은 대청과 겨울을 위한 방들을 갖추고 작은 대청이 누마루 형식으로 놓여있다. 많은 손님을 접객하는 주된 공간이므로 큰 대들보를 T 자형으로 걸치고 외부공간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 외부 창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경포호
경포호는 흔히 말하는 석호이다. 요즘은 많이 오염이 되어서 많은 물고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호수도 훨씬 맑고 넓었다고 한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와는 대조적으로 잔잔하게 고여있는 경포호 역시 은근한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관광객들을 유혹합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는 뜻의 경포호는 파도에 밀려온 모래나 자갈이 만들어낸 자연석호로, 원래는 12km에 달하는 넓은 호수 였으나 주변에서 모래와 흙이 흘러들어 4km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호수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우며, 호수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주위에 세워진 12개의 누각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호수 중앙에는 온갖 새들이 찾아와 놀고 가는 새바위가 있으며, 바위표면에는 조선 숙종때 송시열이 쓴 조암이란 글씨가 새겨있습니다.
경포호 주변에 잘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것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며 새로 조성된 조각공원에서 멋진 사진 한장 남기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입니다. 4계절 내내 아름다워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경포해수욕장이지만 특히 봄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경포주변이 온통 하얀 꽃나라로 변하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 낸답니다.
문의전화 033-640-4671(경포도립공원 관리사무소)
경포대
동해안 해수욕장의 대명사인 경포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호숫가 건너편 언덕 위에 소나무와 벚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까닭이다.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절경을 지니고 있다. 바다와 호수를 한아름 안고 있는 빼어난 경치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이 남긴 경포대 유감(有感)이 경포대 누각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우선 '경포대'라는 현판은 전서체로 쓴 것과 해서체로 쓴 것 두개가 있는데,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쓴 것이고, 해서체는 조선 순조 때 승지를 지낸 명필 이익회가 쓴 것이다.
'제일강산'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 또는 조선 전기 서예가의 한 사람인 양사언이 썼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숙종의 어제시, 명문으로 알려진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시와 글귀가 남아 있다. 율곡이 10세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도 판액되어 있다.
경포대에 뜨는 달은 몇 개?
'거울처럼 맑다'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에는 달이 네 개 뜬다는 말이 있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에도 하나. 하지만 여기에 또 덧붙여 님의 눈동자 속에도 달이 뜬다 하여 옛사람들의 낭만을 느끼게 한다.
경포팔경
1)녹두일출
녹두는 경포호의 동남방 해안, 울창한 송림 속에 위치했다고 하는 옛 한송정을 가리킨다. 경포대에서 보면 동쪽이 되므로 해돋이 때 바다와 호수면을 함께 비추는 그 장엄한 광경을 말한다.
2)죽도명월(竹島明月)
죽도란 동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는 경포호 동남쪽 해안에 돌출된 봉우리를 말한다. 경포대에의 달맞이는 달빛이 하늘과 바다와 호수에 한 기둥을 이룬다 하여 예로부터 삼월주(三月柱)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장엄한 것이었다.
3)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은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키는데 그곳엔 어촌마을이 자리잡고 있다.(현재의 강문동) 또 어화는 밤에 고기잡이를 할 때 비추는 불빛을 말하는 것으로, 마을의 불빛과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떼를 이루어 보이는 야경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4)초당취연(草堂炊煙)
초당은 경포호 동남쪽에 있는 울창한 송림을 이룬 동네이다. 초당 허엽이 은거하면서 허난설헌과 허균을 기르던 곳. 해가 서산에 기울면 이 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오르는데, 경포대에서 보면 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는 솔밭에서 연기만 줄줄이 오르는 평화로운 모습을 일컫는다.
5)홍장야우(紅粧夜雨)
밤에 홍장암을 적시는 부슬비를 말한다. 옛날 강원감사로 와 있던 박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초도순시차 강릉에 온 박신을 강릉 부사인 친구가 대접코자 경포대로 데리고 가서 기생 홍장과 함께 잔을 기울였다. 홍장은 굉장한 미인으로 애교가 넘쳐 박신을 사로잡았고, 그날밤을 함께 보냈다.
강릉 순시를 마친 박신은 홍장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돌아가지 못하고 도로 강릉으로 내려왔다. 그러데 이게 웬일. 그 사랑하는 홍장이 죽었다는 게 아닌가? 애통하고 섭섭한 나머지 박신은 마음을 달래고자 경포에서 뱃놀이를 하게 되었다. 당시는 감사가 뱃놀이를 하면 민간인의 배는 들어오지 못했는데 멀리서 사방에 불을 환하게 켠 배가 박신의 배 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놀란 박신이 자세히 보니 홍장이 배에 타고 있었다. 박신이 놀라 물으니, 홍장이 "옥황상제님에게 분부를 얻었습니다. 감사께서 여기서 선유를 하는데 제가 어찌 안 올 수 있겠습니까?" 했다. 죽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던 사람이니 그 반가움이 얼마일 것인가.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시며 노는데, 홍장의 "저는 돌아가야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 깨어보니 날이 벌써 환히 밝아있었다. 그런데 홍장이 여전히 옆에 있는 게 아닌가? 그때 강릉부사가 아침 문안을 왔는데요, 홍장이 감사와 함께 있으니, 적잖이 놀라 "대체 무슨 일인고"하고 홍장에게 물었다. 홍장이 "저의 계략이 어떠한지요.."하고 말하니, 모두 그제야 알고 박장대소하였다.
경포의 홍장암에 '홍장'이라고 각인을 해 놓은이가 바로 죽은(?) 홍장과 하룻밤을 보낸 박신이라고 한다.
6)증봉낙조(甑峰落照)
증봉은 경포대 서북쪽에 위치한 시루봉이라는 산을 말한다. 석양녘에 저녁노을이 걸려 있는 시루봉의 낙조는 경포의 절경중의 하나이다.
7)환선취적(喚仙吹笛)
옛날 신라의 선인인 영랑, 술랑, 남랑, 안상 등 네 선인들이 놀던 곳으로 바득 두고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하다. 시루봉에서 바둑을 두며 부는 피리 소리가 달빛 고요한 밤이면 송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8)한송모종(寒松暮鐘)
옛날에는 신라 불교의 융흥기를 상징하는 한송사의 저녁 쇠북소리가 은은히 경포호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초당 저녁연기와 시루봉에 낙조의 구름이 걸렸을 때 울려 퍼지는 종소리...
경포대해수욕장
강원도 강릉의 경포해수욕장은 부산의 해운대해수욕장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해수욕장입니다. 백사장의 길이만 6km에 이르는 대형 해수욕장으로 강릉시 안현동과 강문동에 걸쳐 있답니다. 남쪽 강문동 앞 해변을 따로 강문해수욕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같은 해변입니다.
해수욕장 앞바다에 작은 바위가 두 개 있는데, 각각 오리바위와 십리바위라 불림니다. 여름이면 이 바위까지 헤엄쳐 가는 사람도 많고, 여름이 아니어도 보트를 타고 바위로 나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경포해수욕장은 유명 해수욕장답게 숙박시설이나 음식점 등의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최근에는 해수욕장 남쪽으로 새로 카페촌이 형성되고 있어 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해수욕장 남쪽으로 작은 포구인 강문항이 있어, 바다낚시나 회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지척에 아름다운 경포호가 있어 봄 벚꽃과 겨울 철새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강릉시에서 북쪽으로 6km, 경포대에서 1km의 거리에 해마다 수백만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국내 최고의 해수욕장인 경포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넘실대는 파도, 은빛 백사장, 잔잔한 호수, 그리고 백사장을 병풍처럼 감싸주는 4km에 달하는 해송림과 해당화는 곳곳에 자리한 문화유적과 함께 경포해수욕장을 전국최고의 해수욕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하게 조화된 경포대, 오죽헌, 해운정 등의 뛰어난 문화유적들은 관광의 수준을 한차원 높여주고 있습니다.
허난설헌, 허균생가
경포대 정자에서 보면 경포호수 맞은편 동남쪽 소나무 숲속에 허난설헌의 생가가 위치해 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허엽이 살던 곳으로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이 곳의 동네 명칭은 초당이라 하며, 허난설헌생가 집 뒷편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바닷물을 간수로 해서 만드는 초당두부가 유명하다.
경포대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대문 앞에 둥그런 우물이 있고 대문으로 들어서면 전면에 행랑,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본채가 있으며, 본채는 두 대문을 사이에 두어 사랑채와 본채로 구분되어 있다. 집 바깥에는 초가로 된 디딜 방앗간이 있고 디딜방앗간 뒷편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나무 숲속을 지나 예전에는 경포호수로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경포호수의 범람과 호수로 밀려드는 토사피해를 막기 위해 지천을 파놓아 아쉽게도 호수로 가기가 쉽지 않게 되어있다.
허난설헌
그녀는 세 가지의 恨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앓이 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여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평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설헌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녀는 일찌기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전해집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 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여비,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입니다.
哭子(곡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출처: "김억 한시역선)
허균
조선 중엽 강릉에서 태어난 허균(許均, 1569∼1618)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하여 무너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였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유교사회 하에서도 불교와 도교, 천주교 심지어 민속종교를 넘나드는 사상의 자유로움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도된 권위와 사회적 질곡에 맞서 개혁과 저항의 행동가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사상의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정치와 잘못된 제도를 실천적으로 개혁하려 했으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오직 두려워 할 만한 자는 백성뿐이라고 갈파하여 왕조사회를 뒤흔들었고, 더 나아가 바른 정치를 이끌어나갈 호민(豪民)인 민중들이 힘을 보여줄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미래지향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현실정치를 통해 실천하기를 꿈꾸었다. 따라서 그를 선구자나 선각자라고 평하기보다는 실천가요, 행동가요, 개혁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했으며, 모두가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한글로 이상국가의 꿈을 그린 <홍길동전>을 남겼다. 한마디로 그의 꿈은 평등사회, 개방사회, 국제사회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미 400년 전에 우리가 나아갈 민주사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히 부각된다.
허난설헌, 허균생가터와 시비
허균은 1569년 애일당(사천진리에 위치)에서 태어난 뒤 강릉 시내 경포 호수 옆에 있는 친가 초당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 뒤에는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부근)에서 살았다. 24세에 임진왜란이 나자 함경도로 피난을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애일당을 찾아 2년간 살았으며, 그때 퇴락한 애일당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경포호를 지나 해변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약 10여분 가량 가면, 사천진리가 나온다. 이곳 조그만 야산에 허균의 생가터가 있다. 언덕 같은 야산은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인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교산이라고 불리웠다고 하고, 허균도 자신의 호를 이 이름에서 따 왔다. 교산 아래에는 허균의 외가이자 생가인 '애일당'이 있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언덕에 허균을 기념하는 '교산시비'가 있을 뿐이다.
김시습
<짧은 이야기>
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탄식하는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두 왕을 섬기란 말인가!" 그들은 단종에 대한 의리를 져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이들을 후세 사람들은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생육신이란,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를 말합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호는 매월당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습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멋진 시를 읊었습니다. 세종은 기특해서 상으로 비단 오십 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을 너 혼자 가져갈 수 있겠는가?" 다섯 살 난 꼬마 김시습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어디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자."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끝자락들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줄줄이 사탕처럼 묶은 비단을 끌고 집으로 갔습니다. "어린 녀석이 참 기특하군!" 이 일이 있은 후, 세종은 더욱더 그를 아꼈습니다. 김시습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삼각산에 있는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우며 울었습니다."나라가 어지러운 이 때 공부는 해서 뭐해!"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삿갓을 쓰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김삿갓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 작가의 생애와 일화
15세기 한국사상사를 대표하는 김시습은 문학사의 전개에 있어서 <금오신화>란 한문소설을 창작한 인물인 동시에, 유교의 이기철학과 불교의 화엄사상, 그리고 선도의 내단사상을 한몸에 지닌 사상가이면서, 세조의 찬탈로 인한 왕권교체의 충격을 감당해야 했던 불우한 선비의 전형이기도 하다. 김시습의 모순된 행적과 그의 사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행적과 사상을 각기 개별적 현상으로 따로 다룬 관계로 그를 나쁘게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김시습은 고려말 길재 등으로부터 전승된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생육신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에 의탁한 행적이 문제되어 유학사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김안로가 일으킨 여러 차례의 옥사 이후에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매월당으로 지칭될 정도로 사후에 그의 청절이 인정되었다.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이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뜻을 잃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뒤로는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는 한때 오세암에 은거했었다. 선가에서는 그가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선도를 닦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선가서인 해동이적과 해동전도록에 자세히 쓰여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에게 선도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이다. 김고운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본명히 설현이었다. 설현은 고려 때 우리 나라에 유람차 왔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렀다가 권청 진인을 만났다. 권진인은 영생불사하는 선인이 되어 최치원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 머문다는 분이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다. 훗날, 설현은 명오라는 스님을 서대산에서 만났는데, 명오스님한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설현은 명오스님의 지도에 따라 8년 동안 수행하여 득도했다. 설현은 득도하자 곧 선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도를 전수해줄 제자를 만나지 못해 인연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다. 이름을 바꾼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백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통감>을 가르쳤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 김고운은 조선 세종 18년(1436)에 드디어 선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에서 만났다. 당시 매월당은 팔팔한 청년이었다. 또 자기를 극진히 아꼈던 세종이 아직 왕위에 있던 때였으니,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싶었다. 김고운이 매월당에게 수도하라 권했지만, 매월당은 관심이 없었다.
그후,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 김고운이 그를 찾아왔다. 매월당은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김고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열심히 선도를 닦았다. 김고운은 매월당에게 도를 전한 뒤에 수해선이 되었다. 수해선이란 몸이 물로 화했다가 선계로 올라가는 선인을 일컫는 말이다.
<해동이적>은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에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이 일찍이 설악산에서 은거하는데, 강릉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가되겠다며 찾아왔다. 김시습이 그들의 인물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에서 매월당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지 어느덧 반 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스승이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최연은 김시습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는 체하고 있다가, 김시습이 방을 나간 다음 곧바로 뒤쫓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와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다. 최연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너무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김시습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정색을 하고 최연을 꾸짖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너무 번거롭고 조잡하여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 물러가라." 최연이 백배사죄했으나, 김시습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도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이인들이다. 정희량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지냈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종적을 감췄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둬라. 그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 윤군평이 스승 김시습을 개성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 윤군평의 물음에 김시습이 이렇게 대답했다. 김시습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은 산 사람과 똑같았는데 얘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도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세암은 선계(仙界)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선인이 되었다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금오신화 작가 김시습의 저항적 김시습(1435~ 1493)은 세종 17년 서울 교외에서 충순위의 벼슬을 하던 가난한 문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아직 돌도 되지 않았던 어느날, 이웃에 살고 있던 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아기인 김시습에게 문장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한다. 그는 세살이 되자 어려운 한문책을 줄줄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시의 재상 허조는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이다.“이 얼마나 천재적인 표현인가! 너는 과연 신동이로다.”재상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덧 궁중에까지 들어가자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은 김시습을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들을 시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았다. 시험관의 무릎 위에 앉은 김시습은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시 몇 수를 지어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매우 감동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천재라는 소문이 송도에 울려퍼지게 되었으며,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는 칭호를 받아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왔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 결혼을 하면서 집으로부터 탈출하여 서울에서 떨어진 중흥사에 들어가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계유정란이 일어난 1455년, 당시 21세였던 김시습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추방하고 왕위를 탈취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세종과의 약속을 삶의 큰 지주로 삼아 언젠가 세종의 손자인 단종 밑에서 큰 일을 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었던 그인지라, 그 소식은 청년 김시습에게 너무나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방안에 틀어박혀 고민하며 통곡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부하기 위해 가져온 책과 지필묵 등을 모두 깨끗이 태워 버렸을 뿐 아니라 가위로 손수 머리털을 자르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이 때부터 그는 염세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일개 초라한 승려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러던 1456년 6월에 세조의 암살 모의에 대한 단서가 새어나가 성삼문 등이 극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시습은 그즈음인 1456년부터 1457년까지 송도를 비롯한 평양일대를 계속 유람하며 <탕유관서록>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은 향토적인 풍물성을 띠고 있으나, 실은 그 속에 당시 통치계급들의 부패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 1457년 10월, 김시습은 단종이 살해됐다는 말을 전해 듣고 8명의 동지를 모아 산 속에 사당을 짓고 세조정권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다. 이 소식이 세조의 귀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김시습은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일대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1460년 <탕유관동록>을 썼고, 또 호남지방을 돌며 1463년 <탕유호남록>을 썼다. 이렇게 장장 8년에 걸친 전국여행을 통해 그는 백성들의 생활실상을 알게된 동시에 구석구석에 만연한 권력층의 부패를 샅샅이 보게 되었다. 1464년 30세가 된 김시습은 주거지를 강원도에서 신라고도인 경주 근처에 있는 금오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5년 3월, 효령대군의 추천을 받아 서울로 갔으나 권력사회 속에서 양심을 굽히며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따라 다시 금오산의 사당으로 돌아와 권력에 저항하며 살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는 소설 <금오신화>와 <유금오록>이라는 저항시를 썼다. 세월은 변하여 1468년 세조가 죽고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죽고, 세조 장남의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시습에게 상경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1471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유일한 마음의 친구였던 서거정이 ‘달성군’의 칭호를 받는 대귀족의 한 사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일관된 저항정신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1472년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쓰기를 계속했다. 그는 언젠가 서강을 여행하다가 보았던 세조의 수족인 한명회의 시를 인용해 자신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시를 짓기도 했다.
이러한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 ‘臥’자 대신 ‘汚’자를 넣어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며 이 시를 읊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김시습의 증오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그도 철저한 불교도가 되지 못하고 44세가 되던 1478년,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결국 환속할 것을 결심하고 유교의 법도에 따라 제사를 지냈을 뿐 아니라 새로 부인을 맞이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또 심기일변할 사건이 생긴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그가 서울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것이다. 그때가 1483년, 그의 나이 49세였다. 하지만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던 중 건강의 한계를 느낀 그는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라는 누추한 절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 절에서 1493년 2월에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신사임당
조선조의 여류서화가, 호는 사임당 또는 사임재이다.본관은 평산, 진사 신명화의 딸이며, 어머니는 이사온의 무남독녀이다.남편은 감찰 이원수이며, 이이의 어머니이다.
그의 품성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지조가 높아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혔으며, 문장, 침공, 자수에도 능통했다.특히 시문으로는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領望親정)>,<사친(思親)>등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림으로는 산수,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려 여성의 섬세함을 잘 표현하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리도>,<산수도>,<초충도>,<리안도>,<연로도>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베풀어 율곡이이와 같은 성현을 배출하게 되었다.
참소리박물관
살다보면 뭔가에 정신없이 미치게 되는 시기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주머니 돈이 궁해서 인지, 돈이 별로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이 수집대상이 되는데, 딱지나 스티커, 인형, 연예인 사진같은 종류가 타겟이 되고… 이후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음반이나 영화 포스터, 성냥, 양주병 그리고 혹은 사랑에 미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미침 증상>은 일시적인 경우가 많아서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게 되고 그 물건들은 일순간 <쓰잘데기 없는> 잡동사니 물건들로 분류되어 쓰레기통行 신세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여러 잡다한 물건들을 수집했던 “나름대로의” 보물상자가 있었는데… 나이를 한 살두살 먹고 보니, 왜 그리도 그 물건들이 하찮게 보이는지, 급기야 이런 대사를 읊고 말았다. “참나, 내가 이걸 왜 모았을까?”
어느 시기, 열병처럼 우리를 훑고 지나갔던 그 수집벽들… 하지만 이 세상엔 나처럼 잠깐의 미열로 수집을 한 사람만 있는건 아니어서 평생의 업처럼 끌어안고 사는 사람도 분명 있다. 자신의 젊음과 정열, 시간을 모두 그 곳에 쏟아붓고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기대고 사는… 물건에 시간을 덧얹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번에 방문한 <참소리 에디슨 박물관>은 축음기에 대해 뜨거운 신열을 앓고 있는, 축음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놀라운 열정을 갖고 있는 수집광 손성목씨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비주얼 문화가 발달하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요즘은 사람도 물건도 그 속내보다는 허우대에 더 치중을 하게 된다. 물론 나중에 시간을 들여 만나다 보면 겉보다는 속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쨌건 지금은 확실히 겉포장이 중요한 세상이 됐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이곳 참소리 박물관은 첫 점수를 그리 좋게 받지는 못할 거다. 왜냐하면 박물관 외관을 처음 본 사람은 분명히 “에게게…” 소리가 절로 나올테니까. 하도 들은 칭찬이 많아서 나름대로 화려한 기대를 하고 갔는데 박물관 겉모습이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개인돈 을 들여 명품들을 모으고 또 건물비까지 충당하려니 주머니 사정이 좋을 수 만은 없어서 축음기 박물관은 상가건물을, 에디슨 박물관은 컨테이너 박스 안을 전시실로 개조해서 만들었고, 그래서인지 그 많은 소장품들을 전시하기에는 턱없이 공간이 부족했다. (좁은 공간에 그 많은 물건들을 전시하려다보니 물건들과의 여유간격이 적어 답답한 느낌도 있었고, 부천박물관에 전시물을 떼어주지(?) 않았다면 이 많은 물건을 어떻게 다 보관을 했을까, 혼자 별 걱정을 다 했다.) 그리고 조명 역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어서, 전시실을 비추고 있는 허여멀건 일반 형광등은 명품들의 고급스러움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관람객들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어느 전시실이건 큐레이터 오빠들이 이 한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금년에 경포대로 확장이전 합니다. 그때 더 좋은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허우대가 맘에 안찬 그대,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본 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를 듣는 순간… 앞서 느꼈던 섭섭한 마음은 눈녹 듯 사라질 거다. 왜냐하면 이 박물관은 죽어 있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물건들이 놓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20여개국에서 만든 축음기 4,500여점, 음반 15만장, 서적 1000권과 자료 5천여점> 이런 방대한 규모에 기가 질리기도 하지만 이것을 눈으로 마음으로 귀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이런 점에서 이 곳은 살아 있는 곳이다.
1,2,3 전시실에는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웨스턴 일렉트릭 보이스 15-A, 16-A, 25-A, 22-A, 혼 시스템, 폴리폰, 동전 투입식 선곡형 축음기 멀티폰(세계에서 두 대밖에 없다고), 수공예 캐비넷형 축음기, 오토매틱 그래머폰 (최초의 리모트콘트롤 기능을 가졌다) 초기의 외장형 나팔 축음기(원통형,원반형), 내장형 나팔 축음기, 실린더형 축음기 아메리칸 포노그라프(세계에서 딱 한 대밖에 안남았단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TV ‘베어드 30라인 텔레비전’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축음기 명품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중에서 사람들의 탄성을 가장 많이 자아냈던 것은 바로 그 축음기를 통해 실제로 음악을 재연해 듣는 시간인데, 손으로 태엽을 돌리는 세계 最古의 수동식 축음기 ‘HMV 202’로 음악을 듣는 순간 사람들 눈이 동그래지기 시작하더니,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 Tin Foil로 음악을 들을 때는 거의 찬사를 연발했고, 오디오실에 준비된 최첨단 매킨토시 앰프와 대형 스피커로 쩌렁쩌렁한 음악을 들었을때는 그 웅장함에 또 다른 감탄을 자아냈다.
“아… 에디슨 할아버지 당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즐깁니다. 땡큐”
에디슨이 ‘메들린’을 위해 만들었다는 말하는 인형. 가슴부위에 축음기 장치를 넣어 놔서 6곡의 노래도 들을수 있다고
호기심 천국, 에디슨 발명품관
그런데, 축음기 전시실 못지 않게 눈길을 모으게 만드는 물건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에디슨 발명품관! 총 850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 곳(세계에서 에디슨 발명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그래서 외국 관람객들도 꽤 많이 온다고 한다.)은 가히 호기심 천국이어서 에디슨의 발명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그가 발명한 축음기와 영사기, 주식시세 표시기, 전구(직접 점등까지 해준다.), 선풍기, 딸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다는 인형 (배안에 축음기를 넣어서 음악이 자동으로 흘러나오고 인형을 눕히면 눈이 감기고 세우면 눈이 뜨는 기능도 이때 그가 만들었다고.) 아내에게 선물한 커피포트 등 정말 셀 수 없을만큼 재미난 물건들 투성이었다.
에디슨 박물관 관람객들
니퍼 이야기 ‘His Master’s Voice’
귀를 쫑긋 세우며 축음기 앞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개 한 마리. 아무리 음악에 관심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그림은 어디선가 한번쯤 보았으리라. 1889년부터 축음기의 심벌 마크로 사용 되었던 니퍼는현재 참소리 박물관의 마스코트로 사용되고 있다.(지금은 EMI사의 저작권 만료 기간이 끝나서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영국화가 프랜시스 바로가 그린, 축음기 선전용 그림인 ‘His Master’s Voice’ 에 얽힌 찡한 이야기 한 토막. 니퍼는 평소 주인과 함께 축음기 앞에 앉아서 ‘무도회가 끝난 뒤’라는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주인이 죽자 니퍼는 축음기 곁을 떠나지 않았고 “무도회가 끝난 뒤”라는 음악이 나올 때면 혹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 앞에서 기다렸다는 그런 얘기… 그런데 이건 리얼 스토리가 아니었다. 극작가 프랑크 씨멘가 만든 이야기라고. 에디슨이 발명한 수많은 아이디어물건들. 매일 일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중 다섯가지정도는 에디슨의 발명품이다.
*홈페이지 http://www.edison.or.kr/
축음기, 열정 그리고 손성목 관장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손성목 관장은 6살 때 아버지로부터 축음기 한 대를 선물 받게되는데 1951년 1.4후퇴 당시, 손성목 어린이는 피난 보따리를 싸는 부모님께 축음기도 갖고 가야 한다며 울며불며 생난리를 쳤고 그 정신없는 전쟁통에 축음기를 등에 짊어지고 38선을 넘었다고.
■14세 되던 해, 삼촌으로부터 고장난 축음기(고장난 걸 선물로 주다니)를 선물로 받은 손성목 어린이는 맥가이버처럼, 아니 에디슨처럼 밤새 축음기와 씨름을 한 끝에 새벽이 되어서야 축음기를 완벽하게 고쳤는데 그 순간 들었던 축음기 소리에 또 한번 마음을 빼앗기고 확실한 다짐을 하게 됐다고.“이 길이 내 길이여
에디슨이 1877년 발명한 최초의 축음기(모델명 틴포일·Tin Foil)에서 최첨단 시스템의 오디오, 기록과 사진자료, 15만여 점의 음반, 7천여 점의 관련서적 등 방대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전문박물관으로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진귀한 물건들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뮤직박스관, 에디슨관, 본관등 3개 관으로 꾸며져있다.
뮤직박스관은 축음기 이전의 소리상자를 전시한 곳. 원통형, 원반형, 나무 롤러를 돌려 한정된 곡을 자동으로 연주하는 플레이어피아노, 오르골 여러 개로 다양한 악기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리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에디슨관에는 축음기, 백열전등, 영사기 등 에디슨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모아 놓았다. 60여종 500여 점의 발명품과 그의 축음기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에디슨 관련 박물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소장품을 자랑한다.
본관에는 축음기의 발전과정을 볼 수 있는 각 시대의 명품이 전시돼 있다. 오디어감상실이 있어 축음기 소리와 최첨단 오디오 시스템의 소리를 비교해서 감상할 수 있다
초당순두부
순두부의 고장 강릉에서도 120년 전통의 한옥 흙집으로 가장 정남향으로 지어진 고택에서 대를 이어가며 재래식으로 순두부를 만드는 집이 있다. 3대 원조 옛날 초당순두부가 바로 그 집으로 순두부를 찾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둘러보아야 할 강릉의 순두부 명가이다.
원조 옛날 초당 순두부는 동해의 청정한 바닷물을 직접 길어와 간수를 하여 만드는데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가장 큰 특징이다. 새벽부터 준비하여 콩을 갈아 끓이고 순두부가 나오기 시작하는 아침부터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금방 건져낸 따끈한 순두부를 즉석에서 맛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정성에 걸맞게 상차림도 정갈하면서도 깔끔하여 강릉전통의 음식 맛을 한 가득 맛볼 수 있다. 원조 옛날 초당 순두부에서 만든 모두부는 고소하면서도 탄력이 있어 맛깔스러운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하는데 특히 "순두부전골"은 한 번 맛을 본 사람이면 잊지 못할 정도로 그 맛이 입안 가득 맴돈다. 순두부를 만든 후에 나오는 비지는 뚝배기의 투박한 만큼이나 그 개운한 맛과 영양 면에서도 일품이다. 경포바다와 경포호, 해운정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원조 옛날 초당 순두부 집에 들러 대를 이어가며 전통의 맛을 전하는 이곳에서 그 맛을 느껴 보도록 하자.
첫댓글 자료집 만들기 참 힘들다. 휴- 이제 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