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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7월 29일) 오늘은 그레고리력으로 210번째(윤년일 경우 211번째) 날에 해당한다 |
🌺1500년~1800년대🌺 | |
✿1588년 영국 해군,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16세기 지중해를 주름잡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1571년 오스만 제국와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명성을 떨쳤다. 1588년 7월 2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대패함으로 힘의 중심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세말 이후 지방 분권적인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수립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광대한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한 펠리페 2세 때, 레반토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포르투갈도 합병해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스페인의 세력확대를 위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행한 청혼과 스페인 상선을 습격한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의 처형요구가 모두 거절당한데 앙심을 품은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28일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무적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 수병 8천명에 육군 1만9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천명으로 이에 맞서게 했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태풍으로 이날에서야 영국 해안에 도착한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공격에 지리멸렬했다. 피신한 프랑스 칼레 연해에서 영국함대로부터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었으며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이 이 전투에서 70여척의 배와 약 1,800여명의 병사를 잃은데 비해 영국은 배 한척에 전사자도 겨우 100명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자리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차지했다. | |
✿1836년 파리 개선문 완공 1836년 7월 29일 파리의 에쿠알 광장에 개선문이 들어섰다.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연전연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기 시작한 개선문은 고전주의 건축가 샬그랭의 설계로 착공했으나, 설계자도 얼마 뒤 죽고, 나폴레옹도 실각해 공사가 중단됐었다. 이어 여러 건축가와 조각가의 손길을 거쳐 7월 혁명 이듬해가 돼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다리 부분을 장식한 조각 장식 가운데 뤼드의 ‘라 마르세예즈’는 특히 유명하다. 높이 49 m, 너비 45 m의 개선문은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 |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사망 귀에 붕대를 감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1889). 런던 커톨드 미술관 소장. ‘불꽃의 화가’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비참함과 고뇌에 찬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37세였다. 빨강, 파랑, 노랑색이 주조를 이룬 그의 그림은 언제나 강렬했고, 자연이나 인물들은 한결같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고흐는 색깔 그 자체로 정신세계를 표현했고, 색채의 움직이는 듯한 신비감은 그의 그림의 전부였다. ‘빨간 포도밭’이 생존해 있는 동안 팔린 유일한 그림일 정도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집념과 정열만으로 답답한 현실을 이겨냈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집안사정으로 어려서부터 직업전선을 전전해야 했다. 1880년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서 혼자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1881년 화가 모브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마침내 1885년 최초의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으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한때는 고갱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곧 헤어졌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다. | |
🌱1900년대🌱 | |
🌲05년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일본의 야욕이 더욱 노골화되던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조선을 방문하자 민영환ㆍ이준 등은 그를 몰래 만나 조선이 처한 현실을 루스벨트에게 알릴 수 있는 특사 파견을 제의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앨리스는 승낙했고 고종은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했다. 헐버트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 을사조약(1905년 11월)이 체결돼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고종과 헐버트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그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방문하기 전인 1905년 7월29일에 이미 가쓰라ㆍ태프트 밀약이 체결돼 미국은 더이상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밀약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도쿄로 파견한 미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간에 체결됐다.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보장받는 대신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진 제2차 영일동맹(8월)과 러일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9월)으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공공연하게 강요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 |
🌲07년 보안법 공포, 집회.결사 금지 | |
🌲21년 히틀러, 나치스당 당수 선출 아돌프 히틀러 1921년 7월 29일 뮌헨에서 열린 나치스(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특별 당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543표대 1표차로 당 제1위원 당수에 선출됐다. 대회전에 히틀러는 다수파방식과 의회적인 절차를 모두 폐지하고 당수를 정점으로 한 엄격한 명령-복종의 원칙 `지도자 원리`를 확립하고 당의 구성을 바꿨다. 이로써 히틀러는 나치스의 독재자가 됐고 이후 그의 결정은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 1932년 7월 31일 총선거에서는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고 1933년 1월 30일에는 마침내 독일 수상에 취임해 전세계가 전쟁과 학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 |
🌲22년 전국에 큰비내려 197명사망, 가옥피해 2만여호 🌲46년 비키니수영복, 파리의 패션 쇼에 처음으로 등장 | |
🌲48년 한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1948년 7월 29일, 제14회 올림픽이 런던에서 개막됐다. 2차대전으로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한국을 비롯,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 일본·독일·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첫 참가한 한국대표단 한국은 광복 후 처음 출전한 하계올림픽에 축구·복싱·역도 등 7개 종목에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을 출전시켰다. 그 해 1월, 단 3명 뿐인 초미니 선수단이 파견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이 광복 후 출전한 첫 올림픽이었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참가비용은 액면가 100원인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1948년 7월 29일 개막한 제14회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의 김성집 선수가 역도에서 동메달을 따냈고(왼쪽) 이화여중 박봉식은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여자선수가 됐다. 독립기념관제공 6월 21일 서울역을 출발해 열차로 부산에 닿은 선수단은 다시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7월 2일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으나 인도·이집트·로마를 경유하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결국 20일이 지난 7월 8일이 돼서야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 11일 김성집이 역도에서 첫 동메달을 따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감격을 맛본데 이어 한수안도 복싱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은 참가국 58개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리(李)가 하이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런던 올림픽이었다. | |
🌲49년 육군참모학교, 제1기생 29명 졸업식 거행 | |
🌲52년 국회 특별위,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 발표 정부가 중석불(重石弗·중석을 외국에 팔아 획득한 달러)을 민간상사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이 국회에서 문제화됐다. 상당수가 상인과 결탁했다는 혐의가 있어 1952년 7월 18일 특별위를 구성해 열흘간의 조사 끝에 7월 29일 박만순 위원장이 한국최초 정치자금 의혹사건인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발표에 의하면 정부는 대한중석·고려흥업·남선무역 등 13∼14개 상사에 중석불을 부정 불하하여 이들 민간상인으로 하여금 밀가루 9940t, 비료 1만 368t을 수입하게 했다. 수입된 밀가루와 비료의 처분을 둘러싸고 정부와 상사측이 결탁, 80%를 상사측이 자유판매하여 5백여억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국회의원이 개입되어 형식적이고 미흡한 조사에 그치고 말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재무부장관 함인섭 만 인책 사직했을 뿐 폭리취득죄로 기소된 상사측은 이듬해 5월 무죄선고를 받고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6·25 후의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여건과 정치의 부패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며 정치권력과 결탁한 기업인 부정축재의 효시로 기록돼 있다. | |
🌲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발족 1992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제36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의 진행 모습.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53년 제8회 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창해 1956년 70개국의 서명을 받아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57년 7월 29일 발족됐다. 주요기관으로는 총회와 이사회를 설치했다. 주요임무는 1.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위한 연구개발과 실용화를 장려 원조하고, 물자-설비시설의 공급에 있어서는 가맹국 상호간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나아가서는 필요한 독자적인 활동업무를 한다. 2.물질 업무 설비 시설을 제공한다. 3.과학 기술에 관한 정보교환을 촉진한다. 4.과학자 전문가의 교환이나 훈련을 장려한다. 5.제공한 원조가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보장조치를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용한다. 6.보건 안전상의 기준을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이것을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있어서도 적용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 |
🌲60년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참의원) 선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1960년 6월 15일 확정된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에 따라 `국회의원선거법`이 새롭게 개정돼 6월 23일 공포되었고 이전의 민의원은 해산됐다. 허정 과도정부는 새 `국회의원선거법`에 의거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할 선거를 1960년 7월 29일에 실시했다. 이로써 1952년 제1차 개헌(발췌개헌)을 통해 입법화된 후 한국전쟁과 자유당의 장기집권 등으로 인해 한번도 구성되지 못했던 양원제 국회가 구성됐다. 투표율은 84.3%였다. 선거결과 233명의 민의원 당선자중 민주당이 175명으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됐고 자유당이 2명, 사회대중당이 4명, 한국사회당, 통일당, 기타단체가 각 1명, 무소속이 49명 당선됐다. 참의원은 58명의 당선자 중 민주당 31명, 자유당 4명, 사회대중당과 기타 단체가 각 1명, 무소속이 20명이었다. | |
🌲64년 계엄해제,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구속. 포고령에 위반 890건에 1120명 검거 🌲65년 김해에서 군인 30여명 난동, 경찰서 습격코 기자 납치 🌲66년 국무회의,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 공표 (경제성장률 연7%) 🌲67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기공 🌲71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들 집단사표, 전국 판사들 동조 (사법파동), 8월28일 사표철회로 매듭 | |
🌲81년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1981년 7월 29일 결혼식을 올린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버킹검궁 발코니에서 키스를 하고 있다. 32세의 찰스 영국 황태자와 20세의 다이애나 스펜서양이 1981년 7월 29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런던 성바오로 대성당에서 ‘세계의 결혼식’을 올렸다. 황태자는 해군 정장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문장이 그려진 파란띠를 두르고 있었다. 오전 11시 ‘트럼펫 바운타리’가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가운데 다이애나가 식장으로 걸어나와 찰스에게 다가갔다. 찰스까지의 거리는 7.62m로 4분이 걸렸다. 그녀는 엷은 아이보리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필립 찰스 아서 조지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로버트 룬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맹세했다. 찰스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가락에 웨일즈 금반지를 끼워 주었다. 결혼식은 1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신혼부부는 70년 된 마차를 타고 버킹검 궁으로 향했다. 이로써 다이애너양은 지난 1970년 이래 첫 황태자비가 되었고, 3세기 만에 처음으로 왕위계승권자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맞이했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1남 3녀 중 막내로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다이애나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진짜 공주처럼 세상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엄격한 왕실 생활은 숨이 막혔고 12살 연상인 남편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 후 계속된 불화로 우울증에 걸려 5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다 결국 1996년 8월 찰스와 정식 이혼, 1997년 8월 31일 파리 알마광장 지하터널에서 새 애인 도디 알 파예드와 파파라치의 추적을 피하다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 |
🌲81년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 프랑스로 망명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 호메이니에 의해 해임돼 신변불안을 느낀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이 1981년 7월 29일 공군기로 이란을 탈출, 프랑스로 망명했다.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신뢰로 지난 1980년 1월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온건파 바니 사드르가 망명한 이유는 강경파인 회교혁명평의회(IRP)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온건파 사드르를 제거키로 결정한 IRP가 1981년 3월5일 사드르 연설장에서 소란을 피우자 사드르 지지파와 이들간에 충돌사건이 발생,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부터였다. 이 사건후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는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총 동원돼 사드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사드르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 은신에 들어갔다. 6월20일 혁명검찰부는 체포령을 내렸고 6월22일 호메이니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 |
🌲81년 한국, 제11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루마니아)에서 20위 🌲83년 인구시계, 우리 나라 인구 4000만을 돌파 했다고 표시(인구밀도 세계 3위) 🌲84년 LA올림픽 개막 🌲86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민우 신민당 총재 회담, 국회 헌특위 통한 합의개헌을 재다짐 🌲88년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일해재단등 30건을 1차조사대상으로 확정 🌲88년 4당대표 및 국회의장단,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준비접촉 국회대표 15명을 8월 판문점에 보내기로 🌲88년 경제기획원, 경제개발 6차5개년계획 수정계획 확정 🌲89년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경비원의 부인인 朴모 여인, 2차례나 뇌없는 태아를 제왕절개수술등으로 유산 🌲89년 문규현신부 평양파견 관련, 천주교 사제단의 남국현·박병준·구일모 신부 등 3명 구속 🌲89년 태풍 주디호의 영향 부산·경남지방에 집호우가 내려 부산 사상공단이 침수되고 산사태로 12명 사망 | |
🌲90년 몽골 최초의 자유선거 실시, 인민혁명당(공산당) 승리 최초로 실시된 몽골의 자유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몽골사상 최초의 자유총선이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1990년 7월 29일 실시됐다. 이번 선거는 1921년 몽골혁명 이래 69년동안 계속돼 온 공산당 일당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이 스스로 뽑은 대표자들로 국회를 구성, 보다 본격적인 개혁에 나서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전국의 지방의회의원과 함께 상원격인 4백30석의 대후랄(인민대회)의원, 하원격인 59석의 소후랄의원을 선출한 선거 결과 현집권당인 인민혁명당(공산당)이 상원에서 의석의 80%를, 하원에서 의석의 60%를 얻었다. 집권 공산당은 압승에도 불구하고 야당들과 연립정부 구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곰보자빈 오치르바트 인민혁명당 서기장은 당이 인권의 완전한 보장과 언론의 자유를 구현하는 새로운 개혁정책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 |
🌲90년 전북 남원의 기온이 90년 들어 최고인 섭씨 37.5도 기록하는등 전국이 불볕더위 33명이 익사실종 🌲91년 정부,북한의 두만강유역 경제특구개발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유엔국제개발계획기구회의 개최 발표 🌲91년 서울지검, 조춘자(42.여)의 주택조합사기 분양사건 피해자 36명에 피해액은 도합 266억원 발표. 🌲91년 태풍 캐틀린 강타, 3명사망, 4명실종, 30여억원 피해 🌲92년 14대 개원국회(제157회 임시국회)자동폐회 민자당은 14일간 회기의 임시국회소집요구서 전격제출 🌲92년 경제기획원, 음료수 종이 철제품등 재원 재활용 촉진법(가칭)제출. 🌲92년 올림픽,이근철 선수(25.한국통신)는 사격 남자 소구경 소총복사에서 702.5점으로 우승. 🌲93년 헌법재판소, 85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 국제그룹해체는 부당한 공권력행사라며 위헌 결정 🌲93년 한ㆍ미국간 특허비밀보호협정 발효 🌲93년 상록수부대 해외첫 파병-소발리아에 250명-유엔 깃발아래 🌲93년 일본,비 자민 7개당 연립정부-사회 공명등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93년 헌법재판소,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적용된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헌 판시 🌲93년 서울고법, 항공기사고 경우 조종사 과실에 의한 사고일 때 손해액 전부를 항공사측이 배상 판결. 🌲93년 정선군 고간읍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막장 지주붕괴 4명 사망 | |
🌲99년 12·12사태 직후 美에 "김대중 복권지지“ 1999년 7월 29일 7월 29일 윌리엄 코헨 국방부 장관 방한에서 김종필공화당 총재,.. 12·12사태 직후 美에 "김대중 복권 지지" 12·12 군사반란 직후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가 미국측에 자신은 김대중의 복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6일 미국 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미국 측 문서 사본 21건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21건 문서 가운데에는 1980년 1월 17일 김종필과 리차드 홀부르크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와 통화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 |
🌺2000년대🌺 | |
✿2000년 변종하 화백 별세 변종화 화백 분방한 미의식을 표현한 시대의 `예인` 변종화 화백이 2000년 7월 29일 별세했다. 변 화백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1년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던 `타고난 예인`이었다. 중국서 화업(畵業)을 시작, 1956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나,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960년대 초 도불(渡佛), 서구 모더니즘 작업을 하는 등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 작가였다. 그의 예술행로는 끊임없는 변신과 모색 그 자체였다. 1965년에는 유네스코 파리본부 지원으로 멕시코 마야문명 답사를 하고, 미 뉴욕대서 연수하기도 했다. 이후 모더니즘에 심취, 패널과 색종이를 오려붙이는 기법의 입체화 `동키호테` 연작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선화랑에서 도자기 작업을 통해 또 한번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이순의 나이에 소뇌경색증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됐다가, 1년 반만에 회복했다. 그 후 9년 간 그는 휠체어를 탄 채 1996년 박영덕 화랑에서 `하늘은 늘푸른 잔디밭`이란 개인전을 열었다. | |
✿2002년 박희정, 미 LPGA투어 사이베이스 빅애플클래식에서 LPGA 진출 후 첫 우승 박희정(왼쪽), 한희원. 박희정(朴嬉貞·22)과 한희원(韓熙圓·24)이 29일(한국시각) 미국 뉴욕주 뉴러셸의 와이카길컨트리클럽(파71)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사이베이스 빅애플클래식에서 LPGA 최강자 애니카 소렌스탐(32·스웨덴)을 꺾고 나란히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열린 최종 4라운드 경기에서 박희정은 2언더파 69타, 한희원은 4언더파 67타를 각각 기록함으로써 나흘 합계 14언더파 270타로 공동 선두를 이룬 뒤, 연장전 첫 홀에서 박희정이 버디를 낚아 올 시즌 첫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두 선수는 특히 3라운드까지 공동선두였던 소렌스탐을 1타차 3위(13언더파)로, 캐리 웹(28·호주)을 4위(12언더파)로 밀어내고 한국선수끼리 연장전을 벌이는 탄탄한 실력을 보여 LPGA 신흥강호의 면모를 과시했다. | |
✿2002년 법륜 스님, 막사이사이상 평화부문 선정 법륜 스님 2002년 7월 29일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상`의 수상자로 한국의 법륜(본명: 최석호) 스님을 비롯해 모두 6명이 선정됐다. 법륜 스님은 정치적 정파에 개의치 않고 탈북자 지원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평화 및 국제이해 부문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인 법륜스님은 1988년 정토회와 정토법당, 불교환경교육원을 설립한 이래 불교 교육과 환경보전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1993년에는 국제 기아·질병·문맹 퇴치 기구인 JTS를 발족하여 제3세계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 법륜 스님이 북한 지원에 뛰어든 것은 1996년 여름. 북한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서 기아 상태에 빠진 북한 어린이를 직접 보면서였다. 당시 북한은 잇단 대홍수와 경제 정책 실패로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북한 잠수정의 남한 침투로 대북 경제지원은 중단됐었다. 그는 개신교·천주교·원불교 등 다른 종교인, 민간단체와 힘을 합하여 북한을 돕는 한편 `북한 식량난 실태조사 보고서` `북한 난민 실태 및 인권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법륜 스님이 이끄는 정토회는 어린이 급식과 농업 지원을 중심으로 한 해 약 10억원 정도의 물품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 | |
✿2009년 덩샤오핑 부인 줘린 여사 타계 줘린(卓林) 여사 2009년 7월 29일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줘린(卓林·93) 여사가 노환으로 타계했다. 줘 여사는 중국 공산당이 게릴라군으로서 민족주의자들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시기인 1939년 덩샤오핑과 결혼해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됐고 덩샤오핑이 사망하기 전까지 59년 동안 해로했다. 덩샤오핑과의 사이에는 2남3녀의 자녀를 뒀다. 줘 여사는 작년 쓰촨성 대지진 당시 자신의 전재산 10만 위안(약 15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19일 사망하기 나흘 전에 줘 여사를 통해 "유체(遺體·시신) 고별의식 같은 것은 거행하지 마라. 영당(靈堂·빈소)도 차리지 마라. 유체는 의학연구를 위해 해부용으로 제공하고,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라. 화장한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라"는 유언을 남겼다. 덩샤오핑의 유골은 동중국해에 뿌려졌다 | |
✿2009년 귀화 한국인 이참, 관광공사 사장 임명 이참씨. 2009년 7월 29일 공석 중인 한국관광공사의 신임 사장에 독일 출신의 귀화 한국인인 이참(李參. 55)씨가 임명됐다. 지난 1986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 씨는 KTV ‘이참의 업그레이드 코리아’에서 관광 발전과 한식의 세계화 등 아이템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으며 지난 대선기간에는 이명박 대통령 캠프에서 선거대책위원회 한반도대운하 특별위원회 특보로 활동했고 2009년 1월에는 대한스키협회 임원을 맡기도 했다. 신임 이참 씨의 관광공사 사장 임명은 귀화 한국인 또는 외국인의 공직 진출 확대 ‘신호탄’이 될 수 있어 관가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부는 “국제화, 개방화되는 사회 변화에 따라 그동안 보수적으로 인식돼온 공직을 전문성 있는 외국인 출신 인사에게도 개방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공사 기능 재정립과 조직 정비 등을 당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 |
✿2010년 7월29일..백남봉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 백남봉 직업은 한국의 희극인·영화배우이며 지난 1939년에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하였다. 극단 출신으로 원맨쇼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으며, 유창한 팔도 사투리와 뛰어난 성대모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 지난 1967년 물랭루즈쇼단에서 희극인 활동을 시작했고, 1969년 <장기자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에 데뷔했다. 원맨쇼 <팔도 마라톤 중계방송>로 유명해졌답니다. 또한 영화 <팔도 가시나이>, <예비군 팔도 사나이> 등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지난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한때 담배를 끊고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2010년 7월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
7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0번째(윤년일 경우 211번째) 날에 해당한다.
구 분 | 내 용 |
사건 | 1900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왕국 국왕으로 즉위. 1905년 - 일본과 미국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1957년 - 국제원자력기구가 발족하다. 1981년 - 다이애나 스펜서가 웨일스 공 찰스와 결혼하여 웨일스 공비가 되다. 2009년 - 삼성 특검: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으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6년에 벌금 3000억원이 구형됐다. 2011년 - 서울과 강원도 등 집중호우 피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복구 지원이 시작되었다. 2013년 -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성재기의 시신이 서울 마포구 서강대교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멕시코 동부 베라크루스주의 후안 로드리게스 클라라 북부 지역에서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생해 1,200여명이 감염되었고 660명이 사망하였다. 또 홍콩에서도 의심환자가 발생하였다. 2024년 - 서울 은평구 일본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
문화 | 1658년 - 파리외방전교회가 창립되었다. 1836년 -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 완공되다. 1947년 - 최초의 전자계산기인 ENIAC이 동작을 시작하다. 1954년 - 반지의 제왕의 첫 책인 《반지 원정대》가 영국에서 출간되다. 1958년 - NASA가 설립되다. 2005년 - 라온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테일즈런너가 출시되었다. 2010년 - 신분당선의 정자역 이남 1차 연장구간이 착공되었고 착공식은 용인시 수지구에서 진행되었다. 2012년 -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이 한일통산 500홈런을 달성하였다. 2015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10이 발표되었다. 2016년 -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10 무료 업그레이드 지원을 중단하였다. |
탄생 | 1790년 -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 (~1834년) 1805년 -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 (~1859년) 1878년 - 미국의 육상 선수 패트릭 맥도널드. (~1954년) 1883년 - 이탈리아의 정치가 베니토 무솔리니. (~1945년) 1906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학자, 서화가 전형필. (~1962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진구. (~1987년) 1922년 - 일본의 배우 이토 가오루. (~1943년) 192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성우 양일민. 1937년 - 미국의 경제학자 대니얼 맥패든. 1938년 - 미국의 저널리스트, 뉴스 앵커 피터 제닝스. (~2005년) 1940년 - 대한민국의 성우 최병학. (~2025년) 1941년 - 잉글랜드의 배우 데이비드 워너. (~2022년) 1942년 대한민국의 문학가 김현. (~1990년) 대한민국의 가수 현철. (~2024년) 미국의 배우 토니 시리코. (~2022년) 1947년 - 미국의 기업인 스탠 크롱키. 1951년 - 일본의 정치인 가타야마 요시히로. 1953년 - 미국의 패션 컨설턴트, 방송인 팀 건. 1954년 - 일본의 정치인 시이 가즈오. 1957년 - 일본의 정치인 기시다 후미오. 1958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보미. 1959년 - 영국의 록 가수 존 사이크스. (~2025년) 1960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추경호. 1962년 - 일본의 가수 오노 리사. 1964년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최호섭. 1965년 - 미국의 작가 이창래. 196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이명수. 1967년 대한민국의 가수 심신. 일본의 정치인 하타 유이치로. (~2020년) 1968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현영. 1970년 - 대한민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 김정훈. 1971년 - 대한민국의 변호사 겸 정치인 손금주. 1972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돈규. 1973년 대한민국의 현 방송 기자, 전 아나운서 김주하. 대한민국의 썰매 종목(루지, 봅슬레이, 스켈레톤) 선수 강광배.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이명화. 일본의 야구 선수 가도쿠라 겐. 1974년 일본의 정치인 이즈미 겐타. 대한민국의 래퍼 타이거JK (드렁큰 타이거). 1975년 대한민국의 배우 권이지. 미국의 야구 선수 세스 그레이싱어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병만. 대한민국의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이창호. 1976년 - 대한민국의 범죄자 엄인숙. 1978년 대한민국의 변호사 최단비. 대한민국의 법조 출신 정치인 김소정. 1979년 대한민국의 성우 채정우. 우크라이나의 권투 선수 세르히 도첸코. 1981년 - 스페인의 자동차 경주 선수 페르난도 알론소. 1982년 대한민국의 가수 박구윤. 미국의 배우 앨리슨 맥. 일본의 작가 히라사카 요미. 1983년 대한민국의 배우 김동욱.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장태희.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치곤.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블라디미르 스토이코비치.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윤성귀. 대한민국의 프로듀서 최다은. 1984년 - 우크라이나의 전직 리듬체조 선수 한나 베즈소노바. 1985년 대한민국의 전 가수 마망. 대한민국의 모델 이지호. 1986년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조해리.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앵커 윤보리. 1987년 대한민국의 가수 김원주.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진현. 1988년 대한민국의 래퍼 알렉산더 (유키스). 대한민국의 기술관련종사자 김차이.(본명: 김지혜) 1989년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최인영.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제이 로드리게스. 스웨덴의 축구 선수 코소바레 아슬라니. 미국의 야구 선수 에릭 요키시. 1990년 대한민국의 배우 신세경. 대한민국의 성우 김지율. 대한민국의 전직 아나운서 장수정. 칠레의 축구 선수 프란시스카 라라. 미국의 배우 맷 프로콥. 1991년 대한민국의 가수 김유환 (스피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주원.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최훈호. 대한민국의 전 배드민턴 선수 성지현. 1992년 프랑스의 축구 선수 지브릴 시디베. 대한민국의 방송인 홍영기. 1993년 - 대한민국의 래퍼 김효은. 1994년 대한민국의 가수 이하준. 대한민국의 유튜버 주키니.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손주형. 대한민국의 가수 자넷 서. 1995년 - 에콰도르의 육상 선수 브리안 핀타도. 1996년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백중훈.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 송준평.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민경 (희나피아). 1998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손주아. 1999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백호. 일본의 골프 선수 이나미 모네. 2000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추효주. 2001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수빈. 200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최다혜. 2005년 - 일본의 아이돌 이오키 마오. |
사망 | 238년 -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168년~) 1099년 - 프랑스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 (1088년~) 1644년 - 제235대의 교황 교황 우르바노 8세. (1623년~) 1856년 -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로베르트 슈만. (1810년~) 1890년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1900년 - 이탈리아의 왕 움베르토 1세. (1844년~) 1951년 - 터키의 축구 감독 알리 사미 옌. (1886년~) 1966년 - 나이지리아의 정치인 존슨 아그이이론시. (1924년~) 1970년 - 영국의 지휘자 존 바비롤리. (1899년~) 1983년 스페인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1900년~) 잉글랜드의 배우 데이비드 니븐. (1910년~) 1994년 - 영국의 화학자, 노벨 화학상 수상자 도로시 호지킨. (1910년~) 1999년 - 우크라이나의 오페라 가수 아나톨리 솔로비야넨코. (1932년~) 2001년 - 폴란드의 정치인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1913년~) 2004년 - 영국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 (1916년~) 2010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백남봉. (1939년~) 2018년 -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 브라이언 크리스토퍼. (1972년~) 2019년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박경락. (1984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천영성. (1929년~) 네덜란드의 야구 선수 룩 판 밀. (1984년~) 2020년 -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김낙중. (1931년~) 2022년 대한민국의 교육공무원 겸 정치인 김영식. (1930년~) 대한민국의 가수 남상규. (1938년~) 202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광근. (1954년~) 2024년 미국의 영화배우 로버트 바나스. (1933년~) 폴란드의 육상 선수 유제프 슈미트. (1935년~) 대한민국의 기업인 양승학. (1936년~)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정종득. (1941년~) |
기념일 | 국제 호랑이의 날 국가의 날(National Anthem Day): 루마니아 태국어의 날: 태국 |
전국급매부동산: http://cafe.naver.com/tozisarang
토지사랑모임: http://cafe.daum.net/tozi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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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코드: 2580
첫댓글 어제 오후부터 다음에서 HTML을 중단해서 음원을 넣지 못합니다.
음악이 안 나오니까 어째...더 쓸쓸합니다..ㅎ
원시로 회귀하는 다음카카오...회개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