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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1.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년∼1905년)
"짐은 우리가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가 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
도고 헤이하치로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만주, 대한제국과 인근 해역 각지에서 벌인 전쟁. 일본에서는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일노전쟁; 니치로 센소)라고 부른다.
전쟁 이전까지는 서구 열강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대활약한 이후로 군사력에 있어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과 함께 매우 강력한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했지만 그래도 강국이었고) 또한 일본이 어느 정도까지 군사력을 키웠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일본에 대한 저평가 기조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상당한 군사력을 키웠던 점, 러시아가 보급과 이동에 문제를 겪었던 점, 그리고 러시아 국내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게 된 점 등이 겹쳐 러시아가 패배했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대한제국 등 세 제국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쟁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10년 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이자, 10년 전 청나라와의 전쟁 이후 연속으로 승전을 거두게 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식민지배의 기반을 마련하고 사할린을 획득하는 등 큰 이익을 보았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근대 유럽 강대국에 대한 비유럽 국가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미도 있다. 1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승리한 전례는 있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반적인 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열강 중 약체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비록 영국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러시아 내부의 사정도 큰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비유럽 국가 자력의 군대에 의한 유럽 주류 강대국에 대한 첫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일본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잠깐이나마 동조하는 착각을 한 경우도 많았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했어야 했는데 그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했다. 러시아가 애타게 원하던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이익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애시당초 러시아에게 일본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약소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서도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해서 만한교환론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1937년의 중일전쟁으로 나타난다.
특히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한 러시아는 일본을 꾸준히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심지어 아관파천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몰렸다. 심지어 이때 일본은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여기서 고종은 줄타기하면서 적당히 러시아 세력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문제는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조차 받아 이곳을 포트 아르투르로 칭하며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한다. 이후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발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경계로 북만주를 빼앗으려 하며, 더 나아가 만주 전체를 노리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없었기 때문에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러시아 제국은 150,000명의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시켰으며, 일본 및 다른 열강들은 철수를 요구하면서,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조선에서 사태 진전이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제국군은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당장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 한반도까지 병력을 진출시킬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먼저 일본이 공격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 했다는 거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0,000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0,000명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0,000명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000km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2일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지원이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 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대한제국에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면서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훗날 미국은...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며,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그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내주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자 결국 최후의 보루인 발트함대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트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으며 전쟁을 끝내게 된다.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9일에 대한제국의 제물포와 주변 해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러일전쟁 최초의 전투이며 '인천 해전', 또는 '인천 전투'라고도 한다. 뤼순항 해전과 함께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첫 전투였으며 기습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 특징이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제물포, 뤼순항에 이르기까지 제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킴으로써 군사적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인 우류 소토키치는 뤼순항을 공격하려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명령을 받아 6척의 순양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로 했다. 특히 일본의 방호순양함 지요다는 10개월 동안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주둔한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바략과 포함 코리에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투 직전인 1904년 2월 7일, 일본 연합함대의 대규모 무력 전단을 본 러시아의 포함 코리에츠는 뤼순항에 지원 요청을 보냈고, 2월 8일 이른 아침 코리에츠함이 일본의 순양함 지요다를 발견하고 포를 쐈으나 지요다는 어뢰로 대응해 양측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결국 코리에츠는 항구에서 퇴각했고, 지요다는 우류 제독의 소대와 접선했으며, 영국의 HMS 탈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군함 빅스버그 등 정박한 중립 국가 함선에서 일본 해군에게 항의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고 피신했다.
우류 제독은 경순양함 지요다, 다카치호, 아사마, 나니와, 니이타카, 아카시와 어뢰정 4척을 이끌고 3,000명의 군사들을 제물포에 상륙시켰으며 일본 군대는 제물포로부터 이동하여 서울을, 그리고 대한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바략함에 올라타 사관생도인 알렉세이 니로드를 포함한 승조원들을 학살했으며 남은 함대는 대포와 어뢰정을 이용, 두 전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바략함과 코리에츠함의 승조원들은 나포당할 것을 우려해 두 전함을 자침시켰다.
그리고 같은날 2월 9일에 일본 함대는 제물포 항구에 50,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고, 선제 공격을 하여 군사적으로 승리한 일본군은 한반도를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일후인 2월 12일에 러시아 공사가 철수함에 따라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침몰한 러시아의 함정은 뒤에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일본군 함정으로 개조되었다.
압록강 전투
1904년 4월 30일부터 5월 1일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압록강, 신의주 주변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투이다. 구로키 다메모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1군 42,000명이 첫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는 도중에 이를 저지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던 러시아 육군 동방 파견대 24,000명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며 '압록강 도하 작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신들의 무기가 일본군 병사보다 우수한 것으로 과신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한 러시아군의 미하일 자술리치 장군에 대해 일본 육군은 충분한 화포를 갖고 공격하여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러시아 육군이 전군을 이용한 결전을 피하고 조속히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도강을 별다른 손해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진저우-남산 싸움
1904년 5월 25일~5월 26일에 랴오둥 반도의 뤼순 북방, 진저우 성 남쪽 근교의 남산으로 불리는 곳에서 양군이 격돌했는데, 러시아군이 기관총 등을 장비하여 남산을 어느 정도 요새화시켰기 때문에 중반 참호전, 공성전이 되었다. 일본 육군의 제2군은 적보다 수배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 병력의 10%를 넘는 병력을 잃었다.
압록강 전투 이후 양군은 요동 반도에서 전역을 진행했다. 러시아 육군은 요동 반도의 중심이었던 남산에 야포 114문 및 기관총을 장착하고, 참호와 철조망 지뢰를 갖춘 근대적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 육군이 이런 근대적인 진지에 공격을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청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 요새의 구조를 이미 파악했다.
제4사단의 공격이 진저우 성에 대해 시작됐지만 실패로 끝났다. 제1사단에서 증원 2개 대대를 더한 3차 공격으로 진저우 공략이 완료됐다. 그 뒤 남산에 대해서 공격이 가해졌고, 진저우 만에서 해군의 함포 사격이 공격을 지원했지만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끈질긴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포탄이 다한 러시아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제2군은 남산을 점령하고 일단 승리를 거뒀다.
양군은 그 후 탄약 보급을 받고 만주로 향했다. 철수한 러시아군은 약간의 저항을 하면서도 뤼순으로 철수하고 배수의 진으로 일본군 제3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또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도 제2군에 소속되었던 장남 노기 카츠노리를 이 싸움에서 잃고 말았다.
히타치마루 사건
1904년 6월 15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서쪽으로 가던 육군 징용 운송선박 3척이 러시아 제국 해군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이하, 블라디보스톡 함대) 소속의 3척의 장갑순양함 로시야, 류리크와 그루모보이에 의해 잇따라 공격을 당하면서 항복 거부 등의 이유로 격침되어 파괴된 사건이다.
특히 육군 징용 운송선박 히타치마루(常陸丸)의 격침은 일본 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연합함대 특히 동해의 해상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끌었던 제2함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제2함대는 사건 발발 두 달 후인 8월 14일에 일어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사실상 괴멸직전까지 몰고 갔다.
6월 15일 8시경 방호순양함 쓰시마로부터 오키노 섬 근해에서 블라디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2함대는 어뢰정 부대를 급파하는 동시에 왕래 선박에게 다케시키 등지로의 대피를 명령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일본 측의 움직임에 상관없이 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여 먼저 수송선 이즈미마루를 발견했다. 이즈미마루는 6월 13일에 요동 반도의 얀다이오를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이즈미마루를 정선시켜 승선자에게 퇴거를 권고하고 퇴거를 확인한 후 포격을 가해 격침시켰다. 이즈미마루에 대해 일본은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는데, 4명이 사망하고 해산시켰던 승선자의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 수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사에서 육군 병사 2명, 해군 병사 1명의 편승자 3명을 포함한 112명 중 전사자 7명, 쿠라야 이헤 해군 상등병을 포함한 83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22명이 생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전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마주친 것은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로 보인다. 함대는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다가 곧 실탄 발사로 전환했으며 히타치마루는 전속력으로 후방 도주를 하다가 포탄 1발이 히타치마루의 기관부에 명중된 것을 시작으로 근접 사격을 통해 약 100발의 사격을 받아 전사자가 속출했고, 기관은 파열되었으며, 곧이어 제3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히타치마루 선내는 피바다가 되었고, 남아있던 제1연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반격을 했지만 압도적인 공격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치열한 전투끝에 군기를 받들고 있었던 후지사키 히토 육군 이등병이 살아남아 과정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명령했지만 직후에 그도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후 할복했다. 군기는 오쿠보 다다시(大久保正) 소위가 깃대를 부러뜨리고 불을 질러 소각했다.
연대 깃발과 중요 서류 소각을 지켜보며 남아있던 장교들도 할복 및 권총 자살과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며 히타치마루에서 순직했다. 히타치마루는 세번째 일제사격을 받고 15시쯤에 침몰했다. 이날 히타치마루의 전사자는 육군 958명, 해군 3명, 승무원 130명 총 1,091명에 이르렀으며, 남아있던 생존자 중에서 무사히 탈출한 후지사키 히토 이등병을 포함한 37명은 어용선 토사마루 (일본우선, 5,402톤)에 구조되어 무쓰레 섬에 상륙했다. 생존자는 예비근위 보병 제1연대 본부 96명, 제10사단 취사병 32명, 해군 관계자 1명, 각종 승무원 18명 등 총 147명이었다.
모티엔 전투
1904년 6월 27일, 표도르 켈러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육군과 구로키 다메모토가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의 소규모 군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모티엔 고개에서 벌인 충돌적인 전투로 만주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모티엔 고지에서 일어났다.
표도르 켈러 백작은 압록강 전투 이후 러시아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25,000명을 이끌고 단둥과 랴오둥 반도 사이의 주요 도로들이 교차하는 모티엔 고개에 주둔시켰다. 당시 러시아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과 미하일 스코벨레프의 친구였던 켈러는 텔리수 전투에서 이미 많은 병력을 손실한 탓에 쿠로파트킨으로부터 2개 연대를 지원받아 방어선을 강화했다.
한편 보급품을 보충받은 구로키 다메모토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6월 19일~6월 25일까지 랴오닝성에서 진격이 중지되었다. 이에 6월 26일 켈러는 쿠로파트킨으로부터 다른 연대 병력들을 더 빼내 당일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티엔 고개에 3개 러시아군 보병 연대와 3개의 포병 진지를 구축하고, 서쪽에 여단 규모의 병력과 예비 보병 연대가 주둔했다.
이에 일본군은 6월 25일 ~ 6월 26일 밤에 러시아군의 우측면 뒤쪽으로 돌아갔으나 러시아의 맥심기관총과 포병들에게 들켜 러시아군의 좌측면에서 우왕좌왕했다. 전투는 6월 27일 5시 15분 일본군이 정면을 공격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7시까지 강력한 대포 사격으로 어느 정도 공격을 막아냈지만 8시에는 일본군의 측면 공격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밤 10시까지 서둘러 시무청(析木城)으로 후퇴했다.
6월 30일 일본군은 모티엔 고개를 함락시켰고, 이 전투의 지휘관인 표도르 켈러는 일본군 포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7월 13일 모티엔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으며 양측의 사상자는 비교적 적었지만 유능하다고 알려진 표토르 켈러 장군이 왜 전략적이고 방어하기 쉬운 진지를 그렇게 형편없는 저항으로 포기를 했는지 심도있게 분석했다. 켈러 장군은 일본군 포병이 모티엔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쏜 산탄의 파편으로 인한 상처로 인해 사망을 했고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텔리수 전투
1904년 6월 14일~6월 15일, 양일간에 걸쳐 만주 뤼순 항 북부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명 '와팡구 전투'라고도 한다.
뤼순항에 틀어박혀 있던 러시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득리사(得利寺, 일본어로 도쿠리지)에 진지를 구축중이던 시베리아 제1군단과 그들을 공격한 일본 육군 제2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만주 뤼순항 북쪽 130km 떨어진 작은 촌락에서 벌어졌다. 오늘날 이 촌락은 드리시(중국어: 得利寺 Delisi)로 알려져 있으며 랴오닝 성 와팡뎬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 육군 제2군이 남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군 주력은 뤼순 요새의 2개 사단 및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다시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게오르기 스탁겔베르크 중장이 이끄는 시베리아 제1군단이 남하하여 득리사 부근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당초 일본 제2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요격한 후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대본영에서 적의 진지 구축이 완료되기 전에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득리사의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6월 14일에 득리사 부근에 도착한 일본 제2군은 다음날 15일에 화포로 진지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대도 응전을 했지만 일본 육군은 화포를 200문 이상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100문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한 지형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군이 득리사역에 불을 지르고 웅악성(熊岳城)으로 철수하면서 일본 제2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 후 추격하지 않았던 일본 제2군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이후에도 뤼순항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사상자수는 33,500명중에서 적어도 3,500명(477명 전사, 2,240명 전상, 754명 실종)에 이르렀으며 일부는 10,000명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공식 기록은 3,500명이었다. 일본군 사상자 수는 40,000명중에서 1,163명 (217명 전사, 946 전상)이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군대에 의한 습격 위협이 이 전투로 사라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뤼순항 진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텔리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러시아 순양함은 2척의 일본 수송선을 일본 근해에서 격침시켜 2,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내게 했고, 꽉 막힌 뤼순항 포위에 필수적인 여러 포병대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했다.
대석교 전투
1904년 7월 24일~7월 25일까지 만주 라오양과 뤼순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로 중국어로 '타이시차오 전투'라고도 한다.
잉커우와 남만주 철도 본선을 연결하는 대석교에 자리를 잡은 러시아 제국 육군의 시베리아 제1군단과 시베리아 제4군단을 일본 제국 육군 제2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싸움으로 텔리수 전투를 마친 제2군은 보급을 위해 공격을 피했지만 대본영에서 조기 공격 명령을 받아 대석교에 진을 친 러시아 제국 육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에 7월 24일 5시 30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저우 방면에서 3개 사단으로 진격하는 일본 제2군에 맞서 러시아군은 대석교 북동쪽 구릉지에 대포병 진지를 만들고 포격을 시작했다. 맹렬한 포격으로 일본 제2군의 진군이 저지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으며, 7월 25일에 일본 제2군은 대석교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오쿠 야스카타 대장의 제2군은 약 64,000명중에서 1,000명이 전사했고 러시아의 게오르기 스탁켈베르크 중장과 니콜라이 자루바에프 중장이 지휘한 시베리아 제 1, 4군단의 약 60,000명은 1,200명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