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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z4fRsk3AbY?si=_F7aiH0zu7Wd_NKp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독일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오르간 연주자. 아이제나흐 출생. 200여 년에 걸쳐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가문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다. 서양음악사를 집대성한 위대한 존재이며 우수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기 때문에 후대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에는 G.P. 팔레스트리나와 나란히 오랜 음악전통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면서 모든 음악가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이미 W.A.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여, 《주피터교향곡》 《레퀴엠》을 비롯한 만년의 걸작을 완성했다. L. 베토벤도 소년시절에 스승인 C.G. 네페의 지시로 바흐가 지은 《평균율피아노곡집》을 배우고 <바흐는 작은 강이 아니라 큰 바다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하였고, 큰 영향을 받았다.
바흐를 결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1802년에 출판된 J.N. 포르켈이 쓴 《바흐전(傳)》과 29년 20세의 F. 멘델스존에 의해 베를린에서 실시된 《마태 수난곡》의 역사적인 연주에서였다. 더욱이 J. 브람스는 베토벤을 능가하기 위해 창조력의 원천을 바흐에게서 찾았다. 현대음악의 문을 연 A. 쇤베르크가 <12음기법>의 이론적 기초를 바흐의 대위법에서 구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바흐의 작품번호는 오늘날 W. 슈미더가 엮은 《바흐작품주제목록(Bach-Werke-Verzeichnis;BWV, 1958)》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것에 따른다.
https://youtu.be/bvIEMxcLaA0?si=lYHVLAy-CubDXXqD
생애와 작품
(1)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거리의 악사, 사촌형 요한 크리스토프는 바흐가 세례를 받은 성 게오르크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바흐는 음악적 환경 속에서 자랐다.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바흐가문은 중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집안이었다.
9세가 되던 해인 1694년 5월 어머니를 여의고 다음해 2월에 아버지를 여읜 바흐는 오르드루프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밑에서 자랐다. 맏형은 유능한 음악가였고, 오르간 연주와 작곡 등을 바흐에게 직접 가르쳐주었다. 형의 악곡집을 보고 싶은 나머지 매일 한밤중에 일어나 달빛 아래서 악보를 베꼈다는 소년 바흐의 일화도 남아 있다.
1700년 3월 바흐는 오르드루프를 떠나 뤼네부르크로 향했다. 성 미카엘교회 합창단에 채용되어 미카엘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뤼네부르크시절의 바흐는 가까운 함부르크에서 J.A. 라인켄의 오르간예술과 R. 카이저의 오페라, 또 첼레에서는 프랑스음악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뤼네부르크 성 요하네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거장 G. 뵘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2) 아른슈타트·뮐하우젠시절
1702년 봄, 미카엘 학교를 마친 바흐는 다음해 3월부터 6개월 동 안 바이마르공(公) 요한 에른스트의 궁정악사를 지낸 뒤 아른슈타트신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가 되었다. 바흐에게 있어 이곳의 4년간은 모순과 문제로 가득찬 생활이었다. 성가대와 관계가 나빠져 결국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과 싸우게 되고, 더욱이 4주 동안의 휴가를 얻어 떠난 뤼베크여행도 4배나 길어져 성직회의에서 꾸지람을 받았다.
뤼베크 성 마리아교회 오르간 연주자 D. 북스테후데의 예술은 젊은 바흐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바흐는 뮐하우젠으로 옮겨 뮐하우젠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1707년 4월 부활절 시험연주에서 칸타타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 4)》를 연주하면서 그는 눈부신 칸타타창작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뮐하우젠에서 보낸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주여, 깊은 심연에서 당신을 부르나이다(BWV 131)》 《하느님의 때는 최상의 때(BWV 106)》 《하느님은 나의 왕이시도다(BWV 71)》와 같은 걸작이 쓰여졌다. 첫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1707년 결혼했다.
(3) 바이마르시절
1708년 6월 바흐는 뮐하우젠시참사회에 사표를 내고 바이마르궁정 오르간 연주자 겸 궁정악사가 된다. 《오르간소곡집(BWV 599∼644)》을 비롯하여 훌륭한 오르간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또한 요한 에른스트의 부탁으로 A. 비발디의 이탈리아협주곡을 오르간과 쳄발로의 독주용으로 편곡하였다. 14년 악사장으로 승진한 바흐는 매월 한 곡씩 신작 칸타타를 연주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하늘의 왕이시여, 어서 오소서(BWV 182)》 《눈물 흘리며 탄식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다(BWV 12)》 《나의 마음은 피바다를 건너노라(BWV 199)》 등의 많은 바이마르칸타타가 생겨났다.
16년 12월 악장 J.S. 드레제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에 그의 아들이 지명되어 바흐는 승진의 길을 놓쳤다. 눈을 밖으로 돌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었던 그에게 쾨텐 궁정악장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바이마르공은 바흐의 사직을 허락하기는 커녕 1개월 금고형을 내렸다.
https://youtu.be/TOHnzWo8FXY?si=IWLeQXs9mIftTWTn
(4) 쾨텐시절
17년 12월 금고에 굴하지 않고 바흐는 쾨텐으로 옮겨갔다. 음악을 즐기는 군주 레오폴트후작은 우수한 궁정악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바흐도 많은 실내악곡과 협주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고, 또한 음악예산이 삭감됨에 따라 그는 다시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함부르크 성 야코프교회 오르간 연주자에 응모하고, 21년 3월 브란덴부르크변경백작에게 《브란덴부르크협주곡집(BWV 1046∼ 1051)》을 바친 것이 인연이 되어, 23년 라이프치히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1006, 1720)》 《평균율피아노곡집 제 1 권(BWV 846∼869, 1722)》의 자필정서보가 완성되었다. 21년에 안나 마크달레나와 재혼하였다.
(5) 라이프치히시절
23년 5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칸토르 겸 음악감독에 취임한 바흐는 라이프치히 주요 4교회에서 직접 지휘를 하고 교회음악을 맡게 되면서부터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교회음악은 매주 예배 때 연주되므로 200곡에 가까운 교회칸타타와 <마태복음> <요한복음>에 바탕을 둔 수난곡이 작곡되었다. 특히 27년 초연된 《마태수난곡》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https://youtu.be/A5_5NS4Fh1g?si=c2cCLRgkBW3LYHrl
(J. S. Bach: Konzert d-Moll BWV 1052 für Orgel ∙ hr-Sinfonieorchester ∙ Apkalna ∙ Minasi)
30년은 전환기로 종교곡 대신 협주곡과 세속적 칸타타인 《커피 칸타타:가만히 입다물고 말하지 말아요(BWV 211)》 《농민 칸타타:우리들의 새 영주님(BWV 212)》 등의 창작 비중이 커졌다. 계몽주의의 영향에 따른 감각적이고 알기 쉬운 음악의 융성 때문에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간주한 바흐는 점차 자기 예술의 집대성을 목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작품 《피아노연습곡(제1부∼제4부, 1731∼42)》 《음악의 헌정(BWV 1079, 1747)》 《슈블러코럴집 (BWV 645∼650, 1748)》이 출판되었다.
《푸가의 기법(BWV 1080, 1740)》이 작곡되고 《미사곡 b단조(BWV 232)》가 완성된 것도 이 일환에서이다. 마지막 작품이 된 이 장대한 미사곡은, 33년에 작센 선제후(選帝侯)에게 바친 키리에(kyrie)·글로리아(gloria)를 제1부로 하였으며, 역시 기존의 상투스(sanctus)를 이용하면서 말년인 48년 가을부터 실명 직전인 다음해 봄에 이르러 나머지 부분을 작곡하여, 완전한 미사곡이 되었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성악 폴리포니양식에서 당시 최신의 화려한 양식에 이르는 성악 작곡법의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리하여 바흐는 서양음악사상 일대 기념비를 스스로 세운 뒤 그 생애를 마쳤다.
https://youtu.be/3FLbiDrn8IE?si=I2FnlIAi6ZzfnjY_
(Bach - Mass in B minor BWV 232 - Van Veldhoven | Netherlands Bach Society)
작풍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바흐 작품 개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시의 거의 모든 음악의 영역에 손을 대었고, 거기에 작품생활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는 50년 동안 양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현저한 발전을 보여 바흐의 양식을 한마디로 요약해 말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양식의 발전 방향을 염두에 준다면 대강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의 음악사상에서의 위치는 바로크음악의 종합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종합은 여러 가지 양식을 병렬시키거나 혼합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위대한 개성 속에서 완전히 소화시키고 용해시켜 새로운 모습으로 고쳤다는 특색이 있다.
음악사가 만프레드 부코프쩌가 말했듯이 그것은 <여러 국민 양식의 융합>으로서, 헨델의 경우와 같은 <여러 국민 양식의 조화>와는 현저하게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바흐 음악의 독특한 긴장감은 이러한 여러 국민 양식의 용해와 융합이라는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즉,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가운데에서 성장한 바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독일 궁정문화에 침투하고 있었던 프랑스. 이탈리아의 새로운 음악양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렐리, 비발디로부터는 이탈리아 음악의 풍부한 조성적 화성을, 협주곡 양식이나 명쾌한 라틴적 조형감을 갖는 프랑스로부터는 클라브생악파의 건반기법과 륄리파의 서곡형식을 채택하였고, 북 독일의 북스테후데, 중부 독일의 파헬벨에게서는 오르간예술을 이어받아 그의 탁월한 개성속에 융합시킨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다만 한 시대 음악양식의 종합자로서만 본다는 것은 단편적인 견해일 것이다. 확실히 바흐는 음악의 의식적인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음악에는 용해, 융합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요소가 싹트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다가오는 고전음악파의 기법을 암시하는 요소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 주목한다면 도일의 석학 하인리히 베셀러 - Heinrich Besseler가 지적했듯이 <개척자로서의 바흐>로 말해도 될 것이다.
바흐의 성악곡에는 교회칸타타, 세속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마니피카트, 모테트, 가곡 등이 있는데 가장 수가 많은 것이 칸타타이다. 초기 칸타타는 모테트풍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으나 바이마르 후기에는 오페라풍의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등장하고, 라이프찌히 초기에는 코랄 칸타타가 많이 만들어 졌다. BWV80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벽이로다 -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1727~1731)>이나 BWV140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1731)>이 이러한 대표적인 곡이다.
https://youtu.be/46FTnX6gwg4?si=jsJrTbclzIKrgdlf
대규모 성악곡의 대표적인 곡으로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를 들 수 있다.
기악곡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건반악기곡이 있으며 어느 분야에서도 바로크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관현악모음곡 제2번>,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오르간 소곡집 599~644>,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프랑스모음곡>, <평균율클라비어 곡집> 등이 각 분야에서 유명한 곡 중의 예이다.
https://youtu.be/hp53Jh6qO6Q?si=lzKS_RQBTtbcIIDL
(Bach Richter, Brandenburg Konzerte 1-6, BWV 1046 1051)
그리고 말년의 <음악의 헌정>과 <푸가의 기법>은 바흐의 대위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으로 대부분이 악기를 지정하지 않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며 일반적으로는 특수작품이라 하여 별개로 분류된다.
바흐 작품의 양식요소
바흐의 대표적인 양식요소로는 긴장감이 높은 변화화성의 사용, 늠름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동기나 선율의 구성, 밀도가 높은 폴리포니, 극도로 확대된 선율법, 정밀한 메트릭 - Metric(박절법), 단일 또는 소수의 소재에 의한 전체의 통일 등을 현저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색다른 표현매체의 이디엄 교환과 색다른 양식이나 형식의 융합도 바흐의 음악을 형성하는 두드러진 특색이다. 예를 들면, 완전히 기악적인 합창이 있는가 하면 기악에 성악적인 칸틸레나가 자주 나타나 푸가와 협주곡 형식과의, 혹은 무곡과 전주곡과의 융합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바흐가 사용한 악곡형식 자체는 당시의 관용형태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이상과 같은 이디엄의 상호침투와 양식의 융합으로써 기존의 형식은 그 극한에까지 확대되고, 내부해체를 야기시키며 붕괴직전까지 몰리고 만다. 관용형식의 테두리를 지키면서도 그 내부는 폭발의 위험을 잉태한 긴장된 에너지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곡형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바로크시대의 관용법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바흐를 동시대의 많은 작곡가들과 구별짓는 것으로써, 이상과 같은 형식내부의 긴장력과 뛰어난 작곡기법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담긴 표출내용마저 지적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블루메 - Friedrich Blume 교수도 지적했듯이 <마태수난곡>의 첫머리, 종반부 곡의 합창이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등에서는 이미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은 주관적 표출력의 확대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바흐의 두드러진 특색으로 편곡, 개작, 패러디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흐는 비발디나 텔레만 등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편곡했을 뿐만 아니라 자작곡을 편곡하거나 개정하는 일도 많았다. 패러디라 함은 기존의 성악곡에 다른 가사를 붙여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바흐의 경우는 교회음악에서 교회음악으로, 세속음악에서 교회음악으로 패러디하는 두 종류가 있으며, 교회음악을 세속음악으로 패러디하는 것은 현재까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패러디에 의한 대작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들 수 있다.
https://youtu.be/83wY_IegKqU?si=mpaEi_JSrGGj13lu
(Rostropovich plays Bach 6 suites for cello solo DVD 1991)
자료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