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제1독서
<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5,1-10
나 요한은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무엇이 우리의 눈을 잃게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예언하시면서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가장 강력한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것은 ‘욕구’입니다. 망치를 든 이는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욕구가 눈을 가리고 사건과 사물을 왜곡해서 보게 합니다. 돈만 아는 이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재산만 노리는 사람들로 봅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대장내시경을 했습니다. 몇 년 전 대장내시경을 할 때가 기억났습니다. 변을 빼내기 위해 먹는 물과 약을 다 먹고는 9시가 넘어 피자를 먹었습니다. 워낙 입이 느끼한 상태에다가 누군가 선물해 준 피자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욕구가 생기니 보이는 게 없어졌습니다.
‘오늘 저녁에 먹으면 두 시간 뒤면 소화가 될 것이고 내일 아침에 세 번 더 빼내면 되겠지!’
하지만 다음 날 계속 찌꺼기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빨리 소화가 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오전 내내 병원에서 다시 약을 먹으며 다 빼내고 오후에 대장내시경을 해야 했습니다.
욕구는 당연한 법칙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눈을 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고통입니다. 나의 욕구 때문에 눈이 멀어 참 평화를 알아보지 못한 벌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벌을 알면 욕구가 작용하지 못하기에 욕구가 지금의 단맛만을 바라보게 만들어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인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멸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욕구란 것 자체가 눈을 멀게 하여 고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보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쫓다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제 인생을 바꿔준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눈에 들어왔던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1회에는 6명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와 ‘중2병’ 걸렸다고 말하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금쪽이는 반항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싸움꾼이고 욕쟁이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부모는 그것이 중2병 걸린 자녀의 탓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저희 욕심이 아이를 망친 거 같아요”라고 고백합니다.
아이 여섯을 키우다 보니 부모는 강력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법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법입니다. 중학생 아이가 7시까지의 통금시간을 어기고 한 시간이 늦었다고 일주일 외출을 금지합니다. 불시에 소변검사를 통해 니코틴 검사를 합니다. 서열정리가 확실해야 해서 위 형제에게 덤비면 무조건 혼이 납니다. 금쪽이는 자기 가족 중 자기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에 반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구는 뜻입니다. 뜻은 법입니다. 가정에 부모의 법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은 자녀들의 욕구를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러면 자녀들은 그 가정에서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해 자존감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존감 없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 솔루션이 도입되었는데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권투를 배우는 중2 금쪽이에게 아버지가 권투 스파링을 해 준 것입니다. 처음에 아빠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진 금쪽이는 아빠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맞아주기만 하는 것을 보고 힘을 줄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힘이 빠진 아버지의 헤드셋과 글러브를 손수 벗겨줍니다. 아버지도 놀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을 때 보이는 아이의 따듯한 마음일 것입니다. 내 뜻이 죽어야 상대의 뜻이 보입니다.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상대의 뜻에 나의 뜻이 죽을 때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내 욕구는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사랑과 반대의 욕구를 지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본능과 반대되는 본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분의 뜻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은 우리 뜻을 불사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니 예수님이 구원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이 성령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눈의 비늘이 떨어지게 됩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라고 경비병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경비병들은 감히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보다는 자기 뜻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로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있는 다윗을 잡기 위해 세 번이나 전령들을 보냈지만, 성령에 사로잡혀 예언자들이 되어버린 예입니다(1사무 19,18-24).
눈이 열려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세속-육신-마귀보다는 성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과 가까이 머무는 이를 가까이하는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책이 될 수 있고 강의가 될 수 있으며 미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 사랑의 욕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경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분의 뜻으로 내 뜻을 살라버립시다. 그래야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NdhxiZp_qmM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키 작은 자기 모습에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키가 작고, 친척들도 키 큰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키 큰 것이 정상일까요? 키 작은 것이 정상일까요?
‘왜 키가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이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자기 모습을 희망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생각이란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수단에는 많은 단추가 있습니다. 총 22개의 단추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단추를 잘못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맨 마지막에 하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채웠던 단추를 모두 풀어서 다시 처음부터 잘 채워야 합니다.
생각 역시 말과 행동을 하기 전이 첫 번째 단추를 채우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잘한 생각일까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특히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단순히 성전의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셔서 우신 것일까요? 아니면 슬픔을 가져다주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일까요? 성전이 아닌 당신을 향한 유다인의 모습을 보시고 우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구원의 왕이고 평화를 가져다줄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은 이런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구원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들의 왕을 배척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도시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잘못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추인 ‘생각’을 제대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생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는 주님께 슬픔을 드리는 우리가 아닌, 이제는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과 감사에 굶주린 사람이 빵에 굶주린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마더 데레사).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